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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5월 31일은 미국의 한 마을 주민 2,000여 명이 몰사하는 참극이 벌어진 날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기 전인 1888년 초여름, 펜실베이니아 주에서는 여름 장마에 대비한 댐 안전점검 작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습니다. 그 결과 작은 마을 존스타운에서 가장 가까운 댐이 안전치 못하여 대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보고가 나왔습니다. 조사위원회에서는 마을 주민들에게 대피를 촉구하는 연락을 했으나, “그런 걱정 마십시오. 이제까지 끄떡없던 댐이 하루아침에 무너진단 말이오?”라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그해 여름이 무사히 지나고 가을이 되자 또다시 조사 작업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경고가 내려졌으나, 주민들의 대답은 역시 같았습니다. “지난 여름에도 무사히 넘기지 않았소! 이제 곧 겨울이 올 텐데 별 일 있겠소!” 이렇게 해를 넘기고, 사고가 있기 두 주일 전인 1889년 5월 17일 마지막 조사 작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까딱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두 주일 후 갑작스레 내린 폭우로 댐이 붕괴되자, 마을은 순식간에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경고를 아무리 해도 경고를 듣지 않다가 참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각종 화산, 지진 혹은 전염병등의 재난이 닥쳐올 때 정부와 언론등 여러 곳에서 경고를 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경고를 들으면서도 ‘나까지 뭔 일이 있겠어’라고 생각하다가 큰 화를 당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재앙과 심판전에 우리에게 경고를 하십니다. 경고는 협박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최후의 수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을 살려보시고자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경고를 하십니다.
왜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까요? 첫째는 열매가 무성한 것이 화였습니다.
호세아 10장 1절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민족이 ‘열매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좋은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무는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서에서 호세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이 무성한 포도나무라고 했습니다. 정말 하는 일마다 잘되고 이상하다할 정도로 능력도 없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큰 민족, 번성한 족속이 되었습니다. 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으면 정말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에서 길을 가시다가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이렇게 저주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입니다.
마태복음 20장 19~20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정말 쓸모없는 나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즉각 나무를 없애시는 예수님의 단호한 행동을 보며 제가 정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던 구절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이시고 우리가 가지이기에 예수님안에 있으면 우리가 열매를 맺게 되고 은혜가운데 살고 되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역사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호세아에서도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열매를 맺고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이 열매를 많이 맺어 번성한 민족을 이루고 척박한 땅과 빈약한 지하자원의 환경속에서도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뤘음에도 이것이 오히려 저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돈이 많이 생기면 그것으로 우상을 만들고 돈이 많이 생기면 우상숭배를 위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기보다 우상을 금으로 붙이고 은으로 도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교회중 라오디게아교회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라는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뜻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 라오디게아는 에베소(Ephesus)에서 동쪽 수리아(Suria)로 가는 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길목에 있습니다. 이 길은 그 당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가장 빠른 길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럽과 아시아를 왕래할 때 이 길을 이용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에 있는 라오디게아는 무역을 중심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물자와 사람들의 왕래와 거래가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돈이 많이 몰리게 되고 금융산업이 발달한 부유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50년경 활동했던 유명한 정치가이자 철학가, 문학가인 키케로(Cicero)는 이 곳에서 금 9kg을 거래하는 것과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는 것을 책에 기록하였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의 기록에 의하면 라오디게아는 로마제국내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런 도시가 주후 13년과 61년에 대지진으로 도시가 완전히 파괴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시를 재건하는 일에 로마 중앙 정부의 지원없이 라오디게아의 재정으로 충당했을만큼 부유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이 곳은 모직과 면직의 중심지였습니다. 기름진 땅에서 목양을 하며 목화를 재배했습니다. 양털과 목화가 정말 유명하고 엄청나게 많이 생산되었습니다. 돈이 모이고 경제가 활발하다보니 의학도 발달했고 온천과 여가시설들도 발달했습니다. 기원 후 2세기까지 오직 라오디게아에서만 생산되는 방향성 식물로 귀를 튼튼하게 만드는 약이 조제되었으며, 안약 산지로 유명했던 라오디게아는 프리기안 가루(Phrygian)로 만든 가루를 필요한 부분에 펴서 바르는 안약이 눈병 치료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도 프리기안 가루를 안약으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의학교 교수 이름이 동전에 새겨질 정도로 의학으로 명성을 떨치던 곳이었습니다. 이 지방에서 나는 귓병을 치료하는 특효약과 콜로니온(Colonion)이라 불리는 안약은 특히 유명하였고, 그래서 라오디게아는 의료 도시로도 명성을 얻게 되었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자칭 부요한 사람’이라 할 정도로 부하여 하나님까지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곳에서 생산하는 멋지고 아름다운 의복을 자랑했지만 주님은 벌거벗은 자와 같다고 하고, 눈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과신했지만 주님은 정작 눈먼 줄을 모르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렇듯 멋지고, 아름답고, 부요했던 삶을 산 라오디게아는 몇 차례의 대규모 지진으로 현재 교회 터로 볼 수 있는 유적 하나와 야외극장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잘나가던 라오디게아가 폐허로 남게 된 것은 거듭되는 자연 재해와 대형 지진 때문입니다. 1710년과 1899년 대지진때 이곳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현재 복원되지 않은 채 폐허 속에 로마식 야외운동장과 원형극장 터, 그리고 폐허 속에 십자가가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는 돌무더기가 남아있어 교회 터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국내 여러 재벌의 경영권 승계 과정은 경영권 분쟁으로 얼룩지고 있다고 합니다.
재벌 2곳 중 1곳 가까이는 혈족 간에 재산이나 경영권 다툼을 벌였습니다.
2015년 1월 13일에 재벌닷컴과 금융투자업계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공정거래위원회 자산 기준 40대 재벌그룹에서 지금까지 총수 일가의 경영권 분쟁이 일어난 곳은 모두 17곳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40대 재벌들 중 거의 50%가 돈 때문에 부모, 형제지간에 다툼이 있다는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9~10절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돈과 물질, 풍요로운 삶은 검의 양날같습니다. 지혜롭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잘 사용하면 정말 엄청난 일을 할 수 있고, 잘못 쓰이면 모두를 망하게 할 수 있는 무서운 무기가 되기도 하죠. 오늘날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하시는 말씀이,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돈이 없어서 하나님을 일을 못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돈이 있다고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돈이 중심이 된다면 돈이 많아서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무엇으로 풍성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돈이 있으면 풍성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이 있어야 뭘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은 오히려 돈이 많아졌기 때문에 저주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을 수 있다고 책망하시며 이스라엘이 역사속에서 돈이 많아서 저질렀던 영적인 죄악을 책망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돈이 없어서 힘들게 사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또 반대로 돈이 너무 많아서 영적인 죄악가운데 사는 인생도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운데 물질이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까요? 둘째는 두 마음을 품은 것이 재앙의 시작이었습니다.
호세아 10장 2절입니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족이나 각종 공동체, 특히 국가는 분열되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재앙만이 재앙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재앙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재앙은 소리소문없이 내 마음에 찾아든 어느 누군가와의 깨어지고 갈라지는 관계입니다. 관계가 깨지고 갈라지는 것은 한번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더 이상 붙잡을 수 없게 됩니다. 갈등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나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평생 살얼음판이 되는 것입니다. 한 번 얼어붙은 관계는 좀처럼 잘 녹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남아있는 상처들은 쉽게 잘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과의 관계의 분열을 조심해야 합니다. 마음이 나눠지는 것만큼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가정도, 사회도, 교회도, 국가도 마음이 나눠지면 큰 화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항상 한 마음을 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2장 2절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고린도전서 1장 10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우리는 마음을 하나로 품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의 마음에서 조금의 틈이라도 생기면 그 때부터는 좀 더 큰 일을 할 수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형제들이 특히 한 마음이 되어야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유일신신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밖에 다른 분이 없다는 신앙입니다.
출애굽기 22장 20절입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인간이 종교를 탄생시켰다고 보는 인류종교학에서도 기독교의 유일신사상은 정말 신기한 사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속에서는 인간이 두려워하는 모든 세상의 존재들을 신격화하고 신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인 신앙인데 기독교는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인류의 기원을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시작이전에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그 하나님께서 인류를 만드시고 그 분이 실존하셨기에 기독교는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함과 동시에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는 범신론적인 사고가 있는 것이 보편적이기에 하나님을 바로 믿지 못하면 항상 세상에서 인간을 두렵게 만드는 모든 현상과 만물을 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도 인생을 살면서 실수를 많이 했던 부분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일이 잘 안되면 하나님외에 다른 존재를 신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찾아 제사를 지내고 숭배하며 자신의 길을 굽어살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잠시 일이 잘 안된다고 하여 세상의 종교를 찾아가고 세상의 사람들이 찾는 점집을 찾아다니고 인간 삶을 세상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찾아다니는 것은 정말 우리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호세아 10장 2절에 이스라엘백성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마음을 품었다고 책망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과거 역사를 보면 왕권을 찬탈한 사람들에 반기를 들고 전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자신의 명예를 모두 던져버리고 초야에 묻혀 지냈던 예가 있습니다.
중국 사기 전단열전에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충신불사이군 정여불갱이부 (忠臣不事二君 貞女不更二夫)”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정숙한 여인은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 법이다.
이 구절을 옛날 우리 선조들은 마음에 새기고 관직에 나가면 철저하게 이 구절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고려말 충신 정몽주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고려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에 망하고 이성계가 왕이 되었을 때 정말 충신인 정몽주를 자신의 수하에 넣고자 정말 노력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아들인 이방원이 나섰습니다. 이방원은 정말 정몽주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당길 수 있을 지 마음을 떠보기로 했습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만나 먼저 시조 한 수를 읊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하여가’로 자신들과 함께 오랫동안 함께 잘 살아보자고 유혹했습니다.
그런데 정몽주는 이 시조에 대해 답가로 이런 시조를 읊습니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이것도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단심가’입니다. 중학교 3학년정도 되면 이 시조들의 배경과 뜻을 국어와 국사시간을 통해 너무나 자세히 배우는 정말 중요한 내용입니다.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정몽주와 조선시대 단종을 위해 명예와 목숨을 버린 사육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공부했습니다.
정말 세상의 의리를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고 명예를 내던져버리는데 정말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올인하지 못하고 이곳저곳 우리 자신의 안위를 위해 기웃거린다면 정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며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여호수아 23장 16절입니다.
“만일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하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에게만 집중하고 하나님을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하나님께만 올인하고 하나님께만 나의 모든 삶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의 삶에 능력으로 역사하시고 우리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힘든 일을 당했다고 하나님을 버리시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말고 다른 곳을 찾아서 두 마음을 품었기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책망하시는 일을 경험하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까요? 셋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심판의 원인이었습니다.
호세아 10장 3절입니다.
“그들이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이스라엘백성은 그들의 진짜 왕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는 말씀이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가운데 이스라엘이 험란한 삶을 살게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할 때부터였습니다. 하나님없이 자기 맘대로 사는 것이 편할 것 같지만 결국 그 때부터는 험란한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 에덴동산은 어찌보면 하나님안에서 사는 삶이고 자기 스스로 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무미건조한 삶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에덴동산이 가장 편한 곳이고 가장 힘들이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 탕자에게도 아버지아래에서 지내는 것은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는 삶이라고 생각해서 아버지에게 억지로 자기에게 물려줄 재산을 내놓으라고 해서 다른 나라에 가서 살았지만 그 때부터 자신은 돈이 있든지 없든지 자기 스스로 삶을 결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힘든 생활이 시작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인이 되어보니 어릴 때 부모님이 우리에게 뭐든 다 해주시던 때가 가장 좋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릴 때는 내가 빨리 어른이 되어서 내가 내 맘대로 할 수 있을 때를 기다립니다. 대학생이 되고 직장에 취직할 때가 되고 결혼할 때가 되면 내가 다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때 빨리 어른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정작 어른이 되면 내 스스로 돈을 벌어야하고 내가 일을 하고 싶어도 내 뜻대로 일이 되어지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 일도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해야합니다. 아파도 맘대로 쉬지 못하고 일을 하러 나가야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런 상황이 생기면 정말 어릴 때 부모님품안에 있을 때가 가장 좋았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맘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속에서 하라, 하지마라 정해놓은 그 법칙대로 사는 것이 고리타분하고 정말 빡빡한 인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칙대로 사는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합니다. 세상의 눈치를 보며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치를 보며 사는 것이 우리가 잘 사는 길입니다.
신명기 6장 15절입니다.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창세기 42장 18절입니다.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우리가 요셉을 잘 압니다. 요셉은 정말 힘든 인생을 젊을 때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대 세상의 눈치를 보는 인생이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하나님이 멈추라고 하면 멈추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팔려온 땅, 노예로 끌려온 땅에서 총리의 자리까지 올라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최고의 권력자가 되려고 노력해서 그 자리에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그 자리에 올리셔서 이스라엘 민족이 복받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어떤 것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십니까? 세상을 두려워하고 돈을 두려워하고 권력을 두려워하고 이웃사람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십니까? 세상의 눈치를 보며 재물에 눈치를 보며 권력에 눈치를 보며 이웃사람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십니까? 물론 관계를 좋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좀 낮은 듯한 자세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의 내면에 하나님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고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며 살아가면 우리는 멸망과 저주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저주의 백성이 되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심판을 받을 이유가 뭔지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재물이 우리에게는 복이 아니고 저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말고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위치에 다른 세상의 것을 함께 놓게 될 때 우리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 때 우리는 멸망과 저주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떤 것이 복된 인생인지를 깨닫고 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혹시 우리에게 어려운 일들이 생길 때 혹시 저주와 멸명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 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점검하고 잘못된 길을 갈 때 빨리 돌이켜서 축복된 길을 걸어가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