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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시기에 창가교육학회는 이러한 정치적 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학교 선생들 몇몇이 모여 당시 아이들의 교육 학습법등을 개선하고자는 단순한 친목모임이자 학술단체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종교적으로 포장한 창가교육학회일지라도 그 본질은 교육 연구에 있었고 그래서 당시 종교단체로 위장한 창가교육 학회는 그 이듬해인 1941년 학회의 기관지인 “가치창조”를 마치 종교지인 것처럼 발간했습니다.
그러자 그 해 5월, 당국에선 이를 즉시 폐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도 말을 듣지 않고 학교 선생들이 모여 수상한 집회만 계속하고 있으니 결국은 경시청 '특별고등경찰'의 감시망에 걸려버리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결국 진주만 공습을 앞두고 전시 비상시국에 돌입해 있는 일본내에서 출판물을 간행하고 집회를 여는 등, 치안 법령을 어겼기 때문에 그 죄로 창가교육학회 자체가 찍혀 이에 소속된 사람들이 무더기로 끌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주범이 학회 회장인 마키구치였고 공모공범이 학회 이사장으로서 당시 자금을 대었던 도다 죠세이였으니 이들은 당연히 옥고를 치룰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때의 마키구치나 도다 죠세이는 마치 오늘날 독재에 항거하는 자유 민주적 성향을 가진 교육자 정도였을 뿐 이들이 그 무슨 종교적 신앙심에 의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불경죄를 어쨌느니 하는 것은 사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마키구치가 당시 경시청 특고 형사의 질문에 답했던 취조의 내용입니다.
당시 경시청 특고 형사는 “창가교육학회의 신앙이념의 근본은 일련정종과 똑같은가”하고 물었고 이때 마키구치는 “창가교육학회는 일련정종의 신앙에 나의 독자적인 가치창조론을 도입한 하나의 훌륭한 재가 신앙단체입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이 말은 결국 일련정종 불교 단체인 것처럼 해놓곤 창가교육을 시키다 걸렸으니 이를 모두 수용해서 답하려니 이러한 모순된 말이 나올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련정종은 일본의 법화종이고 또한 불교는 부처님의 법문을 믿고 따르는 것인데 여기에다 자신의 이론을 창조적으로 도입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일련정종의 종문이나 법문과는 사실상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교주가 아닌 이상 이러한 일은 결코 있을수가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재가 신앙 단체라니 이것이 어찌 불교를 알고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당시 마키구치는 불교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사람이든가 아니면 전혀 불교의 법문을 거의 믿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키구치는 이 순간부터 불교를 좀더 제대로 배울(?) 기회도 없이 곧바로 그 길로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유훈이 바로 “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 까지 자신이 구상하는 그러한 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오직 교육 개혁만 바라던 진짜 교육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창가학회에선 이렇듯 순수한 사람을 마치 교주인 것 처럼 만들고 있고 이 땅에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까지 이 사람을 우상처럼 쇠뇌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엔 소파 방정환 선생과 같이 보다 더 훌륭한 아동 교육자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5. 도다 죠세이가 깨달은 부처님이라니요.
마키구치와 함께 전시 치안 방해죄로 쌀쓸이에 걸려 함께 끌려간 도다 죠세이는 일본이 패망하면서 출옥을 하게 되자 다시금 조직을 재건하게 되는데 이때 도다가 재건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창가학회였습니다. 말하자면 이때는 아예 “교육”이라는 말이 쏙 빠져 버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마키구치가 없으니 누가 교육을 하고 학회를 이끌겠습니까?
그래서 도다는 1946년 교육이라는 말은 완전히 빼버리고 단지 창가학회라는 이름으로 재건하되 이때부터는 교육자들 모임이 아니라 진짜 신도들 모임이 되어버렸습니다. 왜냐면 이때는 미 군정 치하에서 교육개혁이니 어쩌니 할 필요도 없었고 따라서 학교 선생들도 하나하나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도다와 함께 아예 덤(?)으로 따라 들어온 신도가 한사람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도다의 인쇄소에서 종업원으로 있었던 이께다 다이사쿠라는 사람이었습니다.
1951년 창가학회 회장에 취임한 도다는 종교법인 설립 때 일련정종 종문에다 다음과 같은 삼개조를 준수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1. 절복시킨 사람은 신도로서 각 사원에 소속시킬 것.
2. 당산의 교의를 지킬 것.
3. 삼보 (불,법,승) 을 지킬 것.
사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창가학회는 아무것도 몰랐으니 좀 순수하게 출발을 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후 수많은 분쟁과 우여곡절끝에 간간히 종문과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77년 이께다의 부상(浮上)과 함께 마침내 창가학회는 완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다의 인쇄소 종업원이었던 이께다가 자신의 사장님(?)을 졸지에 부처님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도다의 옥중오달(獄中悟達)”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도다가 감옥에서 깨달음을 열어 부처가 되었다”는 얘긴데 그래서 이를 두고 이께다 다이사쿠는 자신의 불교사관을 통해 “도다의 오달은 창가불법의 원점”이라는 아주 괴상한 말을 내 뱉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그 얼마나 웃기는 말인가 하면, 도다 조세이는 일련정종의 재가 신도입니다. 그런데 도다가 졸지에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승려가 아닌 재가 신도 중에 부처가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도다 부처님의 탄생은 창가학회라는 새로운 종단이 처음부터 시작되는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불교 종단이 되기위해선 당연히 삼보를 갖추어야하는데 그렇다면 승보는 어디에 있는가?
이에대해 이케다 다이사쿠(池田犬作) SGI회장은 1977년 제9회 교학부 대회에서 자신의 불교사관을 통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ꡒ학회의 회원이자 재가 신도인 우리가 바로 승보(僧寶)이다. 따라서 재가로서도 당연히 공양을 받을 수 있다ꡓ
이께다 회장의 이러한 주장을 일러 이른바 ꡒ학회 승보론ꡓ(僧寶論)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승보가 있는 학회의 회관은 바로 승려들이 있는 사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재미있는 말이 아닐수 없습니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한국 불교 총 본산인 조계종의 경우 그 산하에 소속된 수많은 불교 신도회가 있는데 이러한 신도조직들이 모조리 조계사를 이탈하여 제각기 재가부처님 격인 교주(敎主)를 세워놓곤 독립된 불교단체임을 얼마든지 표방할 수 있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다면 도다의 불교종단에 있어 부처님의 말씀인 법보는 또 무엇인가.
이에 대해선 이께다의 소설인 “인간혁명”을 두고 “현대의 어서(御書), 즉 법보인 경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상은 창가학회 파문통고서 참조)
아무튼 이렇게 해서 깨달음을 얻은 도다 회장이 불보인 부처이고 창가학회 신도들이 모조리 재가신자로서 승보가 되고 이께다의 인간혁명이 성전인 법보가 됨으로서 어찌되었던 이렇게 웃기는 논리로 인해 3보의 요건을 모두 갖추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종조인 도다 조세이(戶田城聖)회장은 보리수가 아닌 감방에서 대체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다는 말일까요
이에대해 일련정종 종문에서는 도다의 ‘오달(悟達)’이라는 말이 대체 무슨말이냐며 이를 실날히 따지는 문서를 창가학회로 보냈습니다. 그러자 1978년 6월 창가학회에선 이에대한 회신을 보내 왔습니다.
즉 1977년 도다의 노선(昭和 52년 노선)에 대해 창가학회가 종무원으로 보낸 회답, 바로 이것을 일러 6. 30 회답이라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 도다 전회장의, 이른바 「옥중의 오달」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니찌렌(日蓮)대성인의 불법이 고금의 가르침 속에 최고의 것이다” 라는 것을 깨달아, “대성인의 남묘호렝케교(南無妙法蓮華經)를 광선 유포해 가기 위한 사명의 자각에 서셨다” 라는 것이다.
즉, 남묘호렝케교(南無妙法蓮華經)의 대자대비에 감싸인 경애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그것이 니찌렌 대성인의 어내증과 똑 같다라든가 대성인의 불법과는 다른 불법을 창조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
이에 따르면 결국 창가학회의 불보(佛寶)라 할수 있는 도다의 깨달음은 한마디로 “니찌렌 불교가 최고다”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고 그래서 “포교를 하는데 앞장서야 겠다”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깨달음은 그야말로 개나 소나 다 할수 있으니(?) 이를 근거로새로운 종교를 창출하거나 일련정종과 다른 불법을 창조했다는 식으로는 제발 받아들이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웃기다 못해 한심스런 얘기들입니까?
그런데 이러한 조직을 두고 지금 우리의 부모 형제들이 무려 일백만명이나 이들을 믿고 있다고 하니 이 어찌 심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6. 사제불이(師弟不二)인가
아니면 사죄불이(謝罪不二) 입니까.
마키구치, 도다죠세이, 이께다 다이사쿠, 이들 세 트리오의 관계는 소학교 교장이었던 마키구치가 보조교사로 도다를 고용하므로서 알게 되었고, 또한 이께다 역시 도다가 운영하던 인쇄소의 종업원이었으니 이들은 제각기 고용관계로 얽힌 사람들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색심불이가 아니라 사제불이라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스승과 제자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말이 나왔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이께다 다이사쿠에게 있습니다.
이께다는 별로 배운게 없고 단지 도다의 인쇄소에서 일을 하며 도다의 지시에 따라 학회나 관리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께다가 도다의 사망과 함께 창가학회 제 3대 회장이 되자 상당한 회원수로 발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러한 이께다가 공명당이라는 정치정당을 만들고부터 급속도로 간덩이가 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956. 1. 29 도다회장은 “신자의 대정신(大精神)에 서서”라는 담화를 통해 이러한 발표를 했습니다.
“선대(先代) 마키구치(牧口)선생 당시부터 학회는 예좌(猊座)의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대정신(大精神)으로 관철시켜 왔고, 금후에도 이 정신으로 일관한다. 이것을 깨는 사람은 예를들어 대 간부라고 할지라도 즉석에서 제명한다”
이 말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신성한 종단인 일련정종 종문에 대해선 간섭하거나 대적해선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도다 스승의 이러한 우려는 그 제자에 의해 드디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말하자면 이께다 다이사쿠가 이를 깨뜨려 마침내 종문으로부터 제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이 바로 이께다에 대한 신도 제명처분 통지서의 내용입니다.
通 知 書
일련정종 다이간지(大願寺) 신도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금번, 일련정종 종규(宗規)에 근거하여, 귀하를 신도제명처분에 부친 바 이를 통고한다.
귀하는 도쿄(東京) 제2포교구 관내의 다이간지(大願寺) 신도였으나, 최근의 각종 회합에
서의 발언을 조사한 바, 본종 종규 제229조 및 230조에 근거하여 신도제명처분에 부치는
것에 상당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귀하에 대하여 7월 4일자로 통지서를 송부하여, 통지서 도착 후 30일 이내에 도달할 수 있도록 당 지원장직 앞으로 변론의 서면을 제출하도록 통지하였다.
그럼에도 기일(8월 3일)을 경과한 8월 4일에 이르러서도, 귀하로부터는 변론의 서면 제출이 없었으며, 어떤 의사표시도 없었다.
따라서 귀하에게는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지적한 사실을 전면적으로 인정하고, 어떠한 변론을 세울 의사도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소정의 수속을 거쳐 귀하를 신도제명처분에 부쳐, 본 통고에 이른 바이다.
이에 따라 귀하는 일련정종 신도의 지위를 상실하며, 금후 신도로서의 일체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염고(念告)한다.
1992년 8월 11일
도쿄도(東京都) 스기나미구(杉竝區) 니시오기(西荻) 북 2-29-12
일 련 정 종 부 츠 죠 지 (佛 乘 寺)
도쿄 제2포교구 종무지원장 다카하시 신코(高橋信興) (印)
도쿄도(東京都) 신쥬쿠구(新宿區) 시나노마치(信濃町) 32번지
창가학회 본부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귀하
그런데 도다 회장이 3개조를 엄숙히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를 한 뒤 겨우 만들어 놓은 창가학회를 이께다는 이마저 깨뜨리고 종문으로부터 파문을 당해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이께다 혼자 파문당하고 떠나면 그 뿐인 것을 이께다는 끝까지 조직 전체를 물고 늘어져 마침내 아예 조직 자체가 짤려 나가게 만들었던 것입이다.
그리고 다음의 내용이 바로 창가학회의 파문 통지서 입니다
창가학회 파문통고서
지난번 일련정종은 창가학회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문제의 일체의 책임을 지고, 자주적으로 해산하도록 『창가학회 해산권고서』를 송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창가학회는 오히려 이에 반발하여, 법주 및 종문에 대하여 점점 더 악질적인 비방 중상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일련정종으로서는 창가학회가 신도단체로서의 존립의 목적·기반을 스스로 파괴하고, 본종의 법의·신앙에 현저하게 배반하며, 또 종교법인으로서의 모습에서도 크게 일탈하여 법주·종문으로부터 거듭된 교도·훈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조각의 반성참회조차 보이지 않으므로, 이제는 이 이상 본종 신도단체로서 방치해 둘 수 없어, 여기에 일련정종으로부터의 파문을 통고하는 바입니다. 나아가 이와 같은 창가학회의 지도를 받아들이고, 동조하고 있는 모든 SGI(Soka Gakkai International, 국제 창가학회) 조직, 더불어 여기에 준하는 조직에 대해서도, 함께 파문을 통고합니다.
(중략)
이에 따라 일련정종은 종교법인 창가학회를 파문에 부치며, 이후 일련정종과는 무관계의 단체라는 것을 통고합니다. 또한 이러한 창가학회의 지도를 받아 들여 동조하고 있는 SGI 조직 및 이에 준하는 조직에 대해서도, 이를 파문에 부치며, 이후 일련정종과는 무관계의 단체라는 것을 통고합니다.
1991년 11월 28일
일련정종 관장(管長) 아베 닛켄(阿部日顯) (印)
일련정종 총감(總監) 후지모토 니찌쥰(藤本日潤) (印)
창가학회 명예회장·SGI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귀하
창가학회 회장·SGI 이사장 아키야 에이노스케(秋谷榮之助) 귀하
창가학회 대표임원·창가학회 이사장 모리다 카즈야(森田一哉) 귀하
사정이 이러한데도 이께다는 아직도 사제불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제불이가 아니라 사죄불이, 즉 두 번 다시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로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이께다와 창가학회는 이미 일련정종 종문으로부터 파문을 당했고 따라서 이들은 이제 종교단체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새로운 종교를 창출해 내야 했고 그래서 이께다는 도다를 부처로 만들려 했고 마키구치를 사이비 교주로 만드려 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래서 나온말이 바로 사제불이라는 말입니다. 왜냐면 만일 도다죠세이가 부처가 된다면 이께다도 역시 사제불이의 원칙(?)에 따라 자기도 아예 덤으로 부처가 되기 때문입니다.
7. 이께다는 한국을 일러 문화대은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라 했습니까.,
한국 창가학회의 신도들은 대부분이 부녀자 들입니다. 그래서 이께다는 늘상 한국에 올 때면 “문화 대은의 나라”니 “형제의 나라”니 하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녀자들은 이에 감격을 눈물들을 줄줄 흘려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이께다의 진심일까요.
- 38도 선상에서 남북양군의 교전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어느쪽에서 시작했는가는 지금도 의문에 싸여 있다”(P133)
- 서전(緖戰)의 전투에서는 장비와 사기(士氣)가 보다 우세한 북조선군이 시작하자마자 남조선군을 누르고 남하해 이승만은 6월 28일 서울을 버리고 대구로 수도를 이전했다.(P139)
- UN군은 착착 퇴각을 시작해 재빠르게도 12월 4일에는 평양을 포기했다. 북으로부터의 추격은 거의 없었고, 공격도 완만하다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이 급속한 퇴각을 가지고 마치 압록강을 건넌 운하(雲霞)와 같은 대군의 중공의용군에 밀려서 UN군은 어쩔 수 없이 궤주(潰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인상을 맥아더 사령부는 계속 발표했다.
데일리메일의 특파원은 12월 도쿄로 부터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후위를 지키는 작전을 담당하고 있는 연대는 결국 적에게 총을 한발도 쏠 필요가 없었다. 중공군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P148~149)
이 내용들은 1975년 창가학회의 기관지인 세이쿄(聖敎)신문사 발행 이케다 다이사쿠의 일본판 저서 “인간혁명”제 5권에 나오는 말들입니다.
말하자면 6.25가 북침인지 남침인지 모른다고 했으니 사실은 북침일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께다 다이사쿠는 왜 이러한 글을 쓰게 되었는가.
그 이유가 바로 1974년 12월 28일 공명당을 앞세워 향후 10년간 이른바 ꡒ공-창 협정ꡓ이라는 것을 체결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공창(共創)협정이란 공식적인 창녀를 키우자는 말이 아니라 공산당의 미야모토(宮本) 위원장이 반파시즘 공동전선의 구축을 목표로 하여 창가 학 회와 무언가 음흉한 협정을 맺었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민중의 복지향상을 위해 공동노력하자는 하나의 공통된 명분아래 우선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당은 창가학회에서 펼칠 세계화에 대해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보장해 주는 대신 반면에 공명당은 공산당의 정치적 자유와 활 동폭을 최대한 넓혀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산당 비유를 맞추다보니 결국은 이렇게 조총련 뺨칠만큼 공산당 냄새가 짙은 내용들이 막 솥아져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공산당하고 손을 잡았다고 해도 정치집단의 대 주주요 종교인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역사의 진실쯤은 제대로 알아 뒀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이러한 내용이 만약 원문 그대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한다면, 그래서 우리나라의 모든 창가학회 회원들이 그대로 통독을 했다면 이것은 한마디로 국가 보안법에 걸려 모조리 구속감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판 “인간혁명”엔 이러한 내용이 아예 들어있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이 이제 와서 문화 대은의 나라니 아버지의 나라니 하며 갖은 아양을 다 떨고 있습니다. 왜냐면 오늘날 한국의 창가학회는 일본을 제외한 전 세계 신도수보다 더 많은 인적, 물적 자산을 가지고 있는 세계 정복의 교두보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