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어야 삽니다(마16:24-28)
지난 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데 세 가지를 요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주님이 명령하실 때 이유없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들을 때마다 고민이 쌓입니다. 도대체 난 예수믿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본질적으로 아직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옛 성품과 기질, 잘못된 습관이 있다는 것 때문에 고민이 되고 힘이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분이 "목사님, 고민입니다. 설교하신 그대로 살아야겠는데 참 어렵네요" 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종종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요구는 고통스럽고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25절에 보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진정한 축복입니다. 25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죄악으로 오염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 잃어버렸던 자기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자기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종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2:24-25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묻혀 썩어야만 생명이 잉태된다는 말씀입니다.
25절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 안에 있는 두 개의 생명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는 '목숨'이라고 부르는 육신의 생명입니다. 목숨은 부모로부터 받은 생명입니다. 땅으로부터 온 생명입니다. 그것은 생물학적이고 동물적인 생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목숨은 '육체'와 '정신'의 결합체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하루에 세 끼를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육체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체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공기를 호흡해야 합니다. 또한 육체는 나이가 들면 늙고 병균이 침입하면 병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정신'은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어떤 것입니다. 아주 저급한 동물에도 이러한 느낌들은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땅으로부터 온 생명, 자연으로부터 온 생명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육체적 생명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육신의 안전과 정신의 평안함을 위하여 몸부림치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25절의 '목숨'이란 바로 이런 종류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또 다른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모든 인간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 생명을 알지만 어떤 사람은 전혀 그러한 생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것은 땅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로부터 온 생명이 아닙니다.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춰진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4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예수님의 생명이 곧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요11:25-26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25절 말씀의 뜻은 좀더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생명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생명을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면 영원한 하늘의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는 것, 찰나적인 쾌락과 물질, 육신적인 만족을 위하여 시간과 돈과 정열을 투자합니다.
좀 더 편안하게, 좀 더 안전하게, 좀 더 부유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권력과 쾌락을 위해서라면 무슨 대가라도 치를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것이 바로 육체적인 삶입니다. 그것이 보이는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활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 때문에 영혼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상실한 인간의 머리는 오직 세상적인 가치만으로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마치 밭에 콩을 심으면 거기서 나는 것은 콩이지 팥이 아닙니다. 사과나무에 열리는 것은 사과지 배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죄로 물든 인간의 머리 속은 온통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가치로 프로그램 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세상적인 것만 자꾸 나올 뿐입니다. 이 근본적으로 뒤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여기에서 탈출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허무와 절망과 두려움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그러나 반대로 영원한 가치와 생명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과 육체의 욕심과 허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의 육신과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거기에 위로부터 내려오는 기쁨과 평강이 있습니다. 물론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지 않는 어려움이 오고 고통을 몸에 달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의식하고 그 통치에 순복합니다. 이 사람은 세상적으로 갈아 입을 옷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몇 벌의 옷을 가지고도 아주 행복하게 삽니다. 이 사람의 얼굴은 많은 사람들이 주목할 만큼 그렇게 미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상관없이 감사하게 삽니다. 또 이 사람은 전세방을 전전하며 삽니다.
그러나 세상의 아무 것도 그의 삶을 슬프게 만들 수 없습니다. 매일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하며 충만하게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은 불필요한 자존심과 오만과 편견의 노예로 살지 않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갑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의미를 찾고 목적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는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비집고 살면서도 날마다 하나님을 호흡하며 삽니다. 바로 이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고 안전을 추구합니다. 특별히 안전은 현대인에게 굉장히 중요해졌습니다. 왜 돈을 법니까? 왜 경비원을 둡니까? 왜 자물쇠를 잠급니까? 왜 총을 휴대하고 삽니까? 다 안전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이 안전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모든 행복과 안전을 제공하는 것 같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물질은 도리어 불행과 위험을 가져옵니다. 물질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오히려 무력합니다. 죽음 앞에서 물질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인간이 정말 괴로울 때 물질이 위로가 됩니까?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을 때 물질은 위로가 안됩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고 안전하게 하고 내 인생을 보장해 줄 것처럼 착각해서 끊임없이 물질에 집착하며 생애 전체를 낭비해 버립니다. 25절 말씀의 뜻을 한 가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고린도후서 4:16-18의 겉사람과 속사람의 비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겉사람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육체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병들고 늙고 소모되어 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청춘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나이가 들면 병들고 허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선수가 올림픽 경기에서 자기 역량을 최대로 발휘해서 기록을 세웁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가 최고일 뿐이요 그후로부터는 내려가는 것입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피아노 솜씨가 성숙해 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다가는 나이와 함께 퇴보합니다. 전성기가 있는 것입니다. 겉사람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 때의 인기, 한때의 성공이 자기 인생의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우상처럼 여기고 그것에 목매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결국 병들고 늙고 기억력도 다 사라진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겉사람은 후패한다고 했습니다. 겉사람은 마치 다 떨어진 헌옷과 같고 변색된 누더기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여기에 너무 관심을 갖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겉사람은 하나의 형식처럼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이것이 내 인생을 보장해 줄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속사람 안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습니까? 새 생명이 자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새롭게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위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싱싱하고 생명력이 넘쳐 납니다. 영원한 청춘이요, 영원한 정열과 영원한 사랑을 내포하고 있는 그 생명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육신의 몸이 벗겨질 때는 내 안에 있는 그 새 생명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으로도 이 생명을 죽일 수 없습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겉사람의 문제를 포기하면 속사람이 삽니다.
육체의 목표를 버리면 영원한 목표를 갖게 됩니다. 그것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생명이요 죽음을 초월하여 하나님 앞에까지 갈 수 있는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라가는 자의 축복과 기쁨과 영광입니다. 누가 자기를 부인할 수 있습니까? 누가 내게 주어진 이 억울한 십자가를 기쁘게 질 수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억울한 누명을 쓸 수 있으며, 세상적인 손해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이 말씀은 25절 말씀을 좀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한 그림을 그리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큰 재물을 얻었습니다.
권력도 있고 재물도 있고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가 죽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죽음 앞에서 그처럼 많이 쌓아 놓은 돈이며 권력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한마디로 헛된 것입니다. 자식이라는 게 뭡니까?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명예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 앞에서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인간은 결국에는 관안으로 들어가는 신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관이 금으로 만든 것이든 돌로 만든 것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 어떻게 살아왔든지 간에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나는 천국에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아멘" 할 수 없으면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둘째, "무슨 자격으로 천국에 들어가는가?"하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의롭기 때문에도 아니요, 봉사와 희생을 많이 해서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돌아가셔서 내가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중고등부 수련회때 천로역정 프로그램 가운데 지옥방을 만들어 놓고 그안에 관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제 거기에 학생들이 들어가 눕는 것을 재현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생은 그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막 소리를 치며 웁니다. 무섭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학생 하나가 큰 소리를 칩니다.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나는 안들어 갑니다." 당당하게 큰 소리로 외칩니다.
밖에서 들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바로 저거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이런 확신을 갖고 날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비록 연약한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확실한 믿음으로 가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마지막으로 27절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예언을 하십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27절).
미련한 다섯 처녀와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했고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어제도 안 오셨고 오늘도 안 오셨는데 내일이라고 오실 리가 없다고 그들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신랑은 밤에 도적같이 왔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은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도적같이 오십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주님이 오늘 오시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오늘 밤에 오실지, 내일 아침에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제 어느 때 오시더라도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보고 있었을 때 횐옷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
역사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죄가 영원하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 죄많고 사악한 세상이 오래 갈 것 같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4:16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사탄의 완전한 패배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승리입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 앞에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실 것을 준비하고 주님 때문에 고난을 겪고 세상에서 말할 수 없이 힘든 일을 겪은 사람들은 주님이 오시는 날을 '할렐루야'로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기치고 죄짓고 못된 짓하고 어둠의 세력과 타협한 사람들은 죽을 것 같은 무서움과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런 날이겠습니까?
주님이 다시 오심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27절에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고 세상 법정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 하나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죄를 감출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9:27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면 도대체 그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2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것이 주님의 재림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살아생전에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신앙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 주님이 오실지라도 준비되어 있는 신앙, 파수꾼처럼 영적으로 깨어있는 신앙, 추수꾼처럼 영혼추수에 충성하는 신앙,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점점 성화되어가는 예수꾼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 주님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빨리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나 보내신 이'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믿습니까? 그래서 마지막 심판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뒤로 미룰 문제가 아닙니다. 내일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 날이 저주와 고통의 날이 아니라 기쁨과 영광과 축제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무섭고 두려운 날이 아니라 기다림의 날이요, 신부가 신랑을 만나는 날이요, 모든 눈물이 씻기는 축복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가는 길이 좁고 험하고 세상이 나를 다 몰라줘도 괜찮습니다. 우리 자신속에 있는 이 겉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날마다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사실 이 겉사람은 죽을 때까지 가지고 삽니다.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관계를 단절시켰다는 의미입니다.
이 의미는 죄가 다가와서 노크할 때 죄에 반응하는 육체를 못박으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육체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하였습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자아 즉 육체는 죽는 것이 아니라 죄에 반응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육체는 그냥 방치하면 끝까지 죄에 반응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끝까지 견딘다는 의미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죄를 거부하기 위해 육체를 끝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함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 임하시는 심판 때까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죽어야 삽니다. 내가 죽어야 내가 삽니다. 육체가 죽어야 영이 삽니다. 날마다 나를 쳐서 십자가 앞에 복종시켜서 내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 살아서 역사할 수 있도록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내가 죽어야 내가 살고 내가 죽어야 가정이 살고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삽니다. 오늘 이 놀라운 진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예수님도 다시 사시고 우리도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다가와 유혹하는 사탄의 유혹을 달콤하게 생각하고 끌어 당기는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나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생각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