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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3월 1일 토요일
[(녹)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주님께서는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는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17,1-15
1 주님께서 사람을 흙에서 창조하시고 그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2 그분께서는 정해진 날수와 시간을 그들에게 주시고
땅 위에 있는 것들을 다스릴 권한을 그들에게 주셨다.
3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처럼 그들에게 힘을 입히시고
당신 모습으로 그들을 만드셨다.
4 그분께서는 모든 생물 안에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놓으시고
그들을 들짐승과 날짐승의 주인이 되게 하셨다.
5 그들은 주님의 다섯 가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덧붙여 그분께서는 여섯 번째로 그들에게 지성을 나누어 주시고
일곱 번째로 그분의 능력들을 해석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다.
6 그분께서는 분별력과 혀와 눈을 주시고 귀와 마음을 주시어 깨닫게 하셨다.
7 그분께서는 지식과 이해력으로 그들을 충만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선과 악을 보여 주셨다.
8 그분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 주시어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보게 하시고
그들이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영원히 찬양하게 하셨다.
9 그분의 위대한 업적을 선포하기 위하여
10 그들은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리라.
11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지식을 주시고
생명의 율법을 그들에게 상속 재산으로 나누어 주시어
지금 살아 있는 존재들이 죽을 몸임을 깨우쳐 주셨다.
12 그분께서는 그들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고
당신의 판결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13 그들의 눈은 그분의 위대하신 영광을 보고
그들의 귀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14 그분께서는 “온갖 불의를 조심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그들 각자에게 제 이웃에 대한 계명을 주셨다.
15 그들의 길은 언제나 그분 앞에 드러나고
그분의 눈앞에서 감추어지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3-16
그때에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이들이 당신께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 가까이 온 아이들을 그분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제자들의 행동을 보시고 언짢아하십니다. ‘언짢아하다’는 ‘매우 화를 낸다.’의 뜻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였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어린이들을 쓰다듬어 주는 행위가 잘못이어서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막아선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린이를 쓰다듬는 행위는 안수처럼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는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습니다. 율법 학자가 제자나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관습이 있었고, 실제로 라삐들도 그러한 관습을 따랐습니다. 제자들은 아마 예수님께서 어린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셔야 하므로, 어린이들을 막아서는 것이 그분께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의 판단과 그에 따른 행동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려한다면서,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강하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보여 주시고자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몸소 손을 얹어 그들 앞에서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한창현 모세 신부)
제2의 삼일운동이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또다시 삼일절입니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가 한창이던 시절,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거행된 삼일운동은 여러 측면에서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닙니다. 철저하게도 비폭력 평화 시위로 진행되었습니다. 동시에 조선 독립의 초석을 마련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삼일운동은 단기간에 끝났지만, 그 여파는 상당했습니다. 이 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습니다. 국제 사회 앞에 우리 백성들의 자주독립을 향한 적극적인 의지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보다 조직적인 항일 운동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종교계가 주도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 천도교 15명, 개신교 16명, 불교 2명이 참여했지만, 안타깝게도 천주교는 단 한 명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민족대표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고 해서, 3·1운동에 천주교 신자들이 전혀 동참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자들의 참여는 미미했고 소극적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당시 조선 교회 지도층 인사들의 그릇된 식별력과 판단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제를 합법적인 정부로, 조선을 일본의 한 부분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독립운동을 반정부 운동으로 단정한 것입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신자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했습니다. 나중에는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동참할 것과 신사참배까지 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 같은 경우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병자 성사와 미사 요청에 대해 공식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조선교구장은 그를 테러리스트로 간주한 것입니다. 지시를 어기고 성사를 집전한 빌렘 신부에게는 2개월간 성무 집행을 정지시키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세월이 흐른 지금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의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그는 이제 독립운동가로서뿐만 아니라 충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신앙이자 애국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가톨릭 교회가 또다시 시대의 징표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한국천주교회 구성원 전체가 다 같이 노력해야겠습니다. 더 이상 교회 담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포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는 일이 없도록 늘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우리 현실을 내려다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주요 요직에 친일파들이 득실대고 있습니다. 잠잠하다가도 어느새 독사들의 무리처럼 머리를 쳐들고 활개를 칩니다.
그릇된 지난 시대에 대한 깔끔한 청산에 실패의 결과물이 참담합니다. 기회가 왔을 때, 싹 다 정리했어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능수능란한 친일파들은 어우선하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틈타, 어느새 자신들의 신분을 세탁하고 또 세탁해서, 새로 수립된 정부의 주류이자 기득권 세력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고 그 명맥을 오늘날까지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청춘과 목숨까지 바쳐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해방의 기쁜 소식을 듣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귀환하셨던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받으셨던 느낌, 그 참담한 심정과 수모가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자국민뿐만 아니라 일본인들, 전 세계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에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를 볼 수 없습니다. 과거를 반성하는 것은 화해를 위한 전제조건 중에 하나입니다. 나치 만행은 독일의 항구적 책임입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엄청난 과오에 대해, 진심이 담긴 사과를 끝까지 하지 않고 있는 일본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거저 이룩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익명의 독립운동가들, 항일 투쟁가들을 비롯한 수많은 물방울들이 모이고 모여 큰 물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대한독립이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또 다른 항일 운동, 제2의 삼일운동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혼란 속에 있는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들을 굽어보시고 지켜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서 빨리 이 야만과 비인간의 시대, 미성숙과 부끄러움의 시대가 지나가고 청산되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순발력, 임기응변이 좋은 분들이 있습니다.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빠른 분들입니다. 흔히 그런 분들을 ‘내공’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드라마나 영화의 대사 중에 깊이 각인 되었던 대사가 있습니다. “잘 났어! 정말, 너나 잘하세요,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육이오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추우냐, 나도 춥다.” 이런 대사를 들으면 의미가 선명하게 살아납니다. 강론할 때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날 전례와 맞지 않는 복음으로 준비한 때도 있습니다. 화창한 날을 예상하고 강론을 준비했는데 갑자기 비가 오는 때도 있습니다. 강론 중에 아이가 울거나, 스마트 폰이 울리는 때도 있습니다. 내공이 깊은 신부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별 무리 없이, 어떨 때는 더 깊은 감동을 주면서 선포합니다. 오랜 경험을 지닌 요리사는 신선한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만, 철 지난 재료로도 깊은 풍미를 주는 음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순발력과 임기응변의 원조는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은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입니다. 유대의 율법에 따르면 그런 여인은 돌로 쳐서 죽여도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면 예수님은 새로운 메시아가 아니라 구약의 율법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 이방인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진퇴양난의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손에 든 돌을 놓고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아픈 사람,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제자들도 안식일에 밀 이삭을 먹었습니다.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과 제자들은 왜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그 밖에도 예수님의 순발력이 돋보이는 곳이 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면 됩니다.’ 우리가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언제나 기도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순발력과 임기응변의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빠른 비행기와 우주선으로는 태양계를 벗어나기도 힘이 들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업적으로는 피라미드 이상 높은 건축물도 세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유년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올 수 있도록 어머니가 10개월 동안 나를 품고 있었음을 감사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일어날 수 있도록, 걸을 수 있도록 나를 먹여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과 가족들이 있었음을 감사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무상으로 모든 것을 받았으니, 나도 무상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영혼에 하느님의 숨결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능력을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있으며, 예술을 창조할 수 있는 감성이 있습니다. 우주와 세상의 시작을 사유할 수 있는 오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상자가 됩니다. ‘우리들 마음에 시기, 질투, 탐욕, 분노, 미움, 원한’의 쓰레기를 담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용서, 희생, 나눔, 배려, 인내, 사랑’의 보석을 담으면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어린이처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하나로 모두
받아들이는 겁니다
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지금 여기서
받아들이는 겁니다
어린이처럼
오늘의 성인
성 펠릭스 3[2]세(Felix III[II])
신분 : 교황
활동연도 : +492년
같은이름 : 펠리체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펠릭스 교황은 로마의 귀족 출신으로 부제였으며, 적어도 두 아이의 아버지로 아내와는 사별하였다. 그의 두 아이 중 하나가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의 조상이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교황 펠릭스 2세인 그를 펠릭스 3세로 부르는 것은 교황 리베리우스(Liberius, 352-366년 재위) 시대의 대립교황 펠릭스가 사후 교황 명단에 펠릭스 2세로 올랐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알 수 없으나, 그는 교황 성 대 레오 1세(Leo I, 11월 10일) 스타일의 용감하고도 솔직한 로마인이었다.
그의 재임 기간에 그리스도단성론(monophysitism)이 대두되어 분쟁이 있었다. 482년 동로마제국의 제논 황제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총대주교 아카키우스(Acacius)의 이론에 기초한 "헤노티콘"(Henoticon)이란 일치 포고령을 반포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인정한 칼케돈(Chalcedon) 공의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오히려 단성론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2년 후 성 펠릭스 3세는 라테라노(Laterano)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아카키우스를 파문하고 정통 교리를 재차 확립하였다. 이로써 그는 세속 권력에 대항하여 교회회의를 개최한 위대한 교황으로 부각되었다. 아카키우스 이단은 약 35년 동안 지속되다가 소멸되었다. 그는 재위 9년만인 492년 3월 1일 선종하여 성 바오로 대성전에 묻혔다.
성 다윗 (David)
활동년도 : +6세기
신분 : 주교, 수도원장
지역 : 웨일스(Wales)
같은 이름 : 다비드, 데이비드, 드위
드위(Dewi)로도 알려진 성 다윗에 대하여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은 11세기에 기록된 불확실한 그의 전기에 근거한 것이다.
그 전기에 의하면 성 다윗은 사우스 웨일스(South Wales)의 샌트(Sant) 국왕의 아들로서 사제가 되었으며, 성 바울리누스(Paulinus, 11월 23일)의 문하에서 몇 년 동안을 공부한 후 선교활동에 투신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 다윗은 브레피(Brefi) 시노드에도 참석하여 큰 공헌을 하였고, 550년경에 행한 그의 뛰어난 설교로 인하여 웨일스 지방 교회의 최고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성지를 순례하던 중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로부터 케얼레온(Caerleon)의 대주교로 승품되었고, 빅토리(Victory) 시노드로 불리는 회의를 주재하여 명성을 날렸다.
이때 그는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를 최종적으로 배격하는데 성공하였고, 브레피의 칙령을 인준하였으며, 영국 교회의 규정을 제정하는 등 교회 안팎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세운 메네비아(Menevia) 수도원에서 운명하였고, 1120년경 교황 칼리스투스 2세(Callistus II)로 부터 그에 대한 공경이 승인되었다.
그의 출생과 사망 연대는 불확실하지만 그는 웨일스의 수호성인으로서 높이 공경을 받는다.
복녀 요안나 마리아 보노모(Jane Mary Bonomo)
신 분 : 수녀
활동연도 : 1606-1670년
같은이름 : 메리, 미리암,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마리아 보노모(Joanna Maria Bonomo)는 이탈리아 비첸차(Vicenza) 교구의 아지아고(Asiago) 태생으로 트렌토(Trento)의 클라라회에서 교육을 받고 1622년 바사노(Bassano)에서 베네딕토회 수녀가 되었다. 그녀는 수녀원장과 수련장 수녀 등의 직책을 역임한 후 1670년 3월 1일에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수도원에서 운명하였다. 그녀는 1783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