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 18,15-20; 1코린 7,32-35; 마르 1,21ㄴ-28
+ 오소서, 성령님
지난 한 주간 추운 날씨에 건강히 잘 지내셨나요? 오늘은 해외 원조 주일인데요, 오늘의 2차 헌금은 아프리카, 아시아, 중앙아시아, 남미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됩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번 주일 복음은 그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어떠한 분이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1장 1절에서 이미 해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끝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실 때 백인대장의 입을 통해 반복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에 권위가 있으셨고, 더러운 영들까지 그분께 복종한다고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모세는 “야훼 하느님께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예고합니다. 첫 번째 예언자인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에 수많은 예언자가 등장했지만, 이 예언은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초대교회 때부터 이어진(사도 3,22; 7,37)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이 질문을 던지다가 송창식 씨의 ‘사랑이야’라는 노래 가사가 떠올랐는데요, 다음과 같은 가사입니다.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촛불 하나 이렇게
밝혀 놓으셨나요.…
어느 빛 어느 바람이 이렇게
당신이 흘려 넣으신 물처럼
조용히 속삭이듯 이렇게
영원할 수 있나요.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한번은 올 것 같던 순간
가슴 속에 항상 혼자 예감하던 그 순간
단 한 번 미소에 터져 버린 내 영혼
사랑이야, 사랑이야.”
어느 때 예수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고,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 다가옵니다. 이전에는 우연의 일치로만 여겨지던 일들이 주님의 은총으로 이해되고 주님의 특별한 섭리로 다가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내 사랑과, 믿음과, 변치 않는 희망의 대상이 되십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는 내가 그분께 원하는 것보다 그분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더 많아 보이기도 하고, 남들에게는 주시지 않는 고통을 나에게만 허락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분의 뜻을 잘 알지 못할 것 같은, 그렇게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분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심하게는, 캄캄한 어둔 밤과 같이 당신의 모습을 감추시고, 마치 넷째 왕의 길을 인도하던 별빛이 어느 날 자취를 감춰버린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계시지도 않은 것처럼 느껴지고, 그분을 믿어왔던 나날이 헛수고처럼 느껴지는 그런 날들도 있습니다.
위대한 영적 스승들은 이 시기를 ‘어둔 밤’이라 부르며, 이 어둔 밤의 시기를 잘 통과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느 때에는 이 밤이 너무나 긴 것 같고 이것이 일시적인 순간인지 아니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인지 몰라 애 닳는 시간이 있기도 합니다.
제가 해외에서 유학할 때 주일에 한인 성당에서 청년 미사를 드렸는데요, 매주 이 미사에 참례하던 중학생 친구가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어느덧 청년이 된 그 친구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이 재회하던 이 청년이 제게 커다란 질문을 던졌습니다.
몇 년 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교회에 다니시던 친척들 몇 분이, 어머니 빈소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왜 어머니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진작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니? 우리가 기도했으면 안 돌아가셨을 텐데.” 이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아, 청년은 제게 물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냐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청년의 말을 듣다가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사실이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느님은 기도하면 살려주시고, 기도하지 않으면 살려주시지 않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 큰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럼, 기도는 왜 하는 건가요?”
지난달 25일, 성탄절 새벽에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났습니다. 3층에서 시작된 불이 빠르게 번지자 바로 위층에 살던 일가족이 4층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엄마는 두 살 된 큰딸을 재활용 쓰레기 더미 위에 던지고 자신도 그 위로 몸을 던졌습니다. 아빠는 7개월 된 둘째 딸을 이불에 감싸 안고 뛰어내렸습니다. 일가족 모두가 살았지만, 아빠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 기사를 읽으며,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불길을 갑자기 멎게 하시거나,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날개를 달아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드러납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으신 예수님처럼, 가족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어쩌면 자신이 살 수도 있었겠지만, 딸을 구하기 위해 온몸으로 딸을 감싸 안고 자신의 몸을 던지는, 그 사랑과 희생이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반영합니다. 그 사랑으로 하느님은 인간이 되셨고, 십자가에서 당신 몸을 내어 주셨고, 우리는 이 미사 때 그분의 몸을 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그분께서 모르고 계신, 혹은 잊고 계신 내 처지를 알려드리거나 그분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 당신 사랑 안에 하나 되기 위해 기도하고,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지속되고 있는 그분의 전능하심에,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맡겨 드리기 위해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우리가 악에 의해 지배되지 않도록,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어둠의 세력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오늘도 그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2019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신 헨리 뉴먼 추기경님의 말씀을 인용해 드리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심은 나에게 특별한 봉사를 맡기기 위함입니다. 다른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으신 어떤 일을 나에게 맡기셨습니다. 나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현세에서는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내세에서는 내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까닭 없이 나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을 신뢰합니다. 내가 뭐가 되든, (어디에 있든,) 나는 버려지지 않습니다. 내가 병중에 있다면, 나의 병이 그분을 섬길 것입니다. 혼란 가운데 있다면, 나의 혼란이 그분을 섬길 것입니다. 내가 슬픔 중에 있다면, 나의 슬픔이 그분을 섬길 것입니다.
그분은 어떤 일도 헛되이 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하시는 일을 잘 알고 계십니다. 내 친구들을 데려가실 수도 있습니다. 낯선 이들 가운데 나를 내던지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쓸쓸함을 느끼도록 하실 수도, 내 영혼이 가라앉게도, 내 미래를 나에게서 감추실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여전히,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는 일을 잘 알고 계십니다.”
존 헨리 뉴먼 추기경님의 말씀:
“God has created me to do Him some definite service. He has committed some work to me which He has not committed to another. I have my mission. I may never know it in this life, but I shall be told it in the next. I am a link in a chain, a bond of connection between persons.
He has not created me for naught. I shall do good; I shall do His work. I shall be an angel of peace, a preacher of truth in my own place, while not intending it if I do but keep His commandments.
Therefore, I will trust Him, whatever I am, I can never be thrown away. If I am in sickness, my sickness may serve Him, in perplexity, my perplexity may serve Him. If I am in sorrow, my sorrow may serve Him. He does nothing in vain. He knows what He is about. He may take away my friends. He may throw me among strangers. He may make me feel desolate, make my spirits sink, hide my future from me. Still, He knows what He is about.”
https://youtu.be/xe_Ypyxbd9s?si=UVf2Nm4RZNZH-53J
송창식, 사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