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행 28장 23-31절
설교제목 : 끝나지 않은 사도행전
헤테로토피아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선선해진 날씨가 가을이 왔음을 실감하게 합니다. 환절기 건강유의하시고 영혼의 넉넉함이 있는 계절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자신의 뿌리와 다시금 연결하는 풍성한 한가위가 되시길 빕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 그러나 누구나 꿈꾸는 이상향의 세계를 유토피아라고 부릅니다. 유토피아는 장소, ‘토포스topos’와 부정 접두어 ‘우ou’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장소가 아닌 곳이라는 뜻입니다. 종교적으로 천국이나 극락이며, 신화적으로 잃어버린 제국, 이상세계를 표상합니다. 유토피아에 반대되는 착종된 현실 세계는 디스토피아입니다. 이 두 세계의 사이를 ‘헤테로토피아(Herertopia)’라고 명명합니다. 푸코는, 헤테로토피아가 상상의 공간이자 현실의 공간이며, 탈주의 공간이자 전이의 공간으로서 차이를 생성하고 통합해낸다고 말합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헤테로토피아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신성한 영역, 낙원입니다. 놀이와 축제의 공간이며, 잠시 거기에서 영원성을 만나는 환상의 영역인 셈이다. 푸코는 말합니다.
그것은 당연히 정원의 깊숙한 곳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락방이고, 더 그럴듯하게는 다락방 한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아니면-목요일 오후-부모의 커다란 침대이다. 바로 이 커다란 침대에서 아이들은 대양을 발견한다. 거기서는 침대보 사이로 헤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커다란 침대는 하늘이기도 하다. 스프링 위에서 뛰어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숲이다. 거기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밤이다. 거기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유령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침내 쾌락이다. 부모가 돌아오면 혼날 것이기 때문이다. [미셀 푸코 지음, 이상길 역(2014). 《헤페로토피아》, 문학과 지성사, p13-14.]
이런 아이의 은밀한 공간같은 헤테로토피아는 잠시 삶의 무거운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힘과 여유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을 그토록 무의식적으로 동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헤테로토피아가 점점 사라지면 삶은 빈곤해지고, 삭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은 예배의 시공간일 것입니다. 예배의 시공간은 잠시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 오롯이 유토피아의 안락함을 경험하며 차가운 현실을 건너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시편 기자는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에서 고백합니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서 안겨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시편 131:2-3).”
바로 성전을 향한 순례 길은 헤테로토피아의 시공간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시공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안을 경험하는 곳이었으면 합니다. 또한 일상에서 이런 헤테로토피아가 있을 때, 우리를 짓누르는 중력을 버티고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용기를 얻는 일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에 도달하였습니다. 바울을 압송하는 배가 유라굴로 광풍으로 표류하며 2주일을 버티었습니다. 바울은 배에 탄 이백일흔다섯 명과 함께 운명공동체로 묶였고, 죽음의 공포 속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며 안심시켰고, 함께 떡을 떼며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날이 새자 해변이 보였고, 해안가로 조심스럽게 가려고 했지만, 두 물살이 합쳐지는 곳에서 배가 끼어서 배를 버리고 헤엄쳐서 몰타섬에 도달하였습니다. 몰타섬 사람들은 조난당한 이들에게 특별한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바울이 뱀에 물렸지만 아무런 해를 입지 않자, 그곳 사람들은 그를 신이라 불렀습니다. 섬 추장인 보블리오가 자신의 집을 초대하여 친철을 베풀었습니다.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로 병석에 누워있을 때 바울의 기도로 치유되었고, 그 섬에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찾아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석 달을 보낸 후 디오스구로라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다시 로마로 향하였습니다. 레기오를 지나 보디올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 있는 신도들의 초청을 받아 이레 동안 함께 지내고 드디어 로마로 갔습니다(28:1-14). 바울 일행이 로마로 가까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곳 신도들은 아피온 광장과 트레스 마을까지 맞으러 나왔습니다. 이런 장면을 떠올려보면, 바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모진 고생을 하며 로마로 가는 길에 뜻밖에 신도들이 그를 마중 나왔습니다. 그들을 보는 순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용기를 얻었습니다(15).” 기대하지 않았던 환대와 믿음의 동역자,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큰 용기와 위안을 주었을 것입니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지친 길에서 혼자 오롯이 로마 황제 앞에 서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막막함과 불안, 황제의 권력 앞에 서야 하는 길에서 뜻밖에 만난 성도들은 바울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습니다.
박노해의 에세이집인 《다른 길》 서문은 ‘그 길이 나를 찾아왔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막막함과 불안과 떨림의 날들. 난 모른다. 언제였는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난 모른다. 길을 잃어버리자. 그 길이 나를 찾아왔다. 아주 오랜 전부터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길에서 만난 그 땅의 사람들이 나의 살아있는 지도였고 나의 길라잡이였다. [박노해, 《다른 길》, 느린 걸음, p6-7, 김기석,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꽃자리, p365. 재인용]
이 글을 읽으면 저는 언뜻 떠올았습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인 듯합니다. 어쩌면 무모한 교회개척을 하면서 수없이 이 길이 맞느냐는 물음을 던지고, 일반 교회와는 다른 모양을 그리며 가는 길은 집단적인 네비게이션에는 없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꾸었던 꿈은 지적 장애를 가진 여자 청년이 아이를 씻는 작업을 도와주었던 내용이었습니다. 지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이 아니라 순수하고 조금 모자란 비합리적인 아니마가 저의 미래를 돕는다는 사실은 제가 마음에 품고 가야할 중대한 지침이었습니다. 그 지도 밖에서 뜻밖에 이런저런 분들이 다가오셨습니다. 바울처럼 여러분은 저에게 존재 자체만으로 용기를 불러오는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지도밖에서 예수라는 길이 찾아왔고, 그 길에서 수많은 낯선 이들과 함께 하였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길은 따뜻한 환대에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매인 이유
바울은 로마에 들어가서 그를 지키는 병사와 함께 지냈습니다. 사흘 뒤에 유대인 지도자들을 불렀고, 그들에게 자신이 로마에 온 이유와 자신이 이렇게 쇠사슬에 매인 이유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쇠사슬에 매인 이유는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28:20)임을 고백합니다. 죄가 있어서 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고백합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없이 사는 사람 같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고전 9: 19-23)
바울은 자유로운 몸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매여서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힘썼습니다. 기쁜소식을 위하여 그는 철저하게 매이는 종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자신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된 세상에서, 더 높은 부와 명예,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질주하는 세상에서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길을 간다는 것은 너무나 도달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리스도인의 지향만은 놓치지 않고 살아간다면 누군가에 삶의 길을 넌지시 안내할 수 있는 자로 서 있을 것입니다.
다시 쓰는 사도행전
이후로 바울은 자기가 얻는 셋집에서 두해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여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쳤습니다(30-31). 그리고 사도행전은 끝이 납니다. 미완의 결론인 듯 보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개인의 역사가 기록되지 않습니다. 로마에서 2년 동안 했던 일만 기술하고 마칩니다. 이는 사도행전의 일들, 바울의 일은 여전히 죽음으로 마무리 된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을 읽고 있는 믿음의 독자들에게 이어져야 함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부름받은 자는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 의와 평화, 기쁨이 깃드는 우리 내면이자 공동체입니다(롬 14:17).
우리는 끝나지 않는 사도행전을 다시 써야 합니다. 의와 평화, 기쁨이 깃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일에 힘을 보태고, 그 일에 스스로 매일 수 있는 자를 통하여 사도행전은 다시 써지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다시 써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