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과 학익진(1592년(선조 25) 7월 8일)
왜군은 임진왜란 발생 후 해상에서 제1차, 제2차 해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약이 오를 때로 오른 적장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80여척의 배를 이끌고 견내량에 집결한다. 이 정보를 탐지한 이순신 장군은 몇 척의 배로 왜선을 유인하여 한산도 앞바다에 이른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이 펼친 해상전술은 학익진이다.
이 학익진은 육전에서는 대형을 횡렬로 형성하는 일자진의 형태이다. 해전에서는 단순한 학익진보다는 초승달 형태의 어린학익진(魚鱗鶴翼陣)을 쓰게 되어 있고, 실제로도 이순신은 어린학익진을 사용했다. 다만 그 진법이 학익진과 비슷하므로 모든 사료에서 학익진으로 표기한 것 같다. 어린학익진은 물고기의 비늘이 벌려진 것 같은 대형과, 학이 날개를 편 모양과 같은 진형을 말한다. 어린은 물고기 비늘처럼 잇대어 있는 진형이며, 이를 첨자찰(尖字札)이라고도 한다.
왜선은 학의 날개와 같은 진형 안에 갇혀 47척이 격침, 12척이 나포되었으며 수많이 왜병이 실종되거나 익사했다.
한산대첩 행사는 원래 7월8일에 해야 하나 학생 동원이나 관광객 유치면에서 적합하지 못하여 8월15일에 실시하는데 그 의의가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올해 실시한 한산대첩 행사는 역사적인 사료에 근거를 두었으나 실제 전투장면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좀 더 연구하시길---.
전투개요: 견내량에 집결한 왜군들을 유인하기 위해 왜군있는 곳에 접근하였다가 퇴각하는 모습
이순신 장군의 전략에 빠져 맹렬히 추격하는 왜선
조선수군이 펼친 학익진에 갇힌 왜군
거북선이 선두에서 돌진하고 나머지 함선들이 학익진을 펴고 일시에 돌진한다.
진격! 이라는 소리와 함께 조선수군의 함포(총통)사격이 시작되고 좌우사방에서 돌진한다.
왜군은 우왕좌왕하다 80여척의 전투함 중 47척은 격침되고 12척은 나포되되고 겨우 몇척만 도망을 갔다. 수구부장 마나베나는 40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한산도에 상육했으나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살했으며, 적장 와카사카 야스하루는 김해로 도망갔다.
한산대첩에서 승리한 우리수군은 함성을 지르고 축포를 쏘며 승리를 만킥했다.
문헌에 기록된 학익진
첫댓글 한산대첩 승전일이 음력 7월8일이므로 양력으로는 8월14일입니다. 8월14일 승전일이 포함된 주간의 일요일까지 축제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산대첩 재현>은 직장인들을 위해 토요일 저녁에 하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