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유배문학 「중춘상현상임상(仲春上弦 上任相)」 봄에 재상께 올리다>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거제유배문학은 ‘元’ 운목의 칠언배율(七言排律) 「중춘상현 상임상(仲春上弦 上任相)」이다. 즉, ‘음력 2월 상현날(7~8일)에 재상에게 올린다‘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인 유헌(遊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이 1552년(壬子, 명종 7년) 유배지인 거제도에서 지은 연작시로, 『유헌집(游軒集)』 권2(卷之二)에 수록되어 있다. 제목의 '중춘상현(仲春上弦)'은 음력 2월 상현달이 뜨는 2월 8일 무렵을 뜻하며, '상임상(上任相)'은 당시 영의정이나 좌·우의정 등 조정의 높은 재상(任相)에게 올린다는 의미다. 정황은 을사사화(1545년) 이후 정미사화(1547년)에 연루되어 곤양에서 1548년 거제도로 이배되었는데, 유배지의 혹독한 환경과 외로움,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조정의 소식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이 시에 담았다.
○ 내용인즉, 이 시는 을사사화(1545년)와 정미사화(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라는 거대한 정치적 풍파를 겪고 천 리 먼 변방의 거제섬으로 쫓겨난 선비의 고독감, 억울함, 그리고 구원에 대한 갈망이 집약된 작품이다.
시인은 자신이 처한 유배지를 유교적 교화가 미치지 못한 문화적으로 낙후된 곳으로 인식하며 외로워하면서도, 정작 '정치의 중심지'여야 할 한양이 간신배들의 모함과 소음으로 가득 차 있는 역설적인 현실을 비판한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높은 재상에게 자신과 같은 처지의 유배객을 잊지 말고 구제(해배와 복권)해 줄 것을 호소하면서, 선비로서 유교적 충의(承恩)를 잃지 않으려는 태도로 시를 마무리하였다.
**「중춘상현 상임상(仲春上弦 上任相)」** 1552년(壬子) / 정황(丁熿 1512~1560)
龍鍾自分[缺二字]存 늙고 병들어 초라한 이 몸, 스스로 겨우 살아가니
故國悠悠不敢言 멀리 있는 고향(조정)은 아득하여 감히 말도 꺼내지 못하네.
孤臥島夷西帶眼 섬나라 오랑캐 땅에 외로이 누워 서쪽으로 눈을 두는데
病吟環海北支渾 바다인 섬에서 앓아누워 북쪽의 혼탁한 세상을 버티며 읊조린다.
山河且置皆新見 낯선 산천은 잠시 제쳐두더라도 모두 새로이 보는 풍경인데
俗尙還嗟異昔論 이곳의 풍속과 숭상하는 바는 너무 이질적이라 도리어 탄식하네.
王化所偏人鬼雜 왕의 덕화가 치우치게 미쳐 사람과 귀신이 섞여 사는 듯하고
友師之絶牖窓昏 벗과 스승마저 끊어지니 들창과 창문이 어두컴컴하구나.
曾磨垢鏡光初出 일찍이 때 묻은 거울을 갈고 닦아 이제 막 빛이 나려 했는데
仍蹶駑蹄事已翻 둔한 말의 말굽이 넘어지듯 일이 이미 뒤집혀 버렸네.
魑魅聚鄕猶欲立 도깨비들이 모여 사는 시골에서도 오히려 뜻을 세우려 하건만
京師首地可相喧 나라의 으뜸인 한양 땅에서는 어찌 그리 서로 시끄럽게 떠드는가.
比聞風報驚喪膽 근래에 들려오는 소문에 깜짝 놀라 쓸개가 떨어질 뻔했고
忽戀高明暗破魂 문득 높고 현명하신 분(재상)을 그리워하며 남몰래 넋이 나간다네.
一倡妖魔能日蔽 요사스러운 마귀(간신배)가 한 번 부추기니 능히 해를 가리고
累成先業爲聲呑 조상 대대로 쌓아온 가업은 그들의 목소리에 삼켜지게 되었네.
轍中常涸何由恤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처럼 늘 말라 가니 누가 나를 구휼해 주랴.
長者垂濡豈得諼 재상께서 은혜의 물방울을 적셔주신다면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强聒遠塵無棄我 먼 곳 속세의 먼지가 억지로 시끄럽게 읊조리나 나를 버리지 마소서.
此身乃是在承恩 이 몸은 여전히 임금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고 있나이다.
[주1] 용종(龍鍾) : 노쇠하여 걸음걸이가 똑바르지 못하고 초라한 모습을 뜻함. 유배 생활로 지친 시인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보여준다.
[주2] 도이(島夷) : 원래는 동쪽 섬의 오랑캐를 뜻하나, 여기서는 유배지인 거제도와 그곳의 낯선 풍속을 다소 거칠게 표현한 것이다.
[주3] 인귀잡(人鬼雜) : 왕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는 변방이라 도덕과 질서가 무너져 사람과 귀신이 뒤섞인 것처럼 혼란스럽다는 절망적 표현이다.
[주4] 거울을 갈고 닦아 이제 막 빛이 나려 했는데 둔한 말의 발굽에 넘어졌다.(磨垢鏡光初出 仍蹶駑蹄) : 자신의 학문과 수양이 이제 막 빛을 발하려 했는데 조정의 사화로 인해 재능을 펼치지도 못하고 좌절된 상황(발굽)을 비유했다.
[주5] 비문풍보(比聞風報) : 조정에서 들려오는 정국 변화나 사화의 여파에 대한 소식이다. 시인은 이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주6] 철중상학(轍中常涸) : 장자에 나오는 '학철지부(涸轍之鮒)' 우화에서 유래한 말로, 수레바퀴 자국에 굄 물에 사는 붕어처럼 매우 위급하고 곤궁한 처지를 뜻함. 재상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투영되어 있다.
● [「중춘상현 상임상(仲春上弦 上任相)」의 문학적 가치와 서사적·미학적 관점]
유헌(遊軒) 정황(丁熿, 1512~1560)의 「중춘상현 상임상(仲春上弦 上任相)」은 사화(士禍)의 광풍에 휘말려 절해고도(絶海孤島) 거제도로 쫓겨난 조선 선비의 내면적 고통, 정치적 환멸, 그리고 절박한 구원 요청을 담은 명편이다.
이 장문의 칠언배율(七言排律) 20구(句)는 내용상, 크게 4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1~8구]는 시적 공간의 대립과 소외감을 극대화 했고 [9~12구]는 과거의 좌절과 현재의 환멸을 드러냈다. [13~18구]는 심리적 공황과 구원의 갈망에 절박한 호소로 이어진다. [19~20구]는 충의(忠義)를 통한 자아의 구원을 재상에게 호소하며 끝맺었다.
○ 전반부 [1~8구]에선, 유배지인 거제도의 ‘공간적 낯설음’과 그로 인한 시인의 ‘정신적 고립감’을 극대화하였다. 시인은 거제도를 ‘도이(島夷, 오랑캐의 섬)’이라 부르고, 그곳에서 ‘서쪽’과 ‘북쪽’(한양)을 바라본다. 육체는 사방이 바다로 막힌 섬에 갇혀 있지만, 정신은 끊임없이 중심(조정)을 향해 뻗어 나가는 데서 오는 갈등이 깊게 묘사되었다. 이어 시인의 눈에 비친 유배지는 ‘인귀잡(人鬼雜, 사람과 귀신이 뒤섞임)’의 공간이다. 이는 주민들을 비하하는 것이라기보다, 유교적 교화(王化)가 미치지 못해 도덕적 질서가 무너진 황무지에 뚝 떨어진 유학자의 문화적 충격과 절망감을 문학적으로 과장한 표현이다. 스승과 벗이 끊겨 들창마저 어둡다는 표현은 정신적 유대감이 거세된 암흑 같은 고독을 상징한다.
중반부 [9~12구]에선, 시인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 들려오는 조정의 소식에 분노와 탄식을 쏟아내었다. ‘때 묻은 거울을 닦아 빛이 나려 했다’는 것은 오랜 학문 수양 끝에 비로소 조정에 나아가 뜻을 펼치려 했던 과거의 포부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에서 ‘둔한 말의 말굽이 고꾸라졌다’고 하여, 사화라는 불가항력적인 정치적 재앙 앞에 무참히 꺾여버린 신세를 감각적인 비유로 대비시켰다. 그리고 섬(변방)을 사람과 귀신이 섞인 곳이라 탄식하던 시인은, 정작 나라의 으뜸이어야 할 ‘경사(한양)’ 역시 간신과 도깨비(魑魅)들이 모여 시끄럽게 떠드는(相喧) 타락한 공간으로 규정했다. 변방이나 중심이나 어디에도 선비가 발붙일 올바른 공간이 없다는 공간적 환멸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후반부 [13~18구]에선, 조정의 급변하는 정세를 전해 들은 시인의 실존적 위기감과 이를 타개하고자 하는 절박한 호소가 주를 이룬다. 한양의 소식을 듣고 ‘쓸개가 떨어지고 넋이 나갔다’는 표현은 당시 을사·정미사화 이후에도 계속된 피의 숙청이 유배지에 있는 시인에게 얼마나 큰 심리적 공포로 다가왔는지 실감 나게 보여준다. 간신배들이 해(임금의 총명)를 가려 가문과 선비들의 가업이 삼켜지는 현실을 목도하며 시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진다. 그리곤 시인은 자신을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방울이 말라가며 죽어가는 붕어(涸轍之鮒)’로 비유했다. 이는 《장자》에 나오는 유명한 우화로, 당장 한 바가지의 물이 없으면 죽을 지경에 처한 극단적인 궁핍과 위기를 뜻한다. 편지를 받는 ‘상임상(재상)’에게 거창한 구도가 아니라, 당장 숨을 쉴 수 있게 도와달라는 처절하고도 문학적인 구원 요청이다.
마지막 [19~20구]에선, 시인은 감정을 추스르고 선비로서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다. 시끄럽게 읊조릴지언정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면서도, 마지막 한 줄에서 “이 몸은 여전히 임금의 은혜 속에 있다(在承恩)”고 선언한다. 이는 자신을 쫓아낸 권력과 군주를 원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유배 생활 또한 임금의 처분이며 나는 여전히 신하’라는 조선 사대부 특유의 연군지정(戀君之情)과 충의 사상으로 비극적 감정을 승화시키는 문학적 종결 방식이다.
결국 이 시는 단순한 신세 한탄을 넘어, ‘元’ 운목의 칠언배율(七言排律)이라는 엄격한 대구(對偶) 규칙을 지킨 걸작이다. [문명(선비) vs 야만(유배지)], [순수한 포부(거울) vs 참담한 좌절(말굽)], [말라가는 붕어(자신) vs 은혜의 물방울(재상)]이라는 선명한 대립 구조를 활용하여 고도의 작시 능력을 보여준 유배 문학의 비장미를 극대화한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