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워하는 마음, 비방하는 마음을 멈추자.>
박근혜, 최순실, 정유라, 조양호, 조현아, 조현민, 이명희, 조국 등
동양에서는 이지메(따돌림, 왕따)라는 것이 있지만, 서양에서는 ‘마녀사냥’이란 것이 있어왔다.(이 마녀사냥이란 것도 로마황제가 예수를 학대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후 중세유럽 목사들이 마녀사냥의 주도하는 역할을 하다니, 너무 아이러니 하다. ※불교의 ‘무아’사상과 십자가에 얽힌 모순을 함께 생각해 보자.) 사회적 악습이자 폐단이지만, 오늘날에도 마녀사냥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박근혜 정권을 몰아낸 ‘촛불혁명’ 속에도 대중(국민) 속에 묻혀, 마녀사냥을 하고 있었던 무서운 집단이 있었다. (박근혜 이하 우리나라에는 마녀사냥대에 오른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있었다.) 서양의 잔다르크 역시 마녀사냥으로 희생되었으나, 후대에 영웅으로 추대되었다. 일제 강점기 명성황후 역시 마녀(여우)사냥으로 희생되었으나 광복 후 ‘황후’로 명예회복이 되었다. 이처럼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이런 사회적 악습으로 희생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마녀’라는 이름만 ‘된장녀’, 'xx녀' 혹은 ‘빨갱이’ 등으로 바뀌었을 뿐, 마녀사냥은 현재진행형이다.
또한 우리나라 정치문화도 이런 사회적 문화와 혼합되어서 민주주의의 장점이었던 ‘다수결의 원리’가 폐단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지, 우려된다.
타인을 비방하고, 깍아내리고, 죄를 뒤집어 씌우는 등의 목소리가 박근혜 정권 탄압이후 도를 지나치고 있다.
그래서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전의 문구를 알려주고 싶다.
『죄 없는 순진한 사람에게 갖은 방법으로 해치는 자는 다음 열 가지 중에서 한 가지 갚음을 만나게 됩니다.
①심한 고통 ②노쇠 ③육체의 상처 ④중병 ⑤정신착란 ⑥지독한 중상 ⑦친척의 멸망 ⑧재산의 파멸 ⑨불이 그의 집을 태움입니다.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⑩원망과 비난만 남게 됩니다.
아무리 말을 꾸며 남을 해쳐도, 죄 없는 사람을 더럽히진 못합니다.
Someone who harms an innocent person in every means will be paid back with one of the following ten ways.
①severe suffering, ②decrepitude, ③physical injury, ④serious illness, ⑤mental disorder, ⑥serious wound, ⑦downfall of relatives, ⑧ruin of property, ⑨burning house. After death, there will be only ⑩resentment and blame.
No matter how hard one damages the other as making up a story, if that person is innocent, then he/she can't be besmirched. 』
수보사守寶寺
http://cafe.daum.net/temple2009
cf.1.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상징적 의미에 대한 대중적 견해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윤동주의 십자가)
이것은 로마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한 예수님처럼, 일제침략기에 일본군사들에게 젊은 나이에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한국의 저항시인 윤동주의 시이다. 또한 한국의 기독교 십자가에 대한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사의 찬미의 死는 죽음에 대한 찬미이다. 도대체 그런 죽음이 뭐길래 찬미하며 칭송하는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죽음을 찬미하는 것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이유는 주변의 모함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것이다.
불교에서 죽음은 고통의 일부이며, 무상하다고 이야기 할 뿐 찬미하지는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좋은 것을 기억하려고 할 때, 좋은 물건으로 남겨서 기념하고 보관하려고 한다. 예수님을 찬미할 수 있는 좋은 기억과 상징적인 물건들이 많을 텐데, 왜 하필이면 십자가일까 하는 생각에서 몇 자 적어본다.
서울의 밤하늘을 보면, 네온으로 만든 교회의 십자가가 가득 메워져, 묘지의 무덤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십자가는 당시 예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죄수들이 매달려 처형당할 때 쓰는 물건이었다. 그게 지금의 기독교의 성스러운 상징물처럼 되어버렸다.
동양에도 나쁜 짓을 한 죄수를 교수형 시킨 후, 그 시체를 매달아 마을어귀에 둠으로써 사람들의 경계의 대상이 되게 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렇게 죄수를 매다는 물건이 지금까지 성스럽게 남겨진 것이다.
교회뿐 아니라, 성경, 납골당의 십자가 표시, 비석, 악세사리 등등 예수님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많이 만들어서 남겨져 있다.
문제가 있다.
프랑스 혁명을 기념하면서, 단두대를 상징화 하는 격과 무엇이 다른가? 프랑스 혁명으로 달라진 선진화되고 정돈된 사람들의 모습이나 정치, 문화 등을 기억하여 상징화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스 건축물 중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는 패배한 국가의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어 기둥으로 조각해서 남겨놓는 관습이 있었다. (카리아티드 ; caryatid) 무거운 기둥 속에 갖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패배한 민족은 점점 소멸되어 간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으로 남겨져 있고, 부처님은 바른 자세로 앉아서 좌선을 하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공포심을 주어 통치해야 하는 중생이라면, 이런 의미의 십자가도 통했을 법하나 시대가 변했다.
성적 고통으로 신음해야 했던 소녀상도, 지금은 반듯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만약에 소녀상의 모습이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모습으로 남겨놨다면, 지금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예수님을 기억해야 하는 십자가의 상징적 의미와 유래를 잘 알아서, 이제는 그 이미지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스러워하는 상징물을 걸어놓고 그 앞에서 즐거워하고 있는 이들은 전생에 예수를 몹시도 미워했던 로마황제의 후손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Public viewpoints on the symbolic meanings of Christ’s Cross
The sun rays that chased me
Are now on the tip of the church
Hanging on the cross.
The steeple is so high
How did it get on top?
No ring can be heard,
Only the whistling as it wanders,
The man who suffered,
To the happy Jesus Christ
If the cross allows it
His head lolling
And the blood that blooms like a flower
Under the sky that grows darker,
He will quietly shed
(Cross written by Yun Dong Ju)
This is the poem by Yun Dong Ju, a Korean poet of resistance who was killed by Japanese soldiers in his young ag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like Jesus killed by the Roman soldiers. Also, it reflects the Korean sentiment on the Christian Cross.
Death Song is to praise the death. Why on earth do they praise the death what it is?
Do they praise Jesus Christ’s Holy death? The reason why Jesus nailed and died on the Cross was due to the sacrifice innocently from false incrimination. The death in Buddhism is a part of suffering and said to be impermanent, but not be praised.
Generally, people leave and keep the good things when they try to remember something. Although there might be lots of good memories and symbolic items that they can praise Jesus, I will write a few lines considering why that is Cross.
When we look up the nighttime sky in Seoul, sometimes it feels like the tombs of graveyards filling with crosses of the churches made of neon.
The Cross was the item to be used on death penalty not only for Jesus but also for the other criminals. That became the holy symbol of Christianity now.
In Orient, there was a custom to warn the people by hanging the dead body in the edge of the village after hanging punishment of the criminal, too. The item to hang the criminal remained sacred up to now.
It remained as the symbol of Christ not only in the church but also in Bible, cross signal in the charnel house, tombstones, accessories, and so on.
However, it has the problem.
What is it different from the symbolization of the guillotine commemorating French Revolution? Can’t they symbolize the appearance of the people who were advanced and well organized upon French Revolution, or politics and culture?
There used to be the custom in the ancient Greek architecture that they had made the defeated people from the war as the slaves and recorded them as the pillar of the sculpture (caryatid). Seeing the painful scenes captured in the heavy pillars, the people in the defeated country became extinguished more and more.
Jesus remains as the shape of nailed and bled to be painful on the Cross while Buddha remains as that of Zen meditation sitting with right posture.
If they were the people who were reigned with sense of fear, the Cross with this meaning could be accepted, however, times have changed.
Status of Peace that suffered from sexual abuse remains as the shape of right sitting posture on the chair. If they remained its shape as the scene of sexual abuse, how would it be in our mind now?
Since we know the symbolic meaning and the origin of the Cross to remember Jesus well, I think we should change the image now.
The writer thinks that those who hang around and enjoy the Cross hanging the symbolic item Jesus was nailed and felt painful seem to be the descendants of Roman Emperors who hated Him very much.
(실제로 나는 십자가에 대한 이러한 내용의 서신을 이탈리아 교황청에 수도 없이 보낸 바 있다. 유럽 신학대 교수(지금 명퇴한 독일 00대)의 말에 따르면, '십자가'가 '생명의 나무'로 변할 거라고 한다. ^^)」
cf. 2
「<성경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무아’의 상태에서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언어지시이다.>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왜 나왔을까?
당시 우매했던 사람들을 설득하기에 ‘강한언어’가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말을 불교용어 ‘無我’로 바꿔 표현하고자 한다.
원수를 사랑하면, 원수랑 같이 살아야 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원수를 사랑하면, 원수를 닮아가고, 원수처럼 된다.)
이렇게 언어에 너무 집착하면, 이상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
따라서 ‘지시적 언어’에 길들여진 현대인은 이러한 함축적인 언어로 오해를 살만한 일들과 만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명상(參禪)’을 통해 사실을 인지하고, ‘법’을 관찰할 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화’를 일으키기 쉬운 일제 강점기 관련 역사관은 ‘명상’하기 좋은 곳으로 짓는 것이 좋다.)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되어 학살당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고통을 준 일본군을 매우 미워했다. 일본군이 행한 잔학한 일들은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뿐만이 아니라 그 상대는 나약한‘국가’이고, 나약한‘부모’가 될 수도 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삶이 힘들 수밖에 없는 이유도, 늘 이런 ‘분노’와 늘 투쟁해야 했기 때문이다.
독립기념관에 가서 고문당하는 마네킹인형을 보면서 ‘혐오’와 분노‘의 감정을 계속 상기하다보면(분노에 집중하다 보면), 내 안에 내가 미워하는 일본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 나는 ’나에게 고통을 준 일본군이 되고 만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나는 불교의 ’무아無我‘에 대해 설명할 때 영어의 ’She kills me’라는 표현을 인용하곤 한다.
한국말로 표현하자면 ‘그녀는 나를 죽인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사실 그 말은 ‘내 마음 속에 그녀 생각 밖에 없다.’고 풀이해야 맞다.
왜 내 마음속에 그녀 생각 밖에 없을까?
내 안에 나를 밀어내고 그녀가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미국인들은 ‘그녀가 나를 죽인다.(She kills me)’고 하는 것이다.
이런 언어구조를 쓰는 사람들은 ‘태초에’ ‘無我’를 알았던 것일까?
‘무아’상태의 사람들이 항상 경계하고 알아차려야 할 단계가 이 단계다.
이 ‘無我’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지혜’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 경우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하근기 ‘신’이 들어오는 ‘빙의’현상 때문에 신병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 자신보다 수승한 신이 들어오면 모를까, 대부분이 자신보다 하근기 신이들어므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사상에서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신’에 대한 복종이 아닌 철저한 수행으로 자기가 ‘부처님’이 되는 수행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보다 더 수승한 ‘부처님’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꿈꾸는 ‘成佛’을 하는 것이다
성경에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신에 의해 휘둘리는 삶을 살지 않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한다.
어떤 사람들은 ‘신’에 의한 ‘무한한 사랑’을 구하고, ‘신의 구원’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한다.(기도의 간절함으로 ‘신통지’를 얻을 수는 있으나, ‘법’을 모르면 삿된 욕망과 어리석음에 허우적 대기도 한다.)
부처님이 된다는 것(成佛한다)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를 사랑해 주고, 스스로를 구원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에 나와 내 조국에게 고통을 준 일본을 미워하면(미움에 집착하면), 내가 미워하는 일본이 내 안에 들어온다.
이 사람들은 사람들을 짓밟고, 죽이고, 유린하는 나쁜 세력이다.
이러한 일제강점기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베트남 전에 가서, 반대로 베트남 여자들을 성노예로 만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면, 똑같은 가해자가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따라서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일본군을 계속 미워하고, 분노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내가 미워하는 ‘일본군’ 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일본’이 아니라, 일본이 했던 나쁜 일들을 되풀이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미움’과 ‘혐오’가 그러한 에너지를 주는 사람들과 멀어진다고 생각하지만(예: 우리는 일제강점기 일본군과 멀어지기 위해서 미워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일본군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린 미움가득한 일본군이 내 안에 들어와 내가 그런 일본군이 되고만다. *매우중요*)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미움’과 혐오‘에 집착하면, ’미움‘과 ’혐오‘가 내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분노‘를 ’삼독심‘으로 생각하고, 철저하게 경계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내 안에 ’분노‘와 ’혐오‘가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 가? ’분노‘와 ’혐오‘를 주는 대상이 아닌 ’나 자신‘을 학대하고, 못살게 굴게 되는 불행한 상황을 맞게 된다.
(분노로 막행막식을 하고, 함부로 행동하며, 막된 언행을 하게 된다.
이것이 대대손손 업보가 되어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성격이 모질고 험하다는 평을 듣는 것이다. 그러한 업보(남을 미워하여 자신 안에 가둔)로 삶이 힘들어지고, 업의 되물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부조리를 막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분노와 혐오의 기운에 집착하기 보다는 ‘사랑’의 기운에 몰입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게 수승한 기운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이런 표현은 ‘언발에 오줌누기’식의 임시방편성에 불과하다.
좋은 에너지로 강한 힘을 키울 수는 있으나, ‘법’을 모르면 또 다시 ‘어리석음’으로 빠질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랑에 몰입하는 방법은 분노를 빨리 사그라들게 하고, 좋은 기운이 맴돌게까지 하는데 그친다. 여기까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통한다.
그러나 그 후에 ’법을 알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한계에 부닥치는 경우에 이르게 된다.
기독교 명상가들이 간과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 분들은 좋은 에너지를 많이 가지고 있으나, ’법‘을 통찰하는’지혜‘가 부족하여 어리석은 일에 종종 엮이게 된다.
(예를 들면, 일본성노예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등 여러 가지 청산해야 할 국가적 보상문제를 애매모호 하게 만드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맹점이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에 머물고 끝나기 때문에 생기는 한계이다.
명상은 고요하고 평온한 가운데 이루어져야지, 이렇게 분노에 계속 몰입하면서 악한 생각을 계속하게 되면 그런 것에 몰입한 사람도 계속 분노와 악한 기운을 증가시키게 되고 만다.
명상은 ’분노‘를 가라앉게도 하지만, 에너지를 키우기도 한다.
명상 시 ’분노에 몰입‘한 사람은 악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되고, 선한 기운에 몰입한 사람은 선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된다.
일제강점기의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처럼, 정말 나쁜 사람을 만나서, 분노가 치밀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께서 제시한 가장 좋은 방법을 ‘선정’에 드는 것이다.
편안하고 조용한 장소를 찾아 아무 생각하지 말고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냥 혼자 앉아있으면 된다. 이것이 선정에 드는 기본자세이다.
경전에서는 ‘선정’은 독약보다 무서운 삼독심인 ‘분노’가 올라왔을 때, 나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아주 훌륭하다고 말하고 있다.
분노에 집중하면 무서운 상황을 만들어 나를 파괴한다. 모든 것은 ‘성주괴공’하는 법의 논리에 의해 반드시 사라진다. 이 사실을 알면, ‘분노’가 두렵지 않으며 상황이 더 쉽게 풀린다.
일단 ‘화’가 가라앉으면 ‘지혜’가 생기고, 다음할 일이 생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삼독심에 의한 극한 상황을 막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다.
즉, 내가 ‘일본군을 미워하면’ 내 안에 ‘내가 미워하는 일본군’이 들어오고, 내가 ‘일본군을 사랑하면’, 내 안에 ‘내가 사랑하는 일본군’이 들어온다. 미워하면 내 안에 독심이 생기므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노가 가라앉은 다음 나쁜 사람을 여전히 사랑해서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부처님도, 신도 아닌, 여전히 악한 상황에서 악해지고, 좋은 상황에서 좋아지는 나약한 중생이므로...)
상황이 좋아지도록 지혜로운 대처가 필요하다.
부처님이 이야기한 초발심자경문에는 ‘나쁜벗은 멀리하고, 좋은 벗을 가까이하라’는 말이 제일 첫 번째로 나온다.
나쁜 상황을 최대한 피하는 게 중요하다.
참고로 도올 김용옥 선생은 ‘사랑하지 말라’는 책을 펴내어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내가 남을 사랑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일인지 통찰해 보자. 또한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지 생각해 보자.
왜 그는 ‘사랑하지 말라’고 했을까? 부처님께서는 살아가면서 겪어야 되는 고통을 8가지로 분류하셨다. 첫 번째 4가지 고통은 ‘生老病死(태어나는 고통, 늙음의 고통, 병듦의 고통, 죽음의 고통)’이고 나머지 4가지 고통은 愛別離苦(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怨憎會苦(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求不得苦(구하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고통), 五陰盛苦(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고통)이다.
따라서 사랑하지 말고, 미워하지도 말고, 너무 구하려고 하지도 말고,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생노병사’의 고통은 혼자 겪어야 하는 고통이지만, 나머지 4가지 고통은 나 이외에 다른 사람과 만나면서 생기는 고통이다. 그래서 스님들은 결혼하지 않고 혼자산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말로 남을 속이고, 또 속고 살고 있으며, 이렇게 중요한 국가적인 피해보상이 미뤄지는 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아닌 지 짚고 넘어가자.
내 안에 ‘인간애’라고 변명하면서 채워진 다른 사람들을 빼고, ‘無我’의 상태가 유지되도록 노력하자. 그것이 지혜롭게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
cf.3
「마녀사냥(魔女 - , 영어: Witch-hunt, 프랑스어: Chasse aux sorcières)은 중세 중기부터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북아메리카, 북아프리카 일대에 행해졌던 마녀나 마법 행위에 대한 추궁과 재판에서부터 형벌에 이르는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마녀재판’이라고도 한다. 현대에서는 집단이 절대적 신조를 내세워 개인에게 무차별한 탄압을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유럽에서의 마녀재판
마녀는 본래 사악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동체 내에서 출산이나 질병치료 같은 의료 기능을 담당하거나 점을 치고 묘약을 만드는 주술적 기능을 수행한 집단이었다. 인간 한계를 초월하는 능력을 지닌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졌던 그들은 어느 날 졸지에 악마와 놀아나면서 신앙을 해치고 공동체에 해악을 끼친다고 낙인찍히기 시작했다. 14세기부터 불어닥친 유럽의 ‘마녀사냥’은 17세기까지 대략 20만 명 ~ 50만 명의 사람들을 처형대에 올렸다. 일찍이 마녀재판이라고 하면, 12세기 이후 기독교의 주도에 의해 행해져 수백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이러한 견해는 1970년대 이후 마녀재판의 학술적인 연구의 진전 덕분에 수정되어 본래 민중 사회에서 일어났던 마녀재판은 14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에 걸쳐 볼 수 있었으며 마빈 해리스는 5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마녀 혹은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고 기술한다.
마녀사냥은 백년 전쟁이 끝난 다음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잔 다르크도 마녀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마법을 실행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 중에 절대 다수가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 witches' hammer)라는 책은 '마녀 지식을 집대성한 완결본'으로 간주되는데, 이 책에는 "여성들이 주로 마법을 사용하는데 왜냐하면 여성은 잘 속아 넘어가고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다. 여성은 정욕에 취약하기 때문에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라는 서술 내용이 있고, 이런 논리에 따르면 여성은 모두 잠재적인 마녀일 수밖에 없으며 남성을 유혹해서 마법이라는 죄악에 빠뜨리는 요물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다.[3] 완전히 발가벗겨진 여성이 산 채로 매달려 화형을 당하는 장면은 당시 남성들의 최고 흥행거리였다.(한국적 상상력이 가미된 기술이며 추가적인 역사적 검증이 필요함)
마녀가 악의 화신이 된 건 도미니코 수도회의 영향이 컸다. 그들은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를 질타하기 위해 예수와 대립된 존재로 마녀를 만들어냈다. 중세의 마녀사냥은 1484년 교황이 ‘긴급 요청’ 회칙을 발표해 마녀가 있다고 한 데 이어, 1487년 하인리히 크레이머와 자콥 스프렝거라는 도미니코 수도회 성직자 두 명이 《마녀의 망치》라는 마녀사냥 지침서를 내면서 본격화됐다. 이 책은 주술이나 마술을 믿는 민속 신앙은 있지만 실제 ‘마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세상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수사관들과 판사들이 마녀를 쉽게 구분하고 취조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쓴 책이다. 이 책에는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여자는 마녀다. 열심히 다니는 사람도 마녀일지 모른다"는 식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녀사냥이 가장 극심했던 때는 가톨릭교회가 가장 약했을 때였고 이는 '근본주의의 창궐은 특정 체제에 위기가 닥쳤음을 반영하는 증상'의 일환이었다. 13세기에 이르러 시작된 자본과 화폐경제의 성장은 교회 중심의 중세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마녀사냥 이전의 종교 재판은 믿음을 잃어버린 신자들의 회개와 전향을 이끌어내면 족했는데, 이제는 '도무지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적'들을 가톨릭교회는 상대해야 했다. 마녀사냥은 권위 또는 권력의 공백이 발생했을 때 폭발할 수 있는 종교적 광기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중세의 몰락으로 시작된 근대는 계몽주의와 합리성으로 포장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마녀 프레임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마녀식별법을 담은 《마녀의 망치》라는 책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 활자 인쇄술이라는 최신 기술 덕분에 대량으로 제작돼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이는 마녀사냥을 가속화시켰다. 1490년 교황청, 그리고 1538년 종교 재판 본부에서 ‘오류’라는 공식 비난 입장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녀의 망치》는 글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던 당시에 20쇄를 거듭해서 발간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마녀의 망치》득세의 이면에는 정치적 이익을 위해 묵인하고 방조한 세속 권력과 교회가 도사리고 있었는데, 기나긴 십자군전쟁의 패배로 혼란과 분열, 왕권에 대한 불만과 불신에 휩싸인 유럽 사회의 위기를 타개할 ‘희생양’이 필요했던 세속 권력, 그리고 종교 개혁의 열풍과 극심한 갈등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상대를 ‘신앙의 적’으로 몰아갈 필요성이 있었던 교회가 그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프레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요소가 되었고, 변화에 직면한 공동체의 가치관이 요동치고 도덕적 경계가 흐려지자 대중들은 마녀만 제거하면 과거처럼 평온을 찾을 것이라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지식과 과학이 발달했지만 그만큼 지식과 과학에 포섭되지 못하는 사물이나 현상을 악마화하고 소멸시켜 버리려는 메커니즘도 활발히 작동했다. 이후 마녀사냥은 미신을 타파한 과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근대 사법체계의 확립에 의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녀재판의 기원
중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사회권(주로 이단)에서는 악마가 인간이나 동물 등을 이용해 악한 행위를 한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 이전부터의 민족 신앙에 대한 불신감이나 십자군 병사들에 의해 동방에서 가지고 온 사상 및 문화 등이 융합하여 생겨났다고 추측된다. 또 고대 이래, 악마가 인간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어, 사람들은 그것을 근절하려고 애써왔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악마의 하수인으로 여겨진 인간에 대한 규탄이 있었다. 마녀재판은 스위스와 크로아티아의 민중 사회에서 시작되어 이윽고 민중 법정의 형태로 마녀를 단죄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단에 관해서는 깊이 개입했지만, 마녀에 관해서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던 로마 가톨릭이 이단 심문을 통해 마녀 재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5세기에 들어가면서부터이다.
마녀사업
마녀재판은 상업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다. 마녀로 인식이 된 혐의자에게는 사형의 형벌을 내리는데 마녀는 그 혐의를 가리는 동안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마녀가 지불해야 한다. 고문 도구 대여료, 마녀를 고문하는 고문기술자 급여, 재판에 참여하는 판사 인건비, 마녀를 체포할 때 소요된 모든 시간과 비용, 마녀가 확정될 경우 화형을 집행하는 데 소요된 모든 비용 및 관값, 교황에게 내야 하는 마녀세 등을 마녀 용의자가 모두 지불해야 했다. 심지어는 마녀가 화형에 처해진 이후 다시 한번 처해지는 형벌이 바로 '전 재산 몰수'형이었다. 즉, 마녀는 마녀재판 집행관과 교황에게 급여를 지불해가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자신을 살해한 교황과 그 일당들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상속하는 꼴이 된다.
마녀 용의자
마녀 용의자는 주로 엄청나게 부유한 과부들과 무신론적 지식을 갖고 있는 미혼 여성들이다. 이 중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으면서 돈은 엄청나게 많은 여자들이 마녀로 잡혀가는 경우가 많았다. 공통적으로 과부들이 많이 잡혀갔는데, 이는 과부는 가족이 없기에 재판에 증인을 서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 약초학을 공부한 자들, 동방(북인도 지역)의 신비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자들, 아프리카에서 숭배하는 부두교라는 종교를 믿는 자들 역시 ‘악마를 숭배한다’는 명목하에 마녀로 잡아갔다. 마녀 사냥꾼들은 마녀에 대해 이러한 혐의를 적용하며 설명한다.
“ 마녀들은 악마와 성교를 하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이를 실행하기 위해 빗자루를 매개체로서 활용한다. ”
마녀재판의 전개와 쇠퇴
12세기에 시작된 이단 심문이 민사 재판으로 재판되었던 마법까지 취급하게 된 것은 15세기에 들어가면서부터이지만, 그것은 왈도파가 많았던 스위스나 프랑스의 알프스와 가까운 지방에서만 취급되었다. 노맨 콘에 따르면 기록을 보면 1428년의 스위스 발레 주의 이단 심문소가 마녀 건을 취급한 것이 최고였다고 한다. 원래 이 지방의 이단 심문소는 주로 왈도파를 추궁하는 성향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윽고 이단자들의 집회 이미지가 마녀의 집회 이미지로 변용되어 간다. 악마 숭배 행위, 혹은 성물을 모독하는 행위, 아이를 납치해 잡아먹는 행위 등의 마녀의 집회가 가지는 이미지는 일찍이 이단의 집회에서 행해졌다고 여긴 이미지 그대로였다(마녀는 본래 군집생활을 했었으며, 숲에 혼자서 사는 마녀의 이미지는 그림 동화의 영향이 크다).
한발 더 나아가 마녀의 개념이 당시 유럽을 뒤덮고 있던 반유대주의와 결합하게 되면서, 아이를 잡아먹는 매부리코를 가진 여인이라고 하는 마녀상이 만들어졌다. 마녀의 집회가 유대인의 안식일과 같은 명칭인 사바트로 불리게 된 것도 반유대주의의 산물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적인 마녀의 이미지가 완성된 것이 15세기였다.
15세기에 들어가면서, 마녀와 마법에 관한 서적이 일종의 붐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서적의 대부분은 속설이나 소문을 근거로 집필된 것이었으며 마녀의 위험성을 부추기는 저속하고 선정적인 물건이었다. 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마녀의 혐의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여러 가지 잔인한 고문 행위도 이러한 풍설에 근거한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1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에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공식적으로 마녀 재판이 사라졌다. 하지만 전근대적인 문화나 고대부터의 전통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마녀재판과 비슷한 행위를 하는 일이 가끔 있다. 이는 인권을 탄압하는 일이다.
2003년 3월 5일, 요한 바오로 2세의 지시에 따라 교황청은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발표해 과거 교회가 하느님의 뜻이라는 핑계로 인류에게 저지른 각종 잘못을 최초로 공식 인정했다. 이때 마녀사냥에 대한 잘못도 인정하며 전 세계적으로 가톨릭의 이름으로 사죄했다.
마녀재판의 실제
마녀재판을 하는 방법
네 가지 방법 중 첫 번째로 눈물 시험(Traenenprobe)이 있었다. 마녀망치에서는 ‘마녀들은 사악하기 때문에 눈물이 없다, 그래서 혐의자가 눈물을 흘릴 수 있나 시험해보라’고 나와 있다. 눈물을 흘려서 혐의자가 죄가 없다는 것을 실증해 보여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바늘 시험(Nadelprobe)이다. 바늘시험은 성경 구절의 예언서에서 유래된 것으로, 구원받은 자의 표식으로 이마에 먹이나 도장을 친다는 논리에서 유래됐다. 타락한 악마들은 지울 수 없는 표식을 가지고 있으며, 마녀 또한 마찬가지라는 논리다. 따라서 재판관이 그녀들의 나체를 관찰하고, 또 관찰의 용이성을 위해 몸의 털, 음모, 눈썹을 깎거나 태운다. 관찰에 의해 사마귀, 융기, 부스럼, 기미 ,주근깨 등 마녀의 점이 나오면 형리는 그 자리를 누르거나 바늘로 찔러 감각을 느끼는지, 피가 흐르는지 시험한다. 사바스에서의 난교에 의해 마녀는 피를 다 써버렸기 때문에, 마녀는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간주되었다.
세 번째는 불시험(Feuerprobe)이다. 재판관은 혐의자에게 그들의 무혐의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달구어진 쇠로 지지는 것을 견딜 수 있는지, 불위로 걸을 수 있는지, 그리고 다치게 될지를 시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제안했을 때 혐의자가 승낙을 한다면 그는 마녀가 된다. 마녀는 이 난관을 악마의 도움을 받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물시험(Wasserprobe)이다. 일반적으로 물은 깨끗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졌다. 형리들은 혐의자를 단단히 묶고 깊은 물에다 빠뜨린다. 물은 깨끗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녀가 들어올 경우에는 물 밖으로 내쳐진다고 믿어졌다. 만약 혐의자가 물에서 익사한다면, 그는 혐의를 벗게 되겠지만, 물에서 떠오른다면 마녀로 간주되어 화형 되었다. 마녀든 아니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녀재판의 피해 사례
잔 다르크: 백년 전쟁 때 종교 재판에서 마녀 판결을 받았고 나중에 화형당함. 훗날 명예회복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음.
세일럼 마녀 재판: 미국 뉴잉글랜드 세일럼에서 일어난 청교도들의 재판
마녀사냥의 현대적 의미
마녀사냥에 대해 정치학에서는 전체주의의 산물로 보고 있고, 심리학에서는 집단 히스테리의 산물로 보고 있으며, 사회학에서는 집단이 절대적 신조를 내세워 개인에게 무차별한 탄압을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히틀러 나치의 '우생학', 일본 제국의 '불령선인', 미국의 'KKK'과 '매카시즘', 소련과 아프리카 등에서 벌어진 '인종학살' 등이 근현대에 벌어진 마녀사냥의 대표적인 예다.
현대인들은 스스로를 ‘합리적’이라고 여기지만 오늘날에도 마녀사냥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마녀’라는 이름만 ‘된장녀’, 'xx녀' 혹은 ‘빨갱이’ 등으로 바뀌었을 뿐, 마녀사냥은 현재진행형이다. 마녀를 만들어내는 원리, 즉 ‘마녀 프레임’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택광은 "마녀사냥은 특정 시기의 역사적 사건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해명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현상으로 파악해야만 한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동일성과 규격화를 요구하는 근대국가는 ‘정상이 아닌 것’들을 가혹하게 몰아붙일 필요가 있었다. 마녀사냥의 대상은 주로 여성, 유대인, 무슬림,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등인 것이 그 예인데, 이는 상황에 따라 누구나 마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터넷의 발달로 마녀사냥의 양상도 진화하였는데, 집단이 개인을 상대로 근거 없이 무차별 공격을 해서 '인격 살인'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프레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요소가 되고 이로 인해 인터넷의 발달이 마녀사냥을 더 용이하게 만들었다.'마녀사냥식 여론재판'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한다.
관련 서적
Matilda Joslyn Gage. 《Woman, Church and State; A Historical Account of the Status of Woman Through the Christian Ages》. General Books. 2009년.ISBN 9780217654661[13]
실비아 페데리치(황성원·김민철 역). 《캘리번과 마녀》. 갈무리. 2011년. ISBN 9788961950428
이택광. 《마녀 프레임》. 자음과 모음. 2013년. ISBN 9788957077290
관련 게임
해리포터 : 호그와트 미스테리
관련 영화
《더 헌트》: 토마스 빈터베르 연출, 2012년 작품
《백설공주 살인사건(The Snow White Murder Case, 2014)》: 나카무라 요시히로 연출
관련 영상[편집]
SBS 《그것이 알고 싶다》. 299회 <마녀사냥인가, 표현의 자유인가? - 인터넷으로 ‘방법’을 당한 사람들>. 2004년 6월 19일.
관련 기사
박경민. 댓글 여론형성 도구인가 마녀사냥 무기인가. 여성신문. 2005년 7월 22일.
이희수. (중동 전문가 이희수 교수에게 듣는다) 이슬람과 여성. 여성신문. 2007년 8월 10일.
김수현. 여성 연예인 이혼 마녀사냥식 보도 언론책임도 크다. 여성신문. 2007년 11월 9일.
추은혜. 자본주의는 어떻게 ‘마녀사냥’을 이용했는가. 일다. 2011년 12월 16일.
1.↑ 이동: 가 나 다 라 마 황경상. 마녀사냥은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다. 경향신문. 2013년 2월 22일.
2.↑ 박원순.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짜르게”. 한겨레신문사. 145면.
3.↑ 정미경. 마녀사냥엔 책이 한 몫 했다?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북데일리. 2013년 3월 6일.
4.↑ 이동: 가 나 조현. 발가벗기고 찌르고 살육하며 ‘마녀사냥’. 한겨레신문. 기사입력 2009년 10월 14일. 최종수정 2009년 10월 15일.
5.↑ 조태성. 근대 베스트셀러, 마녀사냥. 서울신문. 2013년 2월 23일.
6.↑ 이동: 가 나 다 표창원. (표창원의 단도직입)21세기 '마녀 망치'. 경향신문. 2014년 3월 18일.
7.↑ 그래서 오늘날 마녀의 이미지는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형상이 된 것이다.
8.↑ 엄기호. 마녀 사냥의 진실…"여성을 노예로 만들자!". 프레시안. 2011년 12월 16일.
9.↑ 이동: 가 나 이지선. 사소한 거짓말이 ‘인간 사냥’을 불렀다. 시사저널. 2013년 1월 16일.
10.↑ 특별기획취재팀. '인격살인' 앞에 경찰·포털 떠넘기기 급급. 세계일보. 2011년 4월 17일.
11.↑ 박보미. 한 아이의 거짓말인데…‘성추행 누명’ 남자 마녀사냥. 한겨레신문. 2013년 1월 13일.
12.↑ 박우진. 이번엔 국물녀… 인터넷 여론몰이 '위험한 심판' Archived 2012년 3월 1일 - 웨이백 머신. 한국일보. 2012년 2월 29일.
13.↑ 김환영. 100년 전 ‘해리포터’급 인기, 어린이 성화에 14편까지 써. 중앙SUNDAY. 2011년 9월 4일.
14.↑ 박보미. 한 아이의 거짓말인데, '성추행 누명' 남자 마녀사냥. 한겨레신문. 2013년 1월 13일.
15.↑ 박소미. 사건이 왜곡되는 과정(백설공주 살인사건). 씨네21. 2015년 2월 11일.
16.↑ 이혜미. 알지에 히스 재판 ‘마녀사냥’ 네티즌을 향한 섬뜩한 경고. 헤럴드경제. 2015년 2월 5일.
17.↑ 신슬비. SNS 시대의 진실을 꼬집다, 영화 '백설공주 살인사건'. 독서신문. 2015년 2월 5일.
외부 링크
The Stages of a Witch Trial ? a series of articles by Jenny Gibbons.
1913 Catholic Encyclopedia entry on "Witchcraft"
The Burning Times A Wiccan discusses what she considers the three myths of "The Burning Times"
Jenny Gibbons (1998). Recent Developments in the Study of The Great European Witch Hunt. Retrieved 21 November 2006.
Crises: Witch hunt
The Decline and End of Witch Trials in Europe by James Hannam
Witch Trials Documentary Archive and Transcription Project[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Witch Trials
cf4.
「이지메
따돌림, 왕따
いじめる
두 사람 이상이 집단을 이루어 특정인을 소외시켜 반복적으로 인격적인 무시 또는 음해하는 언어적 · 신체적 일체의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개인이 개인을 가해하는 행위와 집단이 개인을 가해하는 행위를 모두 포함한다. 일본의 이지메(いじめる)는 가해자가 집단인 경우가 많다. 직장과 학교에서 동료간, 친구사이에서 이지메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인 스트레스로 가정 내 폭력, 등교거부, 자살, 정신장애, 비행으로 이어질 수 있어 사회문제로 비화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