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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에 대한 처방
성경본문 ; 느헤미야 4: 1-6
1.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2.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4.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5.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 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 하고
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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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인 한 분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저는 은사가 꼭 하나밖에 없어서 쓰임 받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기독교 역사에는 단 하나의 은사를 가지고도 주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고 말하면서 "그런데 성도 님의 그 한가지 은사는 무엇이지요?"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비판의 은사인데요"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다시 "그렇군요. 저는 그 은사도 유익하게 쓰여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 성도 님이 그 은사를 가지고 남을 비판하지 말고 자신을 비판하는 일에 쓰신다면 말입니다"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비판이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비판은 거의 분별과 동의어로 쓰여집니다. 분별의 동기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개인과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는것에 궁극적인 관심이 있습니다. 분별의 동기는 사랑입니다. 분별은 영 분별과 같이 은사의 하나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잘 분별하여 사랑으로 충고하는 이웃들에 대하여 열린 귀와 열린 마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비판은 개인과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일에 궁극적인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비판은 하나님이 아닌 사탄에게서 온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비판을 삼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임이요"(마태7:1,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비판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은 바로 이런 부정적인 비판으로 하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느헤미먀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며 그런 파괴적인 비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본문 1-3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비판을 훌륭하게 극복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파괴적 비판을 대응하는 성경적인 처방을 배우고자 합니다. 비판에 대한 처방, 무엇일까요?
1.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느헤미야 당시의 주변 부족 지도자들의 비판은 거의 조롱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2-3절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느헤미야 편에서는 얼마나 분노할만한 조롱들이었겠습니까? 우리는 4-5절의 느헤미야의 기도속에서 그가 당시에 느꼈던 모멸감과 분노를 공감할수 있습니다.
그는 4절에서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원컨대 자기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5절에서 이런 자들은 용서하셔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지나친 기도라고 느끼십니까?
오죽하면 그런 기도를 했겠습니까?
얼마나 억울하게 느꼈으면 그런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직접적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방에 대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대신 그 문제를 가지고 주께 나아와 주님께 기도하기를 작정한 것입니다. 기도가 비판을 대응하는 그의 첫 번째 처방이었던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느헤미야의 이런 저주기도가 과연 성경적인가를 논의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우리시대의 문학가요 기독교 변증가였던 C.S. Lewis가 구도자이었던 시절 성경을 읽으며 첫째로 부딪쳤던 문제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기독교를 알아보기 위해 시편을 읽다가 한때 성경을 던져버린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아름다울 시편을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다가 원수들에 대한 저주들이 기록되는 것을 보고 "이것이 어떻게 성경인가?"라는 물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묵상하다가 깨달은 것은 적어도 성경은 인간의 감정에 가장 정직한 책이란 생각과 함께 성경의 하나님 특히 시편의 하나님이 "이런 인생들의 누군가를 저주하고픈 마음까지도 받아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하나님--그가 어떤 불평, 어떤 좌절, 어떤 감정을 쏟아 놓아도 넉넉히 들어주시고 받아 주시는 그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한 감정을 쏟아놓고 있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이 계십니까? 복수하고 싶은 원수가 생기셨습니까? 그러면 주께 나아오십시오. 주께 쏟아 놓으십시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그분에게 말하십시오. 그는 당신이 어떤 말을 해도 잠잠히 나무라지 않고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도우실 것입니다.
성경은 때로 이런 원수가 가까운 사람일수도 있다고 가르칩니다.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남편이 때로는 아내가 원수일 때도 있습니다.
요즈음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까 "여동생이 원수처럼 보일때"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호적상 오빠라고 되어있는 내겐 한번도 다정하게 오빠라고 부르지 않으면서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잘생겼다 싶은 남자에게 무조건 오빠라고 부를 때/
집에서 밥좀 해달라고 하면 라면도 제대로 끓여주지 않으면서 어느날 갑자기 아는 오빠네 밥해 주러 가야 한다고 나설때/
밤중에 무섭다고 일체의 심부름을 거절하던 동생이 오빠 만나러 가서 새벽 1시를 보통으로 넘기고 귀가할때)그때도 직접 붙어서 일전을 벌려 반격하려고 말고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나와 호소해 보십시오.
우리의 억울함을 완벽하게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에게 호소하는 것보다 더 좋은 처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특히 억울하게 비판당하고 공격당할 때 성도의 처방-기도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2. 맡은 일에 집중하는 일입니다.
느헤미야를 공격했던 원수들의 작전의 하나는 일종의 김빼기 작전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루살렘 성을 건축할 의욕을 좌절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이때 느헤미야가 만일 실망하여 성건축을 포기했더라면 원수들은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이것이 바로 사단의 작전인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그의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사역이 진전되지 못하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다행한 것은 당시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작전에 말려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 하였음이니라"
그들은 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맡은 바 일에 여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한 비판 혹은 조롱을 받고 계시다고 느끼십니까?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여전히 맡겨진 일에 전념하셔야 합니다.
제임스 보이스의 느헤미야 강해집에 보면 그는 뉴욕 양키스와 밀워키 브레이브스의 전설적인 야구 게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시 뉴욕 양키스에는 입이 험하기로 유명한 포수 요기 베라가 있었고, 밀워키에는 전설적인 강타자 행키 아론이 있었다고 합니다.
월드 시리즈 마지막 결승전에서 이 포수와 타자가 맞붙게 되었습니다.
입이 험한 다변가인 포수 요기는 행키 아론이 타석에 들어섰을 때 그의 집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아론을 놀려대기 시작했습니다.
"자네 방망이를 잘못 쥐고 있잖아. 그 방망이의 상표를 읽을 수 있도록 잡아야지" 행키 아론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투수가 다음에 던진 공을 공략하여 홈런을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그가 홈베이스를 밟으면서 그는 상대방 포수 요기 베라에게 유명한 한마디를 했다고 합니다. "이보게 요기 베라, 나는 상표를 읽으려고 타석에 서지는 않았다네" 행키 아론은 집중력을 분산시키려는 전술에 말려들지 않고 목표에 전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의미있는 발전들은 비판과 조롱을 극복하고 사명감을 따라 일했던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들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증기 기관선이 뉴욕에서 알바니를 향해 떠났을 때 무려 32시간이 걸렸습니다.(지금은 1시간이내면 충분한 거리)사람들은 무모한 일을 한다고 조롱하고 비판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첫 번째 모터 자동차가 시운전을 했을 때 그것은 두 필의 말이 끄는 수레보다도 늦었습니다. 사람들은 무모한 시도라고 조롱하고 비판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전구가 실험되었을 때 그 전구는 너무나 희미하여 개스 램프로 비쳐 보아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조롱하고 비판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첫 번째 비행기가 하늘로 올려 졌을 때 그것은 공중에 불과 59초를 머물다가 곤두박질하여 내려 왔습니다. 사람들은 조롱하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판과 조롱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맡은 일에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비판에 대한 성경적인 처방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맡은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사명감을 가지고 소명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도 비판이 지나치면 그리고 비판이 계속되면 우리는 곧 좌절할 수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이 일을 시작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느헤미야가 한일이었습니다.
10절에 보면 위기가 찾아옵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드디어 패배감이 공동체를 사로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위기의 순간에 느헤미야가 전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돌아본후에 일어나서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고하기를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낙심보다 더 큰 재앙이 있다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만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재기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짧은 세상길을 걸어가며 가장 비판을 많이 받았던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가 받으셨던 비판의 죄목들을 기억하십니까?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백성들을 미혹케 하는자, 율법 파괴자, 신을 모독하는 참람한 자, 자칭 유대인의 왕, 자칭 그리스도,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도록 선동하는자,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겠다고 거짓말 하는자,--
이런 비판들에 대하여 예수님이 취한 태도는 두가지 이셨습니다.
하나는 침묵이셨습니다.
또 하나는 기도이셨습니다.
그는 괴로울때마다 입술을 열어 "아버지여--"하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는 고독과 고통의 순간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를 기억하시고 그분에게 모든 것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이었습니다. 아버지를 기억함이 그분의 승리이셨습니다. 이 주님을 기억함이,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기억함이 또한 여러분과 저의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초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이 절정에 달했을 때 말할 자유도, 밖으로 돌아다닐 자유조차 잃었을 때 그들이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할수 있었던 일은 카타콤의 동굴에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이 한마디를 새기는 일이었습니다.
그것 조차도 힘들어졌을 때 그들은 서로를 만났을 때 물고기 표시로 인사를 대신 했습니다.
"이크투스-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그분을 기억하자고 격려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도 이 땅에서 비판과 조롱을 받으셨으나 마침내 승리 하셨습니다.
정녕 우리 주님은 아버지를 기억하시고 아버지가 그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하심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분의 승리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2:23-24)
그렇습니다.
그분의 욕받으심과 고난 받으심, 그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으로 저와 여러분이 죄사함과 구원을 받으셨음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이제는 우리가 그의 제자로 그의 모범을 따라 살 때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행여나 억울하게 비판이나 조롱을 받고 계십니까?
기도하십시오.
마땅히 하셔야 할 일에 전념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기억하심으로 모든 파괴적 비판에 승리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의 대의는 무엇입니까?
2. 생산적 비판과 파괴적 비판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나누어 보십시오.
3. 본문 4절은 파괴적 비판에 느헤미야가 어떻게 대응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4. 6절과 9절은 기도와 함께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행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5. 우리 각자의 삶에서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비판과 각자의 대응 처방을 나누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