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단체 : 법주사(法住寺)
법명 : 태전(太田)
속명 : 정태선(鄭太先)
호 : 금오(金烏)
*금오 태전(金烏太田, 1896∼1968) 스님은 법주사의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다. 나아가 한국불교의 오늘이 있기까지 스님이 이룩한 업적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스님은 1896년 7월 23일 전라남도 강진에서 동래 정씨로 태어났다. 속명은 태선(太先), 호는 금오, 그리고 이름이 태전이다.
어려서 서당 교육을 받았지만 뜻이 다른 데 있어 공부에는 열성이 없었다. 스님이 태어났던 시기는 한국근대사에 있어 격동의 연속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과 갑오경장의 개혁으로 온 나라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민초들의 함성으로 들끓었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 억압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반봉건체제 하에서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 야욕은 조선의 주체성을 말살시키고 있었다. 스님은 이러한 때 유년 시절을 보내며 일찍부터 불도의 길에 뜻을 두고 있었다.
1912년 3월 마침내 스님은 15세로 금강산 마하연사에 출가하여 도암 긍현(道庵亘玄)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안변 석왕사 등지에서 불교의 기초교육을 습득하고 1921년에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화두를 들고 참선 수행하였다. 이해 8월에는 통도사에서 일봉(一峰) 율사를 계사(戒師)로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남달리 참선수행에 정진하였다.
그 뒤 수 년 간 통도사 보광선원과 천성사 미타암 등지에서 수행하다가 충청남도 예산 보덕사의 보월(寶月) 선사의 명성을 듣고 찾아 갔다. 그러나 보월 선사는 스님의 그릇됨을 보기 위해 쉽게 제자로 거두어 주지 않았다. 그러자 금오 스님은, “시방세계를 투철히 오르니 없고 없다는 것 또한 없구나. 하나하나가 모두 그러하기에 아무리 뿌리를 찾아 보아도 역시 없고 없을 뿐이네.” 라는 오도송을 올리자 그제야 제자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건당식(建幢式)을 치루지 못한 채 보월 선사가 1924년에 입적하고 말았다. 이듬해 보월 선사의 스승인 만공(滿空) 선사에게서 건당식을 받고 전법계까지 수지하였다.
스님의 수행은 계속되었다. 10여 년 간 각지의 선방을 유력하였고, 심지어는 하심(下心)을 기르기 위해 2년씩이나 거지생활도 하였다. 1935년에는 경상북도 김천 직지사의 조실을 지냈고, 이후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 지리산 칠불사, 서울 선학원 등에서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스님은 항상 제자들에게, “불법을 얻기 위해서는 목숨마저도 아깝지 않는 정신으로 임해야 한다.”며 투철한 수행자세를 강조하였고, 스스로 그런 자세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출가자의 모범적 자세가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어 1954년에는 불교정화를 위한 전국비구승대회의 추진위원장이 되었다. 당시 스님은, “정화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의 불량한 때를 씻어 버리는 것이 정화요, 몸의 일체비행을 고치는 것이 정화이다.” 라고 하여 대처승을 축출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1955년 대한불교조계종 부종정, 이듬해 서울 봉은사 주지, 1957년 구례 화엄사 주지, 그리고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다.
스님이 법주사에 주석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으로서 당시 일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젊은 수좌들에게 열정적으로 불도를 가르쳤다. 이듬해 1968년 10월 8일 ‘무념으로써 종을 삼는다(無念爲宗).’는 말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1975년 법주사에 스님의 부도와 비를 세웠다.
세수 73세, 법랍 57년을 살다간 스님의 생애는 한국불교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스님은 “참선을 하지 않는 납자는 승려 자격이 없다.”고 할 정도로 선수행에 몰입하였다.
스님의 선풍(禪風)은 한국 정통선을 계승하였고, 다시 제자들에게 전해져 오늘날 조계종을 이끌어 가는 주역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제자로는 불국선원의 조실인 월산(月山) 스님을 비롯해서 월주(月珠) 스님, 월탄(月誕) 스님 등 수십 명에 달한다. 이 분들에게서 다시 법을 이은 손상좌까지 포함하면 무려 600여 명이 넘는다고 하니, 스님이 일군 한국불교의 튼튼한 뿌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꽃을 피워나갈 것이다.
*경기도 의왕시 백운사 관련:"백운사는 다소 협소한 사찰 규모를 가지고 있지만 금오 스님이라는 고승이 주석함으로써 근현대 한국 불교사에서 크게 주목받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러면 금오 스님의 행장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스님은 동래 정씨로, 속명은 태선(太先)이었으며 1896년 전남 강진에서 탄생하였다. 호는 금오(金烏)였고 부친은 용보(用甫), 모친은 조씨(趙氏)이다. 어릴 때부터 유서(儒書)를 공부하던 스님은 1912년 3월 금강산 마하연사(摩訶衍寺)로 출가하여 도암선사(道庵禪師)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스님은 화두를 잡고 정진하다가 석왕사 내원암(內院庵)으로 옮겨 계속 수행에 전념하였다. 192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안거하다가, 같은해 8월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일봉율사(一峰律師)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통도사 보광선원과 천성산 미타암 등에서 정진하다가 1923년 3월 예산 보덕사의 보월선사(寶月禪師)를 찾아가 오도송(悟道頌)을 올리고 인가를 받았다. 보월 스님을 극진하게 모시고 있던 스님은 미처 건당식(建幢式)도 치르지 못한 상태에서 1924년 보월 스님이 입적하자, 그 다음해에 보월 스님의 스승인 만공선사(滿空禪師)가 건당식을 베풀어 주고 전법게를 주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전국 각지를 돌면서 수행에 얽힌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태안 안면도 백사장에서 몇 분의 승려를 데리고 걸식하며 고행한 일, 하심(下心)을 기르기 위하여 2년 동안 거지생활을 한 일, 만주의 수월선사(水月禪師)를 찾아가 1년 동안 함께 수행한 일 등은 오늘날까지도 수행자의 귀감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1935년 김천 직지사 선원의 조실로 있으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던 스님은 이후 석왕사·망월사·칠불선원·선학원 등의 조실 및 회주(會主)로 있으면서 선풍을 선양하였다. 1954년 불교계 정화운동에 앞장서 헌신하였으며, 1955년 조계종 부종정, 1956년 봉은사 주지, 1957년 화엄사 주지, 1958년 조계종 총무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만년에 전국의 여러 선원을 돌아다니며 선풍을 떨치고 중생제도에 힘 쏟았던 스님은 1967년 법주사 주지로 있다가 1968년 “무로써 종을 삼는다(無念爲宗)”는 말을 남기고 나이 72세, 법랍 57세로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월산(月山)·범행(梵行)·월남(月南)·탄성(呑星)·혜정(慧淨)·월탄(月誕) 등 50여 명이 있으며, 저서로 《금오집(金烏集)》이 있다."(전통사찰총서3,백운사편,67~68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