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닦는 나무
공광규
은행나무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부르면 안 되나
비와 바람과 햇볕을 쥐고
열심히 별을 닦던 나무
가을이 되면 별가루가 묻어 순금빛 나무
나도 별을 닦는 나무가 되고 싶은데
당신이라는 별을
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물이 들어
아름답게 지고 싶은데
이런 나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불러주면 안 되나
당신이란 별을
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물이 들어
삶이 지고 싶은 나를
아름다운 대상을 닦다 보면 내 몸도 아름답게 물들지 않을까
오래 전부터 형성된 은행나무에 대한 심상과 서사를 어떤 순간에 삽시간에 쓴 시이다. 그동안 많은 은행나무를 만났다. 덕수궁 말밤나무 옆의 은행나무, 카페 바그다드에서 내다보던 경복궁 동십자각 주변의 은행나무, 낙원동 카페 하가 창문에 가깝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은행나무, 누이동생 복숙이가 심은 시골 언덕의 은행나무. 이런 은행나무들을 떠올리면서 쓴 것이다.
수년 전 사무실과 가까운 덕수궁을 매일 혼자 산책을 한 적이 있다. 점심시간에만 직장인에게 덕수궁을 무료로 개방을 하던 해이다. 덕수궁 정문에서 가장 먼, 후문 가까이에 가면 말밤나무 두 그루가 있다. 말밤나무라니,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마로니에라는 나무이다. 노래방에 가서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을 찾아서 부르다보면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라고 나오는 노래 가사 속의 나무이다.
학명을 Horse Net이라고 명찰처럼 달고 있는 마로니에. 학명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말밤'이 되는데, 굳이 마로니에라고 부를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밤나무 아래서」라는 제목의 시를 쓰기도 했다. 한동안 나는 그 말밤나무 옆에 쪼그려 앉아 스케치를 하였는데, 물론 말밤나무만 스케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좀 떨어져 있는 오래된 회화나무와 말채나무도 그렸다.
결국 스케치북 두 권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 뒀지만, 지금도 스케치북을 펼쳐보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보다는 한 나무를 일정 기간 동안 집중하여 관찰하였다는 것 때문이다. 그 말밤나무 옆에 가을이면 유난히 노란 은행나무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은행나무가 환하게 기억에서 밝아온다. 그러고 보니 그 은행나무 아래 오래 앉아서 말밤나무를 바라보았던 것 같다.
카페 바그다드는 경복궁 동십자각 건너에 있었다. 효림 스님이 가난한 문인들을 불러 모으고 항상 술값을 계산하던 장소였다. 행사를 마치고 몰려가기도 하고, 반듯한 직장을 다녀서 술값 계산을 잘했던 종기와 자주 들렀던 술집이다. 거기서 보는 가을날의 경복궁 주변 은행나무가 볼 만하다.
낙원동 2층에 있는 카페 하가는 은행나무 가지가 항상 창문을 건드리는 곳이다. 비오는 날 아무 때라도 비에 젖은 은행잎을 가까이에 두고 마시는 차와 술맛이 제법인 곳이다. 몇몇 문인과 학생들이 모여 비오는 날 흘러간 노래를 틀어놓고 취해서 신나게 춤추던 기억이 진하다.
중학교 때였던가, 시골집 오르는 길가에 둘째동생 복숙이가 학교에서 나누어준 은행나무 세 그루를 가져와 심은 기억이 생생하다. 두 개는 두엄 가까이에 심었었는데, 땅이 너무 걸어서 어느 정도 크다가 죽고, 한 그루만 건장하게 자라고 있다. 지금은 절이 들어오면서 절의 소유가 되어 있다. 매년 은행이 놀라울 정도로 다닥다닥 열려서 나무를 심은 복숙이가 저렇게 복되게 살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가을이 오면 이런 은행나무의 환한 심상과 오래된 서사가 함께 떠오른다. 작년 가을 별밤에 내가 살고 있는 일산 신도시 은행나무 길을 지나 집에 오는데,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팔랑거렸는데, 은행나무 잎이 별을 닦고 있어서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이 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저렇게 아름다운 대상을 닦다가 보면 내 몸도 아름답게 물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ㅡ『시에티카』 2011년 상반기 제4호
공광규
충남 청양 출생. 1986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소주병』, 『말똥 한 덩이』. 저서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등.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거기서 보는 은행나무가 가관이다'에서 '가관'을 '볼 만하다'로 고쳐주세요. 공시인에게 연락했더니 적절한 말로 바꿔달라고 하더군요. 후에 공시인이 직접 보고 다르게 표현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지면엔 그렇게 나갔지만, 말씀하신 대로 고쳤습니다. "별 닦는 나무"님.^^
고맙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오는 26일 시간되면 추계대 오후 3시 봐요.
모처럼 만에 봅시다, 내일 오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