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에 대한 추억 (정우련)
청춘의 한 시기와 함께하는 이름들, 그 가운데 그의 이름도 있다
소설가 최인호의 별세소식에 아침부터 마음이 산란했다. 그의 책들을 소장해 둔 학교 도서관 서고를 서성거렸다. 소설집이며 산문집들을 뒤적여 보았지만 내가 읽은 책이라곤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의 책이 100여 권이나 된다니. 팬은커녕 독자 축에도 못 낄 노릇이다. 독서 여부의 과다를 떠나서 1970년대 말과 80년대 초를 청춘으로 보낸 사람들이라면, 그 시기를 그와 함께 통과해오지 않은 이가 어딨을까. 당신도 청춘의 어느 한 시기에 '별들의 고향'이나 '겨울 나그네' 같은 연애소설에 매료된 적이 있었던가. 그도 아니라면 TV의 추석특선영화 같은 데서 한 번쯤은 봤을 수도 있겠다. 영판 흉내를 잘 내는 친구들이라면, 안인숙과 신성일의 목소리를 번갈아 흉내 내며 웃겨보지 않았을까.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여자란 참 이상해요. 남자에 의해 잘잘못이 가려져요'.
대사 끝에 과장되게 키득거리며 웃었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소설 '겨울 나그네'는 내가 좋아하던 슈베르트의 연가곡이 전체 분위기를 장악하고 있어 읽는 내내 '성문 앞 우물 가에'로 시작되는 '보리수'가 귓전을 맴돌았다. 이후 내 십팔번 노래가 되기도 했고. 딸아이의 이름을 다혜라고 지은 것도 '겨울 나그네'의 여주인공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청춘의 한 시기를 어떤 식으로든 함께 한 이름들은 이렇듯 잊히지 않을 자국들을 남긴다. 함석헌 한대수 이장희 카프카 모딜리아니 황석영 같은 이름들. 이런 이름들 중 최인호가 있었다. 그것들이 어떤 교집합을 가지고 있는지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이름들은 그저 각자의 고유한 울림으로 내게 남았을 테니까.
내가 그의 소설을 다시 보게 된 건 대학에 입학한 이후였다. 그해에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으로 '깊고 푸른 밤'이 당선된 것이었다. '그는 약속대로 오전 여덟 시에 눈을 떴다'로 시작되는 첫 문장. 낯선 방에서 눈을 뜨는 고독한 한 남자에 대한 묘사가 그럴 수 없이 리얼했다. 별 고민 없이 술술 읽히는 그의 연애소설들과는 사뭇 달랐으니까. 존재의 고통이 배어나오는 진지한 소설이었다. 캘리포니아의 해변에 쏟아지는 푸진 햇살에 대한 묘사나, 가수 이장희로 짐작되는 '준호'가 차 속에서 볼륨을 있는 대로 높이고 음악을 듣는 나쁜 습관을 '마치 음악의 비속에 갇혀있는 기분'이라고 표현하는 것 등등. 그의 흥건한 감수성은 지금 읽어도 참신하다. 질주하는 고속도로 위에서 그들이 찾아가던 길의 묘사는 또 얼마나 매력적이든지. '프레스노에서 99번 도로를 버리고 41번 도로로 접어들었다. 41번 도로는 요세미티의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간선도로였다'. 나는 단박에 그의 '깊고 푸른 밤'에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알음알음으로 만난 몇몇 대학의 문학지망생들과 함께 문학 동아리를 하고 있었다. 그해 겨울, '깊고 푸른 밤'이 토론대상에 올랐다. 무슨 치기였을까. 나는 그의 소설을 도마에 올려놓고 마구 까발렸다. 넘치는 감수성과 미국이라는 이국적인 공간과 고통과 분노의 포즈를 제외하면 뭐가 남느냐고. 도대체 그의 분노는 무엇을 위한 분노인가. 그것은 실체가 없는 분노가 아닌가. 뭐 그런 소리도 했던 것 같다. 당시는 1980년대 초반이었고 나는 리얼리즘만이 시대를 구원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에게는 그의 방식이 있는 것을.
그는 암투병 중에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오직 죽음일 뿐, 병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병자가 아니라 작가로 죽고 싶다고 끝까지 원고를 놓지 않았다는 그의 투지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가 감히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말한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쓸 때는 손발톱이 빠져 고무골무를 끼고서 단 두 달 만에 불꽃처럼 썼다고 한다. 50년 작가 인생 중에 유일하게, 청탁도 없이 단 한 사람의 독자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쓴 소설이었다고. 이 작품을 시작으로 대중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위한 문학을 하겠다던 선언이 눈에 선하다.
"갈수만 있다면 가난이 릴케의 시처럼 위대한 장미꽃이 되는 가난뱅이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던 말 또한 생생하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