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시애틀과 캔자스시티의 경기. 2루타를 치고 나간 캔자스시티 외야수 윌리 윌슨은 투수의 글러브 안쪽에서 뭔가 반짝이고 있음을 알아챘다. 투수의 얼굴에는 뭔가 날카로운 것에 긁힌 듯한 상처도 있었다. 몸 수색 결과 공에 흠집을 내기 위한 압정이 글러브 속에 숨겨져 있었다. 부정 투구로 퇴장을 당한 투수는 10경기 출장 정지와 250달러 벌금을 받았다.
2006년부터 LA 다저스를 맡고 있는 릭 허니컷(63) 투수코치가 현역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허니컷은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클럽하우스 앞 게시판을 지나가다 충동적으로 그랬으며 맹세코 그 때가 처음이었다는 말을 했다.
허니컷은 느린 공을 던지는 좌완이었다. 하지만 다양한 변화구로 1980년과 1983년 두 차례 올스타전에 나서고 통산 109승(143패 3.72)을 따냈다.
1987년 허니컷은 다저스에서 오클랜드로 트레이드됐다. 그리고 토니 라루사 감독의 뜻에 따라 마무리 데니스 에커슬리의 앞을 책임지는 좌완 셋업맨이 됐다. 1988년 월드시리즈 1차전 에커슬리가 커크 깁슨에게 대타 역전 끝내기 투런홈런을 맞는 장면을, 허니컷은 오클랜드 불펜에서 지켜봤다.
허니컷은 당대 손에 꼽히는 슬라이더를 자랑했다. 1990년 스카우팅 리포트에 따르면 허니컷의 제1구종은 슬라이더이고 제2구종은 포크볼이었다. 그리고 1992년 리포트에는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 순으로 적혀 있었다(The Guide To Pitchers). 클레이튼 커쇼가 커브 투수에서 커브와 슬라이더를 함께 던지는 투수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 켄리 잰슨이 좋은 슬라이더까지 던질 수 있게 된 것, 류현진의 빠른 슬라이더 습득과 리치 힐의 컷패스트볼 긴급 처방에는 모두 허니컷 코치의 역할이 컸다.
마감시한 트레이드 시장에서 다르빗슈 유(31)는 생각보다 인기가 없었다. 저스틴 벌랜더(당시 디트로이트)의 가격에 놀란 다저스가 적은 유망주 손실(윌리 칼훈)로 다르빗슈를 데려올 수 있었던 이유다.
다르빗슈는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통산 11.0개였던 9이닝당 탈삼진이 9.7개로 떨어지는 이상 징후를 보였다. 슬라이더의 위력이 감소한 탓이었다. 다르빗슈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빠르게 1000탈삼진을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은 2010년 일본 현역 선수 투표에서 다나카 마사히로(18표)를 제치고 1위(29표)에 오른 슬라이더 덕분이었다.
다르빗슈 슬라이더의 헛스윙/스윙률
2012 - 43.7%
2013 - 37.2%
2014 - 42.1%
2016 - 37.1%
2017 - 29.9% (트레이드 전)
트레이드 얼마 후 다저스가 다르빗슈를 데려온 이유가 밝혀졌다. 다르빗슈가 허니컷 코치와 함께 투구폼 조정에 나선다는 발표였다. 슬라이더의 위력을 되찾기 위해 릴리스포인트를 낮추기로 했던 결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철회됐다. 하지만 슬라이더의 날카로움은 과거로 돌아왔다. 아래는 다저스 이적 후 첫 6경기(2승3패 5.34)와 포스트시즌 포함 최근 5경기(4승 0.88)에서 다르빗슈의 슬라이더가 얻어낸 성적이다.
6경기 : 32타수7피안타(.219) 2볼넷 11삼진
5경기 : 34타수1피안타(.029) 1볼넷 16삼진
26일 열린 2차전에서 마에다 겐타(29)는 2007년 보스턴의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오카지마 히데키, 2013년 보스턴의 우에하라 고지-다자와 준이치에 이어 월드시리즈 마운드에 오른 역대 5번째 일본인 투수가 됐다(한국 투수 2001년 김병현, 2009년 박찬호). 하지만 이 중 선발로 나선 투수는 2007년 3차전에서 5.1이닝 5K 2실점(3안타 3볼넷) 선발승(101구)을 따낸 마쓰자카뿐이다. 그리고 다나카의 뉴욕 양키스가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함으로써 다르빗슈는 그 두 번째 영광을 안게 됐다.
흥미로운 것은 다르빗슈와 휴스턴의 관계다. 다르빗슈는 줄곧 텍사스에서 뛰어온 탓에 지금까지 휴스턴을 무려 14번이나 만났는데, 홈 8경기에서 1승4패 4.56에 그친 반면 미닛메이드파크 원정 6경기에서는 4승1패 2.16으로 대단히 좋았다.
다르빗슈는 2013년 4월3일 첫 미닛메이드파크 방문에서 9회 2사까지 14K 퍼펙트게임을 이어가다 마윈 곤살레스에게 초구 안타를 맞고 교체됐다(그 경기 휴스턴의 선발투수는 루카스 하렐이었다). 그 해 8월13일 경기에서는 8회 1사까지 1볼넷 노히트를 유지하다 카를로스 코포란에게 솔로홈런을 맞고 8이닝 15K 1실점(1안타 1볼넷) 승리에 만족해야 했다.
다르빗슈는 지난 시즌 7이닝 8K 무실점(5안타) 승리에 이어 휴스턴이 최강 타선으로 변신한 올해도 7이닝 1피안타 1실점 경기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다르빗슈의 '휴스턴 킬러'로서의 면모는 2차전에서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한 다저스가 가장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다.
휴스턴은 다르빗슈와 맞서야 하는 3차전 선발로 랜스 매컬러스(24)를 선택했다. 매컬러스는 팀 역대 최연소 포스트시즌 선발 등판(22세10일)이었던 2015년 디비전시리즈 4차전에서의 6.1이닝 7K 2실점 호투를 시작으로 올 포스트시즌에서도 리그 챔피언십시리즈 4차전 선발 6이닝 3K 1실점과 마치 2014년 월드시리즈 7차전의 매디슨 범가너(샌프란시스코)를 생각나게 한 7차전 4이닝 6K 무실점(1안타 1볼넷) 세이브를 기록하며 인상적인 가을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12개의 패스트볼과 41개의 너클커브, 그리고 하나의 체인지업을 던진 7차전에서는 8회 선두타자 토드 프레이저에게 내준 스트레이트 볼넷 후 마지막 6타자를 상대로 커브 만 24개를 던지는 진기한 모습을 보였다. <스탯캐스트>를 담당하는 대런 윌먼에 따르면 이는 2008년 이후 커브가 연속적으로 뿌려진 가장 긴 기록으로, 종전 기록은 2008년 저스틴 밀러(플로리다)의 14구 연속 커브였다(12구 연속-데이빗 로버슨&A J 버넷, 11구 연속-리치 힐&델린 베탄시스&호세 페르난데스 등).
매컬러스의 커브가 강력한 것은 날카로운 변화뿐 아니라 구속 경쟁력까지 뛰어나다는 것이다. 올해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던진 커브의 평균 구속은 78.6마일(126km/h)이었다. 하지만 매컬러스의 커브는 정규시즌에서 85.6마일(138km/h)로 크렉 킴브럴(87.3마일)에 이어 2위에 올랐으며 포스트시즌에서는 86.9마일(140km/h)을 기록하고 있다. 87마일은 슬라이더 평균(84.4)을 넘어 커터 평균(88.5)에 까까운 속도다.
커브 평균 구속 순위(300구 이상)
87.3 - 크렉 킴브럴(bos)
85.6 - 랜스 매컬러스(hou)
85.1 - 알렉스 마이어(laa)
85.0 - 프랜시스 마르테스(hou)
84.4 - 코리 클루버(cle)
84.3 - 지미 넬슨(mil)
84.2 - 코디 앨런(cle)
83.6 - 델린 베탄시스(nyy)
83.5 - 카를로스 카라스코(cle)
83.5 - 알렉스 우드(lad)
통산 평균자책점이 8.94였던 콜린 맥휴를 데려와 커브의 달인으로 만들었던 휴스턴은 탬파베이와 함께 회전수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챈 구단이다. 탬파베이에서 다저스로 옮겨간 앤드류 프리드먼 사장이 회전수에 대한 결론을 하이 패스트볼 전략으로 연결시켰다면, 휴스턴은 높은 회전수의 커브 장착을 목표로 하고 있다. 찰리 모튼이 휴스턴에 와서 좋아진 것도 구속 상승과 함께 커브의 전면 배치가 먹히고 있기 때문이다.
매컬러스가 너클커브에 철저하게 의존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문제는 그에 대한 다저스의 대처가 될 전망이다. 휴스턴이 다르빗슈의 슬라이더를 가장 많이 상대했고 또 가장 많이 당했던 팀인 반면, 다저스 타자들은 매컬러스의 커브를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 매컬러스가 지금까지 다저스를 상대한 것은 7이닝 8K 2실점(8안타)을 기록한 2015년 한 경기가 전부다(야시엘 푸이그 3타수2안타). 게다가 매컬러스는 원정(통산 6승12패 4.97)보다 홈에서 훨씬 강한 모습(통산 13승4패 2.39)을 보이고 있다.
다르빗슈의 슬라이더와 매컬러스의 너클커브.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이 두 개의 강력한 구종은, 공교롭게도 역대 가장 많은 홈런이 쏟아져나온 월드시리즈 바로 다음 경기에서 격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