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일기 南漢日記 / 삼전도의 치욕도 소중한 역사다. 되씹고 넘어가야한다



‘청나라 군대의 선봉장 용골대와 마부대 두 사람이 성 밖에 와서 임금의 출성을 독촉했다.
임금은 남색 옷에 백마를 탔다. 모든 의장(儀仗)을 다 버리고 수행원 50여 명만을 거느리고 서문을
나가니 세자가 뒤를 따랐다. 뒤따른 백관들은 서문에 서서 가슴을 치면서 통곡했다.’
377년 전, 1637년 그 해 1월30일,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가 1만3천여 명의 병사와 40일분의 양식으로
남한산성 속에서 청태종 홍타이치의 12만여 대군에 포위되어 항전한 지 45일이 되던 날의 일기다.
이 일기는 왕세자의 스승으로 인조와 지근의 거리에 있던 정지호(鄭之虎)가 쓴 남한일기(南漢日記)
중 한 부분이다.
한문으로 기록된 남한일기는 2006년 12월 30일 동래정씨 관수공파종친회(회장 정하성)에서
한글로 번역, 무은집(霧隱集. 1,076쪽) 속에 수록해 놓았다.
일기는 계속된다. ‘임금이 산을 내려와 가시를 깔고 앉았더니 조금 뒤에 갑옷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명이 달려왔다… (중략) …
임금은 삼정승과 판서, 승지 각 다섯 사람과 한림원(翰林院) 주서(注書) 각 한 사람,
세자는 시강원(侍講院) 익위사(翊衛司)의 관원들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로 나아갔다.’
삼전도에는 청나라 병사들이 수항단(受降檀)을 높이 쌓아 놓았고,
인조는 그 자리에서 청 태종 홍타이치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를 올렸다.
조선왕조 개국 246년, 임금이 적장 앞에 나가 머리를 조아린 일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나라가 패하면 치욕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라의 치욕이자 백성들의 지옥이었던 병자호란으로 60여만 명의 남녀가
만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무리 가슴 아픈 ‘치욕의 역사’라 하더라도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국가의 안보를 심각하게 생각토록 하는 곳, 남한산성에 올라 봅시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더 이상 병자호란 같은 치욕의 역사를 되씹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국민 모두가 힘을 모으고 합하여 자손만대가 편안한 터전 위에서 살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남한일기를 기록한 무은 정지호 청백리의 12대손 정하성 회장이 무은집 한 권을
건네주면서 친구이기도 한 필자에게 강조한 말이었다.
삼전도는 한강의 물길이 닿는 나루터로 1950년대까지 나룻배가 다녔으나 1970년 대
이후 한강개발로 사라졌다.
삼전도비(三田渡碑)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석촌호수 서호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는 병자호란때 승리한 청나라 태종의 요구로 1939년(인조17년) 12월에 세운
비석이다.
정식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였지만 1963년 문화재지정(사적 제101호) 당시,
삼전도의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로 바꾸었다. (위치 서울 송파구 잠실동 47).
www.sanchonmirak.com
첫댓글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거운 시간되시길 바람니다. 
우촌 선배님 ᆢ 언젠가 남한산성에서 삼전도까지 ᆢ당시 임금님께서 걸어가신 길 답사하신다 해서 저도 同行하고 싶다했더니 연락주신다더니 혼자? 다녀오신 모양 ᆢ 何如间 老益壮 ᆢ 대단하십니다
좋은 자료 잘 보았읍니다,,인조대왕의 결단과 당시 선조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운명은????////
오늘 다시 보았읍니다,아픈역사가 바로 튼튼한 나라를 만들고 지키는 힘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의 지식인은 역사 지식이 약한것 같아요 ? 차차 나아지리라 기대해야지요? 선배님 비석 세운해 년도가 오타로 생각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