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브람 스님의 수행법에 대한 정리
처음에는 위빠사나로 시작한다.
(물론 본인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동시에 수행한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그의 수행은 삼매를 성취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므로, 삼매를 성취하기 위한 예비 단계로 위빠사나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수행하는 사람은 번뇌가 많으므로 사마타 수행으로 바로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초심자는 마음을 관찰하여 놓아버림을 통해 번뇌를 줄여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알아차림과 관찰을 통해 번뇌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마음은 고요해져 간다.
위빠사나 예비수행으로, 지금 이 순간 알아차림, 문지기 수행법, 자애명상, 걷기 명상 등, 우리가 흔히 위빠사나 수행할 때 하는 다양한 방법을 그도 제시하고 있지만,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마음을 둘로 나누어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관찰자(The Seer)와 행위자(The Doer)"
내면에서 일어나는 번뇌, 즉 생각은 행위자이다.
나는 그 행위자를 지켜보는 관찰자, 보는 자, 아는 자이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행위자에 동조하지 않고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번뇌가 일어나는 과정을 조사하고 이해한다.
그가 제시한 또 하나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는 '내비둬 수행법'이다.
그대가 방안에 있다고 하자. 이때 어느 누가 들어오고 나가더라도 내버려 둬라. 악마가 들어와 자리에 앉더라도 내버려둬라. 당황하거나 겁먹지 마라. 붓다가 찬란한 빛을 내고 들어오더라도 내버려 둬라.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나가세요.'라는 마음자세로 편안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앉아 있으면 된다.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어떤 것이 마음에 들어오더라도 반응하지 말고 내버려 둬라. 현재 이 순간에 아주 고요한 침묵 속에서 관찰을 유지하라.
-mindfulness bliss and beyond 73페이지-
이렇게 위빠사나 수행으로 번뇌가 어느 정도 소멸했으면 이제 본격적인 사마타 수행으로 들어간다.
호흡에 주위를 기울인다.
이때 호흡의 어디를 보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호흡을 지켜보면 된다.
(여기서 파욱 사야도와 다르다. 파욱 사야도는 호흡과 콧구멍이 만나는 한 지점을 응시하라고 하지만, 아짠 브람 스님은 그냥 호흡을 보라고 한다.)
그렇게 번뇌 없이 호흡에 오랫동안 집중하게 되면 호흡이 사라지면서 니밋따가 떠오른다.
(이 부분도 파욱 사야도와 다른다. 파욱 사야도는 니밋따가 떠오르면 그것을 이용해서 삼매를 성취하고, 4선정에 도달해야 호흡이 사라진다고 하는데, 아짠 브람 스님은 호흡이 사라져야 니밋따가 떠오른다고 한다.)
또한 외부의 감각, 즉 오감이 끊어져야 니밋따가 일어난다.
(이 부분도 파욱 사야도와 다르다. 파욱 사야도는 니밋따가 일어나면 그 니밋따를 이용해서 삼매에 들어가고, 삼매에 들어가야 오감이 끊어진다고 한다.)
삼매는 완전한 놓아버림에서 일어나며 깊은 만족의 상태이다.
(이 부분도 역시 파욱 사야도 다르다. 파욱 사야도는 삼매는 완벽한 집중 상태이며 집중이 깨지면 삼매에서 벗어난다고 말한다. 즉, 파옥 사야도는 놓아버림으로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집중을 통해 들어간다고 설명한다.)
삼매 상태에서는 행위자는 사라지고 오직 관찰자, 아는 자만이 남아있다.
삼매는 놓아버림을 통해서 일어난다.
"집착함을 놓아버리고, 행위자를 놓아버리고 자아를 놓아버립니다."
그렇게 삼매를 성취하고, 삼매에서 나와서 바로 자아의 본질에 대해 통찰한다.
이것을 위빠사나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너무 짧은 시간에 통찰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여기서도 파욱 사야도와 다르다. 파욱 사야도는 삼매를 성취하고, 색계 4선정, 무색계 4선정을 성취하고, 다시 위빠사나 수행으로 전환해서 오랫동안 정신과 물질을 분석하는 수행을 한다.)
아무튼 아주 짧은 시간에 위빠사나가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삼매에서 나와서 4가지를 반조한다.
1. 무상을 반조하고
2. 점차 사라짐을 반조하고
3. 자아의 소멸을 반조하고
4. 여기 있는 모든 것을 놓아버림을 반조한다.
그러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삼매의 화약에 반조의 성냥으로 불을 붙인다.
그럼 깨달음이라는 아름다운 폭발이 일어난다.
아짠 브람 스님의 수행법을 정리하면,
처음에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놓아버림을 통해 점점 번뇌를 소멸시킨다.
번뇌가 소멸되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사마타 수행으로 들어간다.
사마타 수행은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집중하는 것이 아님)
호흡이 사라지고 찬란한 니밋따가 떠오른다.
니밋따를 통해 삼매를 성취한다.
삼매에서 나와서 존재의 본질, 무상, 고 무아에 대해 통찰한다.
그럼 바로 깨달음이 일어난다.
그리고 다시 색계 4선정과 무색계 사선정을 성취하고 멸진정에 들어갔다 나오면 아나함과 아니면 아라한과의 지혜가 일어난다.
그의 가르침 중에 흥미로운 것은 3가지가 있다.
첫째 삼매는 마음이 완전히 놓아졌을 때 일어난다고 하는 것과
둘째 상수멸(멸진정)에 들어갔다 나오면 바로 아나함과 또는 아라한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그러므로 그의 설명에 의하면 삼매가 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므로 삼매가 바로 깨달음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이것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별개로 보는 아비담마 교리와 상당히 다르고, 사마타를 수행한 후에 다시 오랫동안 위빠사나를 닦아야 한다는 파욱 사야도의 가르침과 차이가 있다.
붓다께서도 삼매(사선정)를 성취한 바로 그날 정각을 이루었으니, 어쩌면 그의 설명이 맞을 수도 있겠다.
그의 가르침에서 훌륭한 부분도 3가지가 있다.
첫째, 처음에는 번뇌가 많아서 사마타를 할 수 없으므로 위빠사나로 수행을 시작한다는 말은 아주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고,
둘째, 놓아버림을 통해 자연스럽게 삼매를 성취한다고 하는 것이다. 완전한 놓아버림이 마음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삼매에 들게 한다는 것이다.
셋째, 삼매에서 나오면 짧은 통찰이 이루어지고 바로 깨달음을 이룬다는 것이다. 화두로 깨달음을 얻은 조사 스님들이나 붓다의 정각을 상기해보면 이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에서 동조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것은 니밋따가 없으면 삼매에 들어갈 수 없고, 삼매를 성취하지 않으면 깨달음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물론 그도 삼매 없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기도 한다.
'예외적으로 여기서 수다원과에 이르는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그 둘은 '믿음으로 따르는 자'와 법을 따르는 자'이다. 五根의 믿음, 정진, 마음챙김, 사마디, 지혜는 마음이 깨달음으로 향하게 하는 힘을 준다. 삼매와 지혜가 약할 때, 믿음과 정진이 그것을 보완할 수 있다. 믿음과 정진이 수다원으로 향하게 하는 주요 에너지가 되는 사람은 '믿음으로 따르는 자, a saddhaanusaarii이고, 삼매와 지혜가 주요 에너지가 되는 사람은 '법을 따르는 자, a dhammaanusaarii이다. 둘 다 마음챙김은 필요하다.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강한 믿음과 그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강한 정진력이 삼매 없이도 수다원과를 얻게 할 수 있다. 믿음은 산도 옮길 수 있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
그러나 요즘 같은 회의적인 시대에는 '믿음으로 따르는 자'의 깨달음은 보지 못한다........
지혜없는 믿음은 도박이다. 그러므로 삼매에 기초한 지혜의 길, 법을 따르는 자의 길이 권고할만한 길이다. 삼매 없이는 아라한이 되는 것은 제쳐두고, 아나함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경전에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mindfulness bliss and beyond 225-226페이지-
그는 '믿음을 따르는 자'는 삼매 없이도 수다원과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믿음이라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완벽한 믿음을 말한다.
그 믿음 하나로 옆을 보거나 뒤돌아보지 않고, 앞에 어떤 장애가 나타나더라도 그 장애를 비껴가지 않고, 저돌적으로 뚫고 지나갈 수 있는 강한 정진력으로 수다원과에 도달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같은 시대에는 사람들이 의심이 많아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삼매를 통과하지 않고는 깨달음은 요원하며, 믿음으로 해탈하는 것도 수다원까지만 가능하며, 아나함과 아라한이 되려면 삼매를 성취해야 한다는 것의 스님의 주장이다.
그러나 <차례대로 경9M70)>에 의하면 믿음으로 해탈한 자도 수다원에서 아나함까지 있다고 설명하고 있으므로 스님의 주장은 전적으로 믿을 게 못된다.
그의 가르침이 어떤 부분은 아비담마와 다르고, 어떤 부분은 실천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어떤 부분은 정말 가슴에 와 닿는 부분도 있다.
스스로가 수행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받아들이고 실천해본다면 좋은 이익이 있을 것이다.
다음은 파욱 사야도의 가르침을 살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