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믿음생활 (잠 19:15-17)
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16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자기의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 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이 시간에 “위대한 믿음생활”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도 같고 성경도 같은데 어떤 사람은 위대하고 어떤 사람은 위대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믿음의 차이입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믿는다면 어떻게 얼마나 믿느냐“ 그 차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에는 몇 가지 기본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믿어야 잘 믿는 것입니까?
1. 부지런하게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입니다.
15절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이 말씀은 게으름에 대한 경고입니다. 여기서 “깊이 잠”든다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실 때 아담을 잠들게 했던 것과 같은 상태, 즉 죽은 것과도 같이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의식 상태를 가리킵니다. 참으로 심각하죠?
게으름이 그렇게 두려운 것입니다. 게으름은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가치나 목표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진취적 성취욕도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게으르면 답이 없습니다. 미련해도 답이 없는데 게으르면 아무 쓸모가 없어요. 한 마디로 폐인이 되는 것입니다.
노숙자들 보세요. 외모는 멀쩡하지만 정신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삽니다. 이들은 가족도 정부도 돕지 못합니다. 일자리를 줘도 뛰쳐나오고 맙니다. 인내가 없습니다. 의지도 없어요. 정신불구자들입니다. 이것이 게으름이 만든 작품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부모의 그늘 아래 백수로 지내는 애들이 많다고 합니다. 일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사고치고 통신요금 수십 혹은 수백 만 원씩 올려놓고 원수가 따로 없습니다. 부모 잘못이 큽니다. 육신의 탯줄은 끊었으나 정신적 탯줄을 끊지 못해서 생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만들어 주실 것을 믿고 기도만 하고 죽든 살든 내버려둬야 합니다.
이처럼 부지런하지 않으면 영적 세계에서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도 부지런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엘리사도 부지런했습니다. 왕상 19장을 보면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19절) 엘리사는 평범한 농부가 아니라 대지주였습니다. 무려 열두 겨리의 소로 밭을 갈고 있습니다. 겨리는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밤새도록 일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착하지 않아도 부지런 한 사람을 부르셨어요. 마태도 세리지만 세관에 있는 것을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은 부지런함입니다.
히6:11-12에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소망을 이루는 것은 부지런 아니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부지런하시기 바랍니다.
2. 말씀을 생명처럼 믿고 지키는 것입니다.
16절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자기의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 여기 “계명”은 ‘미츠와’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키라고 요구하신 명령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영혼이란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만이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법은 곧 생명입니다.
지상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보세요. 만유인력의 법칙에 위배된 일을 하면 사망입니다. 천둥번개 치는 날 나무 밑이나 산꼭대기 올라갔다가 벼락을 맞기도 합니다. 수영 못하면서 물을 가까이하다가 익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마5:26에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국가의 법도 범법하면 공권력이 가만 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상의 법도 그러하거든 하늘의 법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래서 겔18:4에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롬6:23에“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30:19-20에서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생명으로 알아야 합니다.
태평양 전쟁 때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승리한 것은 일본군의 암호문을 먼저 해독한 것이 승리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본군의 암호 중 AF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보고 연구한 결과 AF가 진주만이나 미드웨이 둘 중 하나라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그렇지만 둘 중 어느 것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알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이 때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이 미드웨이 제도 주둔군에게 명하여 "미드웨이 주둔군 식수부족" 이라는 전문을 암호화 하지 않고 보내게 했습니다. 그러자 며칠 후 일본군 무전에서 “AF는 현재 음료수 결핍이 심각” 이라는 무전을 포착해 내게 됩니다. 결국 미드웨이가 목표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미국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말씀 한 마디가 사느냐 죽느냐를 판가름할 만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 걸고 알고 그대로 믿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히4:2-3에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함과 같습니다.
말씀에 생명을 거세요. 다니엘의 믿음이 위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에 목숨 걸었기 때문입니다. 사자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사람들도 사자 무서워서 기도하지 못하잖아요. 잠26:13에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기도하면 몸 상하고 감기 걸리고 시간 빼앗겨 문제가 생길까봐서 못하잖아요. 그러면 진 것입니다.
다윗도 왜 위대합니까? 찬송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날마다 찬송했습니다. 춤도 추었습니다. 말씀이 그를 위대하게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을병에 걸렸는데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날마다 춤을 추다가 그 병이 언제 사라진지 모르게 사라졌다고 합니다. 하물며 찬송하며 춤을 춘다면 하나님께서 영육 간에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최고의 운동이 뭘까요? 최고의 운동은 춤추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도 춤처럼 좋은 운동은 없다. 제대로 된 의료시설도 생활환경도 없는 아프리카를 건강하게 하는 힘이 바로 춤이다. 몸을 흔들고 뛰어야지 가만히 두면 죽는다는 것을 추장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나의 생명으로 알고 배우고 믿고 생명 걸고 지키시기 바랍니다.
3. 더욱 큰 사랑으로 자라나가시기 바랍니다.
17절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자비를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고 도움을 주는 구제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기 백성에 대한 의무였습니다.
신15:7-8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고 말씀합니다.
마25:40에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도 심판 날에 구제의 여부를 가지고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선행의 보상을 넘어 반드시 해야 할 의무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의무란 몇 번 하다 말거나 형식적으로 하지만 사랑만이 진실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달라고만 하고 이웃은 안중에도 없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과 사랑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가지는 서로 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엡6:23에 “믿음을 겸한 사랑”이라 했습니다. 믿음의 크기는 사랑의 크기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키우려면 사랑하세요.
그래서 엡4:15-16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했습니다.
사랑해서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17절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받을 은총은 심히 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고, 엘리야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오, 성경도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그만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부지런히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더욱 큰 사랑으로 자라나서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만큼 자라는 위대한 신앙생활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