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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스리랑카 이주민 센터를 운영하시는 현진스님
취재/전현자(한국주재기자)
하얀쉼터 개원식
스리랑카 대통령(중앙)과 함께
이번 호에 소개할 현진스님은 조계종 비구니스님으로 현재 대구에서 스리랑카 이주민 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젊은 학인 스님이다. 평소 스님과 인연이 있었고, 어려운 가운데 이주민을 돌보는 생활 속에서 고군분투 수행하는 모습을 미주현대불교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기자: 스님, 안녕하세요? 스리랑카에서 온 이주민을 위한 불사를 하게 된 이유는?
현진스님: 10여 년 전 아는 절에 스리랑카 노동자와 스님들이 상주하시고 계셨는데 그중 한 스님과 친분이 있어 저희 절에 잠시 머물러 계시기도 한 인연으로 처음 스리랑카를 방문하게 되었어요 먼나라 이름조차 생소하던 나라였는데 스리랑카스님과의 친분으로 시작 되었고 그 이후에도 몇 번의 방문이 있어 지금은 제 2의 고향과도 같은 나라입니다.
당시 사회복지학과를 전공하고 있었고 졸업이후에 어떤 일을 하면 좋을까, 스님으로써 중생들과 아픔을 같이 하고 싶은데 하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김해에 거주하던 스리랑카 노동자가 집으로 저를 공양 대접한다고 청하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조그만 집에서 부부가 같이 생활하며 일을 하고 있었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공양을 스님께 올려 맛있게 먹었습니다. 근데 벽에 근처 교회 달력이 걸려 있어 스리랑카는 불교국가이고 당신들도 불교도인데 왜 교회를 다니냐고 물어봤더니 뭔가의 도움이 필요하거나 어려움이 있으면 교회 목사님이나 교인들은 가까이 있어 도움을 받기 쉬운데 사찰에는 찾아가도 스님들 만나 뵙기 힘들고 나서서 도와주는 분들도 만나기 힘들다고 했다. 그런 불교단체도 많이 없어서 필요할 때만 교회를 간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많이 아프고 부끄러움이 일어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요. 돌아오는 내내 생각들이 많이 일어났으며 생활불교 하리라 원을 세웠던 승려로써 새로운 불교 실천불교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스리랑카와 인연이 있던 불자님 가운데 한 분이 대구에 건물을 가지고 있고 마침 3층, 4층이 비어 있는걸 알고 좋은 뜻으로 사용했으면 한다고 말하니, 당분간 임대료 없이 1년 후부터 임대료를 드린다는 조건으로 해달라고 해서 승낙을 받고 외국인 이주민노동자들의 쉼터와 법당을 열게 되었습니다.
기자: 스리랑카는 남방 테라와다불교 국가인데 대승불교 수행자인 스님께서 경험한 스리랑카 불교는 어떤지?
스님: 스리랑카를 많이 방문도 하고 친분이 있는 스님들도 많이 계시고 쉼터에 다녀가신 수없는 남방불교 스님들도 계시지만 우리나라 스님처럼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분, 정치를 하는 분, 포교를 목적으로 하는 분 등등 나누어져 있으며 사찰도 빈부의 격차가 심한 편이였습니다.
초기에 스리랑카의 여성 출가수행자(비구니는 아니지만 출가해서 10계를 지키며 수행하는 여성수행자들이 있다. 스님은 그분들을 비구니스님으로 부르고 있다. - 기자) 사찰을 몇 군데 도와 준적이 있었는데 비구스님이 거주하는 사찰은 공양물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선물들도 쌓이는데 비구니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라서 그러한지 비구니스님들은 형편이 너무 어려워 보였습니다.
법당 입구가 부식으로 갈라짐이 보여 수리비에 보태라고 조금의 돈을 보태드리고 다음해 방문 때 들렀더니 불사는 끝나있었지요. 사연을 들어 보니 한국 비구니스님이 와서 돈을 내 놓고 갔다고 들었지요. 이 또한 부처님의 가피가 아니냐고 하면서 법문을 하니 주민들이 조금씩 보시를 하여 큰돈이 모여서 불사를 원만히 해결 하였다고 했습니다. 카타라가마라는 외각 쪽 도시 한 빈민촌 길에서 탁발하는 비구니 스님이 계셨는데 통역하던 친구가 자기마을에 스님이 형편이 어렵다고 저에게 한번 들러주길 청해서 갔더니 절이라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지붕은 새고 부처님은 페인트칠하여 흘러내린 자국이 있었으며 한마디로 어떻게 여기서 스님이 수행하면서 살지 하는 생각이 일어 일주일 일정으로 빠듯한 시간을 집 한 칸 지어주는데 보냈습니다.
작은 돈으로 우선 법당과 부처님을 한분 다시 조성해 드리고 간단한 집기, 식기를 장만해 드리고 점안까지 해드렸습니다.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데 깡마른 비구니스님이 눈물조차 말랐을 얼굴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에 겨워하시며 저희들에게 감사를 하며 부처님이 보낸 분이라는 말씀을 하셨고 주민들도 다 함께 눈물 흘리며 환희심과 감격의 점안식을 해드리고 다음에 공양간(밥짓는 곳)도 불사를 해드리겠다고 하고는 왔습니다. 아직 나머지 불사는 해드리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꼭 할 것입니다.
받는 이보다 주는 이의 행복이 더 크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그때의 그 감격이 승려 생활 내내 밑거름이 되었으며 작은 보시로 이렇듯 따뜻하고 충만함이라는 선물을 평생 갖고 살게 되었습니다. 남은 여정도 이렇듯 살리라 다짐하고 돌아왔는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고 힘겨움으로 발목 잡힐 때도 있지만 스리랑카의 비구니스님을 떠올리며 또 힘을 내곤 합니다.
스리랑카 최고의 사찰인 부처님 치아사리가 모셔져 있는 불치사 등에는 하루에도 수 만 명이 찾아 관광수입, 입장권 수입, 수많은 공양물들로 넘쳐 났지만 작은 시골에는 근근이 올리는 주민들의 공양물에 의지해서 수행하며 살아가는 절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불교와 다른 점은 절에서 공양물을 만들지 않고 불자들의 올리는 공양물로 끼니를 해결하고 오후 불식을 하고 있는데 요즘 조금씩 사찰에서 공양을 짓기도 하고 세끼를 드시는 스님도 계십니다. 불자들의 스님들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은 대단하며 일상생활 속에 불교가 자리 잡고 있어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은 다 스님을 청하여 기도하고 공양 올리는 일로 시작합니다. 청정승가에 대한 불자들의 믿음과 의지가 대단하였으며 신심이 견고하여 생활속에서 기도하며 사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요즘 스리랑카는 새로운 정권으로 바뀌었고 불자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가톨릭과 무슬림수가 늘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전통 싱할리족은 가족 수가 줄고 있으며 반면 무슬림은 일부다처제로 상업을 하며 경제력이 생겨 자녀수가 많아지는 반면 싱할리족은 가난하여 자녀를 1명~2명 정도만 두고 있었으며 우리나라와 일본등지에 노동자로 많이 나가 있는 실정입니다. 포루투칼, 영국 식민지를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가톨릭이 들어왔고 부두가 있는 한 도시는 불교도를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여기에 목소리를 높이는 스님도 계십니다. “불자들이여 깨어나라~ 각성하라~ 싱할리민족이 위험하다 우리도 곧 무슬림의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불교 계몽운동을 펼치시는 분도 있지요. 저 역시 불교의 나라가 점점 쇄락의 길로 갈까봐 안타까움에 도움의 손길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 스님께서 스리랑카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다고 하는데, 관계 형성 계기는?
스님: 스리랑카의 전 대통령이신 마힌다 라자팍스 대통령과의 인연은 그의 비서 중 한 분과 친분이 있었으며 콜롬보 강가람사원의 스님 덕분이었지요. 강가람사원의 축제 때와 웨샥데이(부처님 탄신일, 성도일, 열반일) 오픈 세레모니 때 VIP로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된 계기로 몇 차례 대통령과의 만남이 있었고, 2014년 올해 초 전 대통령 생신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제가 한국에서 스리랑카 쉼터를 한다는 통역의 말을 듣고는 스리랑카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처음 올 때 이야기를 해 주었지요. 스리랑카 친구들이 15년전 쯤에는 우리나라에 노동자들을 보내겠다고 협정사인도 하고 출국일자까지 잡았는데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한국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도주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한국은 못사는 나라라서 가서 고생만하고 돈도 못 번다고 알고 있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국에 갈 것이냐? 교도소로 갈 것이냐? 양자택일하라고 하며 반강제로 한국에 보냈는데 지금은 본국으로 돌아오라고 해도 안돌아오려고 하고 불법체류 하는 일까지 있다면서 여러 장관과 우리 일행에게 여담을 이야기 하면서 웃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스리랑카 국민들은 우리가 이렇게 까지 잘 사는 나라라는 인식이 없었다고 했지요.
전 대통령은 올 초에 임기를 마치고 지금은 새로운 대통령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입니다. 첫 임기 시작 때 고향인 볼루나루와에서 한번 뵙고 6월에 고향친구이자 법률고문인 라나둥가의 소개로 정식으로 대통령 집을 방문하여 만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전대통령과 현대통령, 두 분과의 만남은 주변인의 작은 인연으로 시작되었으며 스리랑카의 행정 구조상 한 가지 일을 성취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으며 장관들의 부패가 해결되지 않으면 발전에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국가와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도 장관들 자신에게 금전적 도움이 되지 않으면 일을 지체하는 등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몇 가지 사안을 추진 중이며 아직 결과물은 없습니다. 영사관 사무실을 대구에 여는 것과 우리나라 기업이 스리랑카 정부와 국책사업을 할 수 있게 도움 주는 일과 스리랑카에 학교를 건립하는 일을 추진 중입니다. 여러 어려움이 많으며 처음엔 도와주겠다고 하던 분들이 시간이 조금 지나면 뒤로 빠지는 등 추진하는 사람 입장만 난처하게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세속의 일에 밝지 않아 한번 뱉는 말을 그대로 믿어 버려 낭패 보는 일이 가끔 있기도 하죠.
서울에 스리랑카 대사관이 있지만 남부 지방 쪽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업무 보는데 시간, 경비 손실이 크기 때문에 대구 우리 센터에 영사관 사무실을 무상으로 제공해 줘서 직원만 상주하는 형식으로 운영비 일체와 임금은 센터에서 지급하는 걸로 대통령께 말씀을 드린 상황이며 아직 구체적인 결과는 없습니다.
기자: 스리랑카 이주민을 돕는 일에서의 구체적 어려움은?
스님: 우리 쉼터 (하얀연꽃 외국인 쉼터)는 순수한 사찰기금으로만 운영을 하다 보니 임대료가 매달 150만원, 관리비가 50~90만원(전기,수도 등), 운영비 50~70만원정도 지출되어 한 달에 최소 250만원에서 300만원 이상 들어갑니다.
국가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사단법인을 만들고 상근하는 직원을 둬야하며 사업계획서 등등 필요한 서류나 업무가 많아 지원받기를 꺼려합니다.
매월 지원해주는 지원자를 찾는 일과 노동자들의 직업알선과 통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변지인과 불자들에게 후원회원을 만들어 5천원~10만원 정도 자유 후원으로 조금씩 임대료에 보태고 있으며 나머지는 저의 개인 사비로 해결하고 있죠. 주위의 따뜻한 관심이 필요한데 투표권이 없는 외국인이다 보니 관심대상 밖이 되어 후원의 손길이 어려우며 혼자 운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마음만큼 도움의 손길을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마음이 큽니다.
자원봉사자들의 재능기부 및 쉼터 청소 봉사 한국말 강의 등 손길이 많이 필요로 하고 있는데 홍보 부족과 저의 능력부족으로 체계화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주하시는 스님들이 있으면 각각 맡은바 소임을 다하면 되는데 혼자서는 힘들지요. 관심 있는 불자나 스님들의 손잡아 주심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기자; 선방에서의 선 수행을 중요시하는 한국에서 이주민 돕기와 스님의 수행과의 연결은?
스님: 수행이 중요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단지 포교와 수행을 동시에 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이 따르고 무엇보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 이주민 노동자들과의 생활은 늘 상 어려운 점이 많아 인내와 내려놓음이 동반되지 않고는 어렵습니다.
처음 센터를 열 때와는 달리 순간순간 화가 올라오고 쉼터에서 머물고 있는 친구들에게 불만이 생기기도 하고 저의 방식으로 하지 않을 때마다 얼굴이 달아오르곤 하였습니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지 않아 여기저기 음식물 쓰레기와 종이 비닐 등을 섞어서 버려 제가 직접 쓰레기봉투를 뒤져 분리수거도 하고 욕실 벽과 세면대가 누런색으로 변해도 청소 하지 않고 바퀴벌레가 돌아 다녀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심지어 온 방안에 먼지와 머리카락 등이 뒹굴어도 직접 제가 청소기를 들고 하라고 하지 않으면 알아서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한두 번 말해주고 직접 해주기도 하다 보니 어느 날은 방만 쳐다봐도 확 올라오는 게 아니겠어요. 그리고 몇 달을 머물다 일자리를 구해 나가도 한 번도 찾아와 감사 인사도 없는 친구들이 야속한 맘이 일어나기도 했죠.그럴 때 마다 자애의 마음을 보내고 나또한 자비, 자애명상으로 모든 이들이 행복해지기를 하는 마음을 진심으로 보냈습니다.
순간순간 알아차림이 없었더라면 진정으로 행복한 복지가 아닌 보여지기 위한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지금도 매순간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림 하면서 나를 보게 됩니다. 미운 친구도, 맘에 드는 친구도 분별없는 마음으로 대하는 그 날을 위해서 말입니다. 꼭 선방에 앉아서만 하는 수행이 최고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도 매순간이 수행의 과정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네요. 물론 출가자라서 수행이 선행되어야 하고 중생구제에도 힘써야 함이 옳은데, 같이 병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많다는 점, 때로는 계율을 지키기 힘든 점 누구나 할수 있을 꺼라 생각하지만 행동으로 행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전 과감하게 도전하였고 어려움을 호소하는 친구들의 목소리에 자연히 귀기울림 하여 같이 행복해지는 삶을 추구합니다.
기자: 스님은 누구십니까?
스님: 글쎄 현재 제 상황을 말씀하는 건지, 항상 지녀야 하는 화두로 말씀하는지 모르겠지만, 전 태어나보니 절집에서 자랐고 잠시 학교 생활 세상살이를 하다가 다시 출가하여 절집으로 돌아가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은사 스님과는 인연이 짧았으며 지금은 배움에 목말라하며 항상 부족함에 느끼며 공부에 힘쓰며 살고 있습니다. 전 내세울만한 스펙도 없고 든든한 은사스님도 계시지 않고 지혜롭거나 법문을 잘하지도 못합니다.
위덕대학교에서 불교문화학과와 복수전공으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였으며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서 명상상담심리 석사과정과 임상전문가과정을 마치고 마지막 논문학기만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함안 와룡산 운흥사 주지직과 대구 뿐다리까불교문화예술원에서 불교의식과 문화를 알리고 있으며 하얀연꽃 외국인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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