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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어린이주일] 새는 나뭇가지 하나에도 둥지를 틉니다 (대하 34:1-7)
제가 큐즈를 내 볼 터이니 한 번 맞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넌센스 큐즈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자연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동물들의 울음소리를 가르치기 위해 물어 보았습니다. “강아지는 어떻게 짖나요?” 아이들이 말했습니다. “멍멍멍!” “호랑이는 어떻게 울죠?” 아이들은 일제히 “어응”했습니다. 선생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제비는 어떻게 울까요? 이 때 카바레집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대답했습니다.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요?” “사모님~. 사모님~.”
다시 한 번 더 쉬운 문제 물어 보겠습니다. 중국집을 하시는 집사님께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시험을 보고 집에 오자 물었답니다. “오늘 시험 친 거 몇 점 받았니?” “한 개만 빼고 다 맞혔어요.” 어머니가 칭찬을 해 주어야 할텐데 하나 틀렸다는 말에 기분이 안 좋아 “무슨 문제를 틀렸는데?”라고 퉁명스럽게 물었답니다. “국어인데요 보통의 반대가 뭐냐는 문제였어요” 그러자 어머니가 “그렇게 쉬운 것을 뭐라고 썼기에 틀렸어?”라고 물었답니다. 그 때 아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였겠습니까? “곱빼기요.”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어릴수록 더 많은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환경이 어떻냐에 따라 인생의 미래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지 않은 환경에서라도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서 역사에 빛을 남긴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요시야 왕이 바로 그런 왕입니다. 요시야 왕은 참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우상을 철저히 숭배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신하가 혁명을 일으켜 아버지가 24살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마 고대 정치 혁명의 속성상 이때 어머니와 수많은 일가 친척들이 죽었을 것입니다. 8살에 고아같이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유다 제 16대 왕 요시야는 유다 나라 20명의 왕 중에서 가장 훌륭한 왕으로 성경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요시야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고 했습니다. 둘째가 그의 조상 다윗을 본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길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셋째가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여호와를 섬겼다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평가받은 왕은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아마샤, 아사랴, 요담, 히스기야, 요시야 등 8명입니다. 이 중에 다윗을 본받아 다윗과 비교될 만한 왕은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3명입니다. 이 중에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았다고 극찬의 말을 들은 사람은 요시야 왕밖에 없습니다. 철저한 개혁으로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 땅 벧엘의 우상까지 헐어 버렸습니다(왕하23:15) 북쪽 여로보암이 만든 우상으로 감히 아무도 헐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유다 역대 왕 중 최고의 선왕(왕하23:25)이며 성군 중의 성군으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 23:25)” 참으로 위대한 평가입니다.
오늘 열린 교회 9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그리고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 열린 교회에 속한 우리 성도님과 저는 이런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우리가 양육하는 자녀들이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이런 평가를 받고 우리 자녀들이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인물로 만들 수 있을까요?
1.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1-7). /하나님 중심의 교회, 하나님 중심의 양육.
요시야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의 인생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의 인생의 초점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옳으냐 옳지 않느냐에 따라 삶의 결정이 달라졌습니다. 선택의 기준이 하나님이고 방향의 기준이 하나님이고 정직의 기준이 하나님이었다는 말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되었지만 백성이 지지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 보시기에 옳으냐 옳지 않느냐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삶의 실제에 대하여 3절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도 나이가 어렸을 때는, 아직 신앙이 성장하지 않았을 때는 백성들의 눈치를 보았을 것입니다. 살기 위해 급급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8살 홀로 된 사람입니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 자신 한 몸 살고 유지하는데 급급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대신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아버지가 친앗수르 정책을 썼고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신들을 죽이고 다시 요시야를 왕위에 올렸으니 그 백성들의 성향은 어떤 사람들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을 죽인 사람이니까 친앗수르 파였을 것이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요시야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전국에 우상숭배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마 신하들의 눈치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라졌습니다. 8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하나님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곧 위에 있은 지 팔 년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몰랐겠습니까? 아닙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8년이 지나서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으로 인생이 변화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신하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상황에 얽매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결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린 나이 8살에 왕이 되었으니 어떻게 자신 스스로 정책을 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백성들이 아버지를 죽인 신하들을 죽이고 자신을 세웠기 때문에 자신을 세워 준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야만 형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16살이 되자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이제 왕이 된지 12년이 되었습니다. 20살이 된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모든 우상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우상들을 가루로 만들어 그것을 섬기던 자들의 무덤에 뿌렸습니다. 할아버지 때는 이렇게 철저하게 하지 못해서 아버지가 다시 버린 우상을 가져다 섬겼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제사장들의 뼈를 단위에 불살라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였습니다. 6절에 보십시오. 전국적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의 중앙에 있습니다. 시므온은 유다 최남단입니다. 납달리는 북 이스라엘의 최 북단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 동안 뿌리 깊게 밝힌 구조적인 악입니다. 이것으로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이렇게 개혁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살기로 그의 삶의 가치관을 분명히 한데 있습니다. 자신이 태어나 왕이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는 것을 분명히 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신비한 것은 이러한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이미 여로보암 시대에 예언되었던 일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행위가 극에 달하자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한 선지자를 보내어 요시야라 이름하는 자가 다윗의 집에서 나와서 산당에 분향하는 제사장을 제사하고 사람의 뼈를 사를 것이라고 예언케했던 것입니다. 성경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왕상 13:1-2를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우연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열린 교회가 우연히 설립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열린 교회 설립 9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열린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코람데오 정신으로 살아가는 교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얼마전 어느 의원의 성추문이 다시 신문에 오른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서의” 정신으로 우리가 산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을 우리가 누리고 살 것입니다. 교회부터 먼저 그렇게 해야 하고 우리 자녀들을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상업주의, 물질 주의 우상, 시장 논리 성공주의 우상이 교회에서 판을 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요즈음 교회도 브랜드화 되고 있습니다. 브랜드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들어 성전을“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번영의 신 금송아지가 우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만 영광을 받고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만 드러나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환경이 아무리 좋지 않다하여도 하나님 중심으로는 언제 어디서나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는데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자녀로 양육하는데는 조그마한 힘만 기울인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교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우리는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8-13). /교회 중심의 성도, 교회 중심의 자녀양육.
성경에 보면 다윗의 길로 행한 왕 세명이 나옵니다.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왕입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성전에서 우상을 제거하고 신앙 부흥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성전 짓기를 사모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입니다. 다윗의 길을 간 사람들은 성전을 정결케 하여 모든 백성들을 성전 중심의 삶으로 회복시킨 사람들입니다. 요시야를 보십시오. 8절을 보십시오. 이제 왕이 된지 18년이 되었습니다. 24살이 된 것입니다. 이 때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땅과 성전을 정결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 때 그는 무엇을 합니까? 여호와의 전을 수리합니다. 그동안 찢기고 헐벗은 성전입니다. 형편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조상들이 앗수르를 섬긴다고 성전의 기물을 조공 물로 바치기도 하였고 이방 신을 섬긴다고 이방신의 제단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성전을 수리할 것을 결심합니다. 결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수리할 수 있도록 사람을 임명합니다(9). 자금을 확보합니다(9). 그 자금을 감독자에게 주어 집행하게 합니다(10). 일을 맡은 사람들은 진실하게 성전 수리를 수행합니다(12). 요즈음 말하면 교회 중심의 삶을 회복시킨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 중심으로 살라고 유혹을 합니다. 돈 중심으로 살라고 유혹을 합니다. 사탄은 그래서 교인들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마음에 품지 못하도록 하고 교회의 비난 거리를 만들어 교회를 떠나게 합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다. 교회가 돈만 좋아 한다. 교회가 은혜가 없다. 교회가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 가까지 교회를 멀리하게 하는 이유를 찾게 만들어 줍니다.
김연숙씨가 쓴 [흔들리는 신앙, 붙들어 주소서]라는 글에 22년 동안 미국 이민 교회에서 108번 교회를 옮긴 장로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년에 약 5번 정도, 평균 두 달에 한 번 정도 교회를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상향의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런대 교회를 옮기는 날로부터 그 교회의 단점을 찾기 시작합니다. 목사의 허물을 맨 먼저 찾아냅니다. 그리고 자기 눈에 드러난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답니다. 교회주보, 성가대, 주방, 교인들의 태도 등 108개 교회의 단점을 낱낱이 노트에 적어서 마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답니다. 그가 병으로 죽게 되자 어느 교회도 그의 장례식을 해줄 수가 없었답니다. 이유는 그가 섬긴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죽기 전 108번째 교회 목사님이 불쌍히 여겨 그의 장례식을 해주었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천국에 올라가 주님 앞에 108개 교회의 허물을 기록한 두툼한 노트를 펴놓는다면 주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주님은 그 사람의 허물이 적힌 수십 권의 노트를 던져주시지는 않았을까요? 그의 후손은 얼마나 불행했을까요?
세상에 이상향의 교회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란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신앙인의 어머니와 같은 곳입니다. 물이 때로는 배의 앞길에 힘겨운 파도로 다가오지만 배는 물을 떠나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바람이 거슬린다 하여도 새는 바람이 있어야 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차 철도가 단조로운 것같지만 기차는 철로 위에 있을 때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비록 모순이 있고 교회가 비록 부족한 것같지만 우리 신앙인은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은 교회 중심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많은 부족한 것들이 있지만 어느 교회나 하나님이 붙들고 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초라한 것 같지만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세속사와 구속사를 나눈다면 구속사의 중심은 역시 교회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붙들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을 계시록에서는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계 1:2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7교회를 보십시오. 많은 부정적이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붙들고 사용하십니다.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고린도 교회 얼마나 부정적인 요인이 많이 있었습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완전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과 같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우리 나라 수많은 교회들이 교회 중심의 사람들에 의해 건립되었고 희망의 공동체로 지역 지역에서 소망을 주며 세상을 변화시키고 생명의 등대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교회 마다 얼마나 교회 중심의 신앙인들의 희생과 십자가가 숨겨져 있습니까?
전북 삼례에 성경교회가 지어질 당시 일화가 있습니다. 문집사님께서 교회 중심으로 열심히 살아갔는데 예배당을 짓다가 완공을 못 본 체 불신자들의 비난을 듣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욕을 돌리고 불신자들에게 비난을 받는 것을 마음 아파하면서, 어느 날 신문을 읽었는데 전주 예수병원에서 사람의 눈을 사겠다는 광고를 보고 눈을 팔아서 교회를 완성하기로 결심했답니다. 아내는 노발 대발하였지만 예수병원에 찾아가서 자기 눈을 팔겠다고 했답니다. 원장은 그 이유를 묻고 예배당 건축 완공하기 위함이라는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아 병원에서 헌금을 해 주고 이 사실이 미국 신문에 보도하였더니, 미국 어느 갑부가 헌금해 와서 교회가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자녀들은 모두 미국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사에 얼마나 이러한 일이 많았습니까?
교회는 결국 세상이 정복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이 시대는 교회에 희망이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희망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와 기도하여 응답받고 교회에 말씀듣고 위로받으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고 나에게 주신 소명을 받습니다. 교회에 나와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양심의 자유를 누리며 질병의 두려움과 마음의 걱정에서 해방됩니다. 복음의 기쁨을 맛보고 참된 평강이 회복됩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삶에 대한 희망이 회복됩니다. 가난에 굶주린 자들, 병든 문둥병자가, 간음하여 현장에 잡힌 여인이, 38년된 병자가, 앉은 뱅이가, 혈루증 앓는 자가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회복되었습니다. 죽음에서 잃어나게 되고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고 질병에서 낳게 되고 죄의 종에서 자유의 몸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희망의 공동체로 쓰시길 원하십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할 수 없다. 우리 교회는 힘이 없다. 우리 교회는 무능력하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어떻습니까? 그는 우상 장사의 아들입니다. 그가 부름받은 때는 75세였습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거짓말 장이입니다. 욕심 꾸러기입니다. 부모를 속이고 가출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다윗은 어떻습니까? 살인자, 간음자입니다. 그들을 사용하였습니다.
교회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부정적인 면만 보면서 교회를 등지지 말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사회보다 희망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든 부족하지만 교회와서 배우고 교회 와서 가르치고 서로 교제하고 모이기를 힘쓰고 전심으로 기도하고 봉사하는 일에 헌신하고 찬양하는 일에 열심이고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치유의 능력을 받고 온 백성의 칭찬을 듣고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중심의 성도, 교회 중심의 자녀 교육을 시켜야 하겠습니다.
3. 우리는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14-33).
성전 수리를 하다가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였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성경이 흔할 때가 아닙니다. 참으로 귀한 때입니다. 사반이 그 책을 왕에게 가져왔습니다(18). 사반이 그 책을 왕 앞에서 읽었습니다. 이 때 왕이 그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하였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자기 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왕이 통회하고 자복했다는 말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자신의 열조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을 놓고 회개한 것입니다. 아마 신명기를 말씀같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훌다에게 말씀을 뜻을 물어 보기 위해 사람을 보내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훌다는 재앙이 내릴 것을 예고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섬김으로 인해서 민족적 재앙이 임할 것을 말씀합니다. 바벨론 포로를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은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옷을 찢고 통회하였으므로 이런 험한 꼴을 보지 않고 죽을 것을 예언합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어떻게 합니까?
그저 무시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그래도 재앙을 면한다고 안심하며 좋아하지 않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모든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모였습니다. 백성들에게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말씀 사경회가 열린 것입니다. 말씀에 주목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왕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명령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었습니다.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3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언약을 좇았습니다.
말씀 부흥 운동이 하루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말씀 부흥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진리가 선포되는 곳입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 3:15)" 교회란 진리를 드러내 놓고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와 함께 살고 진리와 함께 사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란 규모가 문제가 아닙니다. 진리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사람의 머리를 만족시켜 주는데도, 사람의 감정을 만족스럽게 하여 주는데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에 합치하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배는 물 위에서 떠 가는 것입니다. 물을 떠나서는 배는 쓸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이 배 속에 침수하여 들어오면 그 배는 가라앉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서 구원의 방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 세상의 세속주의의 물결을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교회는 말씀 중심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자녀를 양육할 때도 말씀 중심으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과 자녀들의 삶을 온전하게 만들어 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5-17)”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어 영혼이 구원받은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15).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을 만납니다. 제 2의 인생이 탄생됩니다.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기쁨을 맛봅니다. 세상이 줄수 없는 평안과 위로를 누리게 됩니다. 성경은 살아 운동력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렘15:16에서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1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히4:12) 너무나 세상의 권위에만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문화(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 전통( '항상 그렇게 해왔으니까' ). 이성( '논리적이니까' ). 또는 감정( '옳은 일처럼 느껴져서 )에 최종적인 권위를 두며 그것으로 인생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계의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는 대통령으로부터 "내각의 장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만약 주일날, 주일학교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말씀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의 승낙을 얻은 그는 기쁜 마음으로 체신장관 직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그만한 가치관 인생관 신앙인격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어느 날 그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답니다. "나는 이렇게 노인이 될 때까지 참으로 많은 물건들을 샀습니다. 돈으로 따지면 엄청난 금액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어떤 물건보다 귀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면서 곁에 있는 한권의 성경을 들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아홉 살 때 1달러 50센트 주고 산 성경책입니다. 이것이 나의 일생 동안 산 것들 중에 가장 귀한 것입니다. 이 성경에 의해서 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덕분에 오늘까지 대단한 과실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았기 때문에 50년 가까이 주일학교를 위해 봉사했다고 합니다.
성경에 있는 3만 1,173개의 구절 가운데 한 말씀만 붙들어도 우리의 인생은 바뀌어집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죤 번연은 요한복음 6:37에 의해, 위대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에 의해, 세계 선교에 앞장 섰던 윌리암 캐리는 "네 장막터를 넓히라"고 하신 이사야 54:2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인생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있는 진리 하나가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나은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뮬러 목사는 3천명 이상의 고아를 돌보았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어떻게 그런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답니다. 그러자 그가가 대답하기를 "나는 평생동안 성경을 1백번 읽었습니다. 단 한번도 싫증을 느낀 적이 없지요. 내가 성경을 읽지 않았던 3년은 `잃어버린 시간'이었습니다. 하루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영적인 활력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성경이다"라고 말했답니다. 링컨은 매일 성경을 묵상하며 삶의 지혜를 얻었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시편 19편 7-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순결하게 합니다. 이것을 지키며 큰 상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정금보다 사모할 것입니다.
나뭇가지 하나에도 새는 둥지를 틀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이 좋지 않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환경이 연약하다고 자녀 교육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생명만 있다면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말씀 중심으로 살 수 있습니다. 교회를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 갈 수 있고 우리 자녀들을 그렇게 양육할 수 잇씁니다. 그리 많은 것이 있어야 하고 많은 것을 배워야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우리 주님을 구주로 모시는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천국 백성이 되었지 않았습니까? 방향만 조금 바꾸면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말씀 중심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손해가 아니라 요시야 왕처럼 참으로 훌륭한 인생을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김필곤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