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추억이 꽃처럼 박힌…
나는 고향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리고 고향이란 말 뒤에는 풀물 같은 아픔이 묻어나온다. 아름다운 추억이 고향에 많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더욱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깊다는 역설이 성립되는지 모르겠다. 내게 있어 고향의 바탕색은 아무래도 분홍색은 아닌 것 같다. 형태로는 감또개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립고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음은 왜일까.
거긴 내 할머니와 내 어머니에 대한 슬프도록 아름다운 추억들이 아직도 살아있고 또 살아있을 곳이기 때문이다. 거기는 할머니 무릎과 별똥별 이야기와 눈물범벅이 되었던 모깃불의 추억이 남아있고. 실개천 바닥에 배를 깔고 멱을 감다가 사금파리에 발을 베어 자국마다 피를 흘리며 울고 가던 내 유년이 있다.
요즘에야 최고급 미용 팩이 되겠지만. 여름 장마 흙탕물의 자맥질이 해학으로 각색되어 있고. 저녁연기 허리안개로 돌고 어둠살이 내리면 형들의 도움으로 소등에 올라 돌아오는 어린 왕자. 짧아서 더욱 행복했던 소년의 한 시절이 거기 있다. 가물거리는 등잔불 아래서 어머니에게 한글을 배우던 저녁. 가자에 기역하면 ‘각’하고. 가자에 니은 하면 ‘간’하고…행(이응) 따니(ㅣ)라. ‘나’자에 기역하면 뭐꼬? ‘낙’이지. 어린 아들의 대답에 함박 같은 웃음을 담아내던 내 어머니의 모습이 오로지 그곳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 어머니는 소년이 열두 살 되던 해에 한 많은 생을 마쳤으나 고향은 내 어머니를 아직 놓아주지 않고 있다.
그 후로 몇 명의 어머니가 돌아들며 소년을 그냥 짓밟고 지나갔다. ‘이 돈을 언제 다 쓸까’ 걱정이던 아버지는 당대에 그 재산 다 날렸고. 바꿔들던 여자들은 목장을 몰고 가고. 과수원을 안고 떠나고. 논과 밭을 지고. 누구는 안산까지 긁어서 새처럼 바람처럼 모두 다 날아갔다. 느지막이 직장이라는 데에 발을 들여놓은 아버지. 그 덕에 소년은 초등학교를 다섯 군데나 옮겨 다니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유산이라고는 젓가락 한 짝도 구경하지 못한 박복한 부잣집 손자. 가난뱅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는 어느 날 어머니 무덤 앞에 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십 수 년이 지난 오늘까지 나는 고향엘 여전히 가고 있다. 어머니가 그리워 추억의 한 자락을 밟으면서 배나무실을 찾고 있다. 지금은 포장도로로 자동차가 드나들지만. 내 가슴속의 고향은 변함없는 오솔길이며 골목길이다. 논두렁 밭두렁 길인가 하면 걸어다니는 등굣길이다. 긴 자갈밭 아래 웅덩이에는 조무래기들의 자잘한 웃음이 동심으로 넘쳐흐르고. 이십여 호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모여 사는 홍가들의 집성촌 배나무실엔 날마다 먹어도 남아도는 참꽃 동산과 삘기 뽑고 칡뿌리 씹던 시절은 나이를 먹지 않고 오늘도 거기 있다. 밤나무가지에 새끼줄 걸고 뛰던 그넷줄 끊어져 엉덩이에 박힌 밤가시는 지금도 아파서 웃음이 절로 난다. 여항산에 비구름 묻으면 한 시간 안에 비가 오는 일기예보가 정확한 동네. 오일장이 어김없이 서고. 할머니 따라온 어린 조카를 끌어안는 고모가 돼지국밥을 사주는 가야장도 있다.
옹기전 뒤 널찍한 공터에는 다음 장날에도 닭싸움이 성황을 이룰 것이며. 어른들은 돈을 걸고 응원을 할 것이다. 승패가 가려지면 웃음과 탄식이 섞바뀌는 촌극도 벌어질 것이다. 멀어질수록 생각은 크게 다가오고. 흘러갈수록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지는 내 고향 함안. 비극미에 감동을 크게 받고 애련미를 오래 기억하는 속성을 지닌 동물이 사람이라면. 내게 있어 고향은 유난히 빛이 곱고 고와서 더욱 맑은 순수 예술이며. 조물주가 내게 보낸 선물일시 분명하다. 대자연의 연출임에 틀림이 없다.
내가 살던 집에서 정남으로 바라보면 함안의 진산 여항산이 우뚝하다. 그 아래 ‘진달래는 먹는 꽃 먹을수록 배고픈 꽃’이라 노래하며 소년시절을 보낸. 한국현대문학사의 거봉이며 큰 획을 그은 석재 조연현 선생님의 생가가 있다. 서남으로 눈을 돌리면 보이는 넓은 들이 법수면 우거리. 한국시단의 거장이신 문덕수 선생님이 태어나 유년을 보내신 곳이다. 그 남으로 좀 가면 군북면 모로리에 닿는다. 고향을 퍽이나 자랑하던 이 땅의 큰 시인 이석 선생님이 태어나신 곳이다.
나는 이런 문학의 정기가 얼개를 치고 있는 고향을 마음하며 자랑한다. 오늘도 나는 고향엘 다녀왔다. 몇 사람이 뜻을 모아 함안문인협회를 결성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국문단에 당당히 자리하는 후배들이 오늘의 함안 문화예술을 이끌어가고 있다. 환희롭기 그지없다. 분명 보람찬 창조다.
육이오의 폭격이 내 생가는 재로 만들었지만 그것은 되레 내 가슴속에는 추억의 자양으로 남아있다. 돌아보면 그리도 아팠던 설움만 보이는 내 소년기의 긴긴 날들. 그 기억의 잔천들이 죽순처럼 솟아 오늘 내 상념의 중심에서 내 시정신을 이끌 줄이야. 알량하나마 내 예술혼의 견인차가 될 줄이야.
우거진 풀밭을 걷지 않고 어찌 꽃피는 마을에 이르기를 바랄 것인가. 내 설워서 눈물이 말랐던 유년을 프리즘을 통과한 햇살 같은 아름다운 꿈으로 바꿔주신 내 운명의 신에게 나는 감사하면서 살란다.
당나라의 시성 백거이 한 구절을 여기 에둘러 내 고향노래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行路難不在水不在山-인생살이 어려운 것은 물이 깊어 못 건너서도 아니요. 산이 높아 못 넘어서도 아니다. 只在人情反復間-오로지 엎치락뒤치락하며 거듭되는 인정 때문인 것을.
★홍진기 시인은= 1936년 함안군 가야읍 산서리 이곡 출생.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9년 ‘현대문학’ 자유시 추천완료. ‘시조문학 ’시조 천료. ‘문예사조' 소설 신인상에 당선됐다. 창원문인협회장. 함안문인협회장. 경남시조시인협회장. 경남문협시조분과위원장. 가락문학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경남펜클럽 부회장. 포에지 창원과 창원문협 고문을 맡고 있다. 창원대학교 평교원. 경남문예대. 창원도서관 평생학습원. 창원예총 문화교실 등에서 시창작지도를 하고 있으며 종합문예지 ‘문학세계’ ‘한국문인’ ‘해동문학’ ‘문예한국’ 등 편집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작품집으로는 ‘파수꾼’ ‘추억의 푸른 눈빛’ ‘기다리는 마음’ ‘울음 우는 도시’ ‘빈 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