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경가방에서
(오늘의 강사 김연범 안토니오 신부님은 2004년 양주 청소년 수련원에서 경가회 대림 피정을 지도해주신 구면이십니다. 1996년에 서품받으시고 방배동 명동 이태원성당에서 사목하시고 서강대에서 방송학을 공부하시고 성산동 성당에서 사목하시면서 평화방송의 “전례산책”에 출연하셨는데 지금도 재방되고 있다고 합니다. 작년에 “교황방한준비위원회”를 맡아 일하셨으며 현재는 교구통합사목연구소장을 역임하고 계시는데 서울대교구의 기획조정실장 같은 역할을 하고계시다고 합니다.)
<미사강론>
우리는 미사에서 무엇을 느껴야 하고 무엇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만일 어떤자동차가 20년 동안 모델을 바꾸지 않고 이름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왜 그런 것 일가요? 그 회사는 그 제품에 대하여 자신있고 인정받으며 원래모습을 유지하고 있어도 잘 팔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톨릭의 미사는 2000년동안 본질적 부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사성제 고유한 불변의 소중함 때문에 그러합니다. 미사전례의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중에서 미사후에 무엇이 내안에 남아있고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가?
구약에서는 하느님을 만나면 죽어야 하고 큰일나는일 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느님과 씨름하고도 죽지않았음에 기뻐하였고, 모세는 특별한 사명(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때문에 하느님을 대면하였습니다. 신약에서는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잠시 벙어리가 됩니다.
그런데 미사에서는 하느님을 만나는것이고 시간을 정해서 하느님이 만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가? 미사중에 하느님을 만나는 본질적인 부분보다 다른것에 더 마음쓰지 않는가? 그분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는가? 하느님 만남을 기뻐하고 있는가? 형식적으로 만나거나 못만나는 것이 아닌가? 왜 그런가?
사제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보여주는 것이 어렵고 신자들 편에서는 예수님이 돌잔치의 아기처럼 다른이들과의 대회에 열중하며 소외되시는건 아닌가? 일상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사는 것이 신앙에서 중요합니다. 미사전례때에 사용되는 단어중에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주님과 함께 주님존재를 깨우쳐 주기 때문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은 미사단어들이 최초의 의미로 회복되기를 원하셨다는데 하느님 현존과 함께 하심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미사의 감동을 강론 즉 말씀의 전례에 의지하기보다 성찬의 전례에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고해성사에서는 하느님과의 화해라는 은총을 중요시하지 않고 귀찮게 죄를 고백해 버린다는 요식행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 강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회법을 초월하여 하느님은총에 참여하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교황방문과 시복식이 스타같은 느낌이어서는 안되는데 다녀가셨어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각자가 안변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교회를 평가비판할 때 내가 교회라는 생각을 안합니다. 원죄는 하느님의 명을 거역한 교만과 불순명의 죄인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교만과 불순명을 언급안하시고 “사랑하라”고만 하십니다. 원죄와 사랑의 관계는 이러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께 불순종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그분의 말을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추궁에 하와 때문이라고 하며 아내를 감싸주지 않은 것은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인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죄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은 여기에 숨겨진 다른 계명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하였으나 죽지는 않았읍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의미는 하느님과의 관계와 사랑이 단절됨을 의미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서는 여성성이 보입니다. 세계인들이 교황님께 환호하는 부분은 권위를 지키기 보다 약자를 포함한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바티칸의 교황궁대신 마르타의 집에 거주하시며 겸손한 행보를 하시는 것입니다. 권위적이고 법대로 하고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이 남성성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번 미국을 방문하셨을 때 미국의 동성애 허용법에 반대하여 쫓겨난 공무원을 비밀리에 만나서 소신을 지킨 것을 격려하셨고, 제자였던 아르헨티나출신의 동성애자를 만나 위로하셨다고 합니다. 이중적인 격려였고 그래서 보수와 진보는 각자 교황님을 자기편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원칙에 따라 하나를 단죄하기보다 그 둘을 다 내 자식으로 사랑하고 인정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분의 모든 언행에서 기본은 사랑입니다. 빈자와 소외된자들도 사랑하고 위로하고 편들어 주시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은 혁신적이것이 아니고 과거의 모든 교황님들의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지만, 여성적인 사랑으로 모두를 감싸안습니다.
한국의 신자들은 기도, 미사, 봉사활동등의 신심생활에는 강하지만 그 신심을 삶으로 드러내는 신앙에서는 약합니다. 그러한 삶이 안 나오므로 신자수의 증가는 양적인 팽창일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인인가 신앙인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물신신앙에 침범당하고 있지 않았는지도 ...
경가회 회원들이 가톨릭 신자이면서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세상은 변하기 어렵습니다. 무엇인지를 아는사람이 그것을 살아줄 때 존경받으며 영향을 줄수 있습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실천함으로서 동사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것을 전해야 하는 의무감에서, 사랑이 동사가 되도록 ... 한사람이 바뀌면 세상은 조금이라도 바뀝니다. 내가 세상을 바꿀수는 없더라도 가장 가까운 가족... 배우자 자녀, 손자녀 일해주는사람들, 생활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 ... 자본주의 물신주의자로 남지말고 그리스도 주의로 살아가는 것 ...이렇게 하느님을 만나며 삶안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합니다. (외국의 경우에는 자신이 일생을 살아온 방법(know how)들을 어떻게 나누어 줄가를 노후대책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