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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13회 2016.5.31.MP3
장소: 전북 익산 원광대학교 교학대학 1층 세미나실 일시: 2016년 5월 31일(화,오후 1시 15분~ ) 강사: 곽준(묘원 법사님)
교재 : 사념처 명상의 세계(도서출판 행복한숲 刊)
4) 마음 알아차리는 수행 방법과 이익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사념처 수행인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 중에서 세 번째 수행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사념처 수행을 이끄는 중요한 수행입니다. 사념처 수행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몸의 깨끗하지 못함을 알아차립니다.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느낌이 괴로움이라고 알아차립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마음이 항상 변한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염처별 지혜가 날 때 궁극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궁극의 깨달음인 열반에 이르려면 점진적으로 지혜가 계발되는 단계를 거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먼저 몸의 감각이 사라지는 단계가 옵니다. 그런 뒤에 호흡이 미세해져서 사라집니다. 이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아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이때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마음까지 소멸하면 열반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결정적인 작용을 합니다. 그러므로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누구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얻는 이익은 많습니다. 먼저 융통성이 있고 유연해지며 대상에 쉽게 적응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커다란 소득과 이익을 주기 때문에 매우 이롭습니다. 그리고 불행과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과 즐거움을 얻습니다. 이렇듯 여러 가지 이익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익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를 뿌리 뽑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용, 자애, 지혜를 증장시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하고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여서 압니다. 그래서 마음은 즐거움과 괴로움의 온상입니다. 이렇게 일하는 마음으로 인해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났다면 바로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본질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순간 번뇌가 소멸합니다. 물론 마음을 알아차려서 완전한 지혜가 나기 전까지는 번뇌가 순간적으로 소멸합니다. 이때 일단 순간적으로라도 소멸이 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알아차리는 마음이 일어나면 있는 마음은 순간적으로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마음이 잘 닦여지고 더 높은 지혜가 계발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해 잘 닦여지지 않고 계발되지 않은 마음의 결과는 이와 반대입니다. 마음이 융통성이 없고 유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대상에 쉽게 적응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은 결코 이익이 없습니다. 이로움이 없기 때문에 해롭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자아가 강하여 고정관념이 많은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강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이나 학문적으로 높은 식견을 가진 사람은 모든 일에 자신의 성공방정식을 적용하려듭니다. 그래서 보편적인 진실을 외면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마음을 알아차려서 이것이 내 몸과 마음이 아니고 자아가 없다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완고한 고정관념의 껍질을 벗고 바른 법을 볼 수 있습니다.
자아가 강하면 결코 윤회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잘못된 자아를 제거하려면 마음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견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지성적이지 못한 수행자가 도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누구나 완두콩알 만한 자아가 있어도 결코 열반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큰 장애가 자아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깨달음의 가장 큰 장애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마음은 의식의 순간들을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순간순간 여러 가지의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이때마다 일어나는 순간순간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이란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고 조건에 의해 매순간 일어나서 사라지는데 이런 과정을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의 종류가 매우 많은데 수행자가 이 마음을 모두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서 나타나는 마음을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마음은 하나이지만 과보에 따라 각기 다른 마음이 일어납니다. 또 잠재적 성향에 따라 일어나기도 하고 정신적 상태에 따라 다르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마음의 종류가 많아도 수행자가 알아차릴 마음은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한 순간에 마음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수행은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이런 기본적인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매순간 다양하게 일어나는 그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대상을 아는 이 마음을 다시 한 번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마음을 알아차리려고 해도 알아차릴 수 없을 때는 알아차리려고 하는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지금 내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리려고 하고 있네’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처럼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지금 일하고 있고 알고 있는 것이 마음인데 이 마음을 두고 다른 마음을 찾으면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항상 현재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간에 해보지 않던 일이라서 처음에는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새로운 습관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듣고 읽어서 귀에 딱지가 앉고, 마음에 착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가르침을 받아야 언젠가 스스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남의 말을 들어야 비로소 자신이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이유는 마음이 모든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일의 뿌리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매우 빠르게 알아차린 결과가 나타납니다. 견디기 힘든 일에 직면했을 때 마음을 알아차리면 즉시 제어하는 효과가 나타납니다. 이렇게 제어된 마음이 고요해지면 차츰 지혜가 나서 사물을 통찰하는 힘이 생깁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은 그냥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 이상 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면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알아차려서 얻는 결과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조건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므로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어떤 대상이건 설령 그것이 좋거나 나쁘거나에 상관없이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탐욕이 있는 마음은 당연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아울러 탐욕이 없는 마음도 똑같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다시 탐욕이 있는 마음이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지 않으면 탐욕이 없다는 자만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탐욕이 있을 때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탐욕이 없을 때는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화를 낼 때도 화를 내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화가 사라지면 화가 없는 마음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똑같이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은 매순간 흐르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마음만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면 선한 마음이 생기며 선하지 못한 마음이 사라집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에 의해 이끌려갑니다. 모든 것들은 오직 마음이라는 하나의 법의 힘을 좇아서 갑니다. 마음은 모든 행위에 앞서 일어납니다. 모든 육체적이고 정신적 행위는 마음이 협력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선한 행위를 하든지 악한 행위를 하든지 마음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선한 마음을 갖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떠한 행위도 먼저 의도하지 않고 일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려야 의도가 제어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제어될 때 몸도 제어됩니다. 마음이 통제되지 않으면 아무런 제약 없이 생각과 감정을 마음대로 표현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자신의 모든 행위를 제어하는 핵심요소입니다. 아울러 마음을 알아차려야 선한 의도가 증장됩니다. 그래서 선하지 못한 의도는 제어되고 선한 의도는 증장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하려고 하는 의도에 의해 일어납니다. 이 의도가 바로 마음입니다.
몸은 저 혼자 움직일 수 없고 마음이 앞에서 이끌기 때문에 움직입니다. 그래서 몸의 주인은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자아의식, 나 또는 개아라는 사견이 머무는 곳입니다. 그리고 내 몸과 내 마음이라는 유신견(有身見)이 자라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려야 이러한 잘못된 견해가 자신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는 매우 강력한 힘으로 몸과 마음을 내 것으로 집착하게 하는 유신견을 만듭니다. 그래서 몸은 병이 자라는 곳이며, 마음은 유신견이 자라는 곳입니다. 몸과 마음은 고통의 온상이 될 수 있고, 지혜와 기쁨의 온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몸도 알아차려야 하고 마음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자신의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가령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은 맞을 수도 있고 때로는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읽는 것은 결코 틀릴 수 없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마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정확하게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설령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해도 관용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알아차리지 배척하거나 비판하기 위해서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이란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적어도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상대를 비난하거나 경멸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보지 않을 때는 자신의 마음이 봅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마음이 증인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항상 자신이 새로운 증인이 됩니다. 우리가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이 모든 일을 하기 때문에 일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뿌리에 접근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하고 있는 마음을 새로운 증인이 지켜보기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처음부터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집중력을 키워야 합니다. 집중력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든 일을 이끄는 마음을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경험하지 않은 정신세계는 처음에 가기도 어렵지만 바르게 가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확신이 서지 않아 바르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수행은 스승의 지도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알아차리는 매우 간단한 방법인 마음을 알아차리려는 새로운 마음을 내지 못합니다.
5) 마음 알아차리는 수행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세 가지 방법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대념처경에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두 번째는 모곡 사야도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세 번째는 한국명상원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대념처경에서는 열여섯 가지의 마음을 제시하고 이 마음을 알아차리도록 했습니다. 열여섯 가지 마음은 여덟 가지 마음에 반대되는 마음을 하나씩 포함시켰습니다. 모곡 사야도는 외부에서 방문하는 마음 다섯 가지와 내부에서 방문하는 마음 다섯 가지와 주인의 마음 두 가지를 제시하고 이 마음을 알아차리도록 했습니다. 한국명상원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네 가지 방법으로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방법은 모두 똑같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지만 접근방법의 차이가 다릅니다.
(1) 대념처경의 마음 알아차리는 수행
다음은 대념처경에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내용입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마음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안다. 탐욕이 없는 마음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성냄이 있는 마음을 성냄이 있는 마음이라고 안다. 성냄이 없는 마음을 성냄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이라고 안다.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위축된 마음을 위축된 마음이라고 안다. 산만한 마음을 산만한 마음이라고 안다.
커진 마음을 커진 마음이라고 안다. 커지지 않은 마음을 커지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향상된 마음을 향상된 마음이라고 안다. 향상되지 않은 마음을 향상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이라고 안다. 집중되지 않은 마음을 집중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자유로워진 마음을 자유로워진 마음이라고 안다.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을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마음에서 마음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마음에서 마음을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마음에서 마음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마음이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마음이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단지 마음이 있다는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 마음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그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이상은 여덟 가지 마음을 둘로 나누어서 모두 열여섯 가지 마음입니다.
처음에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마음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라고 할 때 ‘어떻게’라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나타난 대상을 단순하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할 때는 지혜가 나서 탐욕이 없는 출세간의 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했을 때는 출세간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 단지 탐욕이 없는 마음일 뿐입니다. 가령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탐욕이 없는 마음은 선한 마음일 뿐이지 이 상태가 출세간의 경지에 있는 마음은 아닙니다. 단지 탐욕이 없는 마음이 열반을 성취한 마음은 아닙니다. 탐욕이 없는 마음뿐만 아니라 성냄이 없는 마음이나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도 이와 똑같이 적용됩니다.
여기서 ‘어떻게’라고 말한 것은 수행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교학에서는 항상 ‘무엇’이라는 것을 밝히지만, 수행에서는 항상 ‘어떻게’라는 것을 밝힙니다. 이것은 수행을 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학과 수행이 접목되면 이제 무엇을 어떻게 알아차리는가를 완전하게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라는 말은 마음을 알아차릴 때 오직 알아차릴 대상을 마음에 두고, 알아차리는 그것에만 집중하면서 지낸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지낸다’는 것은 알아차리는 수행을 일상의 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열여섯 가지 마음 중에서 첫 번째는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안다. 탐욕이 없는 마음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라고 했습니다. 탐욕이 있는 마음은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탐욕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사견이 있고, 자극이 없는 마음입니다.
둘째, 탐욕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사견이 있고, 자극이 있는 마음입니다.
셋째, 탐욕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사견이 없고 자극이 없는 마음입니다.
넷째, 탐욕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사견이 없고, 자극이 있는 마음입니다.
다섯째, 탐욕이 있고, 평온이 있고, 사견이 있고, 자극이 없는 마음입니다.
여섯째, 탐욕이 있고, 평온이 있고, 사견이 있고, 자극이 있는 마음입니다.
일곱째, 탐욕이 있고, 평온이 있고, 사견이 없고, 자극이 없는 마음입니다.
여덟째, 탐욕이 있고, 평온이 있고, 사견이 없고, 자극이 있는 마음입니다.
이상이 탐욕이 있는 마음 여덟 가지입니다. 이들 마음이 있을 때는 단지 이들 마음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 마음을 없애려고 하거나 다른 마음을 바라서도 안 되고,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음에 “탐욕이 없는 마음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탐욕이 있을 때도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지만 없을 때도 없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탐욕이 없을 때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시 탐욕이 있는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좋은 것이나 좋지 않은 것이나 모두 똑같이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여기서 탐욕이 없는 마음이란 세간에서의 유익하고 선한 마음이며 무엇이라고 확정할 수 없는 무기(無記)의 마음입니다. 일반적으로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할 때는 지혜가 나서 탐욕이 없는 출세간의 마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했을 때는 출세간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 단지 탐욕이 없는 마음입니다. 이때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탐욕이 없는 마음은 선한 마음일 뿐이지 이 상태가 출세간의 경지에 있는 마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탐욕이 없는 마음이 열반을 성취한 마음은 아닙니다. 탐욕이 없는 마음뿐만 아니라 성냄이 없는 마음이나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도 이와 똑같이 적용됩니다.
탐욕이 있는 마음이 있을 때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탐욕이 있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다시 탐욕이 있는 마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성냄이 있는 마음을 성냄이 있는 마음이라고 안다. 성냄이 없는 마음을 성냄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입니다. 이들 마음이 있을 때는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 마음을 없애려고 하거나 다른 마음을 바라서는 안 되고,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성냄이 있는 마음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성냄이 있고 불만족이 있고 반감이 있고 자극이 없는 마음입니다. 둘째, 성냄이 있고 불만족이 있고 반감이 있고 자극이 있는 마음입니다. 이상 두 가지의 성냄이 있는 마음이 있을 때는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성냄이 있는 마음에는 성냄과 함께 항상 불만족과 반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극이 있는가, 없는가가 다릅니다.
여기서 자극은 외부로부터 유발된 것인가, 아니면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인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성냄이 없는 마음을 성냄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입니다. 성냄이 있을 때도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지만, 역시 없을 때도 없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성냄이 없을 때 성냄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시 성냄이 있는 마음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성냄이 없는 마음이란 세간의 유익하고 선한 마음을 뜻하며, 확정이 안 된 무기의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냄이 없다고 해서 출세간의 마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때는 단지 성냄이 있다가 성냄이 없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때 성냄을 진심(瞋心)이라고 말합니다. 진심은 참 진(眞)이 아니고, 눈 부릅뜰 진(瞋)이라고 해서 화를 내는 마음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이라고 안다.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입니다. 이들 마음이 있을 때는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 마음을 없애려고 하거나 다른 마음을 바라서는 안 되고,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어리석음이 있고 평온이 있고 의심이 있는 마음입니다. 둘째, 어리석음이 있고 평온이 있고 들뜸이 있는 마음입니다. 이상 두 가지의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 순간 어리석지 않은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리석은 마음에는 항상 평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평온은 지혜가 있는 평온이 아닙니다. 그리고 의심이 있거나 들뜸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마음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의심과 들뜸이 있을 때 어리석은 마음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리석음은 모든 해로운 마음에 들어 있습니다.
다음에는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입니다. 역시 어리석음이 있을 때도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지만 없을 때도 없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어리석음이 없을 때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시 어리석은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란 세간의 유익하고 선한 마음을 뜻하며 확정이 안 된 무기의 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이 없다고 해서 출세간의 마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어리석음이 있다가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일 뿐입니다.
네 번째는 “위축된 마음을 위축된 마음이라고 안다. 산만한 마음을 산만한 마음이라고 안다”입니다. 이들 마음이 있을 때는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 마음을 없애려고 하거나 다른 마음을 바라서는 안 되고,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축된 마음은 다섯 가지 장애 중에서 세 번째인 해태와 혼침에 빠진 마음입니다. 마음이 일을 하는데 일하는 마음이 위축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게으름과 졸음이 올 때는 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산만한 마음은 다섯 가지 장애 중에서 네 번째인 들뜸과 후회를 말합니다. 들뜬 상태에서는 대상을 겨냥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들떠 있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커진 마음을 커진 마음이라고 안다. 커지지 않은 마음을 커지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입니다. 이들 마음이 있을 때는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 마음을 없애려고 하거나 다른 마음을 바라서는 안 되고,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커진 마음은 선정수행을 해서 높은 두 개의 정신세계를 가진 마음입니다. 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수행을 해서 이른 마음이 바로 커진 마음입니다. 커진 마음이라는 것이 높은 세계의 마음을 뜻하지만, 실제로 선정수행을 하면 대상과 하나가 되어 확장되는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대상과 아는 마음밖에 없는 집중을 합니다. 이 상태가 바로 커진 마음입니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대심(大心)이라고도 합니다. 커지지 않은 마음은 욕계의 마음입니다. 욕계의 마음은 감각적 욕망이 지배하기 때문에 선정수행을 하지 않아서 커진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여섯 번째는 “더 향상될 수 있는 마음을 더 향상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안다. 더 향상될 수 없는 마음을 더 향상될 수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입니다. 이들 마음이 있을 때는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 마음을 없애려고 하거나 다른 마음을 바라서는 안 되고,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더 향상될 수 있는 마음은 욕계의 마음과 색계의 마음입니다. 더 향상될 수 없는 마음은 무색계의 마음입니다. 이는 무색계가 가장 높은 세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윤회하는 세계에서는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가 가장 높은 정신적 수준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의 수명이 끝나면 다시 태어나서 어디에 떨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어둠 속에서 기약 없이 괴로움을 겪어야만 합니다. 무색계의 생명이라고 해도 존재하는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겪는 고통은 다른 생명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도과를 성취하면 존재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는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이라고 안다. 집중되지 않은 마음을 집중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입니다. 이들 마음이 있을 때는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 마음을 없애려고 하거나 다른 마음을 바라서는 안 되고, 오직 있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집중된 마음은 근본집중과 근접집중, 두 가지입니다. 집중이 되지 않은 마음은 근본집중과 근접집중이 되지 않은 마음입니다. 집중은 고요한 마음이 생긴 뒤에 오는 집중을 말합니다. 고요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리는 것은 계율을 지키는 것이라서 계(戒)가 수반됩니다. 이 상태에서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 정(定)이 생기고, 이러한 정의 상태에서 지혜가 생깁니다. 그래서 집중된 마음이란 계정혜 삼학에서 정(定)을 의미합니다.
이때의 집중은 선정수행의 집중입니다. 그래서 대상과 하나가 되기 위해 관념을 대상으로 합니다. 처음에 대상을 겨냥하는 근접집중을 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아직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 뒤에 집중을 지속하면 대상과 하나가 되는 근본집중을 하게 됩니다. 대상과 하나가 되는 선정수행의 근본집중은 번뇌를 강력하게 억누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통찰지혜가 없기 때문에 억누를 때만 집중의 효과가 있고, 번뇌를 완전하게 불태우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윤회를 해야 합니다.
집중이 되지 않은 마음일 때는 집중이 되지 않은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집중이 되지 않은 마음을 알아차려야 다음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집중이 되지 않은 마음을 모르고서는 집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덟 번째는 “자유로워진 마음을 자유로워진 마음이라고 안다.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을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입니다. 이들 마음이 있을 때는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 마음을 없애려고 하거나 다른 마음을 바라서는 안 되고, 오직 있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유로워진 마음은 해탈의 마음입니다. 자유로워진 마음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반대되는 것으로 대치함으로써 생긴 자유로워진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상을 억압함으로써 생긴 자유로워진 마음이 있습니다. 이때의 자유로움은 순간적이거나 일시적인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을 성취한 자유는 아닙니다.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은 이들 두 가지가 없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때의 자유는 출세간의 해탈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근절의 해탈과 편안하게 가라앉음의 해탈과 벗어남의 해탈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마음은 여덟 가지를 두 가지씩으로 분류한 열여섯 가지의 마음입니다. 이 중 어느 상태에서 어떤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마음을 일어난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서 고요함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의 마음도 알아차려서 상대를 헤아려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과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려서 서로 헤아려 주어야 합니다.
이때 일어난 현상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기 때문에 나타난 대상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면 있는 마음은 사라지고 새로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사라졌으면 다시 사라진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언젠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무상을 아는 지혜입니다.
수행의 과정이 처음부터 완전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씩 단계적으로 수행을 해야 합니다. 경전의 가르침은 전체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수행자는 자기에게 맞는 단계적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수행자들의 근기는 저마다 모두 다릅니다. 사람마다 수행을 하고자 하는 의지나 수행하는 방법이나 수행을 해서 얻는 결과도 모두 다릅니다. 그러므로 남을 의식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마음을 알아차리기에 적합한 근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집중력이 있어야 합니다.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기도 어려운데, 보이지 않는 마음을 대상으로 하기는 힘들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먼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충실히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지도 받아야 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어려운 것은 단지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하는데 그 마음을 본 적이 없어서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일하고 있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느껴야 하며, 그 느끼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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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_()_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