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쩍도 하지 않는 전선”
*낙동정맥 다섯 번째 이야기
*가사령-사관령-침곡산-태화산-한티재-운주산-이리재-봉좌산-시티재-호국봉-어림산-마치재(56.3㎞, 2016.9.4.)
태풍 남테운의 영향으로 포항에 100mm 넘게 비가 와서 산길이 미끄러울 거라고 했다. 코스도 까칠하다는데 비까지 많이 내렸으니 이번 산행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사당에서 가는 내내 날씨가 맑더니 풍기에 들어서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백산은 옅은 비구름에 덮여 차창 밖으로 멀어진다. 34번 국도 변 임하호를 따라 산허리에는 군불을 지피는 것처럼 비안개가 피어올랐다. 청송 진보면 기사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저녁 8시쯤 가사령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우려했던 대로 산길은 비에 젖어 미끄러지기 일쑤였고, 가시넝쿨이 길을 막아 처음부터 숨이 턱에 찼다. 밤 10시 반쯤 낙동정맥 중간지점인 벼슬재에 도착했다. 벼슬재는 포항시 기북면의 오덕리, 성법리에서 죽장면 가사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사관령(士官嶺)이라고도 했다. 옷은 빗물을 잔뜩 머금었고, 비닐을 씌운 신발도 이미 축축해졌다. 랜턴 불빛을 따라 모기떼처럼 비의 입자들이 모여들었다. 불빛이 여는 길은 눅눅하고 산란했다.
침곡산, 태화산을 지나 새벽 2시경 한티재에 도착했다. 식당에서 싸 온 두루치기에 밥을 먹고, 초당님이 가져온 잔나비걸상버섯주를 두어 잔 마셨더니 몸이 좀 풀린다. 한티재에서 운주산까지는 제법 가파른 데다 배가 불러 더 힘들었다. 불랫재를 지나 운주산 밑에서 앞서 가던 백구님이 갑자기 흠칫 뒤로 물러선다. 멧돼지가 씩씩대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으르렁대다 멧돼지가 물러났다. 숲속은 희끄무레 먼동이 트고 있었다. 숨이 턱에 닿을 무렵 도착한 운주산에는 헬리콥터장과 제천단이 갖춰져 있다.
제천단에 올라 북쪽으로 바라본 산들은 겹겹이 포개지고 끝도 없이 뻗어 나갔다. 밟은 산과 흘린 산들이 운해에 뒤섞여 출렁인다. 구름은 시내가 되어 산골짜기를 돌아 흐르고, 하반신을 담근 산들은 섬처럼 떠다녔다. 걷고 또 걸어도 지워지지 않는 산길에서 늘 욕망은 꿈틀거린다. 모래밭에 코를 박는 파도처럼 욕망은 산맥의 끝에 서서야 길을 내려놓을 것이다. 까치발을 딛고 선 연봉 너머에는 골판을 등에 진 파충류들의 대이동이 길게 이어졌다.
운주산(雲住山)은 포항시 기계면, 영천시의 자양면과 임고면의 경계에 걸쳐 있는 산으로 멀리서 보면 구름이 머물고 있는 것 같아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운주산에서 이리재로 가는 5킬로 길은 큰 봉우리가 없어 편안하다. 포항익산고속도로 옆에 있는 이리재에 정다운님과 이글스님이 먹을 것을 잔뜩 싣고 지원을 나오셨다. 오뎅에다 떡볶이를 배불리 먹고 콜라와 포도즙을 하나씩 챙겨 다시 길을 나섰다. * 정다운님, 이글스님, 지원 감사드립니다. 처음 만나 봬서 너무 반가왔습니다.
봉좌산(鳳座山)에서 사진을 찍느라 일행과 떨어졌다. 정자에서 간식을 먹고 있는 산객한테 배티재 가는 길을 물었더니 오른쪽 임도를 가리킨다. 그쪽으로 노란 리본도 걸려 있어 별 생각 없이 길을 따라 가는데 산으로 연결되는 길은 보이지 않고 임도가 계속된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서 임도를 따라가다 오룡고개에서 정맥길에 합류하기로 했다. 삼포리 수흥마을은 온 동네사람들이 나와 벌초하느라 정신이 없다. 다시 정맥길을 찾아 가시덤불을 헤치고 산에 올랐다. 삼성산 갈림길까지는 심한 오르막이어서 네발로 기어서 올랐다.
시티재에 거의 다 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길이 보이지 않았다. 트랙은 점점 멀어지고 굵은 거미줄이 앞을 가로막았다. 나뭇가지로 거미줄을 헤치고 벌초하는 소리를 따라 무작정 내려갔다. 갑자기 숲에서 튀어나온 험한 몰골의 산객을 보고 벌초객들이 의심스러운 듯 위아래를 훑어본다. 가는 길을 묻고, 묘지 옆에 새참으로 가져온 과일을 흘끔거리며 내려왔다.
시티재는 영천 고경면 청정리에서 경주시 안강읍 너더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28번 국도가 지나간다. 시티재는 동해안 선비들이 이언적 선생을 배알하러 갈 때의 첫 고개라 하여 ‘시치재’라 불리다가 시티재로 불렸다고 한다. 포항지부 추사대장님과 동그리총무님이 안강휴게소 그늘진 마당에 수박이랑 맥주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길을 헤매 갈증이 심했던지 수박에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치재까지 10킬로를 더 진행하기로 해서 식수 4병을 챙겨 국도를 넘었다. * 지원해 주신 추사대장님과 동그리총무님께 무한 감사드립니다. 만나서 반가왔구요~~~
국립영천호국원이 바로 밑에 있는 호국봉을 지나 한참을 가자 멀리 왼쪽으로 어림산이 뾰족하게 솟아 있다. 오르는 길이 제법 가팔라 천천히 올라갔다. 어림산(御臨山, 510m)은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와 현곡면 내태리, 영천시 고경면 논실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신라 경순왕이 둘러본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어림산은 6·25 전쟁 당시 국군 수도사단이 1950. 8. 9.부터 9. 14.까지 안강, 포항, 경주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한 ‘안강전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전투로 북한군 제12사단은 낙동강 전선의 동부지역 돌파작전에 실패했고, 국군은 기계와 포항지역 북방으로 후퇴한 북한군을 추격해 다음 단계의 반격작전으로 이행했다. 밀고 내려온 자들은 마지막 남은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지 못해 불안했고, 밀려온 자들은 이곳에서 등을 보이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군인들에게는 승전과 패전이 구별되지 않았고, 삶과 죽음은 어차피 하나였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군인의 옆구리에 내일은 또 죽음의 파편이 날아들 것이고, 죽어가는 어린 군인의 눈가에는 저 아래 들녘의 삶들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을 것이었다. 살던 땅에 몰아닥친 이념의 밀물과 썰물에 사람들은 수초처럼 흔들릴 뿐, 그들에게 삶의 위태로움은 가깝고 먼 포성으로만 가늠되었다. 삶과 죽음은 날아가는 방향을 알 수 없는 포성에 실려 풍문으로만 들려왔다. 정상의 소나무 한 구루가 밑동을 치맛자락처럼 벌려 빗물을 받아 내고 있다. 삶인지 죽음인지도 모를 만신창이 몸뚱이를 저 나무에 기대고, 어린 군인이 목을 축이고 있는 것도 같았다. 66년이 지나도 꿈쩍하지 않는 이 전선을 굽어보면서.
커피를 마시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버스에 우비를 두고 와서 오는 대로 홀라당 비를 맞았다. 가시넝쿨이 산길을 가로막고 있어 뚫고 나가기가 쉽지 않다. 가시나무에 얼굴이 쓸리고, 손등과 팔뚝에는 북북 손톱자국이 찍혔다. 반바지를 입은 도사님과 백구님은 다리가 얼마나 쓰린지 비명도 못 지르고 팔짝팔짝 뛴다. 마치재 내려가는 1.5킬로, 형극의 길이 따로 없다. 오후 5시가 넘어 마치재에 도착했다. 904호 도로변에서 홀딱 벗고 남겨 온 식수 몇 방울로 몸을 씻었다. 오락가락 내리던 비도 는개로 변하더니 어느새 잦아들고 있었다.
첫댓글 또 많이 바쁘셨지요?~~ㅎㅎ
작품으로 완성 하였기에 산행글이 늦었는가 봅니다.
모르고 있던 낙동강 전선의 스토리도 알게되고,머리에 저장하듯 잘 읽고
갑니다~~
낙동5구간 고생하셨구요!
산행후 생생한 기록물들 작성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추석명절 잘 보내시길요~~^-^
ㅋㅋ 자꾸 게을러져서 큰 일이요. 기억은 가물가물 손은 미적미적. ㅋㅋㅋ 즐거운 추석~~~
다녀 오신지 한참된 산행후기 이지만
손변님 특유의 표현이 살아 있어
아직까지 싱싱 합니다...ㅎ
이놈의 멧선생을 어뜩해 해야지
이거 미서워서~~
요즘은 개네들이 간이 배밖으로
나왔는지 사람 무서운줄 모르고 있네유~~~
밤길에는 항상 멧돼지가 무서워요. ㅎ 지부장님, 추석 잘 보내시고요~~~
비는 오는데 우비도 없고 가시덤불에 갇혀서 길을 찾으며 진행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한여름의 정맥길을 진행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얼마나 쓰린지 백구총무님은 내리막길을 굴러 내려가더라구요. ㅎㅎ 추석 명절 잘 보내시고요~~~
많이 내려가셨네요
지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산행기 잘보고 갑니다
개체수 늘어나는 돼지땜에 항상 긴장해야 합니다
절대로 건들지 마시고 도망가세요~~
낙동길도 벌써 반을 지났는 모양입니다. 내일 마석 환종주 가시죠? 잘 다녀오시구요. 추석 잘 보내세요~~~
정맥길의 거침이 느껴집니다. 중간지원의 정도 있고~~제삼리의 끈끈함이 느껴집니다. 우중산행. 잡풀산행헤치며 고생많으셨습니다~^^
중간지원 해주신 분들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다음 주 졸업하시죠? 잘 마치시길 바랍니다.추석 잘 쇠시구요~~~
운주산지날적에몃돼지땜시 깜짝놀란적있는데요
멧돼지가 많은지역인가봅니다
침곡산 비온뒤에 너무힘들게올라가서 잊을수없는산이네요
이계절이 정맥하기에는좀힘드시죠
고생많으셨습니다
아, 운주산이 덩치가 커서 멧돼지들이 많이 서식하는 모양이군요. 밤길에 얼마나 무섭던지 발이 안 떼져요. ㅎㅎ 산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침곡산 참 가파르더라구요. 남은 휴일 행복하게 보내세요 ~~~
시티재 직전에 임도가 왼쪽으로 꺾이자마자 오른쪽 숲속으로 들어가면 묘지를 거쳐서 내려오는데 거기 입구가 찾기 쉽지 않더군요. 저는 북진과 남진을 다 하니 길을 찾았지만...아니면 임도를 따라 내려가도 좀 돌긴 하지만 시티재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어림산~마치재는 가시풀이 우거진 곳이라 전투복 바지를 입어도 다리가 따끔거리던 곳인데...거기를 반바지로 가신 분들은 상당히 아프셨겠습니다. ㅎㅎ
아, 그쪽으로 길이 있긴 있었군요. ㅎ 임도는 너무 돌아가는 것 같더라구요. 어림산 가시덤불의 반 바지 사나이들...ㅋ 남은 연휴 잘 보내시고요 ~~~
추석명절 잘보내셨지요^-^
어림산이후 벌목지대 가시밭길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는 길이죠ㅡㅎ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장님이 고생 많이 하셨지요. 추석 명절 고향에는 잘 다녀오셨지요? 담 구간 설레는 마음으로 뵙지요~~~
이번구간은
난이도 최상급(가시넝쿨+빗길+트랙오류)
최악의 정맥길 이셨군요.
대다수가 정맥길은 생소한 초행이라
길잃고 찾고하며 길공부가 나름 재미도
있습니다.
또 한구간 수고하셨습니다.옹
길공부...ㅎ 맞네요. 삶도 어차피 트랭글 지도 위를 걷는 것은 아닐 테지요. 없는 길, 있었어도 지워진 길을 훑어야 하는 것이군요. ㅎ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