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신신사 주일모임에서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다가 떠오른 생각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소득이다.
AI 덕분에 한국에서는 내가 처음으로 생각해 볼 수있었던 기발한 착상이라고 생각된다.
.
요한계시록에 대한 현상학적 독해
초기 교회는 두루마리 형태의 문서를 한 사람이 읽으면 듣는 방식의 ‘낭독공동체였다. 초기 공동체에서 가장 중심이 되었던 복음서나 바울 서신이 가장 많이 읽혔을 가능성이 크다. 교회는 정기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는 곳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각 구조상 익숙함은 권태로 흐르기 쉽다. 아마도 신자들 중에 “오늘 낭독 뭐야? 또 마가복음이야? 아… 오늘은 좀 요한계시록 같은 거 없나?”이랬을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서 계시록의 내용은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하기 때문에 흥미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할 수 있다. 짐승, 숫자 666, 천상의 전쟁,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오는 요한계시록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고대판 디스토피아 SF + 우주적 전쟁 서사가 섞인 판타지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이다.
계시록은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로 들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핵심 내용이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지금의 고통은 끝나고, 결국 하나님이 승리한다.”는 종말론적 위로와 저항의 내용이기 때문에 동시에 공동체가 직면한 위기 속의 메시지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계시록은 상징과 구약의 내용이 많기 때문에 해석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부 지역 교회에서는 계시록의 권위를 두고 논쟁이 있었고 실제로 정경으로 확정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현상학적으로 표현하면 초기 신자들에게 요한계시록이라는 텍스트는 단순히 ’읽을 자료‘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사건(event)이었다.
계시록은 듣는 순간마다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단순히 ’재미‘를 넘어 지각을 깨우는 작동 방식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낭독할 때 “무슨 뜻인가?”하는 것으로 토론, 해석, 긴장이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여기서 계시록은 단순한 교리 텍스트가 아니라 공동체의 지각을 흔드는 작용을 했다는 가정이 가능한 것이다. 이는 텍스트를 ‘참/거짓’으로 평가하기 보다는 각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경험하느냐?’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문트 후설에 따르면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 된다. 그러므로 후설적으로 보면 계시록은 객관적 의미를 전달하기 보다는 오히려 청중의 의식 안에서 의미가 구성되도록 유도하는 텍스트인 것이다.
즉 계시록은 단순히 해석을 요구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해석을 ‘발생시키는 사건’인 것이다. 계시록은 새로운 내용을 제공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세계를 보는 방식 자체를 재구성하는 텍스트인 것이다. 현상학적으로 해석하면 요한계시록은 가장 흥미로운 텍스트였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해석을 요구하는 텍스트’였기 때문에 공동체의 지각을 깨우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초기 신자들은 이미 로마 제국 아래에서 겪는 고통 속에서 로마를 짐승으로, 황제 숭배를 우상숭배로, 박해를 우주적 전쟁의 일부로 지각을 전환 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알랭 바디우의 “사건(event)” 개념으로 재해석하면
계시록은 해석을 요구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해석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될 수 있다.
바디우에게 사건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기존 질서(=상황, situation)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 기존 의미 체계를 깨뜨리는 것, 새로운 진리의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즉 사건은 “이미 주어진 세계를 넘어서는 균열”이다. 그리고 사건 이후에는 반드시 따라오는 충실성(fidelity)이 있어야 한다. 즉 그 사건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계속 해석하며 살아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을 “사건”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초기 신자들이 살던 세계인 로마 제국 질서는 이미 하나의 “상황”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이 세계를 깨뜨린다. 즉, 계시록은 기존 상황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균열”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긴장이 생기는데 바디우에게 사건은 보통 예측 불가능, 돌발적, 일회적인데 계시록은 반복, 텍스트로 존재함, 공동체 안에서 지속됨으로 같다고 보기가 어렵다.
해결책은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낭독-경험”의 사건을 보는 것이다. 계시록이라는 책이 사건이 아니라, 계시록이 낭독될 때 발생하는 지각의 전환이 사건이다
바디우적 핵심은 사건 이후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그냥 지나칠 것이냐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되는 기준이 있다. 초기 신자들의 경우 계시록을 “진리”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로마를 더 이상 절대 권력으로 보지 않고 고통을 종말론적 의미로 재해석한다. 이것이 바로 사건에 대한 충실성(fidelity)이다.
계시록은 의미를 전달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사건을 통해 의미 구성을 촉발하는 장치가 된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단순한 종말론 문서가 아니라 로마 제국이라는 ‘상황’을 붕괴시키는 사건적 장치이며, 공동체는 그 사건에 대한 충실성을 통해 새로운 세계 인식을 구성하게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