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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코스:교동면사무소-연산군유배지-화개사-화개산 정상- 대룡시장- 교동읍성- 월선포 선착장
산행시간: 3시간
준 비 물 : 간식,식수,스틱,안면마스크,장갑,보온옷
교통비 : 30,000원
출발지 및 출발시간 : 교하중앙공원 07:00 정시출발합니다.
산행후 전류리 포구 에서 점심으로 맛있는 회와 매운탕 준비합니다,
*시산제산행에는 점심 제공하오니
점심 가져 오지마시고 간식을 지참하시어 허기를 면해주십시요,
*버스탑승지점
교하 출발 07시00분
7시:10분~해솔마을 4단지 버스정류장
7시:15분~한라1차 버스정류장
7시:25분:~주엽역
7시:30분~호수공원 3주차장
* 안전 산행 관련 안내 *
1) 심장병,및 고혈압,저혈압 환자는 가급적 산행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2) 교하산악회는 비영리산악회로서 각종 안전사고 발생시 산악회 차원에서의
책임과의무가없으며산행시일어난사고는 전적으로 사고자 본인의 책임입니다
3) 공지자(교하산악회)는 산행안내자일뿐 사고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습니다
산행에 참가한다는 것은 상기 1~3 사항에
동의 한것으로 간주하고 참가 자격을 부여합니다,
*지켜야 할 사항*
* 안전은 각자 본인 책임이며 불의의 사고의 대한 어떠한 법적 책임이 없음을 알립니다.
* 산행신청은 먼저 하시고 취소시에는 올리신글을 삭제 하지마시고 취소글을 올려 주세요.
* 약속시간은 서로가 소중하오니 잘 지켜 주시고 약속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 해 주세요.
* 산행중 개인 개별 행동은 서로가 불편 하므로 절대 개인 행동은 하지 말아 주십시요.
* 산행중에는 산행대장 앞지르지 마시고 산행대장의 지시에 협조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음주-가무 관련 안내*
*교하 산악회는 회칙의 우선 순위가 음주가무가 없는
산악회인 점을 고려하여 술 지참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산악회에서 제공되는 소량수준의 술만 허용되는
산악회의 회칙 준수에 협조 바랍니다,
*공지자 : 카페지기 하느리
※. 현지 사정 및 교통량에 따라 예상 시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산후 뒷풀이 식당에서 맛잇는 음식 제공하니 많은 참석기대합니다~~~
산행문의:총무 010-6410-7842
육안으로 보이는 거리는 결코 멀지 않지만 마음으로 짚어보는 거리는 너무도 멀고먼 교동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하는 교동도는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으로 서해안에 자리하고 있다.
교동도의 동남은 양사면, 삼산면, 서도면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으로는 불과 3km 내외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북한과 군사분계선을 이르고 있어 황해도 연백군이 눈앞에 보인다. 도서라고는 하지만 비교적 평야가 많으며 해안선은 평탄한 편이고 해저는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다
교동의 원래 이름은 대운도(戴雲島)이다.고림(高林)또는 달을신(達乙新) 이라고도 불렀으나,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縣)을 두어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하고, 신라 경덕왕때 교동현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주민들의 주업이 농사일 만큼 넓디넓은 평야를 품고 있다. 농사짓던 사람들이 더 벌이가 좋은 일을 찾아 하나둘 도시로 떠나면서 이제 교동도는 한적한 섬이 됐다.
강화교동대교
▲ 총연장 3.44㎞의 강화교동대교 ⓒ 2014 한국의산천
차량과 이륜차량, 자전거는 출입증 발급후 교량 통행이 가능하지만 도보로 걸어 갈수는 없습니다.
강화 교동대교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간의 연륙교로 강화도와 교동도간 연결다리이다. 이 대교는 총연장 3.44㎞로 총 904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되어 2014년 7월 1일 정식 개통되었습니다
이제는 다리를 타고 건너가는 섬 교동도. 빠르고 편리한 반면에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아수라 백작의 양면성이 떠오릅니다
▲ 지금은 폐쇄된 월선포 선착장에서 바라 본 교동대교 ⓒ 2014 한국의산천
건널때는 몰랐는데 엄청나게 길게 보이는 다리입니다
2014년 7월 1일 : 정식 개통되었다
▲ 2014년 6월 20일 날 개통된 강화 18번 군내버스 ⓒ 2014 한국의산천
※ 교동 주민이 아닌 외부지역 방문객은 필히 주민증 또는 신분증을 지참하셔야 합니다.
현재 교동대교 개통에따라 지역,관광객 편의를위해 강화버스터미널에서 교동대교를 넘어서 교동도까지 운행되는 버스노선 18번이 신설되었습니다.
강화 터미널에서 출발하며 교동도 내를 돌고 돌아서 월선포가 종점입니다 : 현금 1,300원(교통카드 1,100원) 월선포까지의 소요시간은 약 5~60분
교동대교는 민간인통제구역에 위치하고 있어, 출입시 군 초병의 검문에 적극 협조 해주셔야 합니다.
교동대교 입구 검문소에서 정차하면 초병이 버스에 탑승하여 교동도 주민과 외지인을 구분하여 검문하데, 이 때 외지인은 신분증을 맡기면 임시방문증을 교부받게 됩니다. 임시방문증은 다시 버스를 타고 강화도 본도로 돌아오실 때 검문소에 반납하고, 그 때 신분증을 돌려받으시면 됩니다.
대교를 건너서 바다건너 보이는 산 능선이 북한의 황해도 지역입니다. 대교를 건너서 직진방향으로 고구저수지를 지나면 대룡시장이 나옵니다.
옛 추억 깨워주는 대룡시장
교동도에서 먼저 찾은 곳은 가장 번화하다는 대룡시장입니다. 막상 대룡시장에 가보니 '번화하다'라는 단어가 쑥스러울 정도로 한가했습니다. 시장은 조용하고 시간이 멈춘듯 6~70년대의 풍경이 그대로 멈춰있는 느낌입니다. 300m 남짓한 골목길은 사진찍는 여행자들의 발길만이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또한 대룡시장입구에는 교동초등학교가 있으며 광무10년(1906년)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합니다.
▲ 몇해전에 방문해서 이발관에서 커피도 한잔하고 나온 기억이 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한국에서 열네 번째로 큰 섬이지만 교동도는 민통선 안쪽 지역이라 최근까지도 주민이외에는 출입이 어려웠다. 그렇기에 개발도 더뎠고, 바깥바람도 덜 탔다.
그렇기에 6~70년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곳은 외지인이 즐겨찾는곳이 되었다
▲ 변화가 심한 요즘에 이렇게 50년 넘게 제 자리를 지켜온 가게들이 또 있을까 ⓒ 2014 한국의산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 있는곳 시간이 머물러 있는 섬 교동도. 대룡시장
▲ 대룡시장내의 오래된 건물들은 예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어두운 방에서 도장을 파고 계시는 할아버지 ⓒ 2014 한국의산천
귀가 어두우신 할아버지께 사진 한장 찍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촬영하였습니다
▲ 교동대교 개통으로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이 붐빌듯한 교동도 ⓒ 2014 한국의산천
연산군 유배지 둘러보기
교동도는 조선시대부터 왕족의 유배지로 유명했다.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을 시작으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그 중 꼭 집고 넘어갈 인물이 바로 조선왕조의 풍운아 연산군이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은 바로 교동으로 유배돼 2달만에 사망했다. 교동의 역사발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유배지가 교동 어디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봉소리의 신골, 고구리의 연산골, 읍내리 세곳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전남의 해남지역이 선비들의 유배지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에서 패한 인물은 한양에서 먼 곳으로 보내졌지만 왕권에 치명적일 수 있는 왕족 등 거물은 가까우면서도 완전히 격리된 곳에서 늘 동정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하루, 이틀 거리인 교동도는 해안과 가깝지만 급한 조류로 접근이 쉽지 않아 유배지로서 최적의 땅이다.
읍내리의 부근당에는 일반 당집에 어울리지 않는 관복 등을 갖춰 입은 부부그림이 걸려있다.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로 추정된다. 마을주민들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서 매년 굿을 한다고 한다.
부근당 인근에는 '강화도령' 철종이 잠시 머물렀다는 철종 잠저소가 있다. 철종이 왕이 되기 전인 13세때 먼 친척이 모함으로 피살되자 두려움으로 이곳으로 피신해 석달을 지냈다고 한다. 집터와 우물이 남아있다.
대룡시장쪽에서 오르는 화개산 들머리는 교동면사무소 뒤 대촌마을이다. 마을 안 수령 500여 년이 되는 느티나무 보호수를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대촌마을 마지막 집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길은 잘 정비되어 있어 정상까지 무리없이 오를 수 있다.
등산로 초입에는 삼림욕 하기에 좋은 숲이 있어 산행의 묘미를 더한다. 정상까지는 1시간이면 오를 수 있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50m 떨어진 봉우리는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봉수대가 있다.
▲ 연산군 유배지 가는 길 ⓒ 2014 한국의산천
연산군
조선조 제10대 왕이며, 1476년 성종과 숙의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융. 그는 태어난 해에 어머니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자 연산군에 봉해졌으며, 1479년 윤씨가 폐출된 후 5년 만인 1483년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그는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19세의 나이로 왕에 등극했는데, 곧 20세가 되므로 섭정을 받지 않고 즉위하자마자 직접 왕권을 행사했다. 초기 4년은 그런대로 선정을 베풀었으나, 무오년과 갑자년 두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포악한 정치를 일삼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연산군으로 강등된 그는 강화도의 교동에 유배된 지 2개월 만에 전염병으로 죽었다. 재위 기간은 12년이었으며, 죽을 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연산군 燕山君 1476(성종 7)~1506(중종 1). 조선의 제10대 왕(1494~1506 재위).
연산군은 부왕 성종이 죽은 해인 1494년 12월 19세의 나이로 조선 제10대 왕으로 등극했다. 초기 4년 동안 그는 비교적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1498년 김종직을 필두로 한 사림파와 훈구세력들의 대립으로 인한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연산군의 포악한 정치는 시작되었다. 재위 8년째인 1502년에는 장록수에게 빠져 방탕한 세월을 보냈으며, 간신 임사홍은 그런 행태를 더욱 부추겼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504년에는 폐비 윤씨 사건이 밝혀지면서 갑자사화가 일어나 다시 한번 피바람을 불러왔는데, 이 두 차례의 사화로 조정의 쓸 만한 인재들은 거의 처단되거나 숨어버렸다.
친어머니인 폐비 윤씨 사건 진상을 알고 성질이 광포해진 연산군은 자신을 비판하는 신하들을 귀양 보내거나 무참하게 죽였으며, 홍문관과 사간원을 혁파하고 사헌부의 언로 기능을 없애버렸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신하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라는 패쪽을 차고 다니게 하여 말조심을 하도록 억압했다. 또한 자신을 비난하는 글이 국문으로 씌어져 나돈다고 하여, 국문을 배우지 못하게 하고 국문서적을 불사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전까지 도성 밖 10리를 한계로 삼았던 금표(禁標)를 100리 밖으로 늘려 그 안에 살던 주민들을 철거시킨 뒤 자신의 사냥터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연산군은 장록수 외에도 수많은 후궁을 거느렸으며, 전국 양가의 여자들까지 뽑아 올려 노리개로 삼은 미녀가 거의 1만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뽑은 미녀들을 ‘흥청악(興淸樂)’이라 했는데, 그는 이 흥청들과 매일 금표 안에서 사냥을 하거나 술과 춤, 노래로 질탕한 유희를 즐겼다. 후일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난 것도 그러한 유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특히 연산군은 자신의 백모이기도 한 월산대군의 아내 박씨에게 ‘승평부대부인’이라는 호를 주고 사사롭게 가까이 했는데, 두 사람 사이의 아이가 잉태한 박씨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나돌기도 했다. 이에 화가 난 박씨의 남동생 박원종이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위시키면서, 그의 12년 왕권은 막을 내렸다.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은 31세에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유배 생활 2개월 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연산군이 죽자 왕자의 예로 현지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며, 나중에 경기도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했다.
▲ 화개산 기슭에 자리한 연산군 유배지 ⓒ 2014 한국의산천
위리안치(圍籬安置) :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
▲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연산군 금표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8호 ⓒ 2014 한국의산천
연산군시대 금표비는 1995년 금천군 묘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굴되어 문화재자료 제 88호로 지정되었다. 연산군은 서울 주변 지역을 왕의 사냥터, 유흥지로 지정하면서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금표비를 세웠는데, <연산군 일기>에는 기록이 보이나 실제 연산군의 금표비가 발굴된 곳은 고양시 대자동이 유일하다. 따라서 연산군 금표비를 통해 교과서에서만 접하던 조선 전기의 역동적인 역사 전개 과정과 정치 상황을 생동감있게 이해할 수 있다.
연산군 시대에 만들어진 이 비는, 연산군의 유흥지인 고양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하여 세운 금표비로 무단으로 들어올 경우 처벌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연산군은 1494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왕으로 있으면서 성균관 유생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전국의 기생들을 불러모아 유흥장을 차리고,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도 마굿간으로 바꾸고, 민간인이 한글로 연산군의 행동을 문제삼는 글을 올리자 이를 계기로 한글의 사용을 엄금한 일 등을 저질렀다. 이러한 일로 결국 중종반정으로 임금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후 강화도 교동(喬桐)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세상을 떠났다.
▲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자리하고 있는 연산군시대 금표비 ⓒ 2014 한국의산천
일망무제의 화개산
▲ 화계약수 ⓒ 2014한국의산천
▲ 약수에는 새 두마리가 물을 튀기며 목욕을 하기에 가까이 가지않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정상 아래쪽으로는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화개산에는 내,외성이 있었으나 내성만 터가 남아있고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은둔의 땅 교동도
화개산(華蓋山)은 교동면 읍내리, 상룡리, 고구리, 대룡리에 걸쳐있는 교동의 최고봉으로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어 동쪽으로 하음산성, 남쪽으로 망산봉수에 응하였다고 전한다.
▲ 산 아래 남쪽으로는 교동읍성이 있는 마을이 보인다 ⓒ 2014 한국의산천
▲ 정상 바로 아래 남쪽으로 교동향교가 손에 잡힐듯 보인다 ⓒ 2014 한국의산천
교동향교
고려 충렬왕 때 안유(안향, 1243∼1306)선생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이 향교에 봉안하였다고 전하며, 이 후 각 고을에 향교가 생겼다고 한다.
원래 화개산 북록에 있던 것을 조선 영조때 남록으로 옮겼으며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과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유현을 배향하고 있다. 매달 음력 초하루, 보름에는 전교, 유림들이 모여 분향을 하며 교동향교 왼편의 약수가 있는데 마시면 학문에 더욱 정진케 된다는 말이 있다.
교동향교는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가장 최초로 창건된 유서깊은 곳이다. 최초 창건은 1127년(인종 5)으로 이때는 화개산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후 1286년(충렬왕 12)에는 고려 유학제거(儒學提擧)로 있던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원나라에서 공자상(孔子像)을 들여와 봉안하였다. 그후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 등을 중국에 보내어 성철(聖哲)화상 10점과 제기(祭器) 등을 구해오게 했는데, 이때 서해로부터 귀환하면서 교동에 기착하여 문묘에 봉안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써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가장 먼저 공자와 제자들의 화상(畵像)을 봉안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경도와 각읍에 문묘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정리된 교동도의 평야 ⓒ 2014 한국의산천
▲ 바다처럼 넓은 고구저수지와 그 너머로 보이는 북한땅 황해도 ⓒ 2014 한국의산천
교동의 북쪽 해안 청주뻘에서는 숭어가 많이 잡혔습니다. 숭어는 임금님 상에 올라가는 공물로 지정될 정도로 맛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해방되기 전에 교동 사람들의 활동 무대는 강화도가 아니라 황해도 연백이었습니다. 교동에서 연백의 거리는 겨우 3Km에 불과합니다. 교동 사람들은 연백 장을 보러 다녔다고 합니다
남산포구 교동읍성 월선포 선착장
▲ 비릿한 갯내음과 함께 밀물이 들고 있는 남산포구 ⓒ 2014 한국의산천
▲ 교동읍성 ⓒ 2014 한국의산천
교동읍성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7년(1629)에 세웠으며 둘레는 430m, 높이는 약 6m이며 동, 남, 북 세곳에 성문을 설치하였습니다. 각 문에는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그리고 북문은 공북루하 하였습니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치 않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에 무너져 현재는 홍예만 남아있습니다.
1753년(영조 29)에 통어사 백동원(白東?)이 치첩(雉堞)을 수축하였고, 1764년에 방어사 백낙윤(白樂倫)이 남문(庾亮樓)을 중건하였으나 동문(統三樓)과 북문(拱北樓)은 수축하지 못하였으며, 남문 앞의 해자도 역시 메워 버렸다.32) 규모는 둘레가 4정 26칸 4척이고 높이는 18척이다.33) 동, 서, 북문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으며, 남문만이 현존하고 있다. 내부에는 조선시대 수영터를 확인할 수 있다.
▲ 좌측 측벽에 '南樓(남루)'와 '三道統門 (삼도통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즉 이곳이 남문이며 삼도통문이라 교동에는 3도 즉 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 통어영이 있었다는 뜻을 추측케해준다.
▲ 돌 하나에 이쪽 저쪽으로 '남루'와 '삼도통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저있다 ⓒ 2014 한국의산천
▲ 절묘하게 돌을 짜맟추어 홍예를 이루는 성문 ⓒ 2014 한국의산천
▲ 교동도의 관문 역할을 했었던 월선포 선착장.
창후리와 교동도의 월선포를 연결해주던 페리호는 보이지 않고 페리의 매표소와 대합실 겸용으로 사용하던 건물은 굳게 닫혀있습니다. 선착장 주차장에는 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온 여행자들의 주차장이 되고 있습니다
▲ 월선포에서 바라 본 교동대교 ⓒ 2014 한국의산천
예전에는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유배의 섬 교동도.
가시적 거리로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교동도는 아직도 민통선(민간인 통제선)안에 있는 섬이기 때문이다.
▲ 월선포 선착장에서 200mm망원으로 촬영 ⓒ 2014 한국의산천
교동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 강화도 검문소에 도착하면 해병대 초병이 탑승하여 '교동지역 임시출입증'을 반납 하고, 들어가기 전에 제시했던 신분증을 되돌려 줍니다.
이제는 교동도에 연륙교가 놓이게 되어서 민통선이라는 제약은 있지만 그래도 부담없이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 변화하였습니다. 한때 중국과 고려를 이어주던 다리였고, 또 한때는 조선 삼도수군의 심장부였던 교동은 이제 교동대교의 개통으로 인하여 다시금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