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틴이 느끼는 불안감, 열정, 허약함, 열등감이 그대로 국가정책이 되었다. 그가 피해망상에 빠지면 국가 전체가 적을 두려워하고 스파이를 겁내야 한다. 그가 불면증에 시달리면 모든 각료들이 함께 밤을 새워야 한다. 그가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으면 모두가 금주를 하고, 그가 술에 취하면 모두 함께 취해야 한다. 그가 미국을 좋아하지 않으면 전 국민이 미국을 싫어해야 한다.”
-블라디미르 소로킨|러시아 작가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지국장을 지낸 저자의 이 책은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라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통렬한 평전이다. 영어로 쓴 푸틴 평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저자는 2002년부터 7년 넘게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푸틴 재임시절 일어난 큰 사건들을 현장 취재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폐허가 된 레닌그라드에서의 어린 시절, KGB 근무,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다음 근무지 드레스덴에서 철수하고 나서의 공백기, 이후 권력 핵심부로 진입해나가는 과정을 광범위한 자료를 바탕으로 상세히 소개한다. 이 과정에서 9/11 테러, 2008년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 크림반도 합병, 우크라이나 내전과 시리아 사태 개입 등이 등장한다.
책은 푸틴이라는 한 인물의 철학과 권력에 대해 종합적이고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그린다. 푸틴은 조세인하와 공산체제 이후 사유재산권 확대 등 많은 개혁조치들을 통해 러시아 국민들의 삶을 개선시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소련연방 해체 이후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러시아 국민들이 경험한 민주주의는 부패와 범죄, 빈곤, 혼란뿐이었다. 푸틴은 새로운 권위주의 통치를 확고히 하고, 반대세력과 민주진영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언론을 장악했다. 국제적으로 고립이 심화되는 가운데서도 국민들의 지지는 더 높아지는 기이한 권력이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푸틴이 자신을 어떤 지도자로 그리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러시아를 구원할 유일한 지도자이고, 러시아 사회에 안정과 질서를 찾아주고, 길거리의 혼돈을 종식시킨 지도자로 평가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 당당하게 맞서서 주권을 누리고, 국가이익을 지킬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그렇다고 소련제국으로의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그가 그리는 러시아의 미래는 강대국 소련과 옛 러시아를 합친 대(大)러시아 구상이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서방세계를 구원할 ‘제3의 로마’를 염두에 두기도 하다.
그는 초강대국 소련연방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고, 이후 1990년대를 지배한 불확실성과 불안정을 몸소 경험했다. 소련체제의 붕괴를 목격한 충격과 공포 때문에 그는 스스로 ‘러시아의 안정을 지키는 살아 있는 수호자’가 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안정’을 내세워 비상한 방법으로 권력을 굳혀 나갔다. 2000~2008년 사이 첫 번째 두 번의 임기 동안 그는 재벌 올리가르히들을 완전히 수중에 넣고, 언론을 장악하고, 거대 석유그룹 유코스 오일을 해체하고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회장을 감옥으로 보냈다. 이제는 푸틴의 측근 친구들이 러시아의 주요 산업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고삐 풀린 민주주의는 혼란을 낳을 뿐이라고 믿는 그는 속칭 ‘관리된 민주주의’(managed democracy)를 신봉한다. 선거는 이름뿐이고, 야당은 무력화되었다.
이 평전은 저자가 취재한 풍부한 현장자료를 바탕으로 흥미진진하게 쓴 걸작 서사시 같은 책이다. 푸틴의 권력과 야망, 권력 장악과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국제정세와 강대국으로 복귀하고 있는 러시아의 힘과 그에 따르는 국제적인 세력판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책속으로 추가
푸틴 대통령의 아버지는 1941년 나치가 침공해 왔을 때 제대 군인이었다. 1930년대 해군에 입대해 잠수함에서 복무했고, 그 뒤 레닌그라드에서 멀지 않은 페트로드포레츠 마을에 정착했다. 표트르 대제가 핀란드만 해안에 여름궁전을 건설한 곳이었다. 나치가 침공하자 그는 다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자원입대해 도시 방어에 나섰는데, 처음에는 내무인민위원회(NKVD) 소속의 특수폭파공작대에 배치됐다. 내무인민위원회는 무시무시한 비밀경찰 조직으로 나중에 KGB로 개편되었다. 내무인민위원회는 당시 2222개의 특수공작대를 만들어 신속히 전진하는 나치군을 배후에서 괴롭혔다. 푸틴의 아버지가 투입된 첫 번째 작전은 대실패로 끝났다.
그는 자원입대한 27명의 동료들과 함께 레닌그라드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후방 킨기셰프 마을 인근에 낙하산으로 침투했다. 그 전 해에 소련이 히틀러와 맺은 비밀조약에 따라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소련에 합병된 에스토니아 국경 가까운 곳이었다. 그가 소속된 공작대는 무기고 한 곳을 폭파했으나 얼마 못 가 탄약과 레이션이 동났다. 에스토니아인인 현지 주민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주면서 이들을 독일군에게 신고했다. 당시 주민들은 소련 점령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준 나치를 환영했다. 독일군은 소련군 공작대를 추격했고, 푸틴의 부대는 독일군에 쫓겨 습지대에 몸을 숨기고 갈대줄기로 숨을 쉬며 추격대를 피했다.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공작대에서 푸틴을 비롯해 네 명이 목숨을 건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후 NKVD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으나, 도주한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져 다시 전선으로 투입됐다. 당시 스탈린 명령 제270호는 적에게 투항한 군인은 처형하고 가족도 처벌하도록 했다.
레닌그라드 내부 상황은 급속히 악화됐다. 9월 1일까지는 학교도 정상적으로 문을 열었으나, 사흘 뒤 독일군의 첫 번째 포탄이 도시로 날아들었다. 도시는 완전히 포위됐고 수시로 포탄이 떨어졌다. 식량배급제가 실시됐으나 배급량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푸틴은 도시 외곽 전투에 참가했으나 아내 마리아는 갓난 아들과 함께 도시에 갇혔다. 부부는 둘 다 1911년 생으로 1차세계대전, 볼세비키혁명과 내전 등 격동의 20세기를 지내온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포미노보에서 만나 1928년에 결혼했다. 두 사람 모두 17살 때였고, 이들은 신혼 때인 1932년 레닌그라드로 돌아가 페트로드보레츠에 정착했다. 푸틴이 군에 입대할 무렵 부부에게는 올레그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으나 태어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일 년 전에 두 번째 아들 빅토르가 태어났다.
마리아가 어린 아들 빅토르와 함께 사는 마을은 용케 나치에 점령당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처음에는 페트로드포레츠 마을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으나 독일군이 진격해 오면서 친정오빠 이반 셀로모프의 권유에 따라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이반은 발트함대 사령부에서 함장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독일군이 밀고 들어오는 가운데서도 어느 정도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반의 도움으로 가족은 전투가 진행되는 가운데 다른 곳으로 옮겼으나 새로 옮겨간 마을의 운명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겨울이 다가오며 상황은 더 끔찍해졌다. 극심한 추위 속에서 마리아는 빅토르를 데리고 주위에서 물려드는 피난민들을 위해 당국이 마련한 가옥에 머물렀다. 오빠가 자기가 받은 레이션을 나누어주어서 연명했으나 마리아의 건강은 나빠졌다.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루는 남편인 푸틴이 전선으로 나간 사이에 정신을 잃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그녀가 죽은 줄 알고 거리에 쌓인 시체더미 위에 옮겨 놓았다. 그 뒤 시체보관소로 옮겨졌다가, 그곳에서 사람들이 그녀의 신음소리를 들어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
스피리도노비치 푸틴이 목숨을 건진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는 부상당한 채 몇 시간 동안 네바강가에 누워 있었는데, 소련군 병사들이 발견해 강가에 있는 여단 집결지로 옮겼다. 그곳에서 지나가던 이웃사람이 야전병원 쓰레기장에서 그를 알아보지 않았더라면 그도 파타초크에서 전사한 30만 명의 군인 가운데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웃사람은 그를 어깨에 둘러업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 반대편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고, 그는 군병원에서 몇 달을 보내고 회복했다. 도시 외곽으로 통하는 마지막 길마저 봉쇄당하고 주민과 군인 3백만 명이 포위됐다. 마리아는 도시를 떠나지 않고 버티다가 마침내 병원에 있는 남편을 찾아냈다. 도시는 점차 폐허로 변하고 주민들은 굶주림으로 죽어갔고, 거리 곳곳에 시체더미가 쌓였다. 1942년 1월, 2월에는 매달 1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미점령 지역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은 얼어붙은 라도가호수 위로 이리저리 난 ‘생명 통로’가 전부였다. 이 길을 통해 극소량의 구호물품이 도시로 공급되었고, 소련군은 1943년 1월이 되어서야 나치의 포위망 동쪽을 뚫고 들어갔다.
그때부터 도시가 나치의 포위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기까지 꼬박 일 년이 더 걸렸다. 이후 소련군은 단숨에 베를린까지 밀고 들어갔다.
스피리도노비치 푸틴과 마리아 부부는 살아남았지만 푸틴은 전쟁 중에 당한 부상으로 평생 다리를 절며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는 1942년 4월 병원에서 퇴원해 박격포와 대전차 지뢰를 생산하는 무기 공장으로 배치됐다. 아들 빅토르는 1942년 6월에 디프테리아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아이는 47만 명의 민간인, 군인 전사자들과 함께 피스카료프스코예 공동묘지에 묻혔다. 부모 모두 아이가 묻힌 장소가 정확히 어디인지 몰랐고, 알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아이의 일에 대해서는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했다. 마리아의 친정어머니 엘리자베타 셀로모바는 1941년 10월 모스크바 서부전선에서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앗아간 게 소련군 포탄 파편인지 독일군 파편인지 분명치 않았다. 친정오빠 이반은 살아남았지만, 다른 오빠 표트르는 전쟁 초기에 근무태만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됐는데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스피리도노비치 푸틴의 형제 두 명도 전쟁 중에 목숨을 잃었다. 미하일은 1942년 7월에 죽었는데, 사망 당시의 정확한 정황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알렉세이는 1943년 2월, 보로네즈 전선에서 전사했다.
이것이 바로 블라디미르 스피리도노비치 푸틴과 마리아 부부의 세 번째 아들이 자라면서 대(大)조국전쟁이라고 부르는 2차세계대전에 관해 들은 이야기였다. 영웅주의와 전쟁의 아픈 이야기는 그의 머리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영향을 미쳤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레닌그라드의 공동가옥에 놓인 복닥거리는 식탁에서 오고가는 이야기에서 단편적으로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통해 그는 가족의 내력을 알게 되었다. 일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진 기억 때문에 각색되고, 일부는 사실 여부가 불분명한 이야기들이었다. 푸틴 가족은 평범한 사람들로, 전쟁의 어두운 면을 깊이 들여다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대숙청 기간 중에 편집광적인 숙청을 통해 전쟁 전까지 군병력의 수를 대폭 줄여 놓았다. 히틀러의 유럽 정복계획에 대한 묵인, 1939년의 폴란드 분할, 발트해 강제합병, 나치 침공 이후 소련이 겪은 대혼란,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기근사태를 악화시킨 관료조직의 부패, 소련군이 베를린 침공 때 저지른 잔혹행위들 등등. 1953년에 스탈린이 죽고 나서도 국가의 잘못에 대해 말하는 것은 위험했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그저 귓속말로만 주고받았다. 전쟁이 승리로 끝난 것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자부심을 안겨 주었다. 푸틴 일가도 작지만 승리에 기여했다. 사람들은 전쟁 중에 저질러진 잘못에 대해서는 말할 겨를이 없었다. 오직 승리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세 번째 아들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은 1952년 10월 7일, 아직 포위 때 겪은 상처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모든 것이 부족했고 공포가 사람들의 뇌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스탈린의 피해망상은 숙청과 보복으로 이어졌다. 1940년대 말, 레닌그라드의 전시 엘리트 인사들은 민간인이건 군인이건 불문하고 대대적인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수십 명에 달하는 당 간부와 관련자들이 체포되어 투옥되고, 추방당하거나 총살되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두려움에 입을 다물었다. 스탈린의 요리를 담당할 만큼 신임을 받은 사람의 후손들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과 조금이라도 인연을 맺은 사람들 가운데 무사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무사히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본인이 겪으신 일을 거의 입 밖에 내지 않았어요. 부모님도 마찬가지고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어요.”
푸틴의 아버지는 말없고 무뚝뚝한 성격이었다. 아버지가 겪은 전쟁의 경험은 아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는 전쟁 중에 당한 부상 때문에 평생 고통스러워했고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은 통증이 더 심했다.
전쟁이 끝난 뒤 푸틴의 아버지는 모스콥스키 프로스펙트에 있는 예고로브 공장에서 일을 계속했다. 철도와 지하철 객차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공산당원인 그는 공장에서 당을 대표하는 자리에 올랐다. 블루칼라 아파라치키로서 엄격함과 충성심, 원칙을 지키고 무엇보다도 매사에 신중해야 하는 자리였다. 직책 덕분에 낡은 공동주택 5층에 180평방피트짜리 방 한 칸이 배정되었다. 레닌그라드 시내 중심가 네프스키 프로스펙트에서 멀지 않은 바스코프 대로 12번지에 있는 19세기에 지은 아파트였다. 한때는 우아한 건물이었으며 그리보예도프 운하에서 멀지 않았다. 푸틴 일가는 1944년 이 집으로 이사했는데,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이 좁은 집에서 다른 두 가족과 함께 지내야 했다. 그 집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아파트에는 온수가 나오지 않고 욕실도 없었다. 창 없는 통로를 공동부엌으로 썼고, 싱크대 하나에 가스버너 한 대가 있었다. 화장실은 계단통 옆에 붙은 작은 공간에 있었고 난방은 장작 스토브로 해결했다.
푸틴의 부모 모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어머니는 41세 생일을 열흘 앞두고 푸틴을 낳았다. 부부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고, 이미 두 아이를 잃은 터라 세 번째 아들을 기적으로 생각했다. 푸틴의 어머니는 건물 청소와 실험실에서 시험도구 청소, 빵 배달 등 온갖 굳은 일을 다 했다. 유대인 노부부가 방을 함께 썼는데 이들에게는 나이 든 딸이 함께 살았다. 어린 블라디미르 푸틴은 공동주택에서 유일한 아이였고 노부부가 귀여워했다. 바바 아냐로 불린 유대인 할머니는 푸틴의 어머니처럼 신앙심이 깊은 여자였다. 러시아정교회는 소련 시절에 탄압을 받았으나 전쟁 기간 중에는 공개적으로 예배 보는 게 허용되었다. 당국에서 전시동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탄압이 다시 시작됐다.
푸틴이 생후 7주되는 11월 21일 바바 아냐와 푸틴의 어머니 마리아는 매서운 겨울바람을 헤치고 세 블록을 함께 걸어서 예수의 변모 대성당까지 걸어갔다. 그곳에서 이들은 몰래 아이에게 세례를 시켰다. 남편 모르게 하려고 비밀세례를 시킨 건지 아니면 당국의 감시가 두려워 그랬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푸틴은 나중에 세례식이 그렇게 비밀리에 진행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당시 소련에서 비밀은 없었다. 마리아는 아이를 간혹 예배에도 데려갔지만 아파트에서는 프라이버시가 유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콘을 비롯해 신앙의 징표들은 일체 집안에 두지 않았다. 마리아는 아들에게 신앙에 대해 깊이 가르치지 않았다. 마리아는 40년이 지나서야 아들에게 세례식 때 쓴 십자가를 주면서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무덤 성당을 찾아가 십자가 강복을 받으라고 했다. 푸틴의 예루살렘 첫 방문 때였다. 푸틴을 잘 아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 유대인 이웃과 함께 지낸 것이 영향을 미쳐 푸틴이 교회에 대해 대단히 관용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고, 러시아 문화에 뿌리 깊게 박힌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도 반감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바스코프 대로에 있는 집은 어린 시절 푸틴의 우주였다. 에르미타주 미술관, 해군본부, 성베드로 대성당과 성바오로 대성당 등 차르 시절 러시아의 영광을 나타내는 휘황찬란한 건축물들이 가까이 있었지만 그와는 상관없는 건물들에 불과했다. 그는 소비에트 인텔리겐치아나 정치 엘리트 집안의 아이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 집안의 아이였다. 한참 자란 뒤에야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그렇게 유복한 게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5층에 있는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구멍이 군데군데 나 있고 역겨운 냄새를 풍겼으며 어두컴컴했다. 땀 냄새와 야채 끓이는 냄새로 가득했다. 건물에는 쥐들이 들끓었고, 그는 친구들과 함께 막대기를 들고 쥐를 쫓아다녔다. 아이들은 그걸 재미있는 놀이로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복도 끝에 몰린 쥐 한 마리가 갑자기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는 날렵한 아이였다. 1959년인가 1960년 노동절인 메이데이에 늘 놀던 세계를 벗어나 처음으로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나섰는데, 마야콥스카야 거리의 번화한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친구들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도시 반대편까지 가보았다. 추운 날씨였는데 먹을 것도 없었다. 추위를 피하려고 길에서 불을 피운 기억이 있다고 했다. 고생만 진탕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벌로 아버지한테 벨트로 흠뻑 얻어맞았다고 했다. 아파트 건물은 가운데 있는 마당을 빙 둘러싸고 있었는데, 마당은 옆 건물 마당과 이어져 있었다. 주정뱅이와 불량배들이 우글거렸고 담배 피우는 사람, 술 마시는 사람 등 할 일 없는 이들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만 여덟 살이 되기 전인 1960년 9월 1일, 푸틴은 집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되는 곳에 있는 제193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그는 무뚝뚝하고 심술궂고 다소 버릇없는 아이였다. 급우였던 베라 구레비치는 그를 회전목마라고 불렀다. 교실에 들어오면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기 때문이다. 학교 안팎에서 행실이 좋지 않은 아이들과 어울리는 번잡스런 아이였다. 그래서 공산당 어린이 조직인 파이오니어동맹에 일찍 가입하지 못했다. 이 동맹에 가입하는 것은 어린이 티를 벗는다는 일종의 통과의례 성격을 지녔다. 3학년이 되자 그는 반 학생 45명 중에서 이 동맹에 가입하지 못한 몇 명 가운데 하나였다. 당의 중간간부인 그의 아버지는 뒤처지는 아들 때문에 기가 막혀 했다. 푸틴은 당시 자신의 행동을 아버지와 체제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파이오니어가 아니라 불량소년이었어요.”
아들을 엄하게 키운 아버지는 그에게 억지로 복싱을 배우게 했다. 하지만 호리호리한 아이는 펀치에 맞아 코뼈가 한번 부러지자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그는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복싱 대신 호신술을 배웠다. 유도와 레슬링을 혼합한 러시아 특유의 삼보라는 호신술이었는데, 그의 작은 체구와 ‘다부진 성격’에 잘 맞는 운동이었다. 이때 만난 코치 한 명이 그의 인생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나톨리 라흘린은 바스코브 대로에서 멀지 않은 트루드 클럽에서 일했는데, 푸틴은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65년에 그 클럽에 가입했다. 라흘린은 푸틴의 부모에게 “아이들에게 절대로 나쁜 짓은 가르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후에야 아이의 가입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삼보와 유도를 배우면서 어린 푸틴은 전혀 새로운 경험을 맛보게 되었다. 호신술을 통해 자기보다 더 크고 더 거친 아이들을 상대로 당당하게 맞설 수 있게 되었다. 푸틴은 호신술이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는 말을 자주 했다. 호신술을 배우면서 새로운 친구들도 알게 되었다. 아르카디 로텐베르그와 보리스 로텐베르그 형제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들은 푸틴과 평생 가깝게 지냈다. 호신술을 통해 푸틴은 종교를 통해서도 배우지 못한 확고한 원칙을 갖게 되었다. 푸틴에게 호신술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이었다.
호신술에 빠지면서 푸틴은 남보다 앞서겠다는 의지가 강해졌다. 트루드 클럽은 회원들에게 학교성적이 우수해야 한다고 요구했기 때문에 학교공부도 열심히 했고 6학년 때는 성적이 많이 올랐다. 베라 구레비치를 비롯한 급우들이 그를 파이오니어동맹에 추천했고, 고학년으로서는 예외로 가입됐다. 가입식은 울리야노프카라는 시골마을에서 거행됐다. 이전 이름은 사블리노였는데 레닌의 누이가 한때 살았던 마을이다. 가입 몇 주 만에 푸틴은 학교 파이오니어동맹의 단장이 되었다. 그가 맡은 첫 번째 지도자 자리였다. 8학년 때 그는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공산당청년동맹인 콤소몰에 가입했다. 지도자의 길을 가는 데 필요한 첫 번째 디딤돌을 놓은 것이었다.
나치를 몰아내고 승리한 지 20주년이 되는 1965년에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몰아닥쳤다.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소설 가운데 하나는 <방패와 칼>이었다. 소설은 작가동맹 기관지인 문학잡지 ‘즈나미야’(깃발)에 시리즈로 발표됐다. 작가 바딤 코제프니코프는 프라우다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했는데, 소련식 선전 원칙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자신이 겪은 경험을 현실감 있는 스토리로 전개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알렉산드르 벨로프 소령은 소련 비밀첩보요원으로 대(大)조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나치 독일에 가서 독일인으로 행세했다. 그는 요한 바이스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며 나치의 군첩보기관인 압베르(Abwehr), 그리고 그 뒤에는 나치 친위대 SS에서 승진을 거듭했다. 바이스는 전쟁에 나가 용감하게 싸웠고 절제력이 뛰어났으며, 고문을 당해도 절대로 굴복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위장으로 섬기는 나치를 혐오했지만 독일의 전쟁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 참고 견뎠다.
톨스토이 작품에 비할 바야 아니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십대 소년에게 그것은 톨스토이 작품보다 훨씬 더 훌륭했다. 발표되고 3년 뒤에 작품은 코제프니코프가 직접 시나리오를 써서 4시간이 넘는 흑백영화로 제작됐고, 1968년 소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가 됐다. KGB로 바뀐 비밀요원들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당시 16살이던 푸틴은 이 영화에 매료됐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몇 번이나 봤다. 40년이 지난 뒤에도 그는 영화 주제가 ‘조국은 어디서 시작되는가’의 가사를 외울 정도였다. 소년 푸틴은 어린 시절 꿈이었던 선장을 포기하고 스파이가 되기로 했다. 자신을 미래의 벨로프 소령으로 상상했다. 그에게 벨로프는 혼자 힘으로 역사를 바꾼 멋진 인물이었다. “내가 가장 멋있게 생각했던 것은 어떻게 한 사람의 힘으로 군대 전체가 나서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내는가 하는 것이었어요. 첩보요원 한 명이 수천 명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는 그때 생각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그는 KGB가 어떤 곳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몰랐다. 급우 가운데 아버지가 첩보요원으로 일한 아이가 있었지만 은퇴한 사람이었다. 영화 제작은 1967년에 새로 KGB 국장에 취임한 유리 안드로포프가 조직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한 것이었다. 안드로포프는 억압과 테러를 자행한 공포의 비밀경찰이 아니라, 위대한 조국의 수호자로서 조직의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고 싶었다. 영화를 처음 보고 나서 푸틴은 같은 반 친구에게 자기는 나중에 첩보요원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실제로 겁도 없이 집에서 멀지 않은 리테이니 프로스펙트에 있는 레닌그라드 KGB 본부로 찾아갔다.
레닌그라드 KGB 본부는 ‘큰 집’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건물 규모가 크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푸틴은 세 번이나 시도한 끝에 큰 집의 정문을 제대로 찾았고, 마침내 담당 장교를 만날 수 있었다. 장교는 소년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나, KGB는 자원한다고 받아들여 주는 곳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군에서 근무하거나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 가운데서 적임자를 골라서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애가 탄 푸틴은 어떤 과목을 전공해야 KGB에 들어올 수 있는지 물었다. 장교는 귀찮은 나머지 법대가 좋을 것이라고 해 주었고, 그 말이 아이의 장래를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푸틴은 부모의 희망과 달리 법대에 진학했다. 부모는 아이의 성적과 자질로 봐서 민간항공대학 같은 기술학교가 맞는다고 생각했다. 푸틴도 원래는 이 대학에 가고 싶어 했다. 푸틴은 충동적이고 고집이 셌다. 부모와 운동 코치들은 아이의 말을 듣고 놀랐다. 그들에게 자기가 ‘큰 집’을 찾아간 이야기나 법대에 가기로 한 진짜 의유는 말하지 않았다. 트루드 클럽의 코치 한 명이 그 말을 듣고 검사나 경찰관이 되겠다는 것이냐고 묻자 푸틴은 화를 내며 “경찰관이 되려는 게 아닙니다!”라고 소리쳤다. 그가 KGB로 가겠다고 한 1968년은 국제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난 해였다. 푸틴이 중학교에 진학하기 불과 며칠 전에 프라하의 봄을 진압하기 위해 소련군이 체코를 침공했다. 당시 푸틴은 국내건 해외에서건 반체제 운동에 대한 탄압에 대해 부당하다는 생각은 갖지 않았던 것 같다. 많은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금지된 서방문화를 즐기고 친구들끼리 몰래 음반을 돌려가면서 비틀즈의 노래를 들었다. “그것은 외부세계로 통하는 창과 같은 것이었어요. 그것을 통해 우리는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푸틴은 한동안 아코디온을 연주하고 아버지가 준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비소츠키를 비롯해 당시 유행하던 가수들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소련에서 1960년대는 억압과 정체의 시기였지만 푸틴의 십대 시절은 부모 세대가 겪은 일들과는 무관하게 지나갔다. 전쟁이 끝나고 집안형편도 나아졌으며 제법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 당시 귀중품에 속한 검은색 큰 전화기도 한 대 집에 있었다. 그는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서 전화를 걸었다. 레닌그라드 교외의 작은 마을인 토스노에 방 세 칸짜리 다차도 있었는데, 십대 시절 복닥거리는 공동주택에서 벗어나 친한 친구들과 함께 그 다차로 자주 놀러갔다. 다차의 식탁 테이블 위에 초상화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친구인 빅토르 보리셴코가 누구냐고 묻자 푸틴은 볼셰비키의 군사첩보조직을 창설한 얀 카를로비치 베르진이라고 했다. 베르진은 대숙청 기간인 1937년에 체포돼 이듬해 처형됐으며 그 뒤 사후 복권됐다.
푸틴은 제281학교에서 중학과정을 다녔다. 학교에서는 선택과목 을 정해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대학입시 준비를 시켰다. 그는 인기는 많지 않았지만 스포츠를 좋아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자신만만한 학생이었다. 과학을 배웠기 때문에 일류 기술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문학, 역사 등 인문 과목을 열심히 공부했다. 4학년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독일어도 계속 공부했다. 독일어 교사는 미나 유디츠카야였는데 그녀는 푸틴을 얌전하고 진지한 학생으로 기억했다. 제281학교는 제한된 테두리 내에서지만 지적으로 비교적 개방적이었고 토론도 허용했다.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선생님이었던 미하일 데멘코프는 금지된 문학작품들을 실은 유인물인 사미즈다트를 나누어 주기도 했다. 푸틴은 1967년 콤소몰에 가입했으나 모임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고 스포츠와 학교공부에 몰두했다.
푸틴보다 두 살 어린 베라 브릴레바라는 여학생은 푸틴이 공동주택의 거실 한쪽 편에 놓인 책상에 웅크린 채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했다. 그녀는 1969년 토스노의 다차에서 푸틴을 처음 만나 홀딱 반했다고 했다. 병을 돌려서 하는 키스게임에서 두 사람은 짧은 키스를 했으나 푸틴은 당시 여학생과 사귈 마음이 없었다. 하루는 브릴레바가 집에서 공부하고 있는 푸틴을 찾아가 자기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녀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푸틴이 이렇게 잘라 말했다. “나는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중학교 마지막 2년 동안 그는 대단히 뛰어나지는 않지만 상당히 좋은 성적을 올렸다. 소련의 초중등 학제는 10년이었다. 역사와 독일어 성적이 좋았고, 수학과 과학 성적은 다소 떨어졌다. 마지막 학년 때는 학교수업보다 입시준비에 집중했다. 그 덕분에 그는 당시 소련에서 최고 명문대 가운데 하나인 국립 레닌그라드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레닌그라드대 입학경쟁률은 40대 1 정도로 치열했다. 그래서 그의 노동자 계급 가정 출신이 도움이 되었다거나,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지만 KGB가 본인 모르게 보이지 않는 손을 작동해서 그를 입학시켰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입학시험을 잘 치르고 1970년 가을에 레닌그라드 법대에 진학했다. 2년 전 KGB 장교가 알려 준대로 된 것이었다.
대학에 가서는 열심히 공부에 매달렸고 많은 시간을 유도장에서 보냈다.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술과 담배도 끊었다. 레닌그라드대 유도반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트루드 클럽 코치들과 운동을 계속했다. 1973년에는 사범 자격을 얻고 지역 도시 선수권전에도 출전했다. 여전히 공동주택에서 살았지만 소련연방 내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녔다. 몰도바에서 열리는 유도 시합에 참가했고, 한 해 여름에는 북쪽에 있는 코미공화국에 가서 벌목 일을 하기도 했다. 당시 그루지야공화국 내 압하지야자치공화국에서 개최된 대학생 건설캠프에 2주 동안 참가하기도 했다. 당시 미화로 600달러 쯤 되는 800루블을 벌어서 코트를 한 벌 사 입고, 남은 돈은 흑해 연안의 숲으로 둘러싸인 휴양지 가그라에 가서 다 썼다. 푸틴은 그때 산 코트를 15년 동안 입었다.
1972년에 푸틴의 어머니는 30코페이카를 주고 산 복권이 당첨돼 경품으로 자동차를 한 대 받았다. 팔면 3500루블을 받을 수 있는 자동차였는데 팔지 않고 아들에게 주었다. 박스형 소형 승용차 자포로제츠였다. 1970년대 당시 소련에서 대학생은 고사하고 일반인도 자가용 자동차를 가진 경우는 드물었다. 푸틴에게 그 자동차는 신분상승의 상징 같았고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유도시합에 나갈 때도 타고 가고 친구들을 태우고 그냥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는 운전을 난폭하게 했다. 한 번은 도로로 걸어 들어온 어떤 남자를 치기도 했는데, 푸틴은 그 남자가 자살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대학 4학년 때 정체불명의 어떤 남자가 접근해 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학에 파견된 KGB 요원이었다. 십대 시절에 가졌던 KGB 요원의 꿈은 거의 포기하고 지내던 때였다. 여름방학 때는 현지 교통부 범죄담당 부서에서 인턴을 하면서 비행기 추락사고 관련 수사에 참여했다. 졸업하면 현지 검찰청에서 변호사로 일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예전에 유도 코치가 한 경고가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었다. 법학 공부도 호신술 못지않게 재미있었다. 법은 곳 규율과 질서를 바로잡는 일이었고, 그는 법과 질서가 어떤 이데올로기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학시절에 KGB를 위해 일한 적은 결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일은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대학생들이 비밀기관에 협조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푸틴은 4학년 재학 중이던 1974년에 오랜 꿈이었던 KGB에 채용됐다. 그는 채용이 갑자기 이루어졌다고 했다.
푸틴에게 접근한 그 남자는 자기 신분을 한 번도 밝히지 않았다. “당신 취직과 관련해 할 말이 있소.” 그 남자는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푸틴은 중요한 사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얼마 뒤 학교 안에 있는 교수 라운지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시간에 맞춰 도착했는데 20분을 기다려도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장난 전화에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치올랐는데 그때 그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나타나서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푸틴은 그런 남자에 태도에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철저한 신원조사를 거친 다음 마지막 단계로 1975년 1월 드미트리 간체로프라는 이름의 중년 요원이 푸틴의 아버지를 방문했다. 푸틴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스피리도노비치는 아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이제 보안기관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앞으로 아들이 맡게 될 책임과 임무가 막중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낯선 사람에게 진지하게 거의 탄원조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한테 볼로드야는 전부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 애한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아이 둘을 잃고, 전쟁이 끝난 뒤에 얻은 아이가 바로 볼로드야입니다. 우리 목숨은 이미 다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이를 위해 사는 것이지요.” 푸틴은 KGB가 그동안 저지른 일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KGB가 국내와 해외에서 국가의 적을 다스리기 위해 저지른 일들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오히려 국가의 안위를 위해 KGB에 협력하는 것이 국민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반 시민의 협조는 국가의 생존에 대단히 중요한 도구”라고 했다. 물론 그동안 지나친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태어난 다음에는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도 모습을 감추었고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진 대숙청의 피해자들도 단계적으로 풀려났다. 그래서 당시의 공포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수백 만 명을 죽이고 삶을 파괴한 과거의 범죄행위는 이제 지나간 역사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러한 지나간 역사에 대해 크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스탈린의 폭정 아래서 고통당한 사람들을 포함해 많은 러시아인들이 그를 나치를 몰아내고 조국을 승리로 이끈 존경하는 지도자로 생각했다.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일어난 어두운 면들은 두려움과 죄의식 등 복합적인 감정으로 가슴 속에 묻어두고 싶어 했다. 소련 사회는 수십 년 동안 그러한 복합적인 유산을 안고 살았다.
제1장 전후 폐허의 레닌그라드에서
블라디미르 스피리도노비치 푸틴은 레닌그라드에서 30마일 쯤 떨어진 네바강 옆 움푹 꺼진 길을 따라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에게 내려진 명령은 거의 죽으라는 것과 같았다. 독일군 진지를 정찰하고 어떻게 하든 ‘혀’ 한 명을 사로잡아 오라는 것이었다. ‘혀’는 심문할 포로를 뜻하는 은어였다. 1941년 11월 17일이었다. 지독한 추위 속에 소련군은 밀려오는 나치군을 맞아 궤멸당하기 직전에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도시에 남은 마지막 탱크부대가 일주일 전에 네바강을 건넜고, 푸틴이 속한 부대 지휘부에는 독일군 보병 5만 4천 명이 막강한 화력으로 버티고 있는 포위망을 뚫으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명령을 따르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푸틴은 다른 병사 한 명과 함께 포탄이 떨어져 파인 자리에 피가 고여 범벅이 된 참호 쪽으로 다가갔다.
전방에 갑자기 독일군 병사 한 명이 나타났다. 세 명 모두 놀라 얼어붙은 나머지 잠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군 병사가 먼저 움직여 수류탄 한 발을 들고 안전핀을 뽑아 이쪽으로 던졌다. 스피리도노비치 푸틴의 발밑에 떨어진 수류탄이 터지면서 동료는 현장에서 죽고, 파편이 푸틴의 양쪽 다리를 덮쳤다. 독일군 병사는 도망쳤고, 푸틴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사람 목숨이 정말 별 것 아닙니다.” 푸틴은 수십 년이 지난 뒤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서른 살의 푸틴은 부상당한 몸으로 네바강 동쪽 강안에 있는 교두보에 누워 있었다. 소련 붉은군대 지휘부는 레닌그라드 포위망을 뚫기 위해 병력을 강 건너로 쏟아 부었다. 독일군은 두 달 전 네바강 어귀에 있는 고대 요새 쉴리셀부르크를 점령하면서 레닌그라드 포위를 시작했다.
이후 872일 계속된 독일군의 포위 기간 동안 주민 1백만 명이 폭격과 기아, 질병으로 숨졌다. “위대한 지도자께서 페테르부르크시를 지구상에서 쓸어내 버리기로 결정했다.” 9월 29일자 독일 비밀명령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었다. 항복도 받아들이지 않고, 공습과 포 공격으로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모두 굶겨 죽이겠다는 계획이었다. 역사상 현대적인 도시가 그 같은 포위를 이겨낸 적은 없었다. 쉴리셀부르크 점령과 동시에 레닌그라드에 대한 맹렬한 공습이 감행됐다. 공습으로 시의 중앙 식량창고가 화염에 휩싸였다. 시를 방어하는 소련군은 속수무책이었고, 그런 상황은 소련 전역에서 벌어졌다. 1941년 6월 22일 시작된 나치의 소련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Barbarossa) 작전은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1천 마일에 이르는 소련군 방어망을 파괴했다. 모스크바까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스탈린은 레닌그라드를 포기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총참모장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을 보내 레닌그라드 수호 임무를 맡겼고, 주코프 장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레닌그라드를 지켜냈다. 9월 19일 밤 주코프 장군의 명령에 따라 소련군은 네바강을 건너 600미터를 진격해 포위망을 공격했다. 첫 번째 공격은 막강한 독일군 화력에 막혀 실패했고, 10월에 2차 공격을 감행했다. 제86사단이 투입되었는데, 스피리도노비치 푸틴이 배치된 제330 보병연대도 이 사단 소속이었다. 이들은 네바강 동쪽 제방에 교두보를 확보했는데, 교두보 크기가 5코페이크 동전만큼 작다는 뜻으로 네프스키 퍄타초크로 불렸다.
전장의 폭은 1마일, 길이는 반마일밖에 되지 않았다. 죽음의 덫을 향해 달려드는 것처럼 무의미하고 처절한 전투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부친인 블라디미르 스피리도노비치 푸틴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노동자였고, 할아버지 스피리돈 푸틴은 혁명 전 레닌그라드의 명소였던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스피리도노비치 푸틴은 스피리돈 푸틴의 네 아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스피리돈 푸틴은 볼셰비키 지지자였으나, 1917년 10월혁명 전에 내전과 기근을 피해 도시를 떠나 선조들이 살던 모스크바 서쪽 언덕의 포미노보 마을에 정착했다. 그 뒤 모스크바로 옮겨서 블라디미르 레닌의 미망인 나데즈다 크루프스카야의 요리사로 일했다. 크루프스카야는 당시 모스크바 교외 고르키에 있는 정부 다차에서 살았다. 1939년 그녀가 죽자 그는 모스크바 시당위원회 별장에서 일했다. 레닌의 미망인 집에서 일할 때 스탈린이 찾아오면 그를 위해 요리도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권력자들 가까이서 일했다고 아들들을 나치로부터 지키지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온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 싸우던 시절이었다.
푸틴 대통령의 아버지는 1941년 나치가 침공해 왔을 때 제대 군인이었다. 1930년대 해군에 입대해 잠수함에서 복무했고, 그 뒤 레닌그라드에서 멀지 않은 페트로드포레츠 마을에 정착했다. 표트르 대제가 핀란드만 해안에 여름궁전을 건설한 곳이었다. 나치가 침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