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차의 별 외 4편
김보나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너는 종종 묻곤 했다. 지금 보이는 빛이 일억 광년 전의 은하에서 온 거라면…… 우리를 둘러싼 것은 부드러운 이 어둠뿐이냐고.
말라붙은 찻잎에 들끓는 물을 부을 때마다 향내가 살아났다. 따뜻한데 죽어 있던 차를 마시면 마른 장작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속에서부터 불씨가 타오르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물을 삼켜 살아나는 불이 있다면.
연녹색 강에 물결을 일게 하던 인부들의 망치질은 그쳤어도 여전히 다리를 건널 수 없는 밤이다. 누군가의 무덤에서 발견된 책의 문자열처럼 비가 내리면 사람을 앞에 두고 차를 마셨다. 철관음, 금준미, 백호은침…… 울렁이는 금빛. 언젠가 받은 볕이 끓어넘치는 물을 한 모금 넘길 때
“죽기 전에 오렌지 빛을 본 사람이 있대. 쪽빛이나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사람도 있대. 그게 자기 마음의 색이래”
고대 인도 사람들은 불의 신이 인간과 신을 연결해 준다고 믿었다. 제물을 살라 신에게 닿도록 연기를 흩어놓기 때문에 그렇다지.
네가 찻물을 올리던 때, 물이 사정없이 끓어넘치던 그때에도 우리 곁엔 불의 신이 있었을까.
어쩌면 찾아드는 신이, 지금 보이는 빛이 일억 광년 전에 출발했다 해도…… 연노랑 빛에 기어이 이름을 붙이고 싶은 것이 나의 마음.
떠날 사람이 내준 차를 마신다. 물로 타오르는 불. 홧홧하다.
바티칸에서 온 사람
교황님이 지하철 옆자리에 앉아 계셨다. 눈부셔. 나는 노트에 시를 쓰고 있었다. 뭘 쓰고 있냐고 교황님께서 물어보셨다. 보여드렸더니 교황님은 우셨다. 정말 감동적인 시군요. 그게 이 시는 아니고
누가 왼팔을 툭툭 치길래 그만 꾸벅거리고 눈을 떠보니 옆자리의 여자였다. 여자는 한 뼘도 안 되는 유리병을 내밀며 속삭였다. “성수예요.” 그건 정말 투명하고 찰랑였다. “어디라고?” 할아버지가 갑자기 눈을 뜨며 외쳤다. “신도림예요.” 안심했는지 다시 눈을 감았다. 여자는 웃으며 “하나 들이셔요. 바티칸에서 온 진짜배기예요.” “그걸 어디 쓰는고?” 할아버지 다시 눈 떠서, “아무데나 다 쓰셔요.” 나는 아무데나 축복이 필요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침목을 베고 자듯 헉 소리를 내며 깨어나던 많은 새벽. 기적 소리를 들은 듯 서둘러도 제때 신호를 건너지 못하는, 짐도 잠도 많은, 모든 길은 통한다는 로마까지 가서도 예약에 실패해서 바티칸은 꿈에도 보지 못한 비행운 인간. “킁, 그게 성수인지 어떻게 알아?” 할아버지 코를 들이마시며 뇌까리고, 여자는 웃으며 “마셔 보실래요?” 눈앞에 성수가 들이밀어졌을 때 나는 생각했다. 마실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다. 이 물은 모든 것을 치유한다. 나는 나아진다. 소음을 내며 달리는 열차 밖을 나서 낮을 가르며 걸어갈 수 있다.
왼편으로 빈 손을 내밀었고, 누군가 뭘 얹는 감촉을 느꼈는데, 그것은 차갑지도 찰랑이지도 않았다.
나의 모험 만화
키 작은 주인공이
딱 한 번 용기를 낸다
만화 그리는 게 좋았다
심장은 두근거렸으나
힘껏 찬 축구공이 낮은 호를 그리고
빌려준 책을 읽는 짝꿍의 입꼬리가 올라갈 때
모험은 쉽게 시작되지 않았다
나의 주인공은 그저
다들 지나치는 사육장의 토끼를
혼자 돌보는 사람
혹시 동물의 말을 알아듣게 되었나
귀 기울여 보지만
사각사각
자신의 말은 구름을 닮은
말풍선에 밀어넣곤 한다
(털 달린 마음이 철창에 갇혀 풀을 씹는다)
(눈동자에 비친 풍경이)
(경이로울 때도 있었다)
나는 보여주고 싶다
독서기록장에는 쓰지 못한 문장 혹은
어린 토끼에게 건초를 부어주며 쏟아낸 마음
성장소설에 관해 말하고 싶다
정체를 숨긴 외계인이 학교를 짓밟는 이야기
그러나 눈물 한 방울 떨구면
사각사각
쓰러진 친구가 되살아나는
그런 이야기를 토끼에게 먹이면서도
나의 주인공은
공조차 앞지를까 봐
달리는 속도를 조절하는 사람
어찌할 줄 모르다가 우연히 가까워진 공을
부딪쳐 오는 강한 햇빛을
피하지 않으며
다시 힘껏 (발을 뻗는다)
명대사를 터뜨릴 시간인데
주인공은 그저 웃는군
이 모험의 끝은
친구를 만드는 일이라는 듯
(훗날…) 어른이 된 여섯 시
칸칸이 나뉜 지하철에서 나는
백팩의 무게를 버티며 서 있다
칸 속 사람들의 말풍선을 속속들이 알고 싶다
내년을 얘기할 때 사람들은 왜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지
해가 진 뒤로
저마다의 모험은 어떻게 지속되는지
(계속)
춘일광상(春日狂想)*
나는 셀카를 찍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어깨에 태우고요
봄의 마지막 기억이 떠오릅니다
의사는 초음파 사진을 가리키며
목에 유두 모양 종양이 생겼다고 설명했고요
엑스레이와 시티, 이어지는 검진 속에서
나는 그만 방사능에 수차례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어릴 적에 본 과학 영화에서는
방사선에 맞은 동물이
돌연변이로 변신했어요
이제부터 나의 꿈은
괴수 김보나가 되는 것
헬리콥터가 날아들고
총을 든 군인들이 나를 둘러쌉니다
힘이 센 짐승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손을 흔드는 것
옥상에 모인 사람들에게
과거의 자신에게
화약이 터지는 광경을
불꽃놀이라고 부르는 여름
나무 아래에서 우는 것들을
매미라고 부르는 여름
매미 우는 소리가 거세진 하늘 아래
어둑발이 내리네요
나는 침상에 누워 있습니다
꽃을 들고 올 수 없는 곳입니다
수술대 조명이 켜집니다
백열등이 환하군요
나를 둘러싼 의료진이 칼을 주고받는 장면 아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립니다
이번 봄에는 공원에서
내리쬐는 햇빛으로 샤워를 하고
꽃나무 아래에서
꽃잎이 지는 속도를 헤아렸습니다
* 요절한 일본 시인 ‘나카하라 주야(中原中也)’가 쓴 시
춘일광상
김보나
안녕 나
갑상샘에 암이 생겨서
방사선약을 먹은 뒤로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기 시작했어
팝핑 캔디를 삼킨 때처럼
몸 안이 반짝거리더니
괴수로 변해버렸어
이것 봐
광화문 사거리에
송전탑처럼 씩씩하게 서 있어
사람들이 가는 면발처럼 쏟아져 달려가는
정오의 사거리에서
텔레파시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중이야
기억해?
전학 간 너의 긴 편지에 답장하지 않은 나를
너의 연락처를 지우지 못한 나를
명동성당 뒤편에 딸린 여고에서
너는 만화부였고
나는 클래식 기타부
알고 있었어
네가 날 좋아한단 거
복도를 지나다니는 수녀님들에게도
가로막히지 않았던 너의 마음
십자가 형태의 길에서 성호를 긋지
어른이 된 네가 여기 있다면
너를 납치해 걸어갈 텐데
기자들과 카메라가 화동처럼 뒤따르는 행진이야
스물셋에 처음 간 퀴어 퍼레이드에서처럼
일생에 단 한 번
잊을 수 없는 고백을 듣고 싶었지만
나는 늘 내가
먼저 고백하는 사람으로 자랐어
환자복을 입은 다음부턴
미안한 사람들을 병상에 모아 놓고
안녕 나 암이래
말하고 싶었어
사람 아니게 되어
모든 빚을 탕감받고 싶었어
성당에 못 들어간다면
창밖에서라도 미사를 구경하고 싶네
고딕 첨탑에 기대 낮잠 자고 싶네
하다못해 절 마당에서 비를 쓸면서
발등부터 목덜미까지
누군가 필사한 경전의 글자로 뒤덮이고 싶네
마취총을 맞고
수술대에 올라도
용감하게 걸었다는 기억을 갖고 싶어
작년에 꽃구경을 한 벚나무 아래
자리를 깔고
기다리고 싶어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올 때까지
1. 약력(저서명, 대학, 문학상 경력)
김보나 202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