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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의 글은
2016년 5월 18일 포스팅하였습니다.
야곱의 얍복강 나루에서 에스라의 아하와 강변까지라는 글을 쓰다가
문득 야곱과 라반, 그리고 레아와 라헬의 나이를 머리 아프게 묵상하여 보았습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의 나이가 언급된 것은
애굽의 바로 앞에 섰을 때 일백삽십 세요, 죽었을 때의 나이가 일백사십칠 세입니다.
야곱이 태어났을 때는 아버지 이삭의 나이가 육십 세였고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와 결혼하였습니다.
문제는 야곱이 에서에게서 장자의 축복권을 속여 빼았고
브엘세바에서 밧단아람으로 도망하였을 때의 나이가 몇 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서는 야곱이 외삼촌 밧단아람에서 우거하였던 세월이 이십 년이요,
요셉이 애굽에 팔려 갔을 때 나이가 십칠 세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나이가 삼십 세이며
가나안 땅의 기근으로 야곱이 애굽의 총리로 있는 요셉을 조우하였을 떄가 130세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칠년 동안 봉사하고 레아를 아내로 얻고
또 칠일 후에 라헬을 아내로 얻고 칠 년을 봉사하였습니다.
이러한 단서로 요셉이 태어났을 때 야곱의 나이를 추정하면
야곱이 애굽의 바로 앞에 섰을 일백삼십 세에 요셉의 나이는 삼십 세에 총리가 되어
칠년 풍년 후 이년 동안 가물었을 때이니까 삼십구 세요 일백삼십에서 삼십구를 빼면 구십일 세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칠년을 봉사하고 레아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기 시작하였는데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낳은 요셉은 열 한 번째 아들이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의 종으로 팔릴 때 나이가 십칠 세니까
십칠 년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헤브론에서 정착해서 산 기간입니다.
야곱이 요셉의 나이 십칠 세에 헤브론에서 잃어 버리고 삽심구 세된 요셉과
다시 조우하기 까지 눈물의 세월이 이십이 년이었습니다.
이삭이 죽은 나이가 일백팔십 세요, 육십 세에 야곱을 낳았으니까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장례를 치를 때 나이가 일백이십 세입니다.
십칠 세의 아들 요셉을 잃어 버린 나이가 일백팔 세니까
이삭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야곱은 요셉을 잃어 버렸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칠년 후터 십사 년 동안 네 명의 부인에게서 11명의 아들과 딸 디나를 낳고
열 두 번째 아들 베냐민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낳았고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서 라헬은 난산으로 죽어 장사하였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낳았을 구십일 세는 요셉이 십칠 세일 때 야곱의 나이 일백팔 세요,
야곱이 요셉을 낳은 구십일세에서 자녀를 낳기 시작한 십사 년을 빼면 칠십칠 세요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났을 때는 구십칠 세요, 그 때 요셉은 육세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낳았을 때 라헬을 위한 봉사 칠 년의 기간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라반이 야곱의 품삯을 정하여 육 년을 더 봉사하였는데
이 기간은 요셉이 태어나서 밧단아람에서 성장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십사년 동안
열 한 아들과 딸 디나를 낳았습니다.
야곱의 열 번째 스불론이 태어나고 디나가 태어났고 그 다음 요셉이 태어 났으니까
요셉과 디나는 엇비슷한 나이였을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과 디나가 어느 정도 성장 할 때까지
몇 해 동안 세겜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야곱의 첫째 아들인 르우벤과 요셉의 나이 차이는
적어도 일곱 살이 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밧단 아람을 도망할 때 나이는 칠십칠세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우거한 이십 년을 빼면 칠십칠세에 외삼촌 집에 갔으며,
레아와 결혼 할 때 나이는 그로부터 칠년 후인 팔십사 세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팔십사 세에 첫 신방을 꾸렸다면......
그 때 레아와 라헬의 나이는 몇 세였을까?
사실상 추정할 단서가 전혀 없어 나이를 알 수 없습니다.
이삭의 부인 리브가의 오라비는 라반입니다.
이삭이 결혼하였을 때 이삭의 나이는 사십이요,
그리고 에서와 야곱의 쌍둥이를 낳았을 때는 육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밧단아람의 외삼촌 집에 갔을 때 칠십칠세라면
그 때 이삭의 나이는 일백삼십칠 세요 외삼촌 라반은 적어도 백 세는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의 암시를 따라 라반의 나이를 추적하면
난항의 난맥에 부딪힙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은 아브라함이 백 세에 이삭을 낳고 이삭이 성장하여
모리아 산에서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린 후에
나홀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그의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형제는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므엘과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라고 하였습니다.(창22:20-23)
그렇다면 이삭이 나이 사십에 결혼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후 25년과 이삭의 나이 40년을 더한 사이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이 여덟 명의 아들을 낳았고,
또 여덟 번째 아들인 브두엘이 결혼해서 리브가를 낳았고
그 리브가는 사십 세인 이삭과 결혼할 소녀로 성장하였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나홀과 헤어질 때는 결혼은 하였으나
나홀에게 자식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결혼하기 위한 성경 저자의 암시는
불가사이 하기만 합니다.
이삭의 결혼을 위해 아브라함의 종이 밧담아람을 찾았을 때 리브가는 소녀였고
또 오라비 라반은 손님을 영접할 총책임자인 것으로 보아 결코 어린 나이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해서 20년 만에 낳은 아들 야곱이
칠십칠 세라는 고령으로 외삼촌 라반을 찾았을 때
라반의 나이는 리브가가 결혼한 후 97년이 훌쩍 지난 뒤였습니다.
야곱의 결혼을 위해서는 리브가를 결혼시킬 당시로부터 97년이 지난 후
리브가와 같은 결혼 적령기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이 있었다는 것이 창세기 저자의 암시요, 단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브라함과 열 살 차이가 나는 이복 동생이었습니다.
미스테리한 야곱의 가정사는 이삭이 사십 세에 결혼 할 당시 리브가의 나이가 이십 세라고 해도
라반이 리브가의 오라버니요, 당시 이삭의 나이 일백 삼십칠세였으니까
라반은 백 세가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일백이십칠 세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삭의 아내 리브가와 야곱의 아내 레아의 죽은 나이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창49:31)
라헬은 죽은 시점은 기록되었으나
레아의 죽은 기록은 언급이 없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찾아 갔을 때
외삼촌 라반은 적어도 일백 세가 훨씬 넘은 나이에 결혼하지 않은 딸 레아와 라헬이 있었고
그것도 칠 년 봉사 후 신방을 꾸려 주었다는 것이 창세기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나이 칠십칠 세가 되도록 무엇을 하였을까?
에서는 사냥꾼으로 나이 사십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또 칠십칠 세의 야곱이 떠날 쯤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에세가 세 번을 장가 갈 동안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장막에만 거하였습니다.
에서의 결혼도 의혹으로 남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밧단아람으로 떠날 쯤 에서는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이 때 에서의 나이 야곱과 동갑이요, 이스마엘은 이삭의 나이 보다 14년이 더 많습니다.
당시 야곱의 칠십칠 세는 이삭의 나이가 137세로 추정되는데 이스마엘은 151세가 되어야 하는데
이스마엘은 137세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에서와 결혼한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은 당시에 몇 세나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86세에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13세의 나이로 아브라함과 함께 할례를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스마엘의 나이 89세에 75세인 이삭과 함께
아버지 아브라함을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는데 그 때 에서와 야곱의 나이는 15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열두 두령을 낳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열 두 아들을 낳아 각기 족속의 두령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떠나 도망 할 때쯤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고 하였는데
느바욧은 이스마엘의 열 두 명의 아들 가운데 장자요, 그의 누이 마할랏의 나이는 ???
에서와 이스마엘의 나이 차이는
에서와 야곱이 태어 날 때 이스마엘의 나이는 벌써 74세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미스테리한 이야기는
유다의 가정에 대한 것입니다.
유다는 레아에게서 난 야곱의 네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이 84세에 레아와 신방을 꾸렸다면 연연생으로 낳아도
84세에 르우벤, 85세에 시므온, 86세에 레위, 87세에 유다를....그리고 요셉은 91세에 낳았습니다.
유다와 요셉의 나이 차이가 네살이라면
요셉이 형들에게 팔릴 17세의 나이 때 유다는 21세일 것입니다.
그 후에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아내로 맞아
엘과 오난과 셀라를 낳았습니다.
엘을 조혼시켜 다말을 며느리로 맞았으나
그 악함으로 아이를 낳지 않고 죽었습니다.
창세기는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엘은 후손을 빨리 갖기를 원하는 유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조혼에 대한 불만과 자식을 낳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부적절한 어떤 행동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고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처럼 자손을 많게 하리라는 언약의 복에 대한 거부권 행사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심판으로 죽었습니다.
유다는 고대 근동의 계대 결혼 제도에 의해서
동생으로 형의 후손을 잇게 하였습니다.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였습니다.(창38:8)
유다는 세째 아들 세라 마저도 죽을까봐 장성하기를 가다리라면서
다말을 아버지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결국 다말은 창기로 분장하여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여 쌍태를 낳았는데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부터입니다.
베레스가 결혼하여 헤스론과 하물을 낳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모든 일이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지전 가나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야곱은 108세에 17세의 요셉을 잃어 버리고
22년만인 130세에 애굽에서 당시 39세의 요셉과 조우하였습니다.
바로 그 22년 동안에 요셉을 판 후 유다가 결혼하여 지식을 세 명 낳았고 또
며느리 다말을 맞고 그 며느리가 낳은 아들 베레스가 결혼해서
헤스론과 하물을 낳았다는 것이 창세기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46장에 밧단아람과 가나안 땅에서 낳은 자손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이름이 나오는데거기에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은
베레스의 아들 헤스론과 하몰이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이 22년 동안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또 다시 그 아이가 자라 결혼해서 자식을 낳을 수 있을까?
그 불가사이하고 미스테리한 이야기가 성경의 스토리입니다.
더 나아가서 유다의 계보를 살펴보면1대가 유다요,
2대는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요,
3대는 헤스론과 하몰이요,
4대는 여라므엘과 람과 글루배라
5대는 아마나답이요
6대는 나손입니다.
나손은 모세 시대 광야에서 유다 자손의 족장이었으며
나손의 누이 엘리세바는 아론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번째 인구 조사에서 유다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유다 지파에서 계수된 자는 칠만 사천육백 명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민1:26)
유다 한 사람이 4대 430년 동안 애굽에서
20세 이상 남자만 칠만 사천육백 명이라는 경이로운 숫자를 기록하였습니다.
4대 400년 혹은 430년이라는 기간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기록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창15:13-14)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창15:16 )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삼십 년이라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출12:40-42)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400년이라고 하였고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출애굽기의 말씀을 인용해서 430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야곱의 열 두 지파 가운데 유일하게 나이가 기록된 지파는 레위 지파인데
레위 지파에 기록된 나이를 추적하면 실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거류한 기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1대 레위는 137세요
2대 레위의 아들은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고핫의 연수는 133세요
3대 고핫의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아므람의 연수는 137세요
4대는 아므람의 아들은 아론과 모세요, 그 딸은 미리암이요,
또한 이스할의 아들은 고라요, 모세의 연수는 120세입니다.
야곱이 애굽왕 바로 앞에 섰을 때 130세요,
그 때 요셉은 39세이며 레위는 대략 여섯 살 더 많은 44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레위의 137세에서 44세를 빼면 레위가 애굽에 거주한 기간은 93년이요,
모세가 출애굽할 당시 80세였으니까 애굽의 레위와 모세를 합하면 173년입니다.
이제 레위의 137년과 고핫의 133년과 아므람의 137년과 모세의 80년이
겹치는 기간을 뺀 나머지 기간이 173년 플러스 알파로 실제 애굽에 거주한 기간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모세의 아버지가 아므람이요, 그 어머니 레위가 애굽에서 낳은 딸 요게뱃이요,
고핫의 누이이며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의 고모라는 사실입니다.
아므람은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출6:20)
아므람의 처의 이름은 요게벳이니 레위의 딸이요 애굽에서 레위에게서 난 자라
그가 아므람에게서 아론과 모세와 그의 누이 미리암을 낳았고.....라고 하였습니다.(민26:59)
참고로 레위의 아들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는
가나안 땅에서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가 애굽에서 낳은 딸 요게뱃의 연수는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애굽의 이스라엘에 대한 4대를 내려오는 산 증인일 것입니다.
요게벳은 레위가 애굽에서 낳은 늦둥이 딸이라고 해도
오라비 고핫이 낳은 아들 아므람과 결혼해서 모세가 출생할려면
요게뱃이 모세를 낳았을 때는 아주 고령의 나이일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공주의 유모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레위와 모세는 애굽의 400년, 혹은 430년이라는 성경의 기록이 무색할 정도로
모세의 조부가 레위의 아들인 고핫이요, 외조부가 야곱의 아들 레위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두 번째 인구를 계수할 때에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레위인의 모든 남자는 이만 삼천 명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민26:62)
레위의 아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에게서 3.4대만에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남자가 이만 삼천 명이 될려면 어떤 생태의 공학이 존재해야 할 것인가?
레위의 아들은 게르솜과고핫과 므라리 등 세 명이요,
고핫의 아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 등 네 명이요,
아므람의 아들은 아론과 모세 등 두 명이요,
아론의 아들은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 등 네 명이요,
모세의 아들은 게르솜과 엘리에셀 등 두 명입니다.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의 아들은 비느하스요, 모세의 아들 게르솜의 아들은 요나단입니다.
또한 성경의 기록상 아론의 후손은 엘르아살과 이다말 밖에 없는데
아론의 후손이 가나안 땅을 분배 받은 성읍은 살인자의 도피성 헤브론과 그 목초지이요
또 립나와 그 목초지 등모두 열세 성읍과 그 목초지들이었습니다.(수21:19)
참고로 레위 사람 중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와 베냐민 지파 중에서
제비 뽑은 대로 열세 성읍을 받았고
그핫 자손들 중에 남은 자는 에브라임 지파의 가족과 단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 중에서
제비 뽑은 대로 열 성읍을 받았으며....그래서 모세의 아들 요나단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게르손 자손들은 잇사갈 지파의 가족들과 아셀 지파와 납달리 지파와 바산에 있는 므낫세 반 지파 중에서
제비 뽑은 대로 열 세 성읍을 받았더라
므라리 자손들은 그 가족대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스불론 지파 중에서
열두 성읍을 받았습니다.(수21:4-7)
살인자의 도피성은 유다 지파의 헤브론은 아론 자손,
에브라임 지파의 세겜은 그핫 자손,
므낫세 반 지파의 바산 골란은 므라리 자손,
납달리 지파의 게데스는 게르손 자손,
르우벤 지파의 베셀은 므라리 자손,
갓 지파의 길르앗 라못은 므라리 자손이 분배받았습니다.
또한 참고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가나안에 거주한 기간은
아브라함이 175세, 이삭이 180세, 야곱이 130세를 살았지만
아브라함이 75세에 가나안 땅에 들어 왔으니까
아브라함은 100년이요, 겹치는 75년을 빼면 이삭은 105년이요,
이삭이 죽을 때 야곱의 나이 120세니까 130세에 애굽에 간 야곱의 10년을 더하면 215년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정말 온 몸이 경직되고 소름이 돋습니다.
때로는 목적을 위한 창세기 저자의 이해와 설정은
창세기의 독자로 하여금 아주 곤혹스럽게 합니다.
이 모든 불가사이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이해 할 수 있을까?
덮어 놓고 믿는 믿음이 얼마나 미신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무심코 그냥 읽으면 에서와 야곱의 청년 시절로 착각하겠지만 실은 노년의 이야기며
성경의 기록은 야곱의 가정에 대해서 미스테리한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습니다.
미스테리한 야곱의 가정사는
구속사적으로 해석하면 난제가 되고 신화가 됩니다.
성경의 구속사는
성경 저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벗어나면 신화적 해석이 되고 이현령비현령 신학이 됩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 모든 인물, 모든 지명이......
구속사적인 해석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대한 구속사적인 이해란 개혁주의 신학의 정수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성경 저자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는 해석의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구속사의 남용은 곧 신화적 해석의 위험성을 내포하며
구속사의 알레고리와 구속사의 메타포에 빠져 성경의 본질에 대한 왜곡과 날조와 착시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고
성경을 들여다 봐야 성경이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냥 툭툭 던지는 성경의 수 많은 이야기들.....
오늘날의 문화로 이해하려고 하니까 이해가 되지 않아 신화적으로 해석하면
이단과 사이비의 함정에 빠집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으면서
성경을 신화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아이러니는 비단 이단과 사이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강단의 오류는
성경을 신화적으로 해석하면서 너무나 당당합니다.
참으로 거짓 선지자의 탈을 쓴 오만과 편견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의 미스테리한 가정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창세기는 설화라는 생각으로 굳어집니다.
가끔 성경을 읽으며 연구하다가 이해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을 때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몸이 경직됩니다.
성경의 난제를 만나면......
억지로 풀지 말라는 베드로의 충고를 감사하게 듣습니다.
베드로는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고 하였습니다.(벧후3:10-18)
오늘날 우리 시대는 성경을 고민하지 않는 시대여서
미디안의 날이 되고 파괴된 실로의 성소와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으로
종말의 날을 최후 심판으로 맞을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선지자와 사도의 경계에 깨어 있지 않으면
그 날이 초개와 같이 임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니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사26:16)
다니엘은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하였습니다.(단12:1-3)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마24:42-46)
또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막13:28-37)
사도 바울은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하였고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의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였고
깨어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5:8-9)
요한 계시록은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계16:15-6)
그러므로 성경의 그 말씀을 많이 읽고 깊이 묵상하여
선지자와 사도들 처럼 하늘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행하여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그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성경을 오해 없이 믿을 것인가?
그 미스테리는 성경 저자의 시선 따라 그 끝에 서 있으면 될 것입니다.
잘못되어도 성경 저자와 잘못되면........
그것이 그 인생의 영광일 것입니다.
괜히 성경 저자를 폄훼하면.......
성경 저자가 말하는 바로 그 날의 종말을 맞을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믿음은 성경 저자에 대한 신뢰요,
성경에 대한 부정은 성경 저자에 대한 불신일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에 대한 합리적 이해는
그 말씀을 계시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