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찰四察의 사계, 다도茶道의 숨결
- 양은순론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I. 로그인
우리는 '세계'를 명사와 형용사 중심으로 볼 수도 있고, 또 동사 중심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세계’라고 말할 때 흔히 머리에 지구나 다른 별을 떠올린다. 아니면 사람의 얼굴 모습이나 별빛, 꽃의 색깔, 이런 것들이 떠올린다. 이렇게 떠올리는 세계는 바로 명사와 형용사를 중심으로 생각한 세계다. 그런데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것’을 머리에 떠올리면 그것은 동사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동사 중심으로 세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양은순의 서정세계에 바로 다가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생명의 축제가 일어나는 사건들의 총체로 보고 이해하는 양은순 시인의 내면 풍경도 파악하고 사상근육도 잴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양은순의 시세계를 ‘thing’이 아니고 ‘event’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생명의 축제라는 이벤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이 양은순 시를 이해하는 바로메타라 하겠다.
최근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실용주의에 염증을 느낀 대중은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인문학에 매료되기 시작한 것이다. 양은순 시인의 시작은 이런 세태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인문학이 사회 중심 사건으로 떠올랐다는 게 중요하다. 시인인 양은순이 시로 세상 풍경을 그려냄은 너무나 당연한 작가의 현실참여라 하겠다. 양은순은 오래 전 <월간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한국의 중견 여류시인이다. 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 회장을 맡아 폭발적인 활동과 지도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양은순 시인은 차밭골에 살면서 차인으로서 ‘차’를 만들고, 찻잎을 따고, 차를 마시며 세상을 ‘동사적’으로 보고 있다. 시는 서정의 세계이고, 서정은 세계를 자아화하는 것이다. 세상은 어떤 필터를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달라져 보이게 마련이다. 양 시인의 시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차의 사계에 대한 시적 형상화를 통해 서정적으로 펼쳐진 생명의 축제’라 할 수 있다.
삶의 위기가 논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양은순 시인이 토해낸 영혼의 분비물인 차시를 통해, 우리가 다도의 숨결을 느끼고, ‘사무사’의 정신을 찾아보는 것은 치료시학적 차원은 물론 인문학적 차원에서도 가치와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 길이 생명의 축제에 들어서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II. 클릭, 양은순의 시세계
차와 생명, 관찰의 봄
차는 부처님 전에 올리는 육법공양물에도 있고, 신라시대에는 원효방에서 원효대사가 차를 마셨다는 기록을 이규보가 시에서 남겼고, 설총도 화왕계에서 차를 마셨다는 기록을 남겼다.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의 다성인 초의선사가 차시를 남겼다. 이렇듯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니고 있는 차문화운동이야말로 소중한 우리 것을 찾는 또 다른 길 중의 하나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직도 자욱한 안개와 먼지 속에 가려져 박제된 전통문화에 숨결을 불어넣는, 다시 말해 삶에 있어서 ‘삿된’ 기운을 몰아내는 부채와 같은 것이 바로 다도문화를 꽃피우는 것이 아닐까 한다. 차문화와 시문학은 언제나 함께 있어왔다. 수도꼭지만 있다고 수돗물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수원지가 있어야 한다. 시문학은 수원지 같은 것이고, 차문화는 수도꼭지 같은 것이 아닐까. 차는 만물을 살리는 물을 만나 그 조화로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차는 물의 신이요, 물은 차의 몸이라 했다. 차는 물을 만나 비로소 하나가 된다. 차의 길은 모든 종교와 철학과 예술을 관통한다는 측면에서 다도와 시문학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차밭골에서 해마다 다문화 축제를 열고, 차는 특정한 계층만의 문화가 아니라고 하면서 그녀는 열린 다도를 주창하고 있다. 양은순 시인에게 있어서 생명의 봄은 ‘봄’seeing이다. 시인은 <곡우날>에서와 같이 편안하게 마시는 한 잔의 차로 자신의 여유로움을 찾고, 가족을 생각한다. <다선삼매>에서 볼 수 있듯이, 차밭에서 차나무의 일생에 대한 숙고를 통해, 그녀는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과의 <소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문화를 구축하고자 한다. 이런 ‘다선삼매’의 일상은 차정신인 ‘사무사’ 정신으로 통하며, 고운 최치원이 짓고 쓴 ‘진감선사 대공탑비’에 나오는 ‘수진오속’의 정신인 것이다. 이는 차가 사랑이고 생명이라는 양은순의 시정신과 맞닿아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양은순의 다도정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고지는 ‘소통’이기 때문이다. 결국 차정신인 배려와 소통은 생각이 찰찰 넘치는 4찰과 연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겨울을 살아온 어머니가
나의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아직 찬 기운이 감도는 산비탈의
차밭에서 찻잎을 따느라고
아침 이슬에 젖어 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봄의 미소와
하늘 아래 꽃밭과
보리밭과
함께 있는
봄의 생명을 나에게 안겨주는
애틋한 사랑의 등불입니다.
<차를 만드는 봄날> 전문
이 시는 시집의 맨 처음에 놓인 작품인데, 찻잎을 따는 어머니를 사랑의 등불로 치환해냄으로써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 시인은 노련하게도 사랑의 등불로 비유된 어머니의 추상성을 구체성으로 메우기 위해 축제의 삶에 필수적인 ‘미소’와 ‘꽃밭’ 그리고 ‘보리밭’이란 구체어를 전진 배치하여, ‘언불진의, 입상진의’의 시정신을 잘 소화하고 있다. 시인은 사랑의 등불로 치환된 어머니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모습을 선연하게 보여주기 위해 1연에 ‘겨울’ ‘찬 기운’, ‘아침 이슬’ 등의 춥고 차가운 이미지를 가져왔고, 이런 이미지를 ‘미소’, ‘꽃밭’, 그리고 ‘보리밭’의 맑고, 밝고 푸른 생명 이미지로 승화시켜낸다. 시작에서의 문학적 성취는 차를 마신만큼 선이 된다는 ‘다선일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면서 향기로운 차향을 닮은 어머니를 그립게 한다. 일단 내 마음이 편안해야 된다. 소통도 타인을 위한 배려도 마음이 평정된 뒤의 문제가 아닌가. 이런 차원에서 우리 전통문화의 뿌리인 다도문화가 그 꽃을 활짝 피워나가야 하리라 믿는다. 차와 어머니의 사랑이 이렇게 정서적으로 결합된 것도 모두 대자연의 순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그런 시인의 다도정신이 피워낸 결실이라 하겠다.
새벽부터 차밭 언덕을 오르며
찻잎을 따노라면
시간 가는 순간을 잊어버리네
세상 일은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쯤에서 끝이 나는지
기억 속 골똘함도 잊혀져가네
허공의 평화로움 안으로 들어서면
전쟁이 끝난 오후에
새소리도 벗이 되니
과거를 돌아보며
청춘의 바람에 화답해보네
- <찻잎을 따기> 전문
‘찻잎 따기’가 주는 의미를 치유시학으로 풀어낸 이 시는 ‘문학은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문학의 치유효과를 잘 그려내었다고 하겠다. 이 시가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은 이면에 내재된 논리 구조 때문인 것이다. ‘새벽’부터 ‘언덕’을 오르며 ‘찻잎’을 딴다는 구체적 사건을 명유적 사유인 ‘허공 속의 평화로움 안으로 들어서는 것’으로 치환시킴으로써 독자들의 미적 울림통을 울리게 한다. ‘전쟁이 끝난 오후에/ 새소리도 벗이 되니’라는 시구는 ‘허공 속의 평화’라는 추상을 구상화시키는 장치다. 이 시 역시 추상에서 구상으로, 관념적에서 구체적으로 언어의 자유로운 자리 이동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시가 추상적 관념을 이미지로 형상화한다는 시학의 측면에서 그렇다. 양은순의 미학성은 바로 언어의 이동, 즉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이동이 일어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낸다는 생성미학의 관점에서 그 맛과 멋을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삶에서 불안이 사라진다면, 불안을 떼어놓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세상사의 무거운 골칫거리를 생각 속에서 떼어놓으면 얼마나 삶이 평온할까. 시인은 ‘찻잎 따기’를 통해 이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바로 ‘차밭 언덕을 오르며’라는 어구에 내재된 ‘땅’과 ‘땀’의 양가적 가치가 시너지 효과를 낼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양은순 시인이 그리고자 하는 생명의 축제란 바로 불안이 사라진 일상인 것이다. ‘걱정거리’가 사라진 시간이다. 이 시의 아름다움은 ‘전쟁이 끝난 오후/ 새소리도 벗이 되네’라는 구절 속에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의인화다. 새소리는 사람이 아니다. ‘벗이 되네’라고 의인화하면서 ‘평온한 일상의 아름다운 한 때, 그야말로 생명의 본 모습, 축제의 현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서 시적 화자는 무거운 삶을 내려놓고 자연친화적 삶을 만끽하게 되는 정서를 가진 존재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의 구조는 의인화, 전이 그리고 변주 등의 문학적 기법에 의해 구축되면서 문학적 성취를 거두었다고 하겠다.
햇차 잎은 돋아나오는데
세월호 침몰로
운명을 달리한
젊은이를 생각하는
가슴 아픈 마음으로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방을 나왔다
앞산을 오르고 내려오고
뒷산을 오르고 내려오고
가족을 생각하며
집 주위를 맴돌다가
하루를 보냈다
- <곡우날> 전문
양은순은 의식이 있는 시인이 분명하다. 필자는 시인이란 타이틀 앞에 ‘훌륭한’이란 에피쎄트를 붙이고자 할 때는 반드시 작가정신을 본다. 작가정신이란 네오필리아와 앙가주망이다. 특히 시인이 현실과 유리된 시를 쓴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인은 시대의 아픈 밑그림을 보고도 그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말과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지성인이기 때문이다. ‘곡우날’은 모심기에 필요한 비가 내린다는 날이다. 시인은 자식을 잃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서글픈 심사를 ‘나왔다’ ‘오르고 내리고’, ‘맴돌다’란 구체적인 행위동사를 통해 잘 드러내고 있으며, 탈출구를 못 찾아 선실에 갇혀 수장되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애타는 심사를 ‘햇차 잎은 돋아나오는데’라는 양보절 속에 잘 형상화시켜내고 있다. 이 구절에 담긴 시어의 내포성과 암시성은 상징에 기인한다. ‘햇차 잎’으로 ‘젊은 학생들’을, ‘돋아나오는데’에는 ‘왜 그 아이들은 나오지 못할까’ 하는 불행한 사건에 대한 시인의 ‘어찌하여’라는 부사적 통탄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명확한 형상을 통해 시인은 그 표현을 통해서만이 내가 느끼고 있는 원통함의 실체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2. 차와 생명, 고찰의 여름
아침에 눈을 뜨니
새소리 들려와서
오늘도 살아있음에
감사드려보네
따뜻한 물 한 모금 보태어 우린
녹차의 푸른 물빛 앞에서
크게 숨을 들이키면
여름의 차향이 몸속으로 들어오네
너와 나의 여름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시간의 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촘촘한 행복인가
아침식사는 책상 위에 놓인
석류로 할까보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석류알에서 나온
붉은 물빛을 삼키며
나의 입술은
달고 새콤한 생명의 맛을 음미하여
식물과 함께 부드러움과
고요의 무게를 받아들이네
녹차의 푸르름에
석류의 붉음으로
수놓아지는 나의 여름
여름의 향기로
세상의 근심을 다독이는
바람 안으로
작은 행복감이 되어
안겨오는 그대여
- <여름날의 그대여> 전문
시인에게 있어서 ‘여름’은 ‘엶 opening’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시인은 생을 느낀다. 이 시의 첫 어구는 ‘눈을 열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맞이할 수 없다.’는 걸 말해준다. 더 나아가 ‘따뜻한 물 한 모금 보태어 우린/ 녹차의 푸른 물빛 앞에서/ 크게 숨을 들이키면 여름의 차향이 몸속으로 들어오네’라는 2연은 오감을 활짝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삼라만상이 다 나에게 속삭이고 말을 걸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는 여름 차 맛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시의 가장 멋진 대목은 세 번째 연이다. 무심코 읽어나가다가 순간 필자의 마음에 멎었다. ‘너와 나의 여름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시간의 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촘촘한 행복인가’하는 기막히게 관념을 시각화해내는 표현이야말로 이 시를 읽는 쾌미다. 이 한 줄만으로도 여름날에 차를 마신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차가 얼마나 시인의 삶에 중요한가를 대번에 알 수 있게 한다. 보이지 않는 시간은 보이게, 잴 수 없는 행복을 잴 수 있게 구체어로 치환하는 능력은 역시 월간문학 출신 작가의 면모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녹차의 식물성적인 푸르름 속에 펼쳐지는 생명의 향연은 붉은 석류의 등장으로 더욱 뜨겁게 타오른다. 바로 이런 시적 원리를 통해 시가 생성된다는 데서 우리는 그녀의 시가 힘을 갖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바람이 되어
차를 마시면
무소유의 허공 같은
마음을 얻게 되네
- <생명의 시학> 전문
양은순 시인의 시적 기반은 ‘생명의 시학’이다. 그녀가 말하는 생명적인 의미는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한마디로 ‘바람’이 되어 ‘차’를 마시는 것이다. 바로 ‘사무사’의 정신으로 몸과 마음에서 ‘삿된’ 기운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녀는 다도문화운동을 통해, 다도도 하고, 다도시도 쓰면서 ‘차’를 통해 자연의 원리와 인간의 순리를 일관되게 노래한다. 그녀의 시는 다도를 통해 자아를 회복하려는 욕구와,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불교적 가치인 ‘공’의 의미를 현재적 삶에서 회복하려는 열망을 동시에 숨기고 있다. 허공과도 같은 무소유의 마음을 얻고 바람처럼 때로는 구름처럼 살아가는 삶에 생명성을 불어넣는 양은순의 시가 단순히 마음공부 시편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인상은 표피적이다. 그녀의 시에는 이에 못지않게 동시대의 삶에 대한 사실적이고 심층적인 탐구가 배어 있어 감동을 준다. ‘바람이 되려는’ 그녀의 시정신은 오늘날 현대인의 속물근성을 핍진하게 반영하면서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인간의 욕심에는 무언의 언어로 비판을 가한다. ‘바람이 되니 허공 같은 마음을 얻게 된다’고 노래하듯, 그것은 비록 다도에서 비롯되지만 삶의 긍정성을 발견하게 되는, 우리가 잊고 있는 삶의 한 이법이기도 하다. 법정 스님처럼 ‘무소유’의 삶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행보가 의미심장하다.
차의 맛은 인생의 맛이다
찻물을 마시면
입안을 넘어가는
쓴맛 짠맛 단맛 매운맛 신맛이
오장육부로 흘러들어
세월과 시간과 만남을
기억하게 하고
희망과 소망과 건강과
생활이 무엇이며
삶이란 어떤 것임을
일깨워 준다.
- <차를 마실 때> 전문
이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차를 마시면서 인생을 배워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와의 동화적 삶을 통해 인생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시의 한 문장으로 된 첫 연, ‘차의 맛은 인생의 맛이다’라는 명제에는 많은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이 짧은 한 문장에 대해 두 번째 세 번째 연이 그 연유를 뒷받침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기승전결의 전통적인 귀납법적 사유로 구축되는 시의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인 연역적 사유로 창작된 시다. 이는 시인의 사유가 그만큼 유연하다는 뜻일 것이다. 두 번째 연과 마지막 연에 놓인 메시지는 차와 오감의 만남이 있어서, 결국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생의 맛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달콤한 것만이 인생이 아니란 의미다. 인생이란 무엇인가‘하는 우리 삶의 가장 기본적인 철학적인 명제에 대한 해답을 정답은 아니지만 시인은 ‘쓴맛 짠맛 단맛 매운맛 신맛’이란 상징으로 은근히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개별적이고 단선적인 단세포적인 인간의 찰나적 인식에 반대하는, 또는 비판하는 의미로 읽어내면서 인생의 의미를 한 번 다시 생각해 하게 한다. 양은순 시의 문학성은 위와 같이 일반화에 따르는 예시, 관념어에 대응하는 구체어가 있어서, ‘이것’이 ‘저것’이 되는 자리이동, 즉 치환과 변주 등의 다양한 시적 기법이 적용되어 시가 구축된다는 데 있다.
3. 차와 생명, 통찰의 가을
<차와 생명의 가을> 제 3부에 실린 시편들은 ‘가을’이 제목으로 된 것들이 꽤 많다. <가을 달빛차>, <가을 마차>, <동래의 가을>, <가을 차명상>, <가을사랑>, <가을 이야기>, <어느 가을>, <가을차실>, <초가을>, <가을소리> 등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3부에 수록된 시편에서 양은순 시인의 인간적인 모습과 생명적인 시세계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거니와 우리 부산 현대여류시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치열한 시작 활동의 선두주자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은순 시인의 시적인 면모는 예전이 더 치열했고, 시인적인 풍모는 지금이 더 익어있다고 하겠다. 서정성과 긴장성을 시작의 출발점으로 삼고, 일상성과 식물성을 통해서 시를 생성하고 있는, 그러면서 저질성에는 굽히지 않는 당당한 자세에서 시의 결실을 맺고 있다. 이렇듯 양은순은 서정을 바탕으로 해서 차와 생명을 시의 요소로 끌어들임은 물론 언어의 미감에 천착함으로써 삶의 의의를 발견하는 시세계를 지향한다고 하겠다. 이런 식물성적이고 생명적인 시세계는 차밭골에서 둥지를 틀고, 차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한, 앞으로 결코 퇴색됨이 없이 유효하게 될 것이다.
낙엽이 바스락거리며 떨어질 때
달빛 둥그스레 비추는 뜨락에
그리움 하나 서 있네
문득 문득
떠오르는
어머니의 모습
추억 속의 길 위로
키가 자라는 차밭 너머
단풍 드는 그리움이여
- <가을 달빛차> 전문
양은순의 가을 관련 시에는 우리들의 삶에 대한 사랑, 특히 추억과 그리움이 농밀하게 함축되어 있다. 신기하게 그녀의 시를 읽으면 ‘노을’이 떠오르고, 아름다운 대상들이 다가오는 듯 느껴진다. 이것은 그녀의 시가 ‘생의 찬가’로서 우리들에게 전해 주는 강한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그 메시지의 강력한 설득력은 그녀의 구도자적인 불교철학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같은 철학의 저변에는 어머니의 그림자 형상이 짙게 깔려 있다. 이와 같은 종교적인 정신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모성적 원리의 표출에 힘입어 그녀의 시는 때때로 지극히 낭만적인 매력을 지니기도 한다. ‘추억 속의 길 위로/ 키가 자라는 차밭 너머/ 단풍 드는 그리움이여’라는 마지막만 보더라도 그녀에게 가을은 온 힘을 다해서 하루를 보낸 시인이 높은 성취감으로 맞이하는 자축이자 향연의 시간이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사람의 길을 향하여
햇살이 환하게
불 밝히는 시간
하얀 얼굴로 태어난 차꽃이
황금보다 귀한 꽃향기를
세상에 내어주네
마음 안에 깃드는
아픔을
치유하고
우울한 생각을
비워내는 차꽃향의 찻물이여
맑은 그대의 영혼이
생명 되어
나에게 옮겨 오네
- <차문화치료> 전문
시인은 다도가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온갖 것들, 이를테면 불안, 공포심, 분노, 슬픔, 미움. 답답함, 적개심, 걱정, 갈등, 초조함, 한 등과 같은 감정들과 스트레스를 분출하고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을 시를 통해 나타내고자 한다. 시인은 2연에서 ‘아픔을/ 치유하고/ 우울한 생각을/ 지워내는 차꽃향의 찻물이여’라고 하면서 정신적 질병을 치유하는 데 찻물이 잘 활용될 수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문제로 고민과 갈등, 불만과 초조, 우울과 소외감을 겪으며 디지털 시대 속에서의 아날로그적인 고독,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낀다. 이로 인해 우울증을 비롯한 각종 정신질환이 생겨나며, 이것은 다시 인체의 여러 장기와 기능에 악영향을 끼쳐 갖가지 육체적 질환을 초래하기도 한다. 양은순 시인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찻물의 영혼이 자신에게 생명이 되어 온다’는 표현 속에 차의 치유효과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큼
나에게 차와 함께 한
시간이 행복했기에
차와의 시간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어진다
사람으로 시작되는
외로움과 그리움의 고통을
치유해 준 벗은
한 잔의 차였기 때문이다
- <차 한 잔의 행복> 전문
‘사람으로 시작되는 외로움과 그리움의 고통’으로부터 시인을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것은 한 잔의 차다. 이 시에서는 다도적 삶의 완벽한 행복의 공간이 보인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다’는 고백적인 언술에서 획득되는 것이다. 사찰에서의 생활에서 고독한 자아를 지탱할 수 있었던 어떤 위로가 있었다면 다도의 순간일 것이다. 이런 추측에는 고독과 행복의 시간이 교차되어 나온다. 시인은 구겨진 마음을 한 잔의 차를 마시며 펴고, 시를 쓰면서 또 다린다. 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내가 삶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한 바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의 대상으로 사람을 놓는다. 그러나 시인에게 사랑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차와의 시간이다. 사실 여성은 자신의 몸을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기고 싶어 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그래서 시를 쓰고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닐까. 외로움과 그리움의 고통을 시로써 풀어내고 차물로 씻어 내라고 시가 있고 차가 있다는 걸 이 시는 잘 말해 준다. 병이 있는 곳에 약이 있듯이 상처난 마음이 있는 곳에 그 상처난 마음을 치료해 주는 차도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 차는 아무리 마셔도 부작용이 없지 않은가. 차 한 잔의 행복이 이해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4. 차와 생명, 성찰의 겨울
시인의 말대로, 해질녘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삶의 경이로움을 만끽하는 계절이 생명의 겨울이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그리움’은 바로 ‘어머니’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시인은 그래서 관념 속에 있는 ‘그리움’을 ‘서 있는 것’으로 사건화했다. 일출보다 일몰이 아름다운 것은 내일 다시 떠오를 희망을 노래할 수 있어서다. 개화보다 낙화가 더 아름다운 것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노을 진 저녁, 내일의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음에 감동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듯이 시인은 ‘낙엽이 바스락거리며 떨어질 때/ 달빛 둥그스레 비추는 뜨락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추억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리움에 단풍이 든다’는 표현은 일반인과 다른 시선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같은 표현은 지식이 아니라 감성이 작용한 까닭일 것이다. 양은순 시의 서정적 특성은 삶의 생명성에 시적 자아를 동질화시키려는 시인의 지속적인 노력에 따른 결과라 하겠다.
제 4부, <차와 생명의 겨울>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말은 ‘명상’과 ‘다선일여’다. 이 두 편의 시만으로도 양은순 시인이 구축하는 겨울 세계에 대한 특성을 파악할 수가 있다. 짧은 가을이 노을과 함께 긴 겨울을 시작하는 시점, 그렇게 시작되는 겨울은 거울이다. 거울은 얼굴과 겉모습을 비추는 외면의 거울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비춰보는 내면의 거울이다. 양은순의 겨울은 성장을 멈추고 내면을 거울에 비추어 들여다보는 성찰의 계절이다. 그녀의 겨울은 모든 생명체가 성장을 멈추고 성숙을 위한 성찰의 시간을 보내는 침묵과 고독의 시간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양은순 시인의 작품은 마음을 들여다보는 거울이야말로 더욱 값지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학의 꽃이 시라고 할 때, 그것의 아름다운 모습을 여기에서 볼 수 있어 우리는 행복한 것이다. 거울을 가진 양은순 시인은 우리들에게 다시 새봄의 희망을 잉태하고 홀로 서서 내면을 응시하라고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그녀의 시는 거울에 비춰 나를 발견하고 정진하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준다는 의미에서 가치가 높다.
사람과 시비에 얽힌
세상을 보다가
훌적 차밭으로 들어가서
차나무와 함께
삼매경에 들어간다
헤쳐도 헤쳐도
넘어서도 넘어서도
나아가도 나아가도
끝이 어딘지
언제나 홀연히 가야만하는 세월 속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고
침묵하는 신선의 몸매를 닮은
차나무의 일생과
나의 목숨과
친구의 목숨과
아들의 목숨을 생각해 본다
- <다선삼매> 전문
양은순 시인의 <다선삼매>는 전반적으로 여백이 많은 한 편의 동양화를 대하는 듯하다. 그리고 삶에 있어서 가장 가치로운 혹은 행복스러운 것은 무엇일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어 경건해진다. 현대의 고도로 발달된 산업사회에서 매몰된 서정적 자아의 확립으로 시인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비에 얽힌 세상사를 비껴나 청정한 삶을 추구하기에 그녀의 시선은 항상 차밭에 머문다. 물신화되고 인간성이 붕괴된 혼란한 시대 속에 시인은 풍상을 겪은 한 그루의 차나무로 우뚝 서 있다. 성숙된 자아가 자연 속으로 귀의하여 만든 심미적 공간은 무한히 열린 바이오필리아의 세계다. 속물들의 세태에 절망하는 감각적인 정서가 무르익어 실존적 자각을 이루고 결국 차나무에서 삶의 근원을 찾게 된다. 시인은 생명의 소중함과 운명적인 인연을 삶의 미학으로 승화시켜 냄으로써 삶을 깊이 성찰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한편으로 겨울은 그저 멈춰 서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시간이 아니라 관계와 인연에 대해 성찰하는 거울을 그녀에게 선물로 준다. 이런 성찰하는 자세는 시 전반을 흐르는 시적 자아의 모습이라 하겠다.
차나무는 자라기 위해
뿌리가 돌밭을 견뎌야 하고
줄기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새순은 비바람을 이겨야 하고
한 움큼의 뱃속을 채울 찻물은
제다의 수고로움을 거쳐야 한다
- <차와 사람> 전문
시인은 차의 일생을 사람의 일생에 견주길 좋아한다.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어휘는 ‘돌밭’, ‘비바람’, ‘제다’다. 한 잔의 찻물이 될 때까지 인고의 과정은 인생의 운행과 다를 바 없다. 차와 친숙해지면 삶의 운행과 변화의 질서를 알아내게 된다. 자연은 사람들이 꾸민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위가 아닌 무위이다. 사람도 인생도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양은순은 깨우치고 있다. 때문에 시인은 ‘자라고’, ‘열매를 맺고’를 ‘사람의 일생’에 비유하고, ‘뱃속을 채울 한 움큼의 찻물’을 사람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양은순에게 시의 언어는 ‘차’고 ‘거울’인 것이다. 제다의 수고로움 끝에 토해내는 뜨거운 언어들은 <초의와 차>, <이규보와 차>, <맹자와 차>, <정몽주와 차>, <공자와 차>, <원효와 차> 등의 시에서 ’사무사‘의 화두가 되고 있다.
차의 향기와 함께 성인들을 만나는 거울 같은 사유를 보여주는 게 가을 시의 특징이다. 그녀는 차나무의 순리를 인간의 조건으로 변주한다. 따라서 양은순의 노래는 자연을 본받고 배우라고 부르는 외침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차를 마시며 ‘성인들의 향기’를 맡으며, 인간의 본성과 세태를 풍자하기도 한다. 또한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하면서, 물, 바람, 불꽃, 흙을 떠올리며 ‘일체유심조’라는 불교적 세계관을 수놓는 데 있어서도 추상성과 구체성을 같이 향유한다. 그녀는 <찻잔에 그린 그림>에서 정작 자신을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추상화’라 했지만, 온몸으로 발열시킨 오감의 언어들은 우리들을 축축한 찻물의 사찰로 인도한다. 시의 제목을 ‘차와 사람’이라 해놓음으로써, ‘사람’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고 메시지를 인생의 본질에 도달시키는 데도 성공하고 있다. 이는 그녀의 시적 기량을 잘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하겠다.
그대는 삶의 과정 속에 아픔의
숱한 이별잔치를 벌이네
대표적인 송년차회 때
박수와 환호와 주고받는 덕담으로
가고 오며
당신을 보내고 맞이하네
- <이별잔치> 전문
양은순의 열한 번째 시집의 마지막에 놓인 시는 <이별잔치>다. 이 시를 통해 시인은 만남과 이별이 존재의 양면성이면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임을 이해시키고 있다. 삶은 언제나 이별 속이다. 이별은 살아 있는 자의 운명이므로,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양은순에게 있어서 아픔의 이별은 ‘박수’와 ‘환호’와 ‘덕담’으로 승화되는 긍정의 정서다. 이 반전의 묘미, 역설의 힘이, 양은순 시의 매력이다. 일반적으로 이별의 자리에는 외롭고 슬프고 아픈 정서가 남겠지만, 양은순의 이별 자리에는 긍정이 살아 숨 쉰다. 알고 보면 그게 우리네 생이고, 우리 인생이고, 차와 함께 하는 다인들이 생각하는 인생의 본질이다. 그녀의 차시를 따라가다 보면, 삶의 슬픔도 기쁨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양은순 시의 생명적 근원은 반전을 노리는 긍정적인 인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열한 번째 다시 만나는 그녀의 시집 <차인열전>은 차 한 잔 하는 일이 이렇게 생명적이라는 데서 놀라움을 겪게 된다. 그녀의 시에 나타나는 자연은 본래적 의미의 생성적 질서와 그 환희의 인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녀는 마음을 열어 놓고 사람들과 찻잔을 나누고 사물의 진면과 교응하길 좋아한다. 그녀의 차명상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어서 어떠한 인위도 만들지 않는다. 그녀는 차밭, 차나무, 찻잎, 찻잔, 찻물에서 생명의 존귀를 찾고 생의 이치를 구한다. 시인은 생명을 가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일상에 자리한 아픈 이별을 체득하면서, 그것을 긍정으로 승화시켜 낼 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 하겠다. 그녀의 시풍은 전통적인 차생활양식에 깃든 사무사정신과 생명의식을 섬세한 감성으로 포착하여 시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설미학의 운치는 그 미적 특질로서 가히 성공적이라 할 것이다.
III. 로그아웃
양은순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은 오로지 차를 향한 집념만으로 차향으로 가득하다. 다도를 통한 삶의 인식은 그녀의 시적 주제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다도의 사계는 계절마다 고유한 의미가 담겨 있다. 양은순은 그 의미를 몸으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느끼는 사람이다. 오로지 차와 계절과, 계절과 차의 의미를 즐기며, 차시를 지으며 ‘사랑’ ‘행복’ ‘의미’ ‘삶’ ‘인간’ 등의 화두를 떠올렸다. 구도자적인 생, 외진 산중 체험으로 인해 모성 세계에 대한 절박한 열망을 보여주었던 양은순의 시는 우리 삶의 진경을 돌아보게 한다. 그녀가 절실하게 향유하고자 했던 다도의 세계는 삶의 생명성에 대한 동경이었으며, 그것은 온몸으로 느끼는, 우주적인 사랑이었다. 사물과 인간의 존재에 천착해 들어가 그 운명적 본성을 해명하는 데까지 그녀는 무려 백여 편의 차시를 쏟아내었다.
프로이트는 ‘예술은 심적 불만의 승화’라 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생명성에 대한 강렬한 욕망과 함께 형상화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그녀가 경험했을 생의 한계와 육체적 외로움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양은순의 격렬한 생명성의 시들은, 오히려 역설적으로도 읽힌다. 생명력 이면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생명력을 생각나게 한다. 끝으로, 긍정의 생을 건져 올리기 위해 차밭에 끊임없이 깊은 시선을 던져온 그녀의 찻잔을 떠올린다. 한 잔 한 잔 따뜻하게 우려낸 녹차의 푸른빛으로 우리 생의 환희를 터치하고, 차 한 잔에서 경이로운 기적을 발견하는 시인에게 ‘진정한 차인’이란 타이틀을 달아주고 싶다. 그녀는 가볍고, 저속한 아류에 맞장 떠온 강자다. 거친 도전에 단호하게 대적하며, 자신의 고독한 내면을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들여다본 자유인이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