김장철이 가까워지면 경복궁 전통공예미술관에서는 옹기 전시회가 열린다. 독과 항아리는 물론이지만, 동이나 뚝배기 같은 자그만 용기들이 많이 나온다.
처음에는 구경 삼아 재미로 갔었는데, 요즘에는 뭔가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으로 그곳을 간다.
몇 년 전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그 때까지 살던 집에 항아리를 버리고 왔다. 소래기까지 덮여 있는 그 항아리는 크고 우람스러워서 장독대 맨 뒷줄에 자리잡고 있었다. 웬만한 독 두 개 높이는 되는데, 아래는 좁으며 위쪽으로 둥글게 배가 나와 어른 팔로 두 아름은 되는 큰 항아리였다.
아파트로 갈 것을 결정한 그 날부터 장독대를 몇 번씩 둘러보았지만 어느 한가지 두고 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모란꽃이 그려진 백단지는 양념을 담아 두었고, 철 따라 밑반찬이나 장아찌를 삭여 갈무리하는 귀단지는 운두가 낮고 팡파짐하다. 자주 들락거리는 여름이면 아예 부엌으로 옮겨다 놓을 때도 있었다.
이른봄 갖가지 젓갈을 담가 삭히는 방구리는 배가 나왔다고 해서 나혼자 '배단지'라 부르곤 했다. 겨울 채비에 쓰이는 키 작은 항아리들은, 김치나 동치미를 담그면 군내 없고 톡 쏘는 맛이 일품이라는 어머니 말씀대로 늘 새 맛을 지니게 해주었다.
마당 한 쪽에 자리한 장독대는 그렇게 삼십여 년 동안 우리 식구들의 먹거리 원천이 되었다. 어쩌다 집에 와서 그것을 보는 이들은 서울 살림에 간수하기가 수월찮겠다며 탐을 내기도 했다.
물론 그것들 대부분은 시집올 때 어머니가 마련해준 거지만, 큰항아리와 그 밖의 몇 가지는, 나이 드시어 큰살림을 안 하게 된 어머니가 마당 넓은 우리 집으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장맛이 좋아 으뜸으로 치던 그 큰항아리는 어머니 새색시 때 달구지에 실려 왔다고 했고, 장정 둘이서 들마시했다는 후일담에 걸맞게 우리 집에서도 그 위용을 자랑했다.
우선 봄이면 간장 담그기가 좋았고, 달여서 옮긴 다음에는 건어물이나 곡식들을 넣어두는 곡간이 되었다. 키가 크신 어머니는 물건을 넣고 꺼낼 때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더니, 어른이 되어서도 손이 닿지 않는 나는 앞에다가 디딤돌을 두었고, 그걸 딛고 올라설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일곤 했다.
이렇듯 어머니 손때 스민 항아리들은 나의 보배 같은 세간으로 이어졌고, 나로 하여금 앳된 추억들에 젖어들게 만들었다.
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집 장독간은 뒤란에 있었다. 아침이면 쪽진 머리에 흰색 앞치마를 입은 어머니가 물행주로 장독 그릇을 닦았다. 그럴 때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어머니 치마꼬리를 붙잡고 뒤꼍에서 종종걸음쳤다.
반들거리고 윤기 나는 오지그릇에는 내 얼굴이 얼비쳤고, 그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노냥 뚜껑들을 만지작거리다가 열고 덮기를 거듭했다. 무엇이 담겼는지 알고 싶었고, 키 큰항아리는 키 작은 나에게는 넘겨다 볼 수 없는 비밀스런 곳이기도 했다.
반대기를 열 때마다 어머니 손에 들려진 갖가지 것들은 반찬으로 만들어져 상에 올랐다. 그것이 어떤 날에는 곶감이나 대추가 되기도 했고, 엿이나 홍시일 때는 더욱 신이 났다. 한겨울 군것질거리도 거기서 나왔다. 이런 것들이 뭉뚱그려져서 어린 나를 항아리 주변에서 맴돌게 했다.
술래잡기할 때면 숨기 좋았고, 꾸중들은 풀이로 훌쩍이던 곳도 그 그늘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깜박 잠이 들어, 어두워질 때까지 종적을 몰라 찾아 나선 어머니를 놀라게도 했다. 소꿉놀이할 때도 장독대 뒤쪽에 있는 정구지를 뜯어 버무렸고 , 까맣게 여문 분꽃 씨앗으로 얼굴에 분칠을 해 본 것도 모두 그 큰항아리 곁이었다.
6. 25 전쟁 때는 구덩이를 파고 그 항아리를 땅속 깊이 묻었다. 항상 집안 일을 도와주는 이웃집 아저씨의 삽질 소리가 잠잠해진 다음, 항아리가 묻힌 그 자리는 곱게 일군 밭고랑이더니 피난길에서 돌아와 둘러보았을 때는 우부룩하게 자란 파밭이었다.
어머니가 아끼는 싱거 재봉틀과 성경책, 태극기, 그리고 소중하게 여기는 다른 살림들이 말짱한 채 그 항아리 속에서 나왔다.
이렇게 큰항아리에는 내 어린 시절 이야기가 베어있고, 어머니의 젊음과 그 인고의 삶이 굳은살처럼 박혀있다. 정읍에서 전주로, 다시 서울로 거듭되는 이사였어도 금간 데 하나 없이 의연하게 수문장 구실을 해왔다.
그러던 장독대가 수난을 겪기 시작한 것은 연탄광을 들이면서부터다. 식구가 늘고 살림이 불으면서 연탄을 쌓아 둘 헛간이 있어야 했다. 슬래브지붕 창고를 짓고, 항아리들을 그 위로 올렸다. 그러다가 기름 보일러로 바꾸면서는 연탄광 자리에 잔디를 심고, 장독대는 이층 베란다 난간으로 옮겨 버렸다.
발길이 먼 만큼 소래기를 여는 일도 뜸해졌다. 이층 계단을 지나 다시 밖으로 나가기보다는 냉장고를 활용하는 편이 수월했다. 커버린 아이들도 저장 음식보다는 인스턴트 식품을 더 좋아했다.
때를 같이하여 앞뒷집, 옆집에서 높은 빌딩을 올리기 시작했다. 온종일 볕을 쬐지 못한 고추장 간장은 곰팡이가 슬었다.
먼지 낀 단지들은 물행주로 닦던 시절의 윤기를 잃어갔고, 어쩌다 빗물에 씻기는 외는 때깔 고운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큰항아리는 양념단지나 뚝배기, 쓰지 않는 자지레한 것들을 넣어두는 뒤주가 된 채 여러 해가 지났다.
아이들이 장성하여 곁을 떠나게 되면서 넓은 집을 간수하기가 힘들어졌다. 집을 내놓고 아파트로 오면서는 큰항아리 놓을만한 마땅한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다. 작은 오지단지 몇 개 들고 와서 쌀독으로 쓰고 있고, 그 밖의 것들은 본래의 용도를 떠나 꽃꽂이나 화분 받침으로 쓰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큰항아리가 없는 것이 늘 허전하고 서운하다.
손가락으로 뚜드릴 때마다 탱- 탱- 울리는 소리, 그 소리만 듣고도 깨지고 금간 것을 알아차리던 어머니. 물동이나 여느 장독그릇에도 짝이 있는 법이라며 같은 모양새를 둘씩 마련해 주시던 어머니. 어느 독은 된장맛이 좋고 고추장 담그기에 알맞다고, 봄이 오고 가을이 되면 독을 채우며 일년살이 준비를 하시더니만.
이제 큰항아리는 없다해도, 세월의 덮개가 낀 칠십 년을 어찌 허투루 지울 수 있으랴. 안 계신 어머니가 아직도 내 가슴에 자리하듯 큰항아리의 추억은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올해도 찬바람 일면 경복궁 옹기전시회가 열리겠지.
첫댓글 예전에 장광을 청소하고난 뒤에 그 개운함고 반들거림이 생각납니다.
아 !! 고향집에 가고 싶어요..옹기가 많은 그 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