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해봅시다
|
21-10-12 23:44
물빛 38집 원고 (정정지)
목련
조회 수 333 댓글 0
크지 않아도 괜찮아
나무 그늘 아래
잡초들이 모여 사는 동네
보일 듯 말 듯 반쯤 얼굴 내민
새끼 손톱만한 노란 꽃과
눈이 마주쳤다
화려하지 않는 맑은 미소
옆집 살던 순이의
보조개가 생각났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도
연약한 종아리로 무사히 건너고,
힘이 넘쳐나는 이웃들의
텃새에도 아랑곳않고
실처럼 가는 줄기에서
안간힘 다 해 피워 낸
앙증맞은 웃음
크지 않아도 괜찮아
최선을 다 한 너에겐
너만의 큰 광채가 있어
강보를 펴 보다
꼬물거리는 어린것
강보에 처음 싸 안던 날을 기억한다
새순 같은 손으로
웃음의 씨앗을 뿌리고
온갖 꽃들을 피우던
천정엔 푸른 하늘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밤이면 별이 반짝였다
어린 것은 스승이었다
길을 걷다 다리에 힘이 풀릴 때
손 잡아주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 주던
어느새 세월은 가고
비어있는 강보에
가만히 얼굴을 묻으면
젖 냄새 나는 듯
강보는
추억과 그리움이
가득 고인 옹달샘
밤이 이슥하도록
나는 그것을 퍼내고 있다
바닥을 드러내다
주산지를
다시 찾아 나서며 설레었다
마음속으론 몇 번이나 다녀왔던 곳
모심기 철이어서인지
물을 다 흘려보내고
바닥을 드러낸 채 누워있는 주산지
왕버들과
병풍처럼 둘러싼 산의 숲과
푸른 하늘을
그림처럼 담아내던
맑은 물이 사라진 그 곳
갑작스런 죽음으로
민낯이 드러난 사람 같다
외면하고 싶은 얼굴
저 깊은 곳에서
나의 바닥이 움찔했다
그녀의 사치
팔순 넘은 그녀가
점심을 사겠다고 한다
뜻밖의 제안에 깜짝 놀라
내가 대접하겠다고 했다
그 집안 형편과
몸에 밴 절약 정신을
알기 때문이었다
메마른 땅에서 태어나
초록의 꿈을 꾸기도 전에
척박한 땅으로
옮겨 심어진 나무
열매도 맺고
고목이 되었지만
수맥은 늘 멀리 있고
목마름과 함께 살았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모처럼 누리는
그녀의 사치를 받아들였다
변두리 중국집에서
마주 앉아 먹는
따뜻한 마음과 잘 섞은 짜장면
최고의 식사였다
모란꽃처럼 웃고 있는
주름 가득한 얼굴
늦가을
선생님은
까마득하게 높은 곳의 열매를 따서
아낌없이 나눠 주신다
치마를 벌려 받기만하면
모두 내 것이 된다
잘 익은 말씀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내가 가진 호리병은
입구가 좁아
오래 갈무리하고 싶은 말들
숱하게 밖으로 떨어져 내린다
흩어져서 생기를 잃어가는
알토란 같은 말 말 말
부숴서 새로 만들고 싶은
내 호리병
그저그런 그제
건강검진 결과지가 왔다
'유방에 비대칭 결절형 음영이 관찰되니
초음파검사 요망'
빠르게 줄기를 뻗어가는 불안의 넝쿨
어쩌면 원하지 않아도
당연한 듯 앉아있던
엄마와 아내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앉았던 자리가
호수만큼 넓다
가시 덤불로 뒤덮인 방에
눈이 퀭한 창문으로 아침이 왔다
리본 하나 달지않은
그저그런 그제가
봄날이었음을 깨닫는 아침
카페 게시글
작품토론방/옛자료
물빛 38집 원고 (정정지)
꽃나비달
추천 0
조회 3
24.09.08 04:59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