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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칼 포퍼 Karl R. Popper (1902~1994)
[들어가는 말]
이 에세이 및 강연 원고 모음은 <In Search of a Better World(더 나은 세상을 찾아서)>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자연과학에 방점을 둔 기고문들과 역사 및 정치사에 방점을 둔 기고문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의 1부에는 자연과학에 관한 문제들이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내가 중점을 둔 것은 생물학과 살아 있는 생명체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로움입니다.
6장은 신의 피조물에서 조화를 찾는 위대한 구도자이자, 고도로 추상적인 동시에 고도로 조화로운 방식으로 행성 운동을 결정하는 세 가지 법칙을 발견해낸 위대한 과학자 요하네스 케플러에게 헌정하는 장입니다. ~~~갈릴레오와 뉴턴과 달리 케플러가 자신의 실수들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건 바로 그의 겸손함 덕분이었습니다.
[1부] 자연과학에 관한 문제들
(1장) 과학 이론의 논리와 진화
오늘 강연에서 내가 전하려는 핵심 개념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언제나 문제들에서,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어떤 것이 우리 안에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 문제들을 풀기 위해 과학은 일반 상식이 문제를 푸는 것과 동일한 방법, 즉 시행착오의 방법을 택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문제에 여러 가지 해결책을 대입해보고 거짓 해결책을 틀렸다고 간주하여 제거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법은 다수의 실험적 해결책을 대입할 것을 전제로 합니다. 다수의 해결책을 하나씩 차례로 시험하면서 제거해나가는 것이지요.
고등생물이 하는 학습이란 본질적으로 시험 행동을 차례로 수행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물의 행동을 보면, 식물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생물은 법칙이나 규칙을 좇도록 조건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생물은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법칙이나 규칙을 기대하는데, 나는 이러한 기대들 대부분이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봅니다. 타고 나는 거지요. 이 기대가 어긋날 경우 문제가 발생하며, 이는 빗나간 기대를 새로운 기대로 대체하기 위한 시험적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기대들에 대해 너무 자주 실망하게 되면 그 고등생물은 문제에 굴복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을 다음 3단계 모델로 정리해보려 합니다.
1. 문제
2. 시도된 해결책들
3. 제거
이 모델의 첫 번째 단계는 문제입니다. 문제는 어떠한 장애가 발생할 때 대두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시도된 해결책들입니다. 즉 문제해결을 위한 시도들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실패한 해결책들의 제거입니다. 첫 번째 단계인 문제 자체는 단수로 나타낼 수 있지만, 두 번째 단계는 아닙니다.
세 번째 단계인 제거는 부정적 성격을 띱니다. 제거는 본질적으로 오류들의 제거입니다. ~~~시도한 해결책이 마침내 성공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첫째, 행동 주체는 성공적인 해결책을 학습합니다. 동물의 경우 보통 비슷한 문제가 다시 발생했을 때 앞서 실행한 시험적 행동들을, 실패한 것까지 포함하여, 대충 빠르게 앞서 했던 순서대로 반복한다는 뜻입니다. 성공한 해결책에 이를 때까지 대략적으로 이런 수행을 반복합니다. 그러니까 학습이란 실패하거나 제거된 해결책들을, 잠깐 떠올렸다가 치우는 정도로, 점점 대상에서 제외해가다가 결국 성공한 하나의 해결책을 거의 유일한 고려 대상으로 남기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시도된 해결책들의 복수성에 의한 제거 절차입니다. 이를 통해 생명체는 새로운 기대를 학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유전 장치는 변화나 돌연변이가 유전 구조에서 반복해서 일어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진화론에서는 이러한 돌연변이가 3단계 모델 중 2단계인 시도된 해결책들의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대개의 경우 돌연변이는 치명적입니다. 돌연변이 보유자와 돌연변이 가 발생한 생명체에 치명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돌연변이 개체들은 모델의 3단계에 따라 제거됩니다. 이렇게 보면 3단계 모델에서는 두 번째인 시도된 해결책들의 복수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돌연변이가 매우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 그것은 시도된 해결책들로 고려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돌연변이성은 우리 유전 장치의 작동에 필수적이라고 봐야겠지요.
이제 드디어 오늘 강연의 주제인 과학 이론, 혹은 과학의 논리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제시할 명제는 과학이 생물학적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은 과학 이전의 지식에서 나왔습니다. 상식 수준의 지식의 놀라운 연장이며, 여기서 상식은 동물적 지식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명제는 앞서 소개한 3단계 모델이 과학에도 적용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옛 과학 이론은 과학의 출발점이 우리의 감각 인식 혹은 감각기관의 관찰이라고 가르쳤고, 지금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언뜻 매우 합당하고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사실 이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문제가 없으면 관찰도 없다는 명제 하나만으로도 그것이 잘못됐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당신의 시계를 한 번 보세요라고 하면, 상대방은 여전히 내가 뭘 관찰하라고 요구하는지 모를 겁니다. 하지만 아주 사소하더라도 일단 문제를 던져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상대방은 그 문제에 관심이 없더라도 최소한 인식 또는 관찰을 통해 무엇을 찾아내야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비가 내릴 것이다’ 라는 무언의 생각에서 ‘오늘 비가 내릴 것이다’ 라고 말하는 명제로의 단계는 매우 중요한, 즉 심연을 뛰어넘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생각의 표현이라는 이 첫걸음은 대단치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나의 성격, 나의 기대치, 그리고 어쩌면 나의 두려움마저 다른 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에 따라 누구든 비판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든다는 뜻이지요. 이 차이는 나에게 개인적으로도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어떤 명제는 발화되는 순간 나에게서 떠납니다. 나의 기분이나 희망, 두려움과 따로 존재하게 됩니다. 객관화하는 것이지요. 그 명제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실험적으로 옹호 받을 수 있지만, 마찬가지로 실험적으로 반박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 마음껏 그 명제를 놓고 고찰하고 논의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마음껏 그에 대한 찬반을 표할 수도 있지요.
대개 앎이라 하면 어떤 주관적인 상태, 정신적 상태를 떠올립니다. 알다라는 동사부터 보면 대개는 안다를 어떤 것을 믿는다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앎이란 단어의 이런 주관적인 해석은 옛 과학 이론에 너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과학적 지식은 주관적 기대나 확신이 아니라 말로 표현된 객관적 명제들로, 또한 가설과 문제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과학 이전의 지식 개발서 에서는 제거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상이었습니다. 환경이 우리가 시도한 해결책들을 제거했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능동적 주체가 아닌 수동적 객체에 불과했고요. 우리는 제거를 겪어야 했습니다. 즉 자연환경이 우리가 시도한 해결책들을 너무 자주 파괴하거나 혹은 이전에 성공한 해결책들을 파괴할 경우, 필연적으로 시도한 해결책들의 주체인 인간도 파괴되었습니다.
과학적 방법론 및 접근법이 참신한 점은 우리가 제거 과정에 능동적으로 관심을 갖고 개입한다는 것입니다. 시도된 해결책들은 객관화되어,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시도한 해결책들과 동일시되지 않습니다.
과학을 진정한 과학으로 만드는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비판적 접근이며, 이는 과학 이론의 객관적, 공개적, 언어적 공식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보통 찬반양론이 형성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비판적 논의가 제기됩니다.
내가 3단계 모델을 계속 언급해서 놀랐을 것입니다. 계속 언급한 이유는 지금 소개할 매우 유사한 4단계 모델을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단계 모델은 3단계_ 모델에서 파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를 기존의 문제라고 부르고 네 번째 단계를 새로운 문제라고 부를 뿐이죠. ‘여기서 시도된 해결책들’을 ‘잠정적 이론들’로, ‘제거’를 ‘비판적 논의를 통한 제거 시도’로 대체하면 과학 이론에서 전형적인 4단계 모델이 됩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기존문제
2. 잠정적 이론들 세우기
3. 실험적 검증을 포함하여 비판적 논의를 통한 제거 시도들
4. 이론들의 비판적 논의에서 도출되는 새로운 문제들
4단계 모델의 중요한 특징은 동적 특성입니다.
각 단계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는 논리적 추동력을 품고 있습니다. 과학은 이러한 논리적 밑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현상입니다. 본질적으로 역동적이고, 결코 완성되지 않은 것이지요. 목표에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이란 없습니다.
구획문제에 대해 내가 제시한 해결책은 다음의 구획 기준입니다. “습득 가능한 경험에 모순되고 그에 따라 원칙적으로 경험에 의한 반증이 가능한 이론만이 경험과학 이론이다.” 예를 들어, 백신 접종이 천연두를 예방한다는 이론은 반증이 가능합니다. 백신 접종을 받은 사람이 천연두에 걸리면 이론은 반증되니까요. 그런데 이 예는 반증가능성 기준이 자체적 문제를 안고 있음을 증명하기도 합니다. 백신 접종을 받은 백만 명 가운데 단 한 명만 천연두에 걸린다면 이 이론이 반증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접종 과정이나 백신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추측하겠지요. 게다가 원칙적으로, 그런 구멍은 어떤 경우에서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반증을 앞에 뒀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거든요. 보조 가설을 끌어와 반증을 거부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의 반증이든 그에 대항해 자신의 이론을, 한스 알베르트Hans Albert(1921)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면역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증가능성 기준을 적용하기란 그리 쉽지 않게 됩니다. 그럼에도 반증가능성 기준은 나름의 효용이 있습니다. 항상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겠지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천연두 예방 접종 이론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백신 접종을 받았으나 천연두에 걸린 사람의 비율이 백신 접종을 받지 않고 천연두에 걸린 사람의 비율과 대략 같다면(혹은 더 크다면), 모든 과학자는 백신 접종으로 천연두를 예방할 수 있다는 이론을 버릴 것입니다.
두 번째 규제적 관념인 이론의 내용은 우리로 하여금 높은 차원의 정보를 담은 이론을 추구하게 합니다. 12x12=144 같은 항진명제나 단순 계산식은 아무런 알맹이가 없습니다. 어떤 경험적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고차원의 논리적 내용을 담은 대담한 이론의 예로 다시 한 번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원자의 양자 이론과 유전의 비밀을 일부 풀어낸 유전자 암호 이론을 들 수 있습니다.
(2장) 육체-정신의 문제에 대한 실재론자의 고찰
육체와 정신의 상호작용이라는 주제를 택한 데에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지 모르는 중대한 수수께끼를 안고 있습니다. 철학사에서 가장 심오하고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 현대 형이상학의 중심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게다가 육체와 정신의 문제는 우리 인간에게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기도 하고요. 육체와 정신의 문제는 현대 실존주의에서 인간이 처한 상황이라고 칭하는 것의 바탕을 이룹니다. 인간은 적어도 의식이 있는 동안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고, 하나의 자아이며, 또한 물리적 법칙에 제한을 받는 육체에 묶인 정신입니다. 이는 풀어 설명하기엔 너무도 자명해서 실존주의자들은 (내가 보기엔 반박할 수 없는) 이 자명함의 이면에 숨은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해보려는 시도조차 없이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지만 육체와 정신의 관계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문제도 개입되는데, 인간의 자유는 정치를 비롯한 모든 영역의 근거를 이루는 개념입니다. 또한 물리적 세계에서 인간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라는 문제도 포함됩니다. 이 물리적 세계를 나는 ‘제1세계’라고 칭할 겁니다. 인간의 의식에서 사고과정이 이루어지는 세계는 ‘제2세계’라고 칭할 것이고, 인간 정신의 객관적 창조가 이루어지는 세계는 ‘제3세계’라고 부를 것입니다.
가장 넓은 의미로 제3세계는 인간의 정신이 낳은 산물들의 세계입니다. 좁은 의미로 보면 잘못된 이론까지 포함해 모든 이론의 세계이자, 다양한 이론의 참, 거짓 문제를 포함한 과학적 문제의 세계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문학 작품이나 모차르트의 오페라, 협주곡 같은 예술 작품들은 제3세계_에 속합니다. 그러나 굳이 나누고 싶다면 예술 작품의 세계는 제4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해도 좋습니다.
형이상학이라는 단어에 대해 한마디만 더 할까 합니다. 헤겔과 마르크스, 엘겔스 그리고 레닌은 이 세계를 동적인 것이 아니라 정적인 것으로 보는, 진화에 적대적인 철학을 말하고자 이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용법에는 항상 의문의 여지가 따랐습니다. 변화라는 문제, 그리고 세상의 끊임없는 진화는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철학에서부터 가장 오랫동안 논의되어온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나는 정적인 세계가 아닌 변화하는 세계를 믿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정적인 의미에서 형이상학자가 존재한 지는 오래전입니다. 대신 나는 나 자신을 진화론을 인정하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로 보고 있으며, 인간 지식의 진화라는 역동적인 문제를 과학철학에 도입한 장본인이라는 것도 덧붙이고 싶군요.
나는 물리적 현상이 일어나는 세계를 제1세계라 하고, 정신 현상이 이루어지는 세계를 제2세계라 칭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복잡할 게 없습니다. 이해가 어려워지는 건 제3세계라고 칭한 부분입니다. 가장 넓은 의미로 제3세계는 인간의 정신이 낳은 산물들의 세계입니다. 좁은 의미로 보면 잘못된 이론까지 포함해 모든 이론의 세계이자, 다양한 이론의 참, 거짓 문제를 포함한 과학적 문제의 세계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문학 작품이나 모차르트의 오페라, 협주곡 같은 예술 작품들은 제3세계_에 속합니다. 그러나 굳이 나누고 싶다면 예술 작품의 세계는 제4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해도 좋습니다.
중요한 건 과학 이론이 속한 제3세계와 정신적 세계를 일컫는 제2세계의 문제들을 구분하는 일입니다. 이 구분은 베르나르트 볼차노가, 그리고 이후 고틀로브 프레게가 분명히 한 바 있으나, 내 이론은 두 사람이 제시한 해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볼차노는 진술 그 자체를 이야기했습니다.
고층건물은 물리적 객체이고, 따라서 제1세계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 건물은 설계에 따라 건축되었고, 설계는 여러 이론과 수많은 문제에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건물을 짓는 데 각각 역할을 수행하는 설계와 이론, 문제들은 건축가라는 사람의 의식(즉 제2세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나중에야 건축노동자들의 물리적 운동의 세계에, 또 그에 따라 물리적인 굴착기와 석재, 벽돌 등에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이는 가장 흔한 경우입니다. 제3세계가 대개 정신적 세계인 제2세계를 통해 제1세계에 간접적인 영향을 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어쩌면 제3세계는 대개의 경우가 아니라 항상, 그것도 직접적이 아니라 오직 제2세계를 통해서만 제1세계에 영향을 주는지도 모릅니다. 고층건물이나 교각이 무너지면 이는 제2세계의 오류 혹은 잘못된 주관적 생각의 탓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거짓된 객관적 이론, 즉 제3세계의 오류 탓인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제3세계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사고, 즉, 제2세계는 존재하지만 그 자체의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사고의 내용은 정신의 추상작용,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으로 치부하는 것이지요.
연속된 자연수 1,2,3,4...는 내가 생각하기엔 인간 언어의 산물입니다. 2가 2, 그리고 많이 만 있는 원시 언어들도 있고, 5까지만 셀 수 있는 언어들도 있습니다. 무한대의 자연수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위대한 발명품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소수(素數)를 발명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수를 세다가 발견되었습니다. ~~~독일의 위대한 수학자 크로네커는 신이 자연수를 만들었고, 그 밖에 모든 것은 사람이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내 생각은 다릅니다. 자연수는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숫자 세기를 계속하다가 발명해낸 인간 언어의 산물이지요. 덧셈 또한 인간의 발명이며, 곱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덧셈이나 곱셈의 법칙(예를 들어 결합법칙)은 인간의 발명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발명에서 의도치 않게 파생된 결과물로, 발견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자신과 1만으로 나뉠 수 있는 소수의 존재 역시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하나의 발견입니다. 아무나 알아챈 게 아니라 자연수를 들여다보다가 그 특별한 규칙을 연구한 이들이 발견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소수가 자연수와 함께 발명되었다고 해야겠지만, 자연수의 발명 시점에서 분명 수백 년은 지나 소수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소수의 존재 자체가 인간의 의식, 곧 제2세계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소수가 존재하게 되자마자, 자연수와 함께 제3세계에 존재했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발견되기 전에 제세계의 자율적인 영역에 존재해온 셈입니다. 발견된 후에는 제2세계와 제3세계 모두에 존재하게 되었고요.
에베레스트산의 존재가 인도의 토지조사국으로 하여금 그 상봉우리를 발견하도록 이끈 원인인 것과 마찬가지로요. 제3세계의 자율적인 영역이 제2세계에 인과적 영향을 준다는 얘기입니다.
고대의 수학자들은 큰 숫자로 갈수록 소수가 점점 드물게 나타나며 또한 두 소수 간 간격이 점점 멀어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소수의 수열은 2,3,5,7로 시작하지요. 2와 3은 유일하게 어떤 자연수도 그 사이에 끼어 있지 않은, 가장 가까이 있는 소수 짝입니다. 그런데 서로 매우 가까이 있으면서 사이에 오직 한 숫자만 끼어 있는 소수 짝은 여럿 존재합니다. 5와 7, 11과 13, 17과 19를 예로 들 수 있겠네요. 이런 쌍들을 쌍둥이 소수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소수와 관련하여 제3세계에서 발견된 몇 가지 문제를 언급해야겠습니다. 첫째, 큰 숫자로 갈수록 소수가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드는데 그러다가 소수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 지점이 오지 않을까? 바꿔 말하면, 이후로는 합성수밖에 나오지 않는 가장 큰 소수가 존재하는가? 이 문제는 유클리드 이전에도 제기됐지만, 어쨌든 그것을 해결한 사람은 유클리드였습니다. 유클리드는 최대의 소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연수의 수열이 무한대이듯 소수의 수열도 끝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자연수의 수열에서는 그 증거가 매우 간단합니다. 우선 자연수 수열에 끝이 있다고 가정하고 최대의 자연수를 a라고 해봅시다. 여기서 단순히 a+1을 만들면 그 가정은 틀린 것이 됩니다. 이는 최대의 자연수가 존재한다는 가정의 귀류법적 증명입니다. 유클리드는 최대의 소수가 존재한다는 가정을 증명할 좀 더 복잡한 귀류법 공식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유클리드의 증명은 이어서 소수는 무한하다는 하나의 정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정리는 제3세계에 속합니다. 유클리드의 머릿속에 있던 가공의 정리와 가정은 제2세계에 속하는데, 그것은 최대의 소수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3세계의 사실에 인과적으로 연결되거든요.
육체와 정신의 문제란, 제2세계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사고 과정이 과연 제1세계의 두뇌 작용과 연계되어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연계되는 지의 문제를 뜻합니다. 이에 대해 지금까지 제시된 이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육체와 정신의 상호작용 이론: 제2세계와 제1세계는 서로 영향을 주기에, 우리가 책을 읽거나 강연을 들으면 두뇌 작용이 일어나 의식적인 사고과정이라는 제2세계에 어떠한 작용을 합니다. 반대로, 한 수학자가 어떤 식을 증명할 때 제2세계는 그의 두뇌, 즉 제1세계에 작용합니다. 이것이 육체와 정신의 상호작용입니다.
2. 육체와 정신의 병행 이론: 제2세계의 모든 사고 과정은 제1세계의 두뇌 작용과 평행으로 이루어집니다.
3. 순수 물리주의 혹은 철학적 행동주의: 오직 하나의 시계, 즉 제1세계만이 존재하며 인간과 동물의 움직임, 인간과 동물의 행동도 전부 제1세계에 존재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내가 제2세계라 부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제3세계라 부르는 것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4. 순수 심리주의 혹은 유심론: 오직 제2세계만 존재하며 제1세계는 나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점입니다.
나는 두뇌 현상 없이는 정신적 사고 과정도 일어날 수 없음을 순순히 인정합니다.
(3장) 인식론과 평화의 문제
올해 나이 여든셋이 된 나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삶이 그렇게 경이로울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하기도 합니다. 나 역시 가까운 친지와 친구들을 가슴 아프게 떠나보냈습니다. 친척 중 열 여섯 명이나 히틀러에게 희생되었습니다.
(4장) 진화론적 인식론에 대한 인식론적 견해
존 로크 이래 모든 인식론자와 극명히 반대되게, 심지어 칸트의 주장과도 대조되게 나는 모든 지식이 그 내용 면에서 선험적, 정확히 말하면 유전적으로 선험적이라는 이론을 지지합니다. 모든 지식은 가설적 또는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설이니까요. 오직 가설과 실제의 충돌에서 오는 가설의 제거만이 후험적 지식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오직 시행착오를 통해서만 학습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행이란 언제나 우리의 가설을 뜻합니다. 외부 세계가 아닌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부 세계에서 우리가 배우는 건 우리의 노력 중 일부는 잘못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원시 생명체부터 초기 세포까지 적응은 생명체의 발명이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적응을 하며 스스로 적응 방식을 개선합니다.
-진화론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은 은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론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것들은 실재로 존재하지 않거든요. 실제 존재하는 건 죽으면서 자손을 남기는 개체들이며, 바로 여기에 더 잘 적응한 개체가 자손을 남길 가능성이 더 크다는 진화론의 골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명제로는 진화론의 한계 또한 명확히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적응한, 또는 어느 정도는 적응한 개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는 생의 기원이라는 문제로 직결되는데, 불행히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여전히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적응과 진화론: 사고 실험
시험관에서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죠. ~~~시험관은 어떤 생명체에게도 굉장히 척박한 환경입니다. 그 생명체가 생존하게 하려면 특별한 장치를 마련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환경을 생명체에 적응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환경을 생명체에 적응시키려면 최소한 영양을 공급할 슈퍼마켓 한 개는 만들어 줘야 합니다.
생명의 환경 적응 자체가 일종의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최소한의 지식 없이는 어떤 생명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지식이란 매우 보편적인 생의 조건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사고 실험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진화 인식론이라 불리는 나의 이론에서 선험적 지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상동관계, 지식, 그리고 적응
(5장) 진화론적 지식론에 대하여
오늘 강연에서 나의 목표이자 과제는 지식 이론을 생물학적 진화라는 광범위하고도 흥미로운 맥락에 배치함으로써 지금까지 지식 이론 분야에서 성취된 업적들, 나아가 앞으로 성취되어야 할 과업들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고 더불어 그러한 실험으로 우리가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주인이 평일 저녁 6시면 귀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개의 행동에서 개가 주인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동물도 뭔가를 알 수 있다는 명제가 시시하게 들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현재 주류가 되는 지식 이론을 완전히 뒤집는 것임을 설명해보겠습니다.
내가 개에게 지식을 대입한 것은 의인화 기법인 것은 맞지만 단순한 은유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개의 어떤 l관, 예를 들어 개의 뇌는 인간이 가진 지식의 생물학적 기능에 어렴풋이 상응하는 기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뇌와 상동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종의 계보에서 매우 가까이 위치한 서로 다른 새들의 구애 행동이 유전학적 혹은 발생학적 관점에서 실제로 상동하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 있습니다. 우리 인간과 특정 어류가 상동관계라고 하면 믿기 어렵지만, 여전히 가설로서 상당히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어류의 입이나 뇌가 인간의 입, 뇌와 상동관계라는 건 꽤 그럴싸하죠. 그것들이 같은 조상의 신체기관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습니다.
이 가설은 결코 동물들이 자기 지식을 인지하고 있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도 의식하지 못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무의식적 지식은 보통 무의식적 기대의 성질을 띠는데, 때로 그것이 잘못된 기대였음이 드러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그런 종류의 기대를 품고 있었음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런 예를 나는 오랜 학자로서 인생에서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계단을 한참 내려가다가 마지막 계단에서 넘어질 뻔 한 순간, 나는 계단이 실제보다 한 칸 더, 혹은 한 칸 덜 있다고 생각했음을 깨달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 덕분에 나는 내 가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놀라는 것은 대개 그 일 말고 다른 일이 일어날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동물도 무언가를 알 수 있다는 평범한 명제에서 도출 가능한, 그리고 이미 도출된 19가지 흥미로운 결론을 제시해보겠습니다.
1. 지식은 대개 기대의 성질을 띱니다.
2. 기대는 보통 가설의 성질, 추상적 혹은 가정적 지식의 성질을 갖습니다. 불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기대하거나 안다고 해도 이 같은 불확실성은 인지하지 못하고 잇을 수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개의 예에서, 그 개는 주인의 귀가 시간에 대한 자기의 기대에 대해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실망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귀가가 결코 확실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개의 기대가 위험성이 매우 큰 가설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군요.
3. 사람이든 동물이든 대부분의 지식은 가정적 혹은 추정적입니다. 특히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보이는 지식, 기대의 성질을 갖는 지식은요. 예를 들어 오후 5시 48분에 런던 발 열차가 도착한다는 공식 시간표를 보고 갖는 기대가 여기 해당 합니다
4. 불확실성, 가설적 성질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습득한 지식의 대부분은 객관적으로 진리일 것입니다. 대부분이 객관적 사실들과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의 종으로서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5.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기대 혹은 가설의 참됨과 그것의 확실성을 명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 개념과 확실성 개념을 명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혹은 참과 확실한 참(이를테면 수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참)을 구별해야 할 수 있겠습니다.
6. 우리가 습득한 지식에는 많은 참이 포함되어 있으나 확실성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운 가설에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최대한 엄중하게 검증해, 그것이 거짓으로 증명될 여지가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7. 참은 객관적입니다. 참은 사실과 상응합니다.
8. 확실성은 객관적인 경우가 드믑니다.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불충분한 지식에 근거를 둔 강한 믿음 또는 확신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한 기분은 신뢰할 만한 근거로 됫 받침 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에 매우 위험합니다. 강한 신념은 우리를 독단적으로 만듭니다. 또한 근거가 없음을 무의식적으로 알면서도 스스로에게 확실성을 강요하려 애쓰는, 비이성적인 광신자로 만들기도 합니다.
9. 오직 동물만 뭔가를 알 수 있을까요? 식물들은 알 수 없는 걸까요? 내가 말하는 지식이 생물학적, 진화론적 지식임을 고려한다면 분명 기대와 그에 따른(무의식적) 지식은 동물과 인간뿐 아니라 식물도, 나아가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0. 나무는 땅속 더 깊이 뿌리를 내리면 자기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분을 얻을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적어도 키 큰 나무들은) 어떻게 하면 수직으로 쑥쑥 자랄 수 있는지 알고 있고요, 꽃을 피우는 식물은 때가 오면 곧 날이 따뜻해질 것을 알며, 언제 어떻게 꽃잎을 열고 닫을지 압니다. 복사열 강도 및 기온의 변화를 감지하여 개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식물은 감각기능 혹은 지각에 해당하는 것이 있으며 그에 따라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 덕에, 예를 들면 꿀벌등의 곤충을 유혹하는 법도 아는 것이고요. ※중략 11~19
칸트 철학에서 선험적 지식이란 감각기관의 관찰 이전에 습득되는 지식을 뜻하며, 후험적 지식이란 감각기관을 통한 관찰 이후에 습득되는 지식을 뜻합니다. 나는 선험적과 후험적이라는 용어를 이와 같이 시간적 의미 또는 역사적 의미로만 사용하려고 합니다. (※칸트는 선험적이라는 용어를 관찰에 선행한다는 의미뿐 아니라 선험적으로 타당한이라는 뜻으로도 사용했는데, 이는 그 지식이 반드시 혹은 확실히 참임을 뜻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지식의 불확실성과 가설의 성격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칸트의 용어 사용을 따르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나는 선험적이라는 용어를 한 생명체가 감각 경험 이전에 갖게 되는, 오류의 가능성이 있으며 추측의 성질을 띠는 지식을 칭하는데 사용하겠습니다. 한마디로 선천적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험적 용어는 환경의 일시적 변화들에 대한 자극 감응성을 통해 습득한 지식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하겠습니다. 이렇게 내가 수정한 대로 칸트 철학 용어를 사용하면, 칸트의 입장은(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었는데) 다음과 같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A)대부분의 세부적 지식, 일시적 환경 상태에 대한 지식은 후험적인 것입니다.
(B) 그러나 그러한 후험적 지식은 우리가 관찰을 통해 후험적 지식을 습득하기 전에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하는 선험적 지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선험적 지식 없이는 우리의 감각 기관들이 말해주는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기준이 될 대략적 틀을 먼저 세워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각 정보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맥락이 전혀 없는 것이 되니까요.
(C) 이러한 선험적 지식에는 특히 공간과 시간의 구조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인과성에 대한 지식이 포함됩니다.
나는 모든 생명체가 가진 지식의 99%가량이 타고난 지식, 우리의 생화학적 구조에 편입되어 있는 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각은 우리 스스로 떠올린 질문, 우리가 선험적으로 품거나 묻는 질문, 때로는 매우 복잡한 질문들에 오직 예-아니오로만 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예-아니오의 답도 우리 자신에 의해 해석되어야 하고요. 즉 우리가 선험적으로 획득해 가지고 있던 관념들에 비추어 우리 스스로 해석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은 가설적입니다. 일부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는 환경에 대한 적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는, 예행과 불가피한 오류 그리고 오류 제거의 결과인 것입니다.
생명체의 유전자적 구조에 이식되어 있는 오류 중 어떤 것은 그 오류의 실행자, 즉 해당 개체를 제거함으로써 제거됩니다. 그러나 어떤 오류들은 제거를 피하는데, 이것이 우리 모두 오류를 저지르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환경에 대한 우리의 적응은 결코 최적 상태가 아니며,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개구리는 먹이인 파리가 움직일 때만 그것을 볼 수 있도록 선험적으로 설계돼 있습니다. 파리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개구리는 보지 못합니다. 이렇듯 개구리의 적응은 불완전합니다.
모든 생명체와 그 생명체의 신체기관은 환경에 대한 기대들을 자기에게 통합시킵니다. 그런데 그 기대라는 것은 앞서 확인했듯이 우리가 세우는 이론과 상동합니다. 내 강아지의 코가 내 코와 상동관계인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나는 적응과 기대가 넓게 보면 우리가 내놓는 과학적 이론들과도 상동한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론은 대개 평가를 동반합니다. 어떤 단세포 생물은 빛이나 열 또는 산성에 대한 자극 감응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들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환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생명체의 구조가 이 물은 위험하다,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울지 모른다. 혹은 산성이 지나치게 높거나 지나치게 낮을지도 모른다라는 식의 가설을 자기 구조 안에 통합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분명한 건 그러한 평가 능력은 해당 생명체가 행동을 취할 경우에만 진화한다는 겁니다. 여기서는 위험을 감지하고 그 환경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말하겠지요. 문제와 가치평가, 행동은 동반 진화한다는 얘기입니다.
정통적 경험주의란 우리가 단지 눈을 뜨고 감각기관을 통해 주어진, 혹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데이터가 두뇌로 저절로 쏟아져 들어와 뇌가 그것을 소화하게 내버려 둠으로써 지식을 습득한다는 양동이 이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비판적 태도와 객관적 진리, 이 두 가지는 인간 정신의 최초 산물이자 가장 중요한 산물인 인간 언어와 동반해서만 세상에 개입됩니다. 언어는 우리가 세운 이론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게 해주고, 그 이론들을 외부에 존재하는 객체로, 즉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외부 세계에 속하는 대상으로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론은 비버의 댐처럼,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가치인 사실과의 일치성, 곧 진리에 비추어 그것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6장) 케플러의 태양계 형이상학론 및 경험적 비판론
어제(1986년 11월 7일, 케플러 사망 356 주기 8일 전)는 케플러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날이었습니다. 1631년 11월 7일은 피에르 가상디 Pierre Gassendi(1592~1655. 프랑스 철학. 수학. 물리학자)가 수성이 태양 앞을 지나가는 것을 관측해 그 사실을 확인한 날이거든요. 케플러가 2년 전 예측한 현상이었지요. 안타깝게도 케플러는 자신의 새로운 행성 이론에 대한 최초의 경험적 확증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59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났거든요.
[2부] 역사와 정치에 관한 고찰
(7장) 자유에 대하여
우리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프랑스령 알프스의 인류 정착 역사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 지역의 정착 역사는 고대까지 거슬러갑니다. 그러나 본래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사람들이 단단하고 메마른 데다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겨우 생계유지만 가능한 알프스 고지대 협곡에 어떻게 정착하게 됐는지를 우리는 반드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그들이 자신들보다 힘 있는 이웃에게 복속되느니 황무지에서의 불확실한 삶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불확실성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택한 것입니다. 나는 특히 자유를 중시하는 스위스와 티롤(오스트리아 서부와 이탈리아 불부에 걸친 산악 지대 :옮긴이)의 전통이 스위스의 선사시대 인류 정착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영국의 민주주의는 그 발생 기원을 상류 귀족층의 긍지와 자주정신에, 그리고 이후 민주주의 발전기에는 신교도 정신과 시민의 자각, 종교의 관용에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후자로 언급한 요소들은 청교도혁명과 관련된 대규모 종교적. 정치적 대립의 결과로 대두된 것들입니다. 반면에 스위스의 민주주의는 상류 귀족층이 아닌 산악지대 농부들의 긍지와 자주정신 그리고 개인주의의 결과로 등장했습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출발과 전통은 그만큼 다른 전통적 제도와 가치체계로 이어졌습니다. 스위스 사람이나 티롤 사람이 인생에서 기대하고 바라는 것들은 영국인이 인생에서 기대하고 바라는 것과 사뭇 다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영국에서는 20세기에 들어서고 한참 후에도 교육은 귀족이나 토지 소유자, 즉 지주계급의 특권이었습니다. 더 정확히는 도시 거주자나 중산층 시민들이 아니라 경작지에 거주하고 토지를 소유한 가문들의 특권이었죠. 그들은 문화 독점자였습니다. 공직에 적을 두지 않은 학자 및 과학자들과 고위 관직자들 또한 그 계층에서 배출되었습니다. 반대로 대륙(유럽)의 문화 주도자는 도시 거주자들로, 대개 도시의 부르주아 계층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서 교육과 문화는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획득한 것이었죠. 교육과 문화는 상속받은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 아니라 사회적 출세의, 또 지식을 통한 자기 해방의 수단이자 상징이었습니다.
합리주의자는 한마디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 남에게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단,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에 대한 다른 사람의 비판을 혼쾌히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생각 또한 신중히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합리주의자는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의 진실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판만 가지고 새로운 관념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다만 인간이 품는 관념에 한해서, 오직 비판적 논의를 통해서 쭉정이에서 낱알을 가려낼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사상의 수용 혹은 거부가 순전히 이성적인 문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한 가지 관념을 다각도로 검토하고 타당한 판단을 내리는 데 필요한 성숙함은 오직 비판적 논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합리주의적 접근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 누가 옳고 그른지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 논의가 끝났을 때 우리 모두 이 문제를 전보다 더 명료하게 볼 수 있기를 바라자. 이 목표를 염두에 둘 때에만 우리는 토론에서 자신의 주장을 최대한 펼쳐 보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합리주의입니다. 그러나 계몽주의라고 하면 다릅니다.
계몽주의 사상가는 최대한 단순하게 이야기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기를 바라기 때문이죠.
(8장) 민주주의에 대하여
(9장)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생물의 진화는 오류로 가득 차 있으며, 이러한 오류의 수정은 아주 천천히 이루어집니다. ~~~단세포 생물부터 모든 생명체는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것들을 발명해냅니다. 새로운 발명이나 돌연변이는 대개 제거되는데, 성공적 시행보다 형편없는 실수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생각해낸 수많은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전에 그것이 오류임을 알아채기도 하며, 어떤 경우 세상에 내보이기 전 비판을 통해 아이디어가 제거되기도 합니다.
모든 생명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실력이 있건 형편없건, 또 성공하건 성공하지 못하건 간에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발명가이자 전문가입니다. 모든 동물의 생이 다 이렇습니다. 예를 들면 거미도 그렇지요. 인간의 기술이 하수 처리나 물과 식량의 비축 같은 문제를 해결한다면 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특정 화학제품이 모기와 기타 해충의 퇴치에 매우 효과적이라고 판명됐는데 그만 몇 종의 새가 먹이 부족으로 멸종 위기에 처하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자연주의 동식물학자 레이첼 카슨은 이 사건의 전후 사정을 <침묵의 봄>이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낱낱이 폭로했습니다. 이어서 독일에서도 폭풍을 일으켜 과학과 기술에 반대하는 정치적 운동을 야기하는가 하면, 새로운 정당인 녹색당까지 창설되었죠.
일부 문제를 (예를 들어 대기 오염 같은) 특별법 제정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소위 자유 시장 경제를 이념적으로 신봉하는 이들은 (물론 자유 시장 경제가 우리에게 많은 이로움을 안겨주긴 했으나) 시장의 자유를 제한하는 특별법 제정이 농노제 사회로 퇴행하는 위험한 행보라고 주장하며 핏대를 세웁니다. 그런 주장 역시 이념에 눈먼 헛소리입니다. 이미 46년 전 <열린사회와 그 적들> 초판본에서 나는 오직 국가가 법적 질서를 세우고 보장하는 상태에서만 자유시장이 존재할 수 있음을 논리적 근거를 들어 설명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질서 중 하나는 무장단체 조직의 금지입니다. 여기에는 무기를 거래할 자유의 제한도 따릅니다. 즉 자유시장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한입니다. ~~~우리는 보편적인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야생동물이나 사냥개를 통제하듯, 무기사장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자유가 걸린 문제는 항상 이런 식입니다. 환경이나 대규모 산업이 얽힌 경우에만 이렇게 복잡해지는 게 아닙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수반합니다.
인간의 발명을 두 가지로 분류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기존의 산업을 더욱 발전시키는 발명입니다. 가장 좋은 예가 영국 산업혁명을 촉발한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입니다. 그러한 발명은 생산수단의 향상을 가져온 발명으로 분류해도 좋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화적 발명입니다. 그중 최고로 꼽을 만한 것이 인간의 언어이며, 다양한 형태의 문자와 글, (대략 기원전 300년 경) 아테네에서 있었던 최초의 도서 시장, 인쇄된 책, 인쇄기, 타자기, 컴퓨터 등등이 뒤를 잇습니다.
최초 인쇄기의 기원이 증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아이디어는 굉장히 단순했습니다. 여러분 중 어렸을 때 압지를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압지는 단시간에 마르는 잉크 덕분에 불필요해졌습니다. 와트의 아이디어는 계속해서 적셔지는 잉크를, 그것을 흡수하는 압지와 결합한 것이었습니다. 좌우가 반대로 새겨지는 거울효과를 피하기 위해, 그는 특수 제작된 아주 엷은 압지를 사용해 잉크가 스며들면서 반대면에 글자가 나타나게 하여 읽을 수 있게 했습니다. 두 겹의 종이와 잉크 구성까지 포함하는 이 장치의 특허 취득연도는 1780년! 가장 오래된 인쇄기인 이 발명품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알려진 적이 있기나 한지 의문이지만요. 이 장치는 아직도 작동합니다. 비록 한 번에 몇 장밖에 인쇄할 수 없지만, 글 쓰는 사람에게는 아주 유용한 장치였을 것입니다.
(10장) 냉소주의적 역사관에 반대하며
나는 한평생 지루함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수업을 들을 때만 빼고요. 특히 뇌를 마비시키는 학교 수업들이 지루했는데, 역사와 지리 수업이 유독 그 강도가 심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11장) 평화를 위한 전쟁)
(12장) 공산주의 몰락: 과거를 이해해야 미래를 바꿀 수 있다
나는 마르크시즘에 반대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강연은 서방세계에 가해진 마르크시즘의 공격, 1917년 10월 레닌과 트로츠키의 혁명으로 촉발된 마르크시즘 공격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룰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이 어떤 과정으로 몰락했는지는 여기 모인 우리가 산증인이나 다름없으니 다들 잘 알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7월 28일도 생생히 기억합니다(그 날은 내 열 두 번째 생일이었지요). 먼저 아버지의 편지에서 소식을 접했고. 이어서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대국민 성명문으로도 확인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그들이 시작한 전쟁에서 패할 것을 예감한 1916년의 어느 날도 기억합니다. 1917년 3월 러시아에서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났던 날도 기억합니다. 이어서 레닌이 주도한 케렌스키 임시정부 전복과 러시아 혁명의 시작도, 1918년 3월 러시아와 독일의 평화조약도, 1918년 10월에 전쟁을 종식할 오스트리아와 독일제국의 몰락도 기억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념 전쟁의 기구를 해체할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은 rdh통의 인도주의적 노선을 채택할 수 있다.
1.자유를 강화하되, 책임의식으로 통제한다.
2. 세계 평화: 원자폭탄과 핵탄두가 이미 발명된 이상 문명국들은 평화 유지와 핵폭탄 수소폭탄의 확산 방지에 공동으로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최우선 임무입니다. 그 임무를 다하지 않으면 문명사회는 사라질 것이며, 곧이어 인류 전체가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3.빈곤과의 싸움
4. 인구 폭발 억제
5. 비폭력 교육
(13장) 지식은 평화를 위해 쓰여야 한다.
오토 한이라는 이름이 붙은 상을 받게 됐다는 것이 특히 감동입니다. 우라늄 핵분열을 성공시키기 20년 전에도 이미 오토 한은 내게 큰 우상이었습니다. 새로운 방사성 원소와 새로운 원자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방사능까지 발견한 방사화학 및 원자 이론 학계의 위대한 연구자 중 한 사람이었지요. 내가 열여섯 살이던 1918년에 벌써 오토 한은 퀴리 부부, 에른스트 리더포드, 윌리엄 램비, 이론가인 막스 프랑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대한 과학자 반열에 올라 있었습니다.
나의 스승이자 지금은 거의 잊힌 원자과학자 아서 하스가 저술한<원자론>을 읽으면서 오토 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고요. 1929년에 나온 개정판은 책장이 닳도록 읽고 또 읽어서 어디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다 기억할 정도입니다.
나는 아주 젊었을 때부터 오토 한을 과학자이자 한 인간으로서 존경해왔습니다. 무려 75년이나 그를 존경해왔는데 이렇게 그의 이름이 붙은 오토 한 평화상을 오늘 받게 되는군요. 그러나 나에게 의미 있는 건 단지 오토 한이라는 이름만이 아닙니다. 내 평생,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날 이래로 평화수호라는 문제는 늘 개인적 책임으로 나의 의식에 머물렀습니다. 그렇기에 평화상 수상자 결정에 관여하신 모든 분께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일곱 살의 나를 단단히 매료시킨 그 책은 <극북(Farthest North)> 독일어판 이었습니다. 1893년에 시작해 1896년까지 3년 넘게 이어진, 극지방 탐험가 난센(Fridtjof Nansen)의 생생한 북극 탐험을 기록한 책입니다.
어린 시절 내게 이보다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없었습니다. 그 책은 발견에 대한 흥미에 불을 지폈습니다. 탐험만이 아니라 이론적 발견에 대한 관심도 타올랐지요. 난센의 책은 어린 내게 과감하고 대담한 이론,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대담한 가설의 중요성을 깨우쳐주었습니다. 난센의 탐험 계획도 이론적 계산과 대담한 아이디어에 기반을 둔 것이었거든요.
덕분에 과학 연구와 이론 연구를 포함해 모든 연구는 대담한 가설을 밀어붙이고 그것을 실험적으로 검증하는 단계로 이루어진다는 개념이 어렸을 적부터 또렷이 각인되었습니다. 과학이 처음부터 확신이 가는 결과가 아닌 실험적 탐구로 이루어진 것이라 는 ,어쩌면 다소 낭만적인 관점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과학은 주로 반복된 도전으로 성취되는 발견들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지요. 확고한 사실들이 아니라 불확실한 가설들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따라서 연구자는 때로 자신의 지적 책임을 시험대에 올리는 모험을 감행해야 합니다.
가설 없이 실험이 이루어질 수 없음은 이미 찰스 다윈이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난센은 그보다 조금 더 나아갔습니다. 터무니없는 가설을 내놓는 것이 아무 가설도 제시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했거든요. 그 예로 그는 북유럽 신화 또는 전설로 간주되는 세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얼음에 갇히지 않고 일본과 중국에 이르는 세 가지 탐험 항로를 말하는 겁니다. 첫째는 북아시아에 이르는 북동로, 둘째는 북아메리카 북단에 닿는 북서로, 셋째는 유빙과 충돌 없이 북극을 곧장 지나 북반구를 가로지르는 루트입니다. 언뜻 황당무계하게 들리는 이 가설들이 결국에는 인류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 가설들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지구에 대한 인간의 지식이 크게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조사하고 탐구해서 소용없는 일은 없다. 잘못된 가정에서 시작된 것이라 해도 말이다.
어렸을 때 이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나는 그것이 내게 얼마나 지속적으로 영향을 줄 것인지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원자에 대한 나의 관심(그리고 오토 한 같은 핵물리학자 및 방사능화학자들에 대한 경외감)또한 난센의 영향으로 생긴 것임을 이제는 분명히 알겠습니다.
디트리히 한의 책에서 알프레드 베게너에 대한 부분도 몹시 흥미로웠습니다. 베게너도 난센처럼 자신의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목숨을 건, 나의 어린 시절 영웅 중 하나였거든요.
(14장) 마사리크와 열린사회의 힘
전쟁에서 패하고 피폐해진 오스트리아제국에서 분리된 국가들 중 성공적으로 독립한 국가는 마사리크의 창조물인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유일했습니다. ~~~마사리크의 철학과 지혜 덕분이었고, 용기와 진실함이 작용한 결과였고, 또한 용기와 진실성, 열린 태도가 두드러진 그의 성정 덕분이었습니다.
(15장) 문제들과 사랑에 빠졌더니 어느 날 철학자가 되어 있더라
오늘 이 첫 번째 강연은 우리 각자의 인생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해서 각자의 전문 분야에 관심과 열정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긴 생애 동안 철학자가 되고 싶다 라거나 철학을 공부해야지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조금 지나서는 중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고요. 수학과 물리학, 화학, 생물학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이런 목표를 가지고 나는 1918년 열여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학교를 그만 두고 빈 종합대학교 수학과와 물리학과에 들어가 비범한 학생이 되었습니다. 3년 후에는 그냥 범상한 학생이 되었고, 다시 7년 후 1928년에는 철학박사 학위와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교사 자격증을 모두 손에 넣었습니다.
나는 1935년에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를 모두 만나봤는데, 슈뢰딩거와는 1961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좋은 친구로 남았습니다.
처음 철학적 질문을 던진 건 일곱 살인가 여덟 살 때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무한대 개념, 그리고 공간의 무한성 개념을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무한대 개념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설명을 듣고 싶다고요. 아버지는 숙부에게 물어보라고 했고, 실제로 숙부는 엄밀히는 실무한 혹은 칸토어의 무한 개념과 대비되는 가무한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무한 개념에 대하여 상당히 훌륭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그 설명은 내 궁금증을 거의 완벽히 해소시켜주었습니다. 이후 칸토어의 무한 개념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생겼고, 그 의문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두 권에 걸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얼마 전 나의 90세 생일을 기념해 독일어 개정판이 출간되어, 번역을 다듬기 위해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들여다봐야 했습니다. 두 권에 새 부록까지 합쳐 1,000쪽이 넘는 분량입니다. ~~~사실상 나는 그 책을 매번 내용을 더 명료하게 하고 단순화하려고 노력하면서 스물두 번이나 교정했고, 아내도 원고 전체를 무려 다섯 번이나(낡아서 잘 작동도 안 되는 타자기로) 다시 쳐야 했습니다. 1945년 마침내 출판되기 까지 또 2년 3개월이 걸렸고요.
첫 번째 책인 <탐구의 논리>가 출간된 1934년, 나는 교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집필을 마쳤을 때 원고 분량은 1934년 출간본의 두 배였는데, 편집자가 내게 정확히 얼마만큼을 쳐내야 할지 말해주었죠. 그 책의 중신 주제가 된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것은 1919년에 1920년으로 가는 겨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발표할 생각도 없었던 아이디어를 14년 내지 15년 동안 주무르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1919년 6월부터 7월 사이에는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사상들에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품게 되었고, 그 이론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지요. ~~~당시 나는 고작 열일곱 살이어서 당연히 누가 내 연구 결과를 알고자 하거나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 연구의 결과는 25년 후 <열린사회와 그 적들>로 발표됐습니다. ~~~작고한 나의 친구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가 쓴 유명한 작품<노예의 길>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고 할까요, 하이에크는 올해 3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Review]
연일 무더위 속에 어제 전력수요가 사상 최고치 93.615GW를 기록했다고 한다. 일반인들은 이 수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100만 KW의 전력을 생산하는 원자력 발전소가 100개 가까이 전 출력으로 전력을 생산해 낼 때의 전력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세계 청소년들의 축제인 새만금 잼버리 축제가 더위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게 되자 여기저기서 불만과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태풍 카눈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한반도 중심을 관통하려고 북상 중이라는 소식에 정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부랴부랴 장소를 수도권으로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시간이 급박한지라 1,000대의 버스를 일시에 동원해서 인력을 수송한다는 그야말로 전시 작전을 방불케 하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다.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무더위 속에 더위를 피하려고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이다. 지극히 당연한 말인 것처럼 다가왔지만 ‘칼 포퍼’라는 저자의 명성에 마음이 끌렸다. 1902년생으로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와 교분을 쌓았고, 세계 1, 2차 세계 대전, ‘닐스 보어’와 ’아인슈타인‘과 같은 당대의 과학자들이 성과를 이루던 시대에 영향력 있는 과학철학자로서 이름을 남겼다. 한때는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심리학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다. 공산주의가 출몰하던 당시에 영향력 있는 정치철학자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7월 28일도 생생히 기억합니다(그 날은 내 열 두 번째 생일이었지요). 먼저 아버지의 편지에서 소식을 접했고. 이어서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대국민 성명문으로도 확인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그들이 시작한 전쟁에서 패할 것을 예감한 1916년의 어느 날도 기억합니다. 1917년 3월 러시아에서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났던 날도 기억합니다. 이어서 레닌이 주도한 케렌스키 임시정부 전복과 러시아 혁명의 시작도, 1918년 3월 러시아와 독일의 평화조약도, 1918년 10월에 전쟁을 종식할 오스트리아와 독일제국의 몰락도 기억합니다.”(본문)
이 책은 포퍼가 말년에 행한 강연과 에세이를 엮은 것으로 총 1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자연과학에 관한 문제들’이라는 주제로 과학과 생물학적 관련성에 대한 철학적 관점으로 진화론, 육체와 정신, 우주 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2부에서는 ‘역사와 정치에 대한 고찰’이라는 주제로 인간의 자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평화 등, 끝으로 자신의 인생 항로에 대한 소회를 밝히는 에세이 형식의 글로 되어있다.
포퍼가 말하는 인간 삶의 모든 일들은 1) 문제의 발견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2) 다양한 시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3) 오류를 제거하는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며, 과학 연구 과정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대표 이론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라도 그것의 장점이 아니라 문제를 지속해 발견하는 태도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해결의 방법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 시각으로 볼 때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당대의 과학자들이 지닌 지식의 완고한 태도에 대한 비판적 견해였다.
마지막 삶의 행로를 기록한 에세이에서 ‘칼 포퍼’는 자신이 주장하는 비판적 사고를 통해 끝없이 새로운 문제를 토출하고 또 해결하는 태도는 이미 그가 일곱 살 때 아버지에게 물었던 수학에서 ‘무한대 개념’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극지방 탐험가 ‘난센(Fridtjof Nansan)'의 북극 탐험을 기록한 책<극북(Farthest North)>에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발견에 큰 영향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이 모든 사람에게 다 흥미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무더위 중에 책을 읽으며 여러 번 책을 덮었다가 다시 읽기를 반복할 만큼 내게는 지루함을 주는 책이었다. 서두에서 잼버리 축제를 언급한 이유는 5년 동안 준비했다는 축제가 너무 허망하게 진행되어 간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름대로 실무자들이 준비하며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 ‘칼 포퍼’라면 이 일을 어떻게 했을까라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시행착오가 새로운 문제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바른 결과가 얻어진다는 점에서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라는 ‘칼 포퍼’의 말에 공감할 수 있다.■
(본문)
“일곱 살의 나를 단단히 매료시킨 그 책은 <극북(Farthest North)> 독일어판 이었습니다. 1893년에 시작해 1896년까지 3년 넘게 이어진, 극지방 탐험가 난센(Fridtjof Nansen)의 생생한 북극 탐험을 기록한 책입니다. 어린 시절 내게 이보다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없었습니다. 그 책은 발견에 대한 흥미에 불을 지폈습니다. 탐험만이 아니라 이론적 발견에 대한 관심도 타올랐지요. 난센의 책은 어린 내게 과감하고 대담한 이론,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대담한 가설의 중요성을 깨우쳐주었습니다. 난센의 탐험 계획도 이론적 계산과 대담한 아이디어에 기반을 둔 것이었거든요.”
“덕분에 과학 연구와 이론 연구를 포함해 모든 연구는 대담한 가설을 밀어붙이고 그것을 실험적으로 검증하는 단계로 이루어진다는 개념이 어렸을 적부터 또렷이 각인되었습니다. 과학이 처음부터 확신이 가는 결과가 아닌 실험적 탐구로 이루어진 것이라 는 ,어쩌면 다소 낭만적인 관점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과학은 주로 반복된 도전으로 성취되는 발견들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지요. 확고한 사실들이 아니라 불확실한 가설들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따라서 연구자는 때로 자신의 지적 책임을 시험대에 올리는 모험을 감행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조금 지나서는 중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고요. 수학과 물리학, 화학, 생물학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이런 목표를 가지고 나는 1918년 열여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학교를 그만 두고 빈 종합대학교 수학과와 물리학과에 들어가 비범한 학생이 되었습니다. 3년 후에는 그냥 범상한 학생이 되었고, 다시 7년 후 1928년에는 철학박사 학위와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교사 자격증을 모두 손에 넣었습니다. ”
“옛 과학 이론은 과학의 출발점이 우리의 감각 인식 혹은 감각기관의 관찰이라고 가르쳤고, 지금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언뜻 매우 합당하고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사실 이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문제가 없으면 관찰도 없다는 명제 하나만으로도 그것이 잘못됐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유전 장치는 변화나 돌연변이가 유전 구조에서 반복해서 일어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진화론에서는 이러한 돌연변이가 3단계 모델 중 2단계인 시도된 해결책들의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대개의 경우 돌연변이는 치명적입니다. 돌연변이 보유자와 돌연변이 가 발생한 생명체에 치명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돌연변이 개체들은 모델의 3단계에 따라 제거됩니다.”
“모든 생명체와 그 생명체의 신체기관은 환경에 대한 기대들을 자기에게 통합시킵니다. 그런데 그 기대라는 것은 앞서 확인했듯이 우리가 세우는 이론과 상동합니다. 내 강아지의 코가 내 코와 상동관계인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나는 적응과 기대가 넓게 보면 우리가 내놓는 과학적 이론들과도 상동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론은 대개 평가를 동반합니다. 어떤 단세포 생물은 빛이나 열 또는 산성에 대한 자극 감응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들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환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생명체의 구조가 이 물은 위험하다,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울지 모른다. 혹은 산성이 지나치게 높거나 지나치게 낮을지도 모른다라는 식의 가설을 자기 구조 안에 통합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모든 생명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실력이 있건 형편없건, 또 성공하건 성공하지 못하건 간에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발명가이자 전문가입니다. 모든 동물의 생이 다 이렇습니다. 예를 들면 거미도 그렇지요. 인간의 기술이 하수 처리나 물과 식량의 비축 같은 문제를 해결한다면 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가설 없이 실험이 이루어질 수 없음은 이미 찰스 다윈이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난센은 그보다 조금 더 나아갔습니다. 터무니없는 가설을 내놓는 것이 아무 가살도 제시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했거든요. 그 예로 그는 북유럽 신화 또는 전설로 간주되는 세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얼음에 갇히지 않고 일본과 중국에 이르는 세 가지 탐험 항로를 말하는 겁니다. 첫째는 북아시아에 이르는 북동로, 둘째는 북아메리카 북단에 닿는 북서로, 셋째는 유빙과 충돌 없이 북극을 곧장 지나 북반구를 가로지르는 루트입니다. 언뜻 황당무계하게 들리는 이 가설들이 결국에는 인류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 가설들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지구에 대한 인간의 지식이 크게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조사하고 탐구해서 소용없는 일은 없다. 잘못된 가정에서 시작된 것이라 해도 말이다.”
“어렸을 때 이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나는 그것이 내게 얼마나 지속적으로 영향을 줄 것인지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원자에 대한 나의 관심(그리고 오토 한 같은 핵물리학자 및 방사능화학자들에 대한 경외감)또한 난센의 영향으로 생긴 것임을 이제는 분명히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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