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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법요해>에는 초선에서 4선까지 각각의 단계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 및
사무량심을 행하는 방법, 그리고 오신통을 얻기 위한 4여의족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5신통을 얻는 매우 상세한 설명이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이 선법요해는 용수보살께서 쓰신게 거의 확실합니다.
삼매와 신통력에 대해서 더 자세히 보려면 대지도론을 보면 됩니다.
짧지만 대단히 중요한 논서입니다.
<禪法要解>
요진(姚秦) 구마라집(鳩摩羅什) 등 한역
김철수 번역
수행자가 처음 와서 법을 받으려 할 때에는 다섯 가지 계[五衆戒]를 청정하게 지킬 것인지
스승이 묻고 나서, 만약 음욕(婬欲)이 많은 사람이면 마땅히 부정(不淨)을 관(觀)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부정관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깨끗하지 않은 것을 싫어하는 것이고,
둘째는 깨끗하지 않은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에게는 여섯 가지의 탐욕이 있기 때문이니,
첫째는 색(色)에 대한 집착이고,
둘째는 생긴 모양[形容]에 대한 집착이며,
셋째는 위의(威儀)에 대한 집착이고,
넷째는 말소리[言聲]에 대한 집착이며,
다섯째는 매끄러움[細滑]1)에 대한 집착이고,
여섯째는 사람이라는 상(相)에 대한 집착이다.
1) 미세하고 부드럽고 매끄러운 촉경(觸境)을 가리킨다.
12인연의 여섯 번째인 촉과 같은 뜻이며,
미세하고 부드럽고 매끄러운 쾌감을 일으키는 촉각(觸覺)을 말한다.
앞의 다섯 가지 탐욕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깨끗하지 않은 것을 관하여 그것을 싫어하게 하며,
그리고 사람이라는 상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백골(白骨) 상태의 사람 모습을 관하게 하고,
또 썩어 흩어졌든 아직 썩어 흩어지지 않았든 죽은 시체를 관하게 한다.
아직 썩어 흩어지지 않은 시체를 관하면 두 가지 탐욕을 끊을 수 있으니,
즉 위의와 말소리에 대한 탐착이다.
이미 썩어 흩어진 시체를 관하면 여섯 가지 탐착을 모두 끊을 수 있다.
부정관(不淨觀)을 익히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죽은 시체에서 냄새가 나고 썩어 문드러져 깨끗하지 않음을 관하는 것이니,
나의 몸도 깨끗하지 않아서 죽은 시체와 동일하여 차이가 없다고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관하면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런 상(相)을 취한 다음에는 한적한 처소나 나무 아래나 비어 있는 집에 가서
취한 상을 스스로 관하여 깨끗하지 않다고 여긴다.
몸의 구석구석을 두루 관하여 마음을 몸에 매어 두고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되,
만약 마음이 밖으로 치달려 흩어지면 다시 그 인연 안으로 거두어들인다.
둘째는 비록 눈으로는 보지 않았더라도
스승으로부터 법을 받아 기억하고 생각하여 분별하는 것이다.
스스로 몸 안에 서른여섯 가지 깨끗하지 못한 것들이 가득 차 있음을 관하면,
머리카락·털․손톱․치아․눈물․침․땀․때․지방․피부․살․힘줄․핏줄․척수․뇌․심장․간․
비장․신장․허파․위․장․밥통․아기집․담․생식기 등은 고름이나
피․똥․오줌 및 여러 가지 기생충을 만들어 담고 있다.
이와 같이 갖가지 깨끗하지 못한 것들이 모여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을
임시로 이름 붙여 몸[身]이라고 하니, 스스로 이와 같이 관(觀)하며,
바깥 몸[外身]에 집착한 경우에도 또한 이와 같이 관한다.
만약 마음이 음욕을 <싫어하면>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 이르게 되며,
만약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 이르지 않았으면 마땅히 열심히 정진해서
그 마음을 꾸짖어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이 지극히 가까워졌으니 수명은 마치 번개가 치고 떠나는 것 같구나.
사람의 몸을 받기도 어렵고 훌륭한 스승을 만나기도 어려운데,
불법이 사라지려고 하니 마치 새벽의 등불과 같구나.
선정법(禪定法)이 무너질 때는 걱정거리가 더욱 많아지니,
안으로는 온갖 번뇌가 일어나고
밖으로는 마군(魔軍)의 사람들이 있으며
국토엔 기근이 들고 황폐해진다.
안팎으로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적들이 그 힘이 아주 강해 선정(禪定)을 익힌 것을 무너뜨리니
나의 몸이 두려워할 만하다.
여러 번뇌의 적들을 아직 조금도 손상시키지 못하고 선정법을 아직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비록 법의(法衣)를 입었더라도 그 내실이 없어 공허하고 속인과 차이가 없으며,
온갖 악취문(惡趣門)이 모두 열려 여러 선법(善法) 속에서도 아직 올바른 선정[正定]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러 악법들에 대해서도 아직은 반드시 악을 하지 않게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이제 어찌 이 똥자루에 집착하여 게으른 마음을 내서 능히 정근하지 않고
그 마음을 조복시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다 떨어진 몸은 현성(賢聖)들이 꾸짖는 바이니,
깨끗하지 못한 더러운 것들이 아홉 구멍으로부터 흘러나오며,
이 몸을 탐착하는 것은 축생과 같으니,
죽어서는 함께 어둠 속에 뛰어들어도 매우 마땅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채찍질하여 스스로의 책임을 사유하고 다시 본래의 처소를 회복해야 한다.
또한 마땅히 마음을 기쁘게 하려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지(一切智)의 사람이시니,
곧 도의 가르침을 말씀하시어 이해하기 쉽고 행하기 쉽게 해주신다.
이 분은 나의 큰 스승이시니,
이와 같이 믿으면 근심과 두려움이 마땅히 없어져서,
마치 대왕(大王)을 의지하면 공포나 두려움이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아라한들은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이들로서 나의 동반자이며,
이미 마음을 조복하였으므로 마치 주인이 노비를 다루는 것과 같다.
마음이 조복되고 나면 여러 가지 과(果)를 갖추어 6신통2)이 자재하게 되나니,
나도 또한 스스로 마음을 조복하여 이러한 일을 구하여 얻어야겠다.
오직 이 길만 있을 뿐, 다시 다른 길은 없다.’
2) 여섯 가지 초인적인 자유무애한 능력을 말한다.
즉, 마음이 바라는 대로 몸을 나타낼 수 있는 신족통(神足通),
육도중생(六道衆生)의 생사고락의 모습과 일체 세간의 갖가지
형색을 보는 데 장애가 없는 천안통(天眼通), 육도중생의
괴로움과 즐거움과 근심과 기쁨 등의 언어와 세간의 갖가지 음성
능히 들을 수 있는 천이통(天耳通), 육도중생의 마음속 생각을
잘 아는 타심통(他心通), 자신과 육도중생의 과거세 숙명의 일을 잘 아는
숙명통(宿命通), 삼계의 모든 번뇌를 끊어 삼계의 생사를 받지 않는 누진통(漏盡通)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사유하고 나서 다시 깨끗하지 못한 것을 관하면,
다시 스스로 마음이 흔쾌하고 즐거워져서 이렇게 생각하여 말한다.
“처음 도를 익힐 때는 모든 번뇌의 바람이 불어 나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내가 도를 얻고자 하니,
그 뛰어나고 오묘한 5욕(欲)3)도 오히려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는데 어찌 하물며 폐악(弊惡)한 것이겠는가?
3) 범어로는 paca-kmagua이며, 오묘욕(五妙欲)묘오욕(妙五欲)?오묘색(五妙色)이라고도 한다.
색성향미촉 등 다섯 가지 경계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다섯 가지 욕망을 뜻한다. 즉, 색욕,성욕,향욕,미욕,촉욕을 말한다.
마치 장로(長老)인 마하목건련이 아라한도를 얻었는데
그 본부인[本婦]이 춤과 음악으로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고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고서 목련을 무너뜨리려 했던 것과 같으니,
목련이 그때 게송으로 말하였다.
그대의 몸은 뼈를 근간으로 세워졌고
가죽과 살이 서로 얽혀 있으며
깨끗하지 못한 것들이 안에 가득 차 있어
어느 하나 좋은 것이 없네.
가죽자루 속에는 똥과 오줌이 가득하고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들이 흘러나오니
귀신도 감당하지 않으려 하는데
어찌 스스로 만족하여 귀하다고 하는가?
그대의 몸은 걸어 다니는 뒷간과 같아
얇은 가죽으로 스스로를 덮고 있어
지혜로운 이라면 멀리 버리니
마치 사람들이 뒷간을 멀리하는 것과 같네.
만약 사람들이 그대의 몸을 안다면
마치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처럼
모두가 다 멀리 떠날 것이니
마치 사람들이 똥구덩이를 피하는 것과 같네.
그대는 몸을 스스로 장엄하여
꽃과 향과 영락으로 꾸미니
범부는 탐내고 애착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미혹되지 않네.
그대는 깨끗하지 못한 것의 덩어리로
온갖 더럽고 불결한 것들을 모아 가지고 있어
마치 뒷간을 장엄해 놓은 것과 같은데
어리석은 이는 그것을 좋아하네.
그대의 옆구리와 갈비는 척추에 붙어 있어
마치 서까래가 기둥을 의지하는 것과 같으며
5장(藏)이 배 안에 있어
깨끗하지 못한 것이 마치 똥을 담고 있는 상자와 같네.
그대의 몸은 변소와 같은데
어리석은 범부는 보호하고 좋아하며
구슬과 영락으로 장식하니
겉모습은 마치 화병(花甁)처럼 좋아 보이네.
만약 어떤 사람이 허공을 물들이려 해도
끝내 물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그대가 나의 마음을 흔들려 하는 것은
마치 나방이 스스로 불에 몸을 던지는 것과 같네.
일체 모든 욕망의 독(毒)을
내가 지금 이미 멸하여 없앴으니
5욕(欲)도 이미 멀리 여의었고
악마의 그물도 이미 찢어버렸네.
나의 마음은 허공과 같아
일체에 집착하는 바가 없으니
만약 천상의 욕락이 내려온다 해도
나의 마음을 물들이지 못하리라.
수행자는 이와 같이 사유하여
결정코 견고하게 마음의 본연(本緣)에 머물러 뭇 욕망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날카로운 근기[利根]를 지닌 이가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하면
늦어도 7일쯤 지나면 마음이 선정[定]을 얻어 머물 수 있으며,
중간 정도의 근기[中根]를 지닌 이라면 삼칠일에 이르러서 선정을 얻을 수 있으며,
둔한 근기[鈍根]를 지닌 이라도 오랫동안 정진하면 선정을 얻을 수 있으니,
비유하면 낙(酪)을 저으면 소(?)가 되는 것처럼 반드시 얻을 수 있다.
만약 선정을 닦아 익히지 않으면
이 사람은 비록 다시 오랫동안 갖가지 다른 방법을 익히더라도 헛되어서 얻을 수 없으니,
비유하면 아무리 물을 저어도 끝내 소(?)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문] 어떤 일이 정도(正道)에 맞지 않는 것인가?
[답] 금계(禁戒)를 범해 놓고도 참회하지 않거나,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 버리지 않거나,
선근(善根)을 끊고 3복장(覆障)에 가려 이른바 두텁고 날랜 번뇌에 매여 있거나,
5무간죄(無間罪)를 지어 3악도(惡道)의 과보를 받는 등, 이와 같은 죄를 짓고도 닦아 익히지 않는 경우이다.
또한 마하연(摩訶衍) 가운데서는 보살이 훌륭한 근기를 지녀 실다운 지혜와 복덕의 인연을 갖추면 그 일과는 같지 않으며,
만약 닦아 익히지 않더라도 경전을 외우고 복을 닦으며 탑을 세워 공양하면 법을 설하여 교화할 수 있고
10선도(善道)4)를 행할 수 있다.
4) 10선업도(善業道)라고도 하며, 10악도(惡道)와 반대 개념이다. 10악업도(惡業道)는
살생,
도둑질,
사음,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
험악한 말
꾸미는 말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행하는 것을 뜻한다.
이상의 열 가지 악(惡)을 떠나는 것이 10선업도(善業道)이다.
[문] 어떻게 일심상(一心相)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답] 마음이 일심상에 머물면 몸이 부드럽고 경쾌하고 즐거워지며,
성냄과 근심 걱정 등 온갖 번뇌의 심법(心法)이 모두 이미 그쳐서 마음이 쾌락을 얻어
일찍이 없었던 바를 얻으니, 5욕락(欲樂)보다 뛰어나다.
마음이 깨끗하여 탁하지 않기 때문에 몸에서 광명이 나니,
마치 청정한 거울의 빛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고,
깨끗한 물 속에서 밝은 구슬의 빛이 밝게 드러나는 것과 같다.
수행자는 이런 모습을 보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쁨이 일어난다.
비유하자면 목마른 사람이 땅을 파서 물을 구하려 할 때 축축한 진흙이 보이면 오래지 않아 물을 얻는 것과 같으니,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처음 닦아 행할 때에는 마치 마른 흙을 파는 것 같다가, 오랫동안 멈추지 않으면
축축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처럼 스스로 오래지 않아 선정(禪定)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안다.
일심으로 믿고 좋아하여 부지런히 정진하고 마음을 거두어들이면 점차적으로 깊은 선정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런 생각을 하고 나면 5욕을 무너뜨릴 수 있다.
탐욕을 구하는 이를 보면 매우 나쁘다고 할 수 있으니,
마치 사람이 개를 보건대, 개는 좋은 음식은 먹지 않고 냄새나는 똥을 먹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 때문에 욕심이 지나친 것을 꾸짖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낸다.
5욕을 받아들이는 이는본래 자신의 마음속에 즐거움이 있으나 구할 줄 모르고
오히려 다시 밖에서 청정하지 못한 죄와 즐거움을 구한다.
수행자는 항상 밤낮으로 정진하여 온갖 선법(善法)을 모아 선정을 이루는 데 이바지해야 하며,
선정을 장애하는 온갖 법은 마음에서 멀리 여의어야 한다.
모든 선법을 모으는 이는 욕계의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를 관하고,
마치 질병 부스럼 종기 등과 같고 심장에 화살이 박힌 것과 같다고 여긴다.
3독심(毒心)이 활활 타오르면
온갖 투쟁하는 마음과 질투심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매우 혐오스러우니,
이와 같이 관하는 것을 처음으로 선법(禪法)을 익힌다고 한다.
만약 선법(禪法)을 익히는 중간에 다섯 가지 덮힌 마음[蓋覆心]5)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곧 마땅히 제거해 없애야 하니, 비유하자면 검은 구름이 태양을 가렸을 때 바람의 힘이 구름을 흩뜨리는 것과 같다.
5) 마음의 성품을 덮어 선법(善法)을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다섯 가지 번뇌를 가리키나니,
즉 탐욕 성냄 혼면 도거(掉擧) 의심[疑]을 말한다.
만약 음욕에 덮힌 마음]이 일어나면 마음속으로 5욕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지금 도를 수행하고 있으므로 스스로 5욕을 버려야 하는데, 어찌 다시 그것을 생각하겠는가?
마치 사람이 토한 음식을 다시 먹으면 이는 세간의 죄법(罪法)이 되는 것과 같다.
나는 지금 도를 배우려고 수염과 머리를 깎고 법의(法衣)를 입었으니,
몸과 목숨이 다하도록 5욕에 마음을 두고 바라는 것을 영원히 여의고 영원히 끊어야 하는데,
어찌 다시 집착하는 마음을 내겠는가?
이는 매우 합당하지 못하므로 제거해 없애야 하니,
도적이나 독사가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아서,
그 화(禍)가 매우 깊고 무겁기 때문이다.’
또한 5욕법은 온갖 악이 머무는 곳이어서 다시 돌이킬 수 없으니,
처음에 인정해 받아들이면 오랜 후에는 기만당하여 온갖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고
질투와 성냄 등 온갖 악을 짓지 않는 바가 없게 된다.
마치 주머니에 여러 자루의 칼이 있으면 손으로 잡을 때 좌우에 접촉하여 다치게 되는 것과 같다.
또한 설령 5욕을 얻더라도 오히려 만족할 줄 모르니,
만약 만족할 줄 모른다면 즐거움이 없어서,
마치 갈증이 나서 음료수를 마시고도 아직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고,
옴[疥]이 난 곳을 긁어대도 그 질환에 차도가 없어 즐거울 수 없는 것과 같다.
또한 5욕이 그 마음을 물들이면 좋은 것과 추한 것을 분별할 줄 모르고,
금세나 후세의 죄업에 따른 과보에 대해서도 무서워할 줄 모르게 되니,
이렇기 때문에 음욕을 제거해 없애야 한다.
음욕을 제거해 버리면 혹시 성냄의 번뇌가 생기더라도
성냄의 번뇌가 생기는 즉시 제거할 수 있다.
중생들은 태(胎)에 처한 이래로 고통스럽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중생들은 온갖 괴로움을 다 겪는데,
내가 어찌 그들에게 괴로움을 더 겪게 하겠는가?
모든 중생들은 마치 사형 집행이 다다른 사람과 같으니,
보살행을 하는 내가 어찌 그들에게 고통을 더욱 무겁게 늘리겠는가?
또한 도를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이나 교만 등의 번뇌를 버려야 하니,
비록 천상에서 태어나는 것을 장애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도를 수행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런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성냄으로써 즐거움의 근본을 뽑아버리겠는가?
또한 비유하건대 물이 용솟음쳐 움직이면 얼굴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것처럼
성내는 마음이 생기면 존귀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을 구별할 줄 모르고
부모나 스승도 몰라보며 나아가 부처님의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성냄이야말로 큰 병통이며,
그 잔인한 해로움과 무도(無道)함이 마치 나찰(羅刹)과 같다.
마땅히 사유하여 자비로운 마음으로 성내는 마음을 소멸시키면
탐욕과 성냄이 멈춘다.
만약 선정을 얻으면 마음이 흔쾌하고 즐거워지지만,
만약 선정의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정(情)이 흩어지고 근심으로 심란해져 마음이 점차 침울해지며,
눈이 흐려져 분명하지 못하니,
수면(睡眠)이 마음을 해치는 적임을 알 수 있다.
수면은 세간의 이익도 파괴하는데, 어찌 하물며 도(道)에 관한 것이겠는가?
수면법(睡眠法)은 죽음과 다름이 없으나 숨을 쉰다는 점이 다를 뿐이니,
마치 물에 이끼가 덮이면 얼굴을 들여다볼 수 없듯이,
수면이 마음을 덮으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모든 법의 실체 또한 이와 같으니, 즉시 제거하고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온갖 번뇌의 도적들이 모두 위험한 재해를 끼치려 하는데, 어찌 편안히 잠잘 수 있겠는가?
마치 창이나 칼을 세우고 적진과 마주 대하는 동안에는 수면에 빠질 수 없는 것과 같다.
늙고 병들고 죽는 근심을 아직 여의지 못했으면 3악도(惡道)의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며,
도법(道法) 가운데 난법(暖法)도 아직 얻는 바가 없는 것이니, 마땅히 잠들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도 만약 졸음이 그치지 않으면, 곧 일어나 걷거나
찬물로 세수하고 사방을 쳐다보며 별자리를 바라보고 세 가지 일을 생각하면서
잠을 없애어 그것이 마음을 덮지 않도록 한다.
첫째는 두려워함[怖畏]이니, 마땅히 스스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죽음의 왕이 큰 힘으로 항상 위해를 가하려고 하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지극히 가까이 있어
마치 도적이 아주 빨리 오면 믿고 의지할 데가 없는 것과 같다.
또 칼을 뽑아 목에 대고 있는 것처럼, 잠이 오면 즉시 목을 베어 버리리라.’
둘째는 흔쾌하고 안위(安慰)함이니,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큰 스승이시며, 그 분이 가지고 계신 오묘한 법은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그것을 배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행복한 일이며 경사스러운 일이지만,
잠자려는 마음[睡心]을 내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셋째는 근심 걱정[愁憂]이니,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후세에 계속해서 몸을 받아 돌아다녀 그 고통과 독해(毒害)가 끝없고 한량없으리니,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인연으로 수면에 떨어지는 것을 꾸짖어 나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유하면 수면이 곧 그친다.
만약 들뜸과 회한의 번뇌[掉悔蓋]가 일어나면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세간 사람들은 근심을 없애려고 기쁨을 구하기 때문에 들떠 희롱하는[掉戱] 마음을 낸다.
지금 나는 고행하면서 좌선하여 도를 구하고 있으니,
어찌 스스로 방자한 마음을 내 들떠 희롱하겠는가?
이는 매우 합당하지 못한 일이다.
불법이 소중하게 여기는 바는 <마음을 거두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니,
경박하게 방종한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마치 물결이 일어나면 얼굴을 들여다볼 수 없듯이,
들떠 희롱함은 마음을 움직여 좋고 나쁜 것을 보지 못한다.
의심/뉘우침[悔]에 대해서는 선도(禪度)6) 중에서 말한 바와 같다.
6) 6바라밀(波羅蜜) 가운데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을 말한다.
[문] 탐욕 성냄[瞋?] 의심[疑]은 각기 개별적으로 덮음[蓋]이 되는데
무엇 때문에 수면(睡眠)과 들떠 후회함[掉悔]은 두 가지가 합해져야 덮음이 되는가?
[답] 졸음[睡]은 번뇌의 세력이 아직 미약하고 엷어서 잠듦[眠]이 돕지 않으면 마음을 덮지 못하며,
들떠 희롱함은 후회함[悔]이 없으면 덮음을 이룰 수 없으니,
이렇기 때문에 두 가지가 합하여 덮음이 되는 것이다.
비유하면 노끈으로 물건을 묶을 때 한 가닥으로 묶으면 힘이 없으나
두 가닥을 합하여 매면 제대로 동여맬 수가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수면이라는 심법(心法)은 졸음[睡]으로 인하여 마음이 무거워지고,
마음이 무거워지기 때문에 몸도 역시 함께 무거워진다.
졸음으로 인하여 미약하게 덮이지만
잠듦[眠]이 덮어 점차적으로 증가하면 도법(道法)을 막아 파괴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두 가지가 합해져 덮음[蓋]이 되니,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다음에도 마음은 전일(專一)하지가 못하다.
생각이 5욕(欲)으로 치달려 온갖 번뇌를 행하는 것을 들뜸[掉]이라고 한다.
비유하면 원숭이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제멋대로 나무 숲 속을 팔짝거리며 뛰어다니는 것과 같으니,
들뜸[掉]도 역시 이와 같다.
5욕을 생각하고 나서 온갖 번뇌를 행하여 몸과 입과 생각을 잃어버리고
근심과 후회를 일으켜 생각하기를, ‘짓지 말아야 할 것을 짓고 지어야 할 것은 짓지 않았구나’라고 한다.
그러므로 들뜸과 후회가 서로 인(因)이 되어 두 가지가 합해져야 덮음이 된다.
[문] 악을 짓고 뉘우치면[悔] 덮음[蓋]이 되지 않는가?
[답] 만일 계(戒)를 범하고 스스로 뉘우쳐 그 후로 다시 짓지 않는다면 이럴 경우에는 덮음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마음으로 죄를 짓고 항상 끊임없이 생각한다면
근심과 번뇌가 마음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덮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들뜸과 뉘우침의 덮음[掉悔蓋]을 꾸짖어 나무라는 것이다.
마음을 얽어매는 연(緣) 가운데 만약 마음이 의심을 낳으면 곧 마땅히 사라지게 해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의심이라는 법은 애착이나 교만함과는 같지 않아서,
금세에는 즐거운 마음을 내지 않으며 후세에는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니,
의심이 있으면 모든 선법(善法)을 막는다.
마치 갈림길에서 망설이면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몰라 문득 스스로 멈추는 것과 같이,
수행하는 이도 이와 같아서 본래 닦아 익히는 법에 대해 의심을 하면 다시 나아갈 수 없으니,
의심이란 병통은 정도(正道)를 막고 덮는다는 것을 알아서 마땅히 신속하게 제거해 없애야 한다.
또한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지(一切智)의 사람이시라 온갖 법을 분별하시니, 이것은 세간법이고 이것은 출세간법이며,
이것은 선법(善法)이고 이것은 불선법(不善法)이며, 이것은 이로운 법이고 이것은 해로운 법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헤아려 아신다. 지금 다만 받아들여 행해서 의심을 내지 않아야 하며, 마땅히 교법(敎法)을 따라서 그것을 부정하거나 위배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불법의 오묘함은 선정과 지혜를 닦아 여실하게 그 법을 알 수 있는데,
나는 이런 지혜가 없으니 어떻게 스스로 마음으로 온갖 법들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날카로운 무기를 손에 지니고 있으면 적과 싸워도 막을 수 있지만,
만약 아무 것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강한 적에게 대항하여 오히려 해를 당하는 것과 같이,
나는 지금 아직 선정과 지혜를 제대로 닦지 않았는데,
어떻게 온갖 법의 실상(實相)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는 도리에 맞지 않다.
또한 외도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의심을 낼 수 있지만,
나는 부처님의 제자인데 어떻게 부처님에 대해 다시 의심을 낼 수 있겠는가?
부처님께서는 항상 의심의 병통을 꾸짖으셨으니,
이것은 덮음[覆蓋]이고 막음[遮]이며 장애함[?]이고 스스로를 속이는 법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이미 자객이 올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피해야 하는 것처럼,
의심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미혹되어 행하는 이는 지혜와 함께하려고 해도 여실하게 아는 지혜[實智]를 장애한다.
비유컨대 몸에 옴병[疥病]이 나서 그 부위를 긁으면 점차 널리 퍼져 몸이 훼손되고 가려움이 더욱 극렬해지나 훌륭한 의원이 약을 주면 옴이 저절로 낫는 것처럼, 수행하는 이도 이와 같아서 갖가지 법에 대해 의심하는 생각을 내면 일을 따라 이해하려 해도 의심이 점차 늘어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곧장 의심을 끊으면 의심이 생겨났다가 곧 사라지게 된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의심을 나무라니, 마땅히 신속하게 제거해야 한다.
수행하는 이는 이와 같이 사유하여 5개(蓋)를 제거하고
모든 선법(善法)을 모아 깊이 일심(一心)에 들어가 욕계의 번뇌를 끊고 초선정(初禪定)을 얻는다.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수행자가 탐욕의 악법과 불선법(不善法)을 떠나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으면,7)
기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떠나 초선(初禪)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7) 각관(覺觀)은 신역(新譯)에서는 심사(尋伺)로 번역된다.
각(覺)이란 추구하여 추론한다는 의미로서 사물의 이치에 대해 대략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며,
관(觀)이란 제법(諸法)의 명칭과 의미에 대해 세심하게 사유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제2선(禪) 이상의 정심(定心)을 방애(妨?)하므로 만약 지속하게 되면 몸과 마음이 피로해지고
손상되며 정념(正念)에 장애가 된다. 이 각관의 존재 유무에 따라 정심(定心)의 깊이가 얕고 깊은지를 판별할 수 있다.
「잡아함경」제21권에서는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는 것을 구행(口行)이라 한다”고 하였다. 각과 관이 언어를
발하게 하는 원인이므로 각관을 떠나서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문] 초선을 얻은 모습[相]은 어떠한가?
[답] 먼저 올바른 생각[正念]으로 5욕을 꾸짖어 그치게 하면 아직 초선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몸과 마음이 즐겁고 온화하며 경쾌하고 부드러우며 몸에 <광명>이 있게 된다.
초선의 모습을 얻으면 계속해서 점차 더 뛰어나게 향상되어
색계(色界)의 4대(大)가 몸에 두루 가득해지기 때문에 온화하고 경쾌하며 부드럽고,
탐욕 등 악법(惡法)이나 불선법(不善法)을 떠나
일심의 선정 상태에 들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색계에서 색(色)을 만들어 광명의 모습이 있으니,
그러므로 수행자는 오묘한 광명이 몸의 안팎을 비추는 것을 볼 수 있다.
수행자가 이와 같이 마음[心意]이 점차 달라져 성낼 곳에서 성내지 않고 기뻐할 곳에서 기뻐하지 않으면 세간의 여덟 가지 법[八法:세속팔풍]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공경/부끄러워함이 점차 더 많이 증가하여 몇 배에 이른다.
의복이나 음식 등에 대해 탐착하지 않고, 단지 온갖 선한 공덕만을 귀하게 여기고 나머지는 천하게 여긴다.
천상의 5욕에 대해서도 오히려 마음이 얽매이지 않는데,
어찌 하물며 인간 세상의 깨끗하지 않은 5욕이겠는가?
초선(初禪)을 얻은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모습이 있다.
또한 초선을 얻었을 때는 크게 놀랄 정도로 마음이 기뻐지는데,
비유하면 가난한 이가 졸지에 보배 창고를 얻은 것과 같다.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른 밤이나 한밤중이나 늦은 밤에도 열심히 정진하여
고행하면서 초선의 도를 닦아 익혔는데
지금 과보를 얻었으니, 진실하여 헛되지 않구나.
그 오묘한 즐거움이 이와 같은데, 모든 중생들은 미혹되고 미련하며
어리석어서 5욕에 빠져 부정(不淨)하며 즐겁지 않으니 매우 불쌍하구나.’
초선의 즐거움이 몸의 안과 밖에 두루하니,
마치 물이 마른 땅을 적셔 안과 밖이 축축이 젖는 것과 같다.
욕계의 신분(身分)으로 받는 즐거움은 널리 두루할 수가 없으니,
욕계의 음욕과 성냄 등 온갖 불길이 몸을 태우기 때문이다.
초선의 연못에 들어가면 청량한 즐거움이 제일이어서 온갖 뜨거운 번뇌를 제거할 수 있으니,
마치 열기가 아주 지극할 때 시원한 연못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미 초선을 얻었으면 본격적으로 도문(道門)을 닦아 익힐 생각을 해야 한다.
혹 다른 인연이 있을 수 있으니,
이른바 염불삼매나 부정자심관(不淨慈心觀)을 생각하는 것 등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것을 행하면 생각의 힘으로 선정을 얻을 수 있고 점차 깊이 들어갈 수 있으며
근본적으로 관찰하는 능력이 배로 증가하여 청정하고 분명하게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초선을 얻은 다음에는 2선(禪)을 구하러 계속 정진해야 한다.
만약 유루도(有漏道)라면 2선의 변지(邊地)에서 각관(覺觀)을 싫어하니,
마치 욕계의 5욕과 5개(蓋)가 마음을 산란하게 하듯이
초선의 각관이 선정의 마음을 괴롭고 어지럽게 하는 것도 이와 같다.
만약 무루도(無漏道)라면 초선의 욕락(欲樂)을 여의고
곧 무루(無漏)의 초선을 수용하여 각관을 꾸짖어 나무란다.
[문] 초선의 번뇌[結使]가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단지 각관만을 말하는가?
[답] 초선의 번뇌를 각관이라 하니,
왜냐하면 선(善)한 각관으로 인하여 애착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초선의 번뇌를 각관이라고 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초선을 얻었을 때는 아직 나머지에 대한 집착이 없다.
또한 본래 일찍이 없었던 각관을 얻으면 매우 기쁘니,
매우 기쁘기 때문에 선정의 마음을 무너뜨리며,
선정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마땅히 먼저 제거해야 한다.
또한 아주 깊은 2선(禪)의 선정에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각관을 제거하니,
큰 이익을 위하여 작은 이익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마치 욕계의 작은 즐거움을 버리면 큰 즐거움을 얻는 것과 같다.
[문] 단지 각관을 멸해야 한다고만 말할 뿐, 초선의 번뇌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는가?
[답] 각관은 곧 초선의 선한 각관이니,
초선의 애착[愛] 등을 또한 각관이라고 이름한다.
악한 각관은 2선(禪)의 도를 장애하므로 마땅히 멸해야 하고,
선한 각관도 수행자로 하여금 그 마음이 즐거움에 머물러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므로 모두 마땅히 멸해야 한다.
곧 다시 생각해 보면,
악한 각관은 진짜 적(賊)임을 알 수 있으며,
선한 각관도 비록 친하고 선량한 것 같아도 이 역시 적이니, 우리의 큰 이익을 빼앗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나아가 이 두 가지 각관을 멸해야 한다.
각관이 괴롭고 어지럽게 하는 것이, 마치 어떤 사람이 매우 피로하여 편안하게 잠을 자려 해도 온갖 소리가 그를 괴롭고 어지럽게 하는 것과 같으니, 그러므로 수행자는 이 각관을 멸한 다음 2선(禪)을 구해야 한다.
비유컨대 바람이 불어 흙먼지가 깨끗한 물을 흐리게 하면, 얼굴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것처럼,
욕계의 5욕에 의해 혼탁해진 마음은 마치 흙먼지가 물을 흐리게 하는 것과 같고,
각관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은 마치 바람이 물을 흔드는 것과 같다.
각관을 멸해야 안으로 청정함을 얻을 수 있으니,
각(覺)도 없고 관(觀)도 없는 선정의 상태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생겨 2선으로 들어간다.
이 표안의 내용은 대지도론에서 발췌함. <밖의 5욕>과 <안의 5개>를 없애고 <5법>을 행하면 초선을 성취할 수 있다. 1. 밖의 5욕을 없애고 마음이 바깥을 향해 치달으려는 욕망을 뜻한다. - 눈으로 보고 싶어하고, - 귀로 듣고 싶어하고, - 코로 냄새 맡고 싶어하고, - 혀로 맛보고 싶어하고, - 몸으로 접촉하고 싶어하는 욕망....... 5욕이란, 수면욕/색욕/식욕/재물욕/명예욕.......이런걸 의미하는게 아니다. 2. 안의 5개를 없애고 안이란 마음 안에서 생기는 것을 말하고, 마음의 덮어버리는 내적인 것은 다섯가지이다. - 욕망 - 분노 - 수면(혼침/졸림) : 멍해짐 &꾸벅꾸벅 좀 - 도회(들뜸/후회) : 잡념이 생김 &후회 - 의심 보살이 5욕(欲)과 5개(蓋)가 모두 인연 따라 생긴 것이어서 자성이 없으며, 공하여 있는 바가 없는 줄을 안다면, 그것을 버리기가 매우 쉽다. 3. 5법을 행하라. <의욕 : 欲>이라 함은 욕계에서 벗어나서 초선천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정진 : 正進>이라 함은 집을 떠나 계를 지니며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전일하게 정진하여 게으르지 않으며, 절제 있게 먹고 마음을 거두는 것이다. <기억 : 念>이라 함은 초선천의 즐거움을 기억하되 욕계는 더럽고 미친 듯 어리둥절하고 미천하며 초선천은 존중하고 귀한 줄을 아는 것이다. <공교로운 지혜 : 巧慧>은 욕계의 즐거움과 초선천의 즐거움을 관찰하고 헤아려서 가볍고 무거움과 얻고 잃음을 아는 것이다. <한마음 : 一心>이라 함은 마음을 항상 대상 가운데 매어 두어 나뉘거나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
[문] 2선(禪)은 어떤 모습인가?
[답] 경(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善)이든 무기(無記)이든 모든 각관을 멸하면
각관의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내심(內心)이 청정해진다.
마치 물이 맑고 바람이 불지 않아 파도가 일지 않으면,
별과 달과 모든 산이 모두 다 수면에 비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내심이 청정하면 이런 상태를 성스러운 묵연(?然)이라고 한다.
3선(禪)과 4선(禪)도 비록 모두 묵연이지만 2선에서 최초로 얻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는 것이다.
각관이라는 언어의 인연은 그 인연이 이때 처음으로 멸하기 때문에 묵연이라 이름하며,
이 선정이 내는 기쁨과 즐거움은 초선 상태의 기쁨과 즐거움보다 오묘하고 뛰어나다.
초선 때의 기쁨과 즐거움은 5욕을 떠남으로써 생기며,
여기서의 기쁨과 즐거움은 초선의 선정으로부터 생긴다.
[문] 2선에서 또한 초선의 번뇌[結使]를 떠난다면 왜 ‘떠남이 생긴다[離生]’고 말하지 않는가?
[답] 비록 다시 번뇌를 떠났더라도
다만 선정의 힘[定力]에 의지함이 많기 때문에 선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한 5욕을 떠나는 것은 곧 욕계를 떠나는 것을 말하지만,
초선을 떠나는 것은 아직 색계를 떠난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떠남이 생긴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2선(禪)의 모습[相]이다.
수행자가 이미 2선을 얻었다면 다시 더 깊은 선정을 구해야 한다.
2선의 선정에서도 번뇌가 마음을 덮으니,
이른바 애(愛)?교만[慢]?사견(邪見)?의심[疑] 등이다.
이것들은 선정의 마음을 파괴하므로 2선의 적이며 3선문(禪門)을 막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러한 병통을 끊어 없애고 3선을 구해야 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기쁨[喜]을 떠나 그것을 버리면 3선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2선을 얻으면 크게 즐거워져 기뻐하는 마음[喜心]이 지나쳐 마음이 집착하게 된다.
그 기뻐함이 온갖 번뇌를 생기게 하기 때문에 기쁨이 번뇌의 근본이 된다.
또한 온갖 번뇌는 어떤 이익도 없으므로 마땅히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데,
기쁨[喜]은 기쁘고 즐거우므로 매우 이익이 되는 것 같아서 그것에 머물러 집착하면 버리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쁨을 버리면 3선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문] 5욕부정죄(欲不淨罪)의 기쁨은 마땅히 버려야겠지만,
이 기쁨은 깨끗하고 오묘하여 중생이 즐거워하는 바인데 무엇 때문에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가?
[답] 앞서 대답했듯이 집착하는 인연을 낳으면 이는 죄문(罪門)이다.
또한 만약 기쁨[喜]을 버리지 않으면 더 훌륭하고 오묘한 공덕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얻는 것이니, 어찌 허물이 있겠는가?
수행자가 3선을 구해 나아가려면 기쁨이 근심과 괴로움의 인연임을 알아서,
기쁘고 즐거워할 만한 것은 무상(無常)하여 일이 변하면 곧 근심과 괴로움을 생기게 함을 관해야 한다.
또한 2선의 기쁨은 거친 즐거움[?樂]이니,
이제 거친 즐거움을 버리고 미세한 즐거움[細樂]을 구하려고 하기 때문에
2선의 기쁨을 떠나 더욱 깊은 선정에 들어가 그와는 다른 선정의 즐거움[定樂]을 구해야 한다.
어떻게 3선의 모습에서 기쁨을 멸할 수 있는가?
이 오묘한 기쁨을 버리고도 마음에 후회하지 않고 그 희열이 해롭다는 것을 알아야 하니,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내가 나찰(羅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곧 그 아내를 버리고도 후회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과 같다.
기쁨은 미혹된 것이고 거친 법[?法]이며 오묘하지 않다.
제3선에서 몸이 느끼는 즐거움[身樂]은 세간에서는 최상의 즐거움으로 이를 넘어서는 것이 없다.
성현들이 거쳐 간 바이며,
기쁨이 없는 즐거움[樂]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어서,
교묘한 지혜를 생각함으로써 몸이 곧 두루 3선을 받아들여 들어간다.
[문] 이는 일심(一心)으로 지혜[慧]를 생각함을 말한 것인데, 초선과 2선에서는 왜 말하지 않았는가?
[답] 제3선은 몸으로는 두루 즐거움을 받아들이고 마음으로는 법(法)을 버려서
마음으로 하여금 좋고 나쁨을 분별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일심으로 지혜를 생각한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3선 가운데는 세 가지 허물이 있으니,
첫째는 마음이 점차 미약하게 사라지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이 크게 움직이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이 미혹되어 답답하게 되는 것이다.
수행자는 항상 일심으로 이 세 가지 허물을 생각해야 하니,
만약 마음이 사라질 때에는 정진의 지혜력으로 다시 마음을 불러일으켜야 하며,
만약 마음이 크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곧 거두어들여 그치게 해야 하며,
만약 마음이 미혹되어 답답하게 되었을 때에는
마땅히 부처님의 오묘한 법을 생각하여 다시 마음이 즐겁도록 해야 한다.
항상 마땅히 지키고 보호하여 이 세 가지 마음을 다스려야 하니,
이것을 일심으로 즐거움을 행하는 이가 제3선에 들어간다고 한다.
[문] 경전에 따르면 제3선 가운데에서 두 번[二時] 즐거움[樂]에 관해 말하였는데,
두 가지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답] 앞에서는 즐거움을 향수함[受樂]을 말하였고, 뒤에서는 쾌락을 말하였다.
[문]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즐거움을 향수함[受樂]과 쾌락(快樂)과 괴로움이 없는 즐거움[無惱樂]인데,
어떤 즐거움이 있기에 3선을 제일가는 즐거움이라고 하는가?
[답] 세 가지 즐거움은 모두 아래 단계의 경지보다 오묘하고 뛰어나다.
다만 즐거움을 향수하는 것이 제일이니,
이것을 낙지(樂地)라고 이름하는 것은 결국에는 그것이 다하여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머지 두 가지 즐거움은 윗단계[上地]에서도 존재하기 때문에 이 가운데에서는 명칭으로 삼지 않은 것이다.
[문] 희락(喜樂)과 무희락(無喜樂)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즐거움을 향수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희근(喜根)이고, 둘째는 낙근(樂根)이다.
희근(喜根)과 희락(喜樂)은 초선과 2선에 속하고,
낙근(樂根)과 무희락(無喜樂)은 3선에 속한다.
또한 욕계의 초선에서 즐거움을 향수하는 경우에 거친 것을 낙근(樂根)이라 하고,
세밀한 것을 희근(喜根)이라 한다.
2선과 3선에서 즐거움을 향수하는 경우에는 거친 것을 희근이라 하고, 세밀한 것을 낙근이라 한다.
비유컨대 무더위가 지독할 때 깨끗하고 차가운 물로 손과 얼굴을 씻으면
이를 희(喜)라 하고, 아주 시원한 연못에 들어가 온몸을 목욕하면 이를 즐거움을 향수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수행하는 이도 이와 같아서,
초선에서는 각관(覺觀) 때문에 즐거움이 몸에 두루하지 못하고,
2선에서는 크게 기뻐 놀라기 때문에 몸에 두루하지 못하나
3선에서는 장애가 없기 때문에 즐거움이 그 몸에 두루하니,
이를 일러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즐거움을 향수함에는 네 가지가 있다.
욕계에서 6식(識)이 상응하는 즐거움을 희근이라 하고, 또한 낙근이라고도 한다.
초선에서 4식(識)이 상응하는 즐거움을 낙근이라 하고, 또한 희근이라고도 한다.
2선에서 의식(意識)이 상응하는 즐거움을 향수하는 것을 희근이라고 한다.
3선에서는 희(喜)를 떠나기 때문에 의식이 상응하여 즐거움을 향수하니, 이것을 낙근이라고 한다.
수행자가 이미 3선을 얻으면 앞의 세 가지 즐거움을 알게 되어,
일심으로 지키고 보호해서 항상 잊어버릴까 두려워하므로 이것이 곧 번뇌가 된다.
그러므로 즐거움이 다시 근심이 되기 때문에 마땅히 즐거움에서 떠나기를 구해야 한다.
비유컨대 사람이 부귀의 즐거움을 구하나 구할 때 이미 괴롭고,
얻었을 때 만족함이 없으면 다시 괴로움이 되며,
얻고 나서 그것을 지키는 것도 다시 괴로움이 되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즐거움을 구하는 것이 괴로움이 되므로 버리며,
혹은 즐거움을 얻음을 싫어하지 않지만 괴로운 것임을 깨닫고서 버리며,
혹은 이미 얻었으나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괴로움이 되기 때문에 버린다.
수행자가 즐거움을 염려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초선의 즐거움을 구할 때는 각관이 마음을 산란하게 하므로 버리고,
2선에서는 크게 기뻐함[大喜]이 발동하기 때문에 버리며,
3선에서는 즐거움이 무상(無常)하여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버리니,
그러므로 마땅히 이러한 즐거움을 버리고 4선(禪)의 안온(安隱)한 경지를 구한다.
[문] 수행자는 선정의 즐거움에 의지하여 욕락(欲樂)을 버리는데,
이제 무엇을 의지하여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는 것인가?
만약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면 어떤 이익을 얻는가?
[답] 수행자는 열반의 즐거움에 의지하여 선정의 즐거움을 버릴 수 있으니,
세 가지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이른바 아라한도와 벽지불도와 불도이니,
그러므로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고 4선의 안온한 쾌락을 행하며,
삼승도(三乘道)로써 마음을 따라 열반에 든다.
[문] 어떻게 제4선의 모습을 알 수 있는가?
[답] 부처님께서 4선의 모습을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만약 비구가 즐거움도 끊고 괴로움도 끊으려면 먼저 근심과 기쁨을 멸해야 하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마음으로 청정함을 호념(護念)하면 제4선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문] 3선의 즐거움을 끊음이 마땅히 그러하고, 욕락을 떠날 때 이미 괴로움을 끊었는데,
지금 무엇 때문에 다시 괴로움을 끊는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끊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별상(別相)을 끊음이요,
둘째는 총상(總相)을 끊음이다. 예컨대 수다원(須陀洹)이라면
도비지(道比智)로 일체 견해의 진리와 번뇌를 총체적으로 끊는다”고 하였으니, 이 일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괴로움도 끊고 즐거움도 끊으려면 먼저 근심과 기쁨을 멸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만약 욕계의 괴로움이라면 마땅히 먼저 괴로움을 끊어야 한다고 설하지,
근심과 기쁨을 먼저 끊어야 한다고 설하지는 않을 것이니,
그러므로 욕계의 괴로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선의 즐거움은 무상(無常)한 모습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낳으니,
그러므로 괴로움을 끊으라고 설한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즐거움을 향수할 때에는 마땅히
이것이 괴로움[苦]임을 관해야 한다. 3선에서 즐거움이 생길 때
그것이 머물 동안은 즐겁지만 멸할 때는 괴롭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렇기 때문에 즐거움도 끊고 괴로움도 끊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니,
먼저 멸해야 하는 근심과 기쁨이란 욕계 중의 근심과 초선과 2선 중의 기쁨이다.
[문] 욕계 중에는 괴로움도 있고 근심도 있어서 욕계를 떠날 때 멸한다.
그런데 어째서 근심은 끊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괴로움을 끊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는가?
[답] 욕계를 떠날 때 비록 두 가지 일을 다 끊어서 근심의 뿌리[憂根]는 다시 이루어지지 않지만
괴로움의 뿌리[苦根]는 다시 이루어지니, 다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멸한다고 말할 수 없다.
[문] 만약 3선 가운데 즐거움이 생겨서 그것이 머무를 때는 즐겁고 멸할 때에는 괴롭다고 한다면,
지금 초선과 2선 중의 기쁨[喜]은 어찌 유독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인가?
[답] 불경(佛經)에 따르면 3선을 떠날 때는 즐거움도 끊고 괴로움도 끊지만
근심과 기쁨을 멸하는 일은 없다고 말씀하셨으며, 초선과 2선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문] 부처님께서는 무슨 인연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는가?
[답] 3선 가운데 즐거움은 삼계에서 향수하는 즐거움 가운데
가장 오묘하여 마음이 집착하는 바이니, 그 집착 때문에 그것의 무상함이 괴로움을 생기게 한다.
기쁨[喜]은 거칠기 때문에 몸에 두루하지 못하나 비록 다시 잃더라도 크게 근심을 생기게 하지 않으니,
이렇기 때문에 불경에서 설하지 않으신 것이다.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不苦不樂]는 것은
제4선 가운데서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향수하는 것을 말한다.
버린다는 것은 3선의 즐거움을 버리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행하여
향수하더라도 기억하거나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청정함을 생각한다는 것은
근심/기쁨/괴로움/즐거움 등 네 가지를 멸하기 때문에 청정함을 생각하는 것이다.
[문] 앞의 세 선(禪)에서는 청정함을 말하지 않았는데,
왜 제4선 가운데서만 유독 청정함을 말하는가?
[답] 초선에서는 각관이 마음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청정함을 생각할 수 없으니,
비유컨대 드러난 곳에서는 바람 속에서 등불을 켜면 비록 기름심지가 있더라도
바람이 불기 때문에 밝게 비출 수 없는 것과 같다.
2선 가운데서는 비록 일식(一識)이 거두더라도 기쁨[喜]이 크게 발동하기 때문에
선정의 마음이 산란해지니, 그러므로 청정함을 생각한다고 이름할 수 없다.
3선 가운데서는 즐거움[樂]에 집착하여 마음이 이 선정을 많이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청정함을 생각한다고 말할 수 없다.
4선 가운데서는 이러한 일이 모두 없기 때문에 청정함을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아래 단계[下地]에서는 비록 선정의 마음이 있더라도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하기 때문에 마음을 거두기가 어렵지만,
이 4선 가운데서는 숨을 내쉬거나 들이쉬는 일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쉽게 거두어지니,
쉽게 거두어지기 때문에 청정함을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제4선을 진선(眞禪)이라고 이름하며, 나머지 세 선(禪)은 방편인 사다리이다.
이 제4선은 비유하면 산꼭대기와 같고, 나머지 세 선정은 마치 산에 난 길과 같다.
그러므로 제4선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움직이지 않는 곳[不動處]”이라고 하셨으니,
선정의 움직임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안온하고 순조로운 곳[安隱調順之處]이라고 한다.
이것이 제4선의 모습이니,
비유컨대 말[馬]을 잘 길들이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이 제4선을 얻고나서
- 4무량심(無量心)을 행하고자 하면 생각하는 대로 쉽게 얻을 수 있고,
- 4념처(念處)를 닦고자 하면 쉽게 닦을 수 있으며,
- 4제(諦:고집멸도 사성제)를 얻고자 하면 어렵지 않게 빨리 얻을 수 있고,
- 4무색정(無色定)에 들어가고자 하면 쉽게 들어갈 수 있으며,
- 6신통[通]을 얻고자 하면 그것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왜냐하면 제4선 가운데서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생각을 버려 청정하고,
순조롭고 부드럽게 마음이 따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비유하여 말씀하시길,
“금을 다루는 기술자는 금을 녹여 법에 맞게 잘 제련하여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되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 수행자는 어떻게 자심(慈心)이 한량없음을 얻을 수 있는가?
[답] 수행자는 4선을 의지하고 나서 생각하되 한 성(城)의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도록 소원하며,
이와 같이 하나의 국토, 하나의 염부제(閻浮提)사천하(四天下)소천국토(小千國土)?이천국토(二千國土)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 및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들에게 자비심을
두루 덮어 모두 즐거움을 얻기를 원한다.
비유컨대 수겁(水劫)이 이를 때는 물을 사라지게 한 불구슬[火珠]이 소멸되어 다시 나타나지 않으며,
대해(大海) 용왕의 마음이 크게 움직여서 그 생각으로부터 물이 생겨 바다로 흘러나와 가득 차 넘치고,
하늘에서 단비가 내려 두루 천하를 가득 채우면, 이때 천지가 가득 차 넘쳐, 차서 넘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이,
수행자도 또한 그러해서 대자(大慈)의 물로 성냄을 멸하고 자심(慈心)을 사라지게 한 불구슬을 소멸시키며,
자심의 물이 넘쳐흘러서 점점 광대해져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들에게 두루 이르러 모두가 그 윤택한 은혜를 입되
항상 그 자심의 물이 흘러나와 끊이지 않으니, 혹 설법하는 것을 들으면 자심이 더 늘어난다.
비유컨대 큰비가 두루 널리 미치지 않음이 없듯이, 수행자는 자심으로 중생들을 생각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의 청정한 즐거움을 얻게 하며, 또한 얻은 선정의 쾌락을 중생들에게 제공하고, 또한 열반으로 괴로움이
다한 즐거움과 나아가 모든 부처님의 제일가는 진실한 즐거움을 중생들에게 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자심의
힘이 있기 때문에 시방의 육도중생(六道衆生)이 즐거움을 받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모두 안다.
[문] 아비담(阿毘曇)에서 말하기를, “자삼매(慈三昧)가 무엇인가 하면,
일체 중생을 관하여 즐거움을 향수하는 것을 모두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경에서 설하기를, “자심삼매(慈心三昧)란 두루 시방에 가득한 중생들이
모두 즐거움을 향수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단지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도록 하기를 원한다고만 말하는가?
[답] 자심을 처음 닦아 익힐 때는 즐거움을 얻도록 원하는 정도이지만
자심삼매에 깊이 들어가고 나면 중생들이 즐거움을 향수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된다.
비유하면 나무를 비벼 불이 나올 때 처음에는 가늘고 부드러운
건초를 태우지만 불기운이 점차 커지면 젖은 나무와 산림을 일시에 함께 태우는 것처럼,
자심도 이와 같아서 처음 들어가 관할 때는 괴로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향수하도록 바라지만 자심의 힘이 점차 성숙하면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다.
[문] 중생은 진실로 얻을 것이 없으니,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다는 것이 어찌 뒤바뀐 생각이 아니겠는가?
[답] 선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관하는 것이요,
둘째는 법을 관하여 이용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진주(眞珠)를 다루는 기술자는
첫째로 진주의 모양이 귀한지 흔한지 그리고 좋은지 나쁜지를 잘 알며,
둘째로 잘 가공하여 이용하는데 어떤 이는 그 모양은 잘 알지만 가공해 이용할 줄 모르고,
혹 어떤 이는 가공해 이용할 줄은 알지만 그 모양을 잘 모르며,
혹 어떤 이는 모양도 잘 알고 가공해 이용할 줄도 잘 아는 것처럼,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현성(賢聖)으로서 욕심을 떠나지 못한 이는
법상(法相)과 4진제(眞諦) 등을 관할 수는 있으나 그것들을 이용하지는 못하니, 4무량(無量)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범부가 욕심을 떠나 여러 공덕을 행한다면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으니,
4무량심(無量心)을 생각할 수는 있으나 제법의 실상을 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두 갖추어 해탈한 아라한 등은 제법의 실상을 관할 수도 있고,
선정을 갖추었기 때문에 4무량심을 생각할 수도 있다.
4무량이란 해탈을 얻는 법이니, 그것을 이용하기 때문에 뒤바뀐 것이 아니다.
또한 불법에는 진실로 어떤 중생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하여 괴로움은 진실하고 즐거움은 뒤바뀐 것이라고 관하는가?
이른바 뒤바뀌었다는 것은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데
아상(我相)에 집착하여 항상하거나 무상(無常)하다거나
끝[邊]이 있다거나 끝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뒤바뀐 것이다.
자심(慈心)을 행하는 사람은 중생이 가명임을 아니,
마치 바퀴 등이 합해져서 그것을 수레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수행자는 자심이 청정하면 뒤바뀌지 않는다.
또한 만약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데 실재한다고 여기면,
중생이 즐거움을 향수한다는 이것도 마땅히 뒤바뀐 것이다.
중생이 존재한다거나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모두 치우친 견해[邊見]이니,
단지 중생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만이 뒤바뀜인 것은 아니다.
또한 자심삼매의 힘 때문에 수행자는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지 않음이 없음을 모두 아니,
마치 일체 모든 중생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살펴보는 것과 같다.
선정의 힘 때문에 반연하는 경계에서 청색을 변화시켜 적색으로 만들 수도 있는데, 하
물며 중생들에게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樂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예컨대 귀하거나 천하거나 가난하거나 부유한 사람이거나 날거나
기어다니는 짐승에 속한 것들이거나 각자 즐거움이 있고 서로 불쌍히 여기니,
귀한 사람에게 있는 근심은 가난한 이에게는 없고
가난한 사람에게 있는 근심은 귀한 이에게는 없다.
[문] 다른 세계[道]는 그럴 수 있어도 지옥은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답] 지옥의 중생에게도 또한 즐거운 면[樂分]이 존재한다.
멀리서 칼산이나 재[灰]가 흐르는 강을 보고는 나무나 물이라고 여겨 즐거운 생각을 내며,
나무 위에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면 또한 즐거운 생각을 낸다.
또 자기의 마음이 뒤바뀌었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니,
만약 옥졸이 죽이려 할 때는 도망치며 슬피 울면서 놓아 달라고 간청하다가,
만약 그대를 사면해 주겠노라고 말하면 이런 고통을 벗어날 수 있어서 마음이 또한 즐거워진다.
이와 같은 것 등이 모두 즐거운 면이다.
또한 신통력이 있기 때문에 자비의 마음을 행해서 갖가지로 교화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고,
혹은 소유하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맞게 제공해 주며, 몸과 입으로 자비행을 베풀어 그들이 이롭게 돕는다.
마치 모든 불보살이 깊은 마음으로 중생들을 애념(愛念)하여 모든 악취(惡趣)를 무너뜨려
진실로 중생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즐거움을 얻게 하는 것과 같으니,
이렇기 때문에 단지 원하는 것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또한 진실로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한다.
[문] 자심(慈心)을 행하는 이는 어떤 공덕을 얻는가?
[답] 자심을 행하는 이에게는 온갖 악들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니,
마치 굳건히 지키고 잘 방비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약 자심을 행하는 이를 괴롭히거나 해치려고 하면 오히려 자신이 환난을 당하게 되니,
마치 어떤 사람이 손바닥으로 창을 막으면 손바닥만 손상될 뿐 창은 전혀 손상되지 않는 것과 같다.
다섯 가지 삿된 말도 그 자심을 파괴할 수 없으니,
그 다섯 가지란
첫째는 거짓말[妄言]을 하는 과실이고,
둘째는 나쁜 말[惡口]을 하는 과실이며,
셋째는 때에 적절하지 않는 말을 하는 과실이고,
넷째는 악한 마음으로 말하는 과실이며.
다섯째는 이익되지 않는 말을 하는 과실이다.
비유하면 대지(大地)를 파괴할 수 없는 것처럼,
갖가지 성냄과 괴롭힘과 비방함 등으로도 자심을 행하는 이를 훼손할 수 없다.
비유하면 허공이 해를 입지 않듯이,
자심은 온화하고 부드럽기가 마치 하늘의 옷[天衣]과 같다.
또한 수행자가 자심에 들면
호랑이나 이리 등 악독한 짐승이나 뱀이나 도롱뇽류에 속하는 것들이 해치지 못하며,
감옥이나 성 안에 들어가도 상해를 입지 않는다.
자심을 행하는 이는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얻는다.
[문] 자심의 덕이 이와 같다면, 무엇을 자심의 법[慈法]이라고 하는가?
[답] 중생들을 애념하여 그들이 즐거움을 향수하는지를 모두 아는 이 마음이 상응하는 법은
행음(行陰)에 속하므로 자심의 법이라 이름한다.
이것은 색계에 매여 있기도 하고,
매여 있지 않기도 하며,
심수법(心數法)과 심법(心法)이 함께 생긴다.
심법을 따라 행하면 색법이 아니며 업이 아니다.
업이 상응하면 업이 함께 생겨서 업행(業行)을 따르니, 과보로 생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땅히 닦아야 하니 닦을 수 있으며 닦아 행할 수 있고,
마땅히 증득해야 하니 몸으로 증득하고 지혜[慧]로 증득한다.
사유가 끊어지기도 하고 끊어지지 않기도 하며,
각(覺)과 관(觀)이 존재하기도 하고
각은 존재하지 않고 관만 존재하기도 하며
각이나 관이 모두 존재하지 않기도 하며,
기쁨[喜]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일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현성이기도 하고 범부이기도 하며,
낙수(樂受)와 상응하기도 하고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와 상응하기도 하니,
도품(道品)이 아니다.
먼저 모습[相]을 반연한 후에 법을 반연하니,
4선(禪)에서는 또한 그 밖의 다른 경지가 있으며
한량없는 중생을 반연하기 때문에 ‘무량’이라고 이름한다.
청정하기 때문이고,
자애로운 생각을 하기 때문이며,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범행범승(梵行梵乘)이라고 이름한다.
능히 청정한 세간[梵世]에 이를 수 있으므로 청정한 도[梵道]라고 이름하니,
이는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항상 행하신 도이다.
[문] 어떻게 자심(慈心)을 닦을 수 있는가?
[답] 수행자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수염과 머리를 깎은 것은
호화롭게 꾸미고 사는 데 뜻을 두지 않고 교만한 모습을 없애기 위함이니,
이에 걸맞으려면 마땅히 자심(慈心)을 행해야 한다.
지금 물들인 법복을 입고 있으니 마땅히 자심을 행하여 마음이 물들지 않게 하며,
다른 사람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었으니 보시를 받은 공덕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
경전에서는 설하기를, (만약 어떤 비구가 점차적으로 자심을 닦으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다른 사람의 신심 있는 보시[信施]를 먹음이 헛되게 하지 않으리라.’
또한 만약 출가하였거나 집에서 수행하는 이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자심의 힘 때문에 악한 세간에서도 안온하고 근심이 없으며,
법을 파괴하는 무리 가운데서도 오직 법을 따라 행하여
번뇌의 열기로부터 마음이 청량할 수 있도록 하니,
마치 마을 가까이에 청량한 연못이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자심을 행하는 힘 때문에 원수가 독으로 해치려 해도 해칠 수 없으니,
마치 가죽신을 신고 가시를 밟으면 다치지 않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욕계에 처해 있어도 그곳의 많은 성냄과 분노의 해침이나
다툼과 원망의 독(毒) 등 갖가지 모든 해로움이
자심(慈心)의 힘 때문에 그를 손상시켜 무너뜨릴 수 없으니,
비유컨대 역사(力士)가 금강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비록 큰 진영[陣]에 들어오더라도 그를 다치게 하거나 무너뜨릴 수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이 자심은 이익되게 할 수 있으니, 세 종류의 사람을 이익되게 한다.
범부로서 자심을 행하면 온갖 성냄을 없애고 한량없는
복을 얻어 깨끗한 세계에 태어날 수 있으니,
세간의 복덕으로서 이를 넘어서는 것은 없다.
성문이나 벽지불을 구하는 이는 욕계의 많은 성냄을 자심의 힘으로 파괴할 수 있으며,
그 밖의 번뇌도 또한 그것을 따라 멸하니,
따라서 욕계를 떠날 수 있고 점차로 삼계를 벗어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심이 모두 갖추어지면 7각지(覺)를 닦는데 가까워지며
대승의 마음을 발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도 자심이 그 근본이 된다”고 하신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자심은 세 종류의 사람에게 한량없는 이익이 된다.
또한 자심을 익히는 초문(初門)에는 열여섯 가지 행(行)이 있어
신속하게 자심을 얻게 하고 또한 견고하게 하며, 또한 항상 수행하게 한다.
첫 번째는 계(戒)를 청정하게 간직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마음이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는 선법(善法) 가운데서 기쁨을 내는 것이고,
네 번째는 마음이 흔쾌하고 즐거운 것이다.
다섯 번째는 5정(情)을 거두어 수호하는 것이고,
여섯 번째는 선교방편(善巧方便)의 지혜[慧]를 생각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는 몸이 떠나고 마음이 떠나는 것이고,
여덟 번째는 함께 행하고 함께 머무는 것이다.
아홉 번째는 듣든 말하든 자법(慈法)을 따르는 것이고,
열 번째는 다른 사람을 괴롭고 어지럽게 하지 않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음식을 먹을 때 스스로 절제할 줄 아는 것이고,
열두 번째는 잠을 적게 자는 것이다.
열세 번째는 말을 줄이는 것이고,
열네 번째는 몸의 네 가지 위의가 안온하여 마음에 맞는 것이다.
열다섯 번째는 필요한 사물이 뜻에 따라 부족함이 없는 것이고,
열여섯 번째는 모든 법행(法行)을 희롱하지 않는 것이니,
이 열여섯 가지 법은 자심삼매(慈心三昧)를 돕는다.
비심(悲心)이란 중생의 괴로움을 관하는 것이다.
예컨대 지옥,아귀,축생,세간,의 죄수[刑徒],기아추위,질병의 괴로움 등에 대해
괴로움의 모습[相]을 취하기 때문에 비심이 더욱 증가하며,
나아가 즐거워하는 사람에게서도 모두 그 괴로움을 본다.
[문] 어떻게 즐거움을 괴로움으로 여기는가?
[답] 즐거움은 무상(無常)하고 즐거움은 만족할 수 없는 것이며,
인연을 쫓아 생기는 것으로 생각생각에 생겨났다 소멸한다.
머물 때가 없으니, 그렇기 때문에 괴롭다.
또한 욕계의 하늘(천국)에서는 즐거움을 향수하더라도
마치 미치고 취한 것처럼 따로 아는 것이 없어서 죽을 때가 되서야 깨달으며,
색계와 무색계의 중생은 깊은 선정에 대해 맛을 들이지만
마음속으로 집착하여 목숨이 다하면 지은 업의 인연에 따라 다시 과보를 받으니,
이와 같은 중생들에게 어떤 즐거움이 있겠는가?
지옥 등의 3악도(惡道)는 옛날에 머물던 처소이고,
천상과 인간 세계는 마치 손님이 머무는 것과 같이 잠깐 동안 머물러 쉬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단지 고제(苦諦)를 설하셨을 뿐 낙제(樂諦)는 설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에게는 괴로움 아닌 것이 없는데,
중생들은 가엾게도 진실로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뒤바뀐 가운데 즐거운 생각을 내어
금세나 후세에 갖가지 근심과 번민을 받으면서도 싫증내는 마음이 없다.
비록 잠시 괴로움을 벗어났다가도 괴로움이 다시 반복되니,
즐거움을 구하는 것은 온갖 괴로운 일을 짓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유하여 중생들이 모두 괴로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비심(悲心)이다.
그 밖의 비심의 의미는 마하연론(摩訶衍論)의 4무량 가운데서 설한 것과 같다.
희심(喜心)은
수행하는 사람이 모든 법의 실상을 알아
괴로운 중생들을 모두 즐거운 모습으로 관하고,
즐거운 중생들을 모두 괴로운 모습으로 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법은 정해진 모습이 없이 마음의 힘에 따라 바뀌니,
만약 모든 법이 정해진 모습이 없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 일도 오히려 어렵지 않은데, 하물며 그 밖의 도(道)이겠는가?
뜻에 따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기쁨[歡喜]이 생긴다.
또한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조그만 지계와 정진 등을 바탕으로 하여 문득 욕심을 여의었으며,
모든 선정의 한량없는 공덕에 이르렀다.’
모든 선한 공덕을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환희가 생기니,
비유컨대 장사꾼이 소량의 물품을 간직하고 있다가 백천 배의 이익을 얻으면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는 것과 같다.
다시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이와 같은 법의 이로움은 모두 부처님의 은혜를 말미암는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도를 얻으시어 사람들에게 베풀어 설해 주셨으니,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면 이와 같은 이익을 얻는다.’
이때 마음으로 시방 모든 부처님의 몸은 금색이고 상호(相好)가 장엄되어 있으며,
10력(力) 등 한량없는 공덕의 법신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이렇게 부처님을 생각함으로써 마음속에 환희가 생긴다.
또한 불법(佛法)은 96종류의 도(道) 가운데 가장 으뜸이며,
모든 괴로움을 멸할 수 있고,
항상하는 즐거움[常樂]으로 나아갈 수 있으므로 마음속에 환희가 생긴다.
또한 세 가지로 불법(佛法)을 분별하면,
첫째는 열반의 한량없고 항상한 모습이니 이것은 끝내 파괴되지 않는 법이며,
둘째는 열반의 방편과 여덟 가지 곧고 성스러운 도(道)이며,
셋째는 12부경(部經)으로 여덟 가지 도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환희가 생긴다.
또한 이와 같은 실상을 잘 알면 정도(正道)를 행하고 온갖 잘못된 길을 떠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다.
이른바 불제자의 무리는 일체의 무리들 가운데 가장 으뜸이다.
스스로 사유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미 이 무리들 가운데 있으니,
이들은 나의 진실한 도반이며 그들은 나를 이익되게 한다”라고 한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마음속에 환희가 생기며,
중생들이 모두 다 함께 환희하기를 원하며,
선정의 힘이 계속 이루어지기 때문에 중생들이 모두 이 기쁨을 얻는다는 것을 다 알 수 있다.
사심(捨心)이란 수행하는 사람이 만약 약간 느슨해지거나 치우쳤다면 마음을 잠시 그쳐 쉬는 것이니,
다만 중생을 한가지 모습[一相]으로 관하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관하지 않는다.
기뻐하는 모습[喜相]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아서,
만약 항상 사랑하고 아끼면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그르치게 되고,
만약 항상 괴로움이 절박하면 두렵고 무서워 몸이 쇠약해지니,
그러므로 어떤 때는 놓아 버리고 애착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
수행하는 이도 이와 같아서,
만약 항상 자심(慈心)과 희심(喜心)을 행하면 방일하게 되니,
이는 기쁨과 즐거움이 많기 때문이며,
만약 항상 비심(悲心)을 행하면 걱정이 생기니,
괴로움에 대해 많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심(捨心)을 행하여 괴로움이나 즐거움이 지나치지 않게 해야 한다.
또한 수행자가 도(道)에 들어가 선정의 맛을 얻으면
중생들을 분별하여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선량하다느니 선량하지 못하다느니 하게 되어,
선량한 사람에 대해서는 공경하고 사랑하며 아끼고,
선량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가벼이 여겨 교만하게 군다.
마치 사람이 아주 진귀한 보배를 얻으면 가난한 사람을 가벼이 여겨 교만하게 굴고,
보배를 간직한 사람을 보면 공경하고 애념하는 것과 같으니,
이 두 가지 모습을 깨뜨리기 위하여 사심(捨心)을 행한다.
경에서 설하기를,
“자심을 닦아 행하면
성냄을 파괴하여 없앨 수 있고,
비심을 닦아 행하면
중생의 번뇌를 없앨 수 있으며,
희심(喜心)을 닦아 행하면
근심걱정을 없앨 수 있고,
사심(捨心)을 닦아 행하면
증오와 애착을 없앨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다만 중생들을 관하여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해 마음을 따라 짓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숲을 관하고 나무를 관하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만약 세상 사람들이 추울 때는 따뜻함을 얻고 더울 때는 시원함을 얻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이것을 즐거움[樂]이라 하고,
벼슬자리를 얻었거나 보배가 감추어진 곳을 찾으면 노래 부르고
춤추며 희롱하고 웃고 노는 것을 기쁨[喜]이라 한다.
만약 이러한 일들을 잃어버렸다면 이를 근심과 괴로움[憂苦]이라 하고,
만약 이상의 세 가지가 없다면 이를 버림[捨]이라고 한다.
수행자도 또한 이와 같아서,
네 가지 마음[四心]을 갖추면 자신의 몸으로 즐거움을 향수하고 중생들도 그러하기를 원하며,
마음이 이미 부드러워져 모든 중생들이 모두 이 즐거움을 얻는 것을 안다.
또한 여러 천상 세간의 부귀함을 보고 즐거운 모습을 취하여 중생들에게까지 미치기를 원하며,
마음이 이미 부드러워져 일체 중생이 다 이 즐거움을 얻는 것을 안다.
자심을 닦아 행할 때는 마음에 큰 기쁨[喜]이 생기며,
이 큰 기쁨을 중생들에게도 주고자 한다.
혹은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불(佛)?법(法)?성중(聖衆)에게 예를 올리고
찬탄 공양하여 또한 마음에 기쁨을 얻어서 중생들에게도 주고자 하며,
그리고 외부의 기쁨을 취하여 중생들에게 주기를 원한다.
어떤 때는 스스로 괴로움과 늙음?병듦?걱정?번민?배고픔?추위?곤경의 고통을 보아서
중생들로 하여금 이런 고뇌에서 벗어나게 한다.
자신이 분별하여 헤아려 보건대, 마음속으로 인내함이 고뇌스런 일인데,
어찌 하물며 중생들이 지혜도 없이 갖가지 고통을 참아낼 수 있으며,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비심을 낸다.
또한 외부의 사람들이 형벌을 당하거나 채찍으로 매질을 당하는 것을 보거나,
또는 경전에서 설하는 악도의 고통을 들으면,
이런 괴로움의 모습을 취해 일체가 모두 괴로움을 관하여 비심을 낸다.
사심(捨心)이란 자기 스스로 증오하거나 애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또한 중생들에게도
증오나 애착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며, 외부의 중생들을 취하여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제4선(禪)으로부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욕계의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때에 미쳐서도 이런 모습을 취한 다음
일체 중생들도 또한 모두 이와 같이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음을 관한다.
또한 만약 귀인에게 오직 아들이 하나만 있다면 그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매우 중하여서 항상 자애롭게 보살피고 세간의 온갖 즐거움을 모두 얻게 하며,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아들에게 줄 것이다.
그 아들이 혹시 여러 가지 근심걱정을 만나면 아버지는 매우 가엾다는 생각[悲念]을 내며,
만약 아들이 그런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면 그 아버지는 크게 기뻐할 것이니,
마음속에 환희가 생긴 다음에는 곧바로 놓아 버리고
아들에게 맡겨 스스로 성장하도록하고 아버지는 휴식을 취한다.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4무량심 가운데서 중생들을 보기를 마치 자식처럼 생각하여,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즐거운 일을 따라 세간의 갖가지 즐거움을 취하여 중생들이 그것을 얻기를 원하며,
자심(慈心)과 선정의 힘 때문에 일체 모든 것이 즐거움이라는 것을 안다.
수행하는 사람은 자심으로부터 일어나,
만약 중생이 온갖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모습을 취하고 나서 비심을 낸다.
비심의 힘 때문에 중생들이 모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알고,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안 다음에는 중생들이 이런 고통을 벗어나기를 원한다.
비삼매(悲三昧)로부터 일어나,
만약 중생이 즐거움을 향수하고
도를 얻어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알면
이런 모습을 취하고 나서 희심(喜心)을 낸다.
중생들이 얻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이 그것을 얻어
심식(心識)이 유연해져 중생들이 모두 환희를 얻는 것을 안다.
이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중생들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근심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며, 이런 모습을 취하고
나서는 사심(捨心)을 내어 중생들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근심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기를 원한다.
사삼매[捨定]를 잘 닦은 힘 때문에 중생들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근심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으며, 번뇌의 열기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다 안다.
또한 만약 중생들에게 여러 허물이 있어도 놓아두고 책문(責問)하지 않으며,
만약 그를 공경하고 애착하여도 기쁨으로 여기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사심(捨心)이다.
이와 같은 등의 4무량의 뜻은 마하연(摩訶衍:大乘) 가운데서 설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수행자가 허공정(虛空定)을 구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색(色)은 갖가지 온갖 괴로움의 도구[苦具]이니,
마치 채찍과 몽둥이나 가르고 잘라서 살해하는 것이나 배고픔
추위 늙음 병듦의 괴로움 등이 모두 색으로 말미암기 때문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사유하면 색을 버리고 떠나 허공처(虛空處)를 얻을 수 있다.
[문] 수행자는 지금 색을 몸으로 삼고 있는데, 어떻게 곧바로 버리고 떠날 수 있는가?
[답] 모든 번뇌는 색을 인연으로 하고 또한 색과 연관되어 있으니,
이 번뇌들을 멸하였기 때문에 색을 떠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닦아 익혀서 색을 파괴하고 법을 허공처럼 관하면 색을 떠날 수 있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구는 제4선의 5음(陰)을 마치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가시와 같다고 여겨야 하며,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라고 관찰해야 한다”라고 하셨으니,
이와 같은 것 등을 관하면 제4선의 5음을 떠날 수 있다.
그 밖의 나머지 음(陰)들도 색을 따르기 때문에 다만 색을 떠난다고 말하는 것이니,
왜 그런가 하면, 색이 결국에는 다하여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수행자가 색을 관하여 조각조각 부수고 찢으면 색이 존재하지 않으니,
마치 몸을 나누면 머리,발,어깨,팔 등 각각 다른 부분으로 나누어져 곧 몸이 없는 것과 같다.
또 예를 들면 머리[頭]는 눈,귀,코,혀,입,수염,머리털,뼈살 ,등 여러 다른 부분으로
나누어져 곧 머리가 없는 것과 같으며, 눈[眼]은 4대(大)와 4진(塵)신근(身根)안근(眼根) 등
열 가지 것[十事]이 백색과 흑색 등의 살덩어리로 합쳐져 이것을 눈이라고 하지만
각각 나누어 구별하면 곧 눈이 없는 것과 같다.
땅[地] 등의 여러 부분도 각각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문] 안근은 4대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색이라고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답] 4대 및 4대로 만들어진 정색(淨色)이 화합되어 이루어졌기 때문에 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만약 이 색이 제거되면 눈은 없는 것이다.
또 이 정색은 비록 볼 수는 없으나 유대(有對)1)이기 때문에 나누어질 수 있고,
나누어질 수 있기 때문에 눈이 없는 것이다.
1) 범어로 sa-pratigha이며 무대(無對)의 반대 개념이다. 대(對)란 애(?)의 의미이다.
유대(有對)란 법에 애()가 있다는 뜻이다. 애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장애(障)와
구애(拘?)이다. 5근(根)5경(境) 및 심법(心法)심소법(心所法) 등 제법(諸法)은
장애를 받으면 생기지 않으며, 소연(所緣)으로 취해지는 대상인 경계도 구애되면
다른 경계로 변화하지 못한다. 이를 유대라 한다.
또한 능히 색을 볼 수 있는 것을 눈[眼]이라고 하니,
만약 4대와 4대로 만들어진 색을 제거하면 눈은 없다.
만약 눈이 없는데 색을 볼 수 있다면 귀[耳]도 또한 마땅히 눈이 될 것이다.
만약 눈이 색법(色法)이라면 일체의 색법에는 처소가 있고
부분[分]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분별할 수 있으니,
만약 분별할 수 있다면 눈[眼]이 많게 될 것이다.
만약 4대로 지어진 뭇 미진(微塵)이 눈이라면
하나의 눈이 될 수 없으며, 만약 모두가 다 눈이 아니라면 역시 하나의 눈도 없다.
만약 미진이 눈이라면 이 또한 옳지 않으니, 왜냐하면 만약 미진에 색이 존재하면
곧 시방(十方)이 있게 되므로 미진이라 이름할 수 없으며,
만약 색이 아니라면 눈이라 이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미진의 체(體)에는 결정적으로
네 가지 분(分), 즉 색(色)향(香)미(味)촉(觸)이 존재한다.
그런데 눈은 결코 이 네 가지 것[四事]이 아니다.
왜냐하면 눈은 내입(內入)에 속하고, 그 네 가지는 외입(外入)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모든 미진이 눈이 될 수 없으니,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여러 가지 것들[衆事]이 화합하여 색을 보는 것을 가명(假名)으로 눈이라 하는 것이니,
정해진 실체는 없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귀,코,혀,피부,살,뼈, 등도 또한 이와 같이 논파(論破)될 수 있으니,
이것은 내신상(內身相)을 깨뜨린 것이다.
외색(外色)인 궁전?재물?처자 등도 또한 모두 이와 같이 분별하여 논파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나타(羅陀)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부터 마땅히 색을 깨뜨려 흩어지게 하고 색을 무너뜨려 찢어서 색이 존재하지 않게 하라”고
하셨으니, 이와 같이 분별하는 것을 색을 떠난다고 한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만약 비구가 색을 떠나려고 한다면
일체의 색상(色相)을 넘어서고[度]
일체의 대상(對相)을 멸하고
일체의 다른 상[異相]을 생각하지 않아서
한량없는 허공처(虛空處)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셨으니,
일체의 색상을 넘어선다고 하는 경우에
색상이란 눈으로 볼 수 있는 색을 말하며,
일체의 대상을 멸한다고 하는 경우에
대상이란 유대(有對)이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색(色)을 말하며,
일체의 다른 상(相)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에
다른 상이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무대(無對)2)인 색을 말한다.
2) 범어로는 spratigha이며 극미(極微)에 의해 성립되지 않는 무장애법(無障法)을 말한다.
12처(處) 가운데 안,이,비,설,신,의 5근(根)과 색,성,향,미,촉,의 5경(境) 등
10처에는 장애가 있으므로 유대라고 하며,
의(意)와 법(法) 두 가지 처에는 장애가 없으므로 무대(無對)라고 한다.
또한 일체의 색상을 넘어선다고 하는 경우에
색상이란 청색,황색,적색,백색,홍색,자색, 등
여러 가지 색상을 말하며, 유대(有對)를 멸한다고 하는 경우에
유대란 성(聲)향(香)미(味)촉(觸) 등을 말하며,
일체의 다른 상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에
다른 상이란 크고 작고 길고 짧고 네모나고 둥글고 멀고 가까운 것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이 일체 색상을 떠나면 허공처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수행자는 몸의 내부가 허공과 같다는 마음을 두어야 하니,
이른바 입,코,목,구멍,눈,귀,가슴,배 ,등이 허공과 같다는 것이다.
색은 온갖 번뇌가 되고,
공(空)은 걱정거리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아는 까닭에 마음이 즐거워 허공과 같게 된다.
만약 마음이 색에 속하는 상태에서 공(空)이 되게 하면, 마음이 점차 유연해지고
몸 가운데서 허공이 점점 광대해져 스스로 색신(色身)을 연뿌리의 구멍처럼 보며,
그것을 익혀 계속해서 이로움을 얻으면 몸이 다하여 공해져서 다시는 색이 존재하지 않음을 본다.
외색(外色)도 또한 그러하여,
내색(內色)과 외색(外色)이 허공과 같아 똑같이 하나의 공이 된다.
이때 마음은 허공을 반연하여 한량없고 가없어 문득 색에 대한 생각[想]을 떠나 편안하고 즐거워지니,
마치 병 속에 들어 있는 새가 병이 깨지면 그 속에서 나와 허공으로 날아올라도 저촉되거나 장애됨이 없는 것과 같다.
이를 초무색정(初無色定)이라 이름한다.
수행자가 허공 가운데서 수(受),상(想),행(行),식(識),을 마치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가시와 같다고 여기고,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임을 알아,
다시 오묘한 정(定)을 구하면 곧 공(空)의 연(緣)을 떠나니,
왜 그런가 하면 이 마음이 생각하는 허공이 속임이고 허망함이기 때문이다.
먼저 없다가 지금 있고 있다가는 다시 없어지니,
그 병통은 바로 이 허공이 식(識)을 좇아서 있는 것임을 알았다면,
이른바 식이 진실하다 할 것이니,
단지 식만 관하고 공연(空緣)은 버린다.
식을 관하는 것을 익힐 때는 점차 식상(識相)이 서로 이어져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이는 마치 흐르는 물이나 등불의 불꽃과 같다.
미래,현재,과거의 식은 그 식이 서로 이어져서 가없고 한량없다.
[문]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식처(識處)가 가없고 한량없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식은 능히 멀리 있는 것도 반연할 수 있기 때문에 가없고,
가없는 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가없다.
또한 먼저 허공이 가없음을 반연하니,
만약 가없는 허공을 깨뜨린다면 식도 마땅히 가없을 것이다.
수행자의 마음이 유연하기 때문에 능히 식을 크게 하여 마침내 가없음에 이르게 하니,
이를 가없는 식처(識處)라 이름한다.
[문] 이 식처는 4음(陰)을 갖추고 있는데, 왜 단지 식처만을 말하는가?
[답] 일체의 내법(內法)은 식이 그 주인이며,
모든 심수법(心數法)은 모두 식을 따라 속하니,
만약 식을 말한다면 곧 나머지 것들도 말하는 것이 된다.
또한
욕계 가운데서는 색음(色陰)이 주인이고,
색계 가운데서는 수음(受陰)이 주인이며,
허공처(虛空處)와 식처(識處)에서는 식음(識陰)이 주인이고,
무소유처(無所有處)에서는 상음(想陰)이 주인이며,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서는 행음(行陰)이 주인이다.
또한 세 가지 법, 즉
신법(身法)․심법(心法)․심수법(心數法)은
욕계나 색계에서는 몸[身]이 주인이니, 마음이 몸을 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마음의 힘[心力]만 홀로 작용한다.
마음[心法]에는 두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공(空)을 반연함이고,
둘째는 스스로를 반연함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2처(處)가 있으니,
공처(空處)와
식처(識處)이다.
다만 처음에 색을 깨뜨렸기 때문에 허공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며,
허공을 깨뜨렸기 때문에 오직 식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심수법에도 또한 두 부분이 있으니,
첫째는 상(想)이고,
둘째는 행(行)이다.
그러므로 또한 마땅히 2처가 있으니,
상무소유처(想無所有處)와
행비상비비상처(行非想非非想處)이다.
또한 식을 반연하기 때문에 허공처를 떠날 수 있으니,
이렇기 때문에 비록 다른 음(陰)이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식이라고만 이름하는 것이다.
[문] 허공처와 무소유처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전자는 마음속 생각[心想]이 허공을 인연으로 삼는 것이고,
후자는 마음속 생각이 무소유를 인연으로 삼는 것이니, 이것이 차별이 된다.
수행자가 무소유처에 들어가면 예리한 근기[利根]를 지닌 사람은 이 가운데
수․상․행․식이 있는 것을 깨달아 그것을 싫어하게 되는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둔한 근기[鈍根]를 가진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
또한 무소유처를 떠나는 인연에는 세 가지 견해가 있으니,
유견(有見)․무견(無見)․비유견비무견(非有見非無見)이다.
유견은
욕계로부터 식처에까지 이르며,
무견은
곧 무소유처이며,
비유견비무견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무견은 마땅히 버리고 떠나야 하니,
왜냐하면 비상비비상처가 비록 미세하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데,
어찌 하물며 무소유처이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무소유처를 떠나야 한다.
[문] 예컨대 불법(佛法) 가운데 또한 공(空)과 무소유(無所有)라는 것이 있으니,
만약 이것이 실재한다면 어찌하여 사견(邪見)이므로 마땅히 버리고 여의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답] 불법 가운데서는 집착을 파하기 위하여 실재가 아니라고 한 것이니,
무소유처가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로 애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중생은 정해진 과보를 받은 다음에 업의 인연을 따라 다시 온갖 과보를 받게 되니,
이런 이유 때문에 마땅히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칭은 비록 비슷하지만 그 실제는 각기 다르다.
또한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일체의 상지(想地)는 모두 거칠어서 근심스러우며,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화살과 같다.
무상지(無常地)는 곧 어리석은 곳[癡處]이다.
지금 적멸(寂滅)의 미묘한 제일처(第一處)는 이른바 비상비무상처(非想非無想處)이다.’
이와 같이 관하고 나면 무소유처의 상지를 떠나
곧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들어가게 된다.
또한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일체의 상지(想地)는 모두 거칠어서 근심스러우며,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화살과 같다.
무상지(無常地)는 곧 어리석은 곳[癡處]이다.
지금 적멸(寂滅)의 미묘한 제일처(第一處)는 이른바 비상비무상처(非想非無想處)이다.’
이와 같이 관하고 나면 무소유처의 상지를 떠나
곧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들어가게 된다.
[문] 이 가운데서는 유상(有想)인가, 무상(無想)인가?
[답] 이 가운데서는 유상이다.
[문] 만약 유상이라면, 어째서 단지 아래의 7지(地)를 상정(想定)이라고 이름하는가?
[답] 이 지(地) 가운데 상(想)은 미세하지만
날카롭지 못하여 상의 작용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상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수행자는 마음속으로 이 처(處)를 비유상비무상이라고 하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본래의 명칭을 따라 이를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라고 이름하신 것이다.
둔한 근기를 가진 사람은 이 가운데 4음(陰)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열반의 안온한 처소라고 하면서 증상만(增上慢)을 내니,
그 수명이 8만 겁이 지난 뒤에는 다시 여러 갈래[諸趣]에 떨어진다.
이 가운데 4음이 비록 미세하며 깊고 오묘하더라도
예리한 근기를 가진 사람은 능히 깨달아 알 수 있으니,
깨달아 안 다음에는 환난을 싫어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 또한 화합하여 된 법이고 인연에 의해 생긴 법이어서 허망한 속임수이고 실재하지 않으니,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화살과 같으며,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이다.
또한 이것은 나중에 인연을 생하므로 마땅히 버리고 떠나야 한다.
그것은 환난이기 때문에 마땅히 4제(諦)를 배워야 한다.’
[문] 그 밖의 다른 지(地)를 버릴 때는 왜 4제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 앞에서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화살과 같으며 무상․고․공․무아라고 말한 것은
4제를 간략히 설한 것이요, 다만 아직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또한 그 밖의 다른 지(地)에서는 막음[遮]도 없고 어려움[難]도 없으니,
범부의 유루도(有漏道)도 능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간의 정상(頂上)은 오직 성인만이 무루도(無漏道)를 배워서 마침내 넘어설 수 있다.
비유컨대 노끈으로 새의 다리를 묶어 놓으면 처음에는 비록 날아가려고 하지만
노끈이 다하는 곳에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처럼,
범부인(凡夫人)도 역시 이와 같아서 비록
그 밖의 다른 지를 넘어서더라도 마왕(魔王)이 놀라지 않지만,
만약 유정지(有頂地)3)를 넘어서면 마왕이 크게 놀라니,
마치 노끈이 끊어져 새가 날아가 버리는 것과 같다.
3) 무색계의 제4천(天)인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은
삼계 9지(地) 가운데 최상지(最上地)이다.
따라서 최상의 절정이므로 유정지(有頂地)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지를 떠날 때는 4제를 설하지 않은 것이다.
유정지는 삼계의 중요한 문이니,
이 중요한 문을 벗어나려면 마땅히 4제를 배워야 한다.
[문] 4제란 무엇인가?
[답]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이다.
고(苦)에는 두 가지 있으니,
첫째는 몸의 괴로움[身苦]이고,
둘째는 마음의 괴로움[心苦]이다.
집(集)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번뇌의 부림[使]이고,
둘째는 번뇌에 얽매임[惱?]이다.
멸(滅)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여열반(有餘涅槃)이고,
둘째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다.
도(道)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정(定)이고,
둘째는 혜(慧)이다.
또한 고제에는 두 가지 있으니,
첫째는 고제이고,
둘째는 고성제(苦聖諦)이다.
고제란 번뇌의 모습[惱相]이기 때문에
이른바 5수음(受陰)을 고제라고 이름한다.
고성제란 지견(知見)이 있기 때문에
도를 닦는 것이니, 이를 고성제라고 한다.
집제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집제이고,
둘째는 집성제(集聖諦)이다.
집제란 생겨나는 모습[出生相]이니,
이른바 애(愛) 등의 온갖 번뇌를 집제라 이름한다.
집성제란 그 온갖 번뇌를 끊기 위하여 도를 닦는 것이니, 이를 집성제라 한다.
멸제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멸제이고,
둘째는 멸성제(滅聖諦)이다.
멸제란 적멸의 모습[寂滅相]이니,
이른바 4사문과(沙門果)를 멸제라 한다.
멸성제란 증득하기 위하여 도를 행하는 것이니, 이를 멸성제라 한다.
도제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도제이고,
둘째는 도성제(道聖諦)이다.
도제란 벗어나 이르는 모습[出到相]이니, 이른바 8정도(正道)를 도제라 한다.
도성제란 닦기 때문에 도를 행하는 것이니, 이를 도성제라고 한다.
또한 진리[諦]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이다.
총상의 고(苦)는 5수음(受陰)이고,
별상의 고(苦)는 색음(色陰) 및 수,상,행,식의 음을 구체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총상의 집(集)이란 나중에 받을 몸을 능히 생겨나게 하는 것이고,
별상의 집이란 애(愛) 등의 온갖 번뇌와 유루업(有漏業) 및 5수음의 인연을 구체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총상의 멸(滅)이란 나중에 받을 몸의 애(愛)가 다하는 것이고,
별상의 멸란 89가지 번뇌가 다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총상의 도(道)란 8성도(聖道)를 말하며,
별상의 도란 고법인(苦法忍)6)에서부터 무학도(無學道)7)에 이르기까지를 구체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6) 고제(苦諦)의 입장에서 말하면 고법인(苦法忍)으로
욕계의 고제를 관찰하여 고제에 의해 미혹된 번뇌를 끊고 고제의 이치를 증득한다.
7) 무학위(無學位), 또는 무학지(無學地)라고도 한다. 진제(眞諦)의 이치를 다 증득하고
일체의 번뇌를 다 벗어나 도를 배우는 일이 원만하게 성취되어 다시는 뛰어난 과[勝果]를
닦아 배울 필요가 없는 경지로 아라한과를 지칭한다.
만약 4제를 통달하지 못하면 5도(道)를 윤회하게 되니,
생사를 왕래하여 끊임이 없을 때 이 인연 때문에 수행자는 늙음,병듦,죽음,등의
모든 고뇌가 모두 몸이 있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비유컨대 모든 초목이 다 땅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경에서 설하기를,
“시방의 중생은 몸이 있는 까닭에 모두 괴로움을 받으며 또한 몸을 받아 태어난다”라고 하였으니,
비유컨대 독을 먹으면 잘생겼든 못생겼든 모두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다.
만약 몸과 마음이 없다면 죽음과 괴로움이 의지할 바가 없으리니,
마치 사나운 바람이 큰 나무를 꺾어 부러뜨릴 수 있지만,
만약 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러뜨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이 괴로움을 받는 근본>임을 간략하게 말하였다.
마치 허공이 바람의 근본[本]이고,
나무가 불의 근본이며,
땅이 물의 근본이듯이,
몸은 괴로움의 근본이다.
또한 땅[地]은 항상 견고하고[堅相],
물[水]은 항상 축축하며[濕相],
불[火]은 항상 뜨겁고[熱相],
바람[風]은 항상 움직이듯이[動相],
몸과 마음은 항상 괴로움[苦相]을 가지고 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몸이 존재하기 때문에,
늙음/병듦/죽음/배고픔/목마름/추위/더위/바람/비 등의 괴로움이 항상 몸을 따르며,
또한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걱정/두려움/성냄/질투 등의 괴로움이 항상 마음을 따른다.
만약 현재의 몸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안다면,
과거의 괴로움도 또한 그러하고,
현재와 과거의 몸이 괴로움이라면 미래 또한 그럴 것이니,
비유컨대 지금 현재의 곡식의 종자가 곡식을 생산하는 것을 보면,
과거나 미래에도 또한 모두 이와 같다는 것을 비교하여 알 수 있으며,
또한 현재 불이 뜨겁다면 과거나 미래의 불도 또한 뜨거움이 이와 같다는 것을
비교하여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 몸과 마음이 없다면,
이전에도 괴로움이 없었고 지금도 괴로움이 없으며 나중에도 괴로움이 없을 것이니,
삼세의 고통은 모두 몸과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고제(苦諦)를 관해서 이와 같이 마음으로 싫어하는 생각을 내야 한다.
이 괴로움의 인연은 오직 애(愛) 등의 모든 번뇌로부터 생기는 것이지
하늘[天]로부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시간[時]으로부터 생기는 것도 아니며,
자연(自然)히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인연이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만약 번뇌를 떠나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세간은 모두 애욕 등의 번뇌로부터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짓는 것은 모두 욕심이 먼저 앞서기 때문이니,
온갖 번뇌가 괴로움의 인연이다.
또한 애욕의 물[愛水]로 말미암아 몸을 받으니,
만약 애욕의 물이 없으면 몸을 받지 않는다.
비유하면 마른 흙은 벽에 붙지 않지만
물이 그것과 잘 섞여 화합되면 벽에 붙는 것과 같다.
또한 온갖 번뇌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몸을 받는 것도 갖가지로 똑같지 않으니,
가령 탐욕이 많은 자는 탐욕이 많은 형태의 몸을 받고,
성냄이 많은 자는 성냄이 많은 형태의 몸을 받으며,
어리석음이 많은 자는 어리석음이 많은 형태의 몸을 받고,
번뇌가 엷은 자는 번뇌가 엷은 형태의 몸을 받는다.
지금의 과보가 다름을 보기 때문에 옛날의 인연이 각기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내세에도 번뇌를 따라 몸을 받음이 이와 같이 각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업을 따라 몸을 받으니,
만약 성내지 않았으면 독사의 모습을 받지 않으며,
일체의 나머지 모습들도 또한 이와 같다.
이러하기 때문에 애(愛) 등의 온갖 번뇌가
일체 괴로움의 인연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인연이 다하면 괴로움이 없어져 열반을 얻는다.
열반이란 욕심을 떠난 것을 말하니,
온갖 번뇌가 끊어져 항상하여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는다.
이 가운데서는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병듦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도 없고,
원수와 만나는 괴로움도 없어,
항상 즐거워 물러나지 않는다.
수행자가 열반을 얻어 멸도(滅度)할 때에는
도무지 가는 곳이 없으니,
이를 적멸(寂滅)이라고 한다.
비유컨대 불을 밝힌 등불에 기름이 다하면
불이 사라져 그 불빛이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를 멸제(滅諦)라고 한다.
열반을 얻는 방편도(方便道)의 정분(定分)에 세 가지가 있고,
혜분(慧分)에 두 가지가 있으며,
계분(戒分)에 세 가지가 있으니,
이 계 가운데 머물러 정과 혜를 닦는다.
이른바 4제 가운데서 혜가 능히 결정적으로 헤아려 아는 것을 정견(正見)이라 하며,
정견을 따라 법을 깨달음이 일어나는데 이를 정사유(正思惟)라 하니,
이들을 혜분의 두 가지라고 한다.
정정(正定) 정념(正念) 정정진(正精進)을 정분의 세 가지라고 한다.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을 계분의 세 가지라고 한다.
청정한 계에 머물기 때문에 온갖 번뇌의 싹이 자라나지 못하고 그 세력이 쇠약해지니,
마치 때가 아닌 때에 종자를 심으면 싹이 자라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온갖 번뇌의 세력이 다가오더라도 정분(定分)으로 막아낼 수 있으니,
이는 마치 큰 산이 물을 막으면 물이 그것을 파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비유컨대 주술로써 독사를 제어하면 비록 독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을 해칠 수 없는 것처럼 정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혜(慧)는 온갖 번뇌의 근본을 뽑아낼 수 있으니,
이는 마치 여름에 물이 갑자기 범람하면
물가 언덕 위에 있는 모든 나무를 휩쓸어 뽑아 버리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이 3분(分) 8정도(正道)를 행하면 진정 바른 길[正路]로 곧장 나아갈 수 있어서
능히 괴로움의 원인[因]을 멸하고,
마침내 편안하고 항상 즐거운 무위(無爲)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만약 방편으로 처음에 그 수행문[門]을 익히려면 열 가지 일[十事]이 있다.
첫 번째는 마음이 전일하여 바른 것이니,
갖가지 외부의 일[外事]이 다가와 파괴하려 해도 마음을 바뀌게 할 수 없다.
이는 마치 네 방향에서 바람이 일어나도 산이 기울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두 번째는 질박하고 올곧은 것이니,
스승이 설하는 법을 들으면 그 장단(長短)을 보지 않아서
마음이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으며 가르침을 따라 의심하지 않는다.
비유컨대 빽빽한 삼림에 들어가서 곧은 나무를 베면 나오기 쉬우나
굽은 나무를 베면 나오기 어려운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삼계라는 빽빽한 삼림은 곧은 자는 벗어나기가 쉬우나
굽은 자는 벗어나기가 어렵다.
불법(佛法) 가운데서는 곧은 것만 사용하고 굽은 것은 버린다.
세 번째는 부끄러워함[慙]이니,
이것은 제일가는 최상의 의복이며 가장 오묘한 장엄이다.
부끄러워함은 온갖 악한 마음을 감아 제어하니,
부끄러움이 있으면 진실로 사람이라 할 수 있으나
만약 부끄러움이 없다면 축생과 다를 바가 없다.
네 번째는 방일하지 않음[不放逸]이니,
모든 선법(善法)의 근본이다.
이는 마치 세간에서 방일하면 온갖 이로운 일을 잃으며,
수행자가 방일하면 열반의 이로움을 잃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방일함을 원수나 도적처럼 여겨야 하며,
마음이 항상 그것을 멀리 떠나야 한다.
반면에 방일하지 않음[不放逸]은 마치 군왕이나 부모,
스승처럼 여겨서 마땅히 준수하고 계승하여 버리지 말아야 한다.
다섯 번째는 멀리 떠남[遠離]이니,
이 멀리 떠남을 바탕으로 방일하지 않음을 성취할 수 있다.
만약 5욕을 가까이하면 온갖 정(情)이 개발되니,
먼저 몸이 취락(聚落)으로부터 떠나야 하고,
다음으로는 마음이 세간의 일을 멀리 떠나 그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여섯 번째는 욕심을 적게 내는 것[小欲]이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마음으로 많이 구하지 않아야 하니,
많이 구하기 때문에 많은 고뇌에 떨어진다.
일곱 번째는 만족할 줄 아는 것[知足]이니,
어떤 사람이 비록 욕심을 적게 내더라도 좋은 물건에 애착하면 도심(道心)을 그르치게 된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만족하게 여길 뿐이다.
여덟 번째는 마음이 얽매여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제자든 단월(檀越)이든 선지식[知識]이든 친척이든
그들에게 안부를 묻거나 환영하거나 환송하는 등 많은 일을 치르게 되면,
이와 같은 등의 일이 도를 훼손하고 그르치기 때문에 그런 일에 매여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아홉 번째는 세간의 즐거움을 좋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는 등을 즐기기 위해
좋은 때나 좋은 날을 가려 길흉을 선택하는 따위의 일체 세간의 일에 대해
모두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아야 한다.
열 번째는 인욕(忍辱)이다.
수행자가 도를 구할 때에는
마땅히 열 가지 일을 참아야 한다.
첫째는 모기와 등에가 물거나 쏘는 것이고,
둘째는 뱀이나 도룡뇽 따위의 독을 가진 것들이 무는 것이다.
셋째는 악독한 짐승이고,
넷째는 욕하고 비방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때리고 던져 해를 가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질병의 고통이다.
일곱째는 배고픔이고,
여덟째는 갈증이다.
아홉째는 추위이고,
열째는 더위이다.
이와 같이 괴로운 일들을 수행자는 참아서
이런 일들이 자신을 이기지 못하도록 하고,
항상 이런 일들을 이겨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이 병의 모습을 알면 병의 인연을 알 수 있고,
병을 치료하는 약을 알 수 있으며, 간병인을 구해 병자의 뜻에 따라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면 머지않아 차도가 있는 것과 같이,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진실로 괴로움의 모습[苦相]을 알면
괴로움의 인연을 알 수 있고,
괴로움이 다하는 도(道)를 알 수 있으며,
훌륭한 스승과 동학(同學)을 얻음을 알 수 있으니,
이와 같으면 머지않아 안온한 적멸을 얻을 것이다.
[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얻어 깊은 선정에 들어가면
오직 상지(上地)만이 존재하여 번뇌[結使]가 미세하고 엷어 마음이
이미 부드러워져 갖가지 인연과 갖가지 비유가 상응하지 못하니,
4제(諦)를 관함이 마치 믿지 못하는 것과 같다.
[답] 비단 유정(有頂)의 지위에 있는 이를 위해 설할 뿐만 아니라,
모든 유정의 지위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설한 것이다.
다만 무색계의 4음(陰)을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라고 관하여
그것들을 병, 부스럼 ,화살과 같다고 여긴 것이니,
마음속에 들어가면 무상,
고, 공 ·무아는 모두 인연으로 허망하게 속여 지은 법이다.
열반을 훌륭하고 오묘하며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며 인연으로 지은 법이 아니므로
진실하여 허망되지 않다고 관하여 3독(毒)과 3쇠(衰:탐진치)를 멸하고,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멸하며,
항상 4음 및 그 인연을 꾸짖는 것을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라고 한다.
또한 열반과 열반도를 찬탄하는 것을 진제(眞諦)와 도제(道諦)라고 한다.
수행자가 4선(禪)과 4무색정(無色定)을 얻으면 마음이 유연해진다.
만약 5신통을 구하려 한다면,
제4선에 의지하면 쉽게 얻을 수 있다.
만약 초선과 2선과 3선에 의지하면 비록 얻을 수는 있으나
구하기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얻는다 해도 견고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초선에서는 각관(覺觀)이 선정을 어지럽히기 때문이고,
2선에서는 기쁨[喜]이 많기 때문이며,
3선에서는 즐거움[樂]이 많기 때문에 선정과 서로 위배된다.
4여의분(如意分:4신족, 4여의족)은 모두가 선정의 모습[定相]이니,
오직 제4선에서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며
근심도 없고
기쁨도 없으며
숨을 내쉬거나 들이쉼도 없어서
모든 성현이 흔쾌하게
즐거움과 편안함에 머무는 바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제4선에 의지하여 4여의분을 닦아야 한다.
4여의분이란 이른바
- 욕정행법성취여의(欲定行法成就如意)
- 정진정(精進定)
- 심정(心定)
- 사유정행법성취여의(思惟定行法成就如意)이니,
이에 의지하여 머무르면 어떤 일도 얻지 못할 것이 없다.
[문] 욕정행법성취여의란 무엇인가?
[답] 욕(欲)이란
구하고자 하는 일이며,
정(定)이란
일심(一心)의 상태로서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는 것을 말하며,
행법(行法)이란
믿는 생각[信念], 교묘한 지혜[巧慧], 기쁨과 즐거움[喜樂] 등이
욕정(欲定)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것을 말한다.
욕(欲)을 주인으로 삼아 정(定)을 얻기 때문에 욕정이라 한다.
정진정, 심정, 사유정도 또한 이와 같다.
수행자는 욕(欲)을 관(觀)하여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없도록 해야 하고,
안으로 많이 거두지 않도록 하고,
밖으로 많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여
유연하고 평등하고 조화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하니,
이는 마치 거문고[琴]를 탈 때
그 완급을 조절하며 곡에 따라 연주하는 것과 같다.
정진(精進), 심(心), 사유(思惟)도 역시 그러하다.
만약 수행자가 나는 것을 배워 날고 싶어하면 이를 욕(欲)이라 하지만,
온갖 흩어진 마음을 거두어 모아 행법을 돕는다면 이것을 정진이라고 한다.
마음은 능히 몸을 들어올리거나 몸을 떠날 수도 있으며,
마음이 거칠고 무거우면 수면이나 도거(掉擧) 등의 번뇌에 매인다.
마음이 경쾌해지면 마음이 가볍기 때문에 그 몸을 들어올릴 수 있는데,
이를 심(心)이라 한다.
욕(欲), 정진(精進), 심(心)에 관해 그 다소를 헤아려 능히 몸을 들어올리되,
아직 안과 밖의 여러 색미(色味)를 파괴하지 않은 것을 사유라 한다.
4여의분에 의지하면 일체의 공덕을 갖출 수 있으니,
어찌 하물며 5신통쯤이야 쉽게 얻지 못하겠는가?
[문] 5신통에서는 무엇이 먼저 생기는가?
[답] 그에 따라 즐거움이 일어나는 것이 먼저이다.
[문] 만약 그러하다면 왜 변화신통(신족통)이 처음에 존재하는가?
[답] 5신통은 대부분 중생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마치 혜해탈아라한(慧解脫阿羅漢)이
이미 아라한을 얻고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여 말한 것과 같다.
“중생들 가운데 둔한 근기를 가진 많은
이들은 도(道)에 관한 일을 믿지 않고 불법(佛法)을 경시한다.
내가 어려운 일인 누진신통(漏盡神通)을 얻었으니,
어찌 신통력을 일으켜 중생을 교화하지 않아서 죄에 떨어지도록 하겠는가?
또한 부처님께서는 대비로써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시니,
나도 불제자로서 마땅히 신통력으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도우리라.
그러나 많은 중생들은 나타난 일로써 이익을 얻으므로
신통변화로 귀하든 천하든 모든 대중들을 감동시켜 조복하지 않음이 없게 하리라.”
그 밖의 신통력에는 이러한 일이 없으므로 변화신통이 처음에 있는 것이다.
<아래 내용은 대지도론에서 발췌한 것임> 무엇을 여의(如意:신족통)라고 하는가? 여의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능도(能道)와 전변(轉變)과 성여의(聖如意)이다. 능도에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몸이 능히 날아다니되 새와 같아서 걸림이 없는 것이요, 둘째는 먼 곳을 가깝게 만들어 가지 않고도 도달하는 것이요, 셋째는 여기에서 숨어서는 저기에서 나오는 것이요, 넷째는 깜빡할 사이에 능히 이르는 것이다. 전변이라 함은 큰 것을 작게 만들고 작은 것을 크게 만들며, 하나를 많게 만들고 많은 것을 하나로 만드는 등 갖가지 물건을 능히 바꾸어 놓는 것이다. 외도의 전변은 멀어도 7일을 지나지 못하는데 부처님이나 제자들의 전변은 자재로워서 멀고 가까움이 없다. 성여의라 함은 밖의 6진(塵)에 대해 사랑스럽지 못하고 부정한 물건을 관하여 정화시키고, 사랑스럽고 깨끗한 물건을 관하여 부정하게 만드니, 이 성여의는 부처님만이 가지신다. 이러한 여의통은 4여의족(如意足)을 닦음으로부터 생기며, 이 여의족통 등은 색의 반연인 까닭에 차례차례 생길지언정 일시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보살은 5욕(欲)을 여의고 모든 선(禪)을 얻었으며 자비가 있기 때문에 중생을 위하여 신통을 취하면서 모든 희유하고 기특한 일을 나타내어 중생들의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왜냐하면 만일 희유한 일들이 없으면 많은 중생들을 제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은 이런 생각을 한 뒤에 마음으로 몸을 허공에다 매어 두고 거칠고 무거운 물질 모양을 소멸시키면서 항상 비고 가벼운 모양[空輕相]을 취한다. 크게 정진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지혜로 헤아리면 마음의 힘으로 몸을 들어 올릴 수 있게 되며 아직 헤아리기 전에도 벌써 스스로 마음의 힘이 커지면서 그 몸을 들어 올릴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뜀뛰기를 배울 때 항상 물질의 거칠거나 무거운 모양[麤重相]을 무너뜨리면서 언제나 가볍고 텅 빈 모양[輕空相]을 닦으면 이때 곧 날게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둘째는 역시 모든 물건을 변화시킨다. 땅을 물이 되게 하고 물을 땅이 되게 하며 바람을 불이 되게 하고 불을 바람이 되게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요소[大]를 모두 바꾸어지게 하니, 금을 기와나 조약돌이 되게 하고 기와나 조약돌을 금이 되게 하는 등 모든 물건을 각각 변화하게 한다. 땅이 변하여 물의 모양이 되게 함에는 항상 닦으면서 물을 생각하고 땅의 모양을 기억하지 않으면 이때 땅의 모양은 생각과 같이 곧 물이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모든 물건을 모두 변화하게 할 수 있다. |
[문] 하늘(천신)의 몸[天身]은 불의 요소[火大]가 많기 때문에 몸에 광명이 있고
또한 허공에 빨리 오를 수 있다.
귀신은 바람의 요소[風大]가 많기 때문에 몸이 가볍고 빠르며 걸림이 없다.
용의 몸[龍身]은 물의 요소[水大]가 많기 때문에
마음속 생각으로 물을 만들고 또한 변화하여 움직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은 땅의 요소[地大]가 많기 때문에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이 적으니, 어떻게 날 수 있는가?
[답] 인간의 몸은 땅의 종류여서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이 적기 때문에
신통력을 구해 배워도 천상이나 귀신처럼 어떻게 통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땅은 비록 무겁지만 물의 힘이 있기 때문에 땅이 움직일 수 있듯이,
이와 같이 마음의 힘이 있기 때문에 그 몸을 들어올릴 수 있다.
비유컨대 원숭이는 높은 곳으로부터 떨어져도 몸을 다치지 않으나
사람은 그 높이에서 떨어지면 다치게 되니,
원숭이는 마음의 힘이 가볍고 빠르고 강하기 때문에 손상됨이 없는 것이다.
마땅히 몸의 신통함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니, 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뜰 수 있다면 비록 깊은 물에 있더라도 가라앉지 않으니,
마음의 방편력이 있기 때문에 그 몸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사람의 몸이 비록 무겁더라도 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몸이 허공을 날 수 있는 것이다.
[문] 이와 같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답] 만약 수행자가 제4선에 머물러 4여의분(如意分)에 의지하여 일심으로 생각을 거두어서,
몸의 곳곳이 텅 비어 마치 연뿌리의 구멍과 같다고 관하면
몸이 가볍고 빠른 모습을 취할 수 있으니,
그것을 익혀서 그치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합해진다.
이는 마치 철과 불이 화합하는 것과 같다.
몸의 거칠고 무거운 모습을 소멸하면 단지 가볍고 빠른 몸만 있게 되니,
이것과 욕, 정진, 사유 및 이를 돕는 행법이 화합하면
욕 등의 선행력(善行力) 때문에 몸이 곧 그것을 따른다.
마치 불과 철이 화합하면 가볍고 부드러워져 사용되는 것과 같다.
또한 색계의 4대(大)로 만들어진 색(色)은 이 몸 가운데서
몸과 화합하여 몸을 가볍게 하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하니,
마치 사람이 약을 먹으면 마음이 명료해져 몸이 곧 가벼워지는 것과 같다.
비유컨대 색계의 4대로 만들어진 색이 밝고 깨끗해지면,
이 몸에 있기 때문에 눈이 밝고 깨끗해지는 것과 같다.
마치 사람이 도약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서 더욱 공교로워지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며,
새가 나는 방법을 배우면 점점 더 멀리 날 수 있는 것처럼,
신통도 이와 같아서 처음 얻었을 때에는 한 길[丈]이나 두 길에 불과하지만
점차 더 멀리 날 수 있다.
이 신통변화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몸이 마치 새가 날듯이 허공을 나는 것이고,
둘째는 먼 거리를 가깝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이곳에서 사라져 저곳에 나타나는 것이고,
넷째는 마음대로 빠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니,
손가락을 튀기는 짧은 동안에 60념(念)이 있는데
한 생각 사이에 무량 아승기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국토를 넘어설 수 있어서 생각에 따라 곧 이른다.
이 신통력을 사용하면 몸이 자재함을 얻어
한 몸이 많은 몸으로 되고 많은 몸이 한 몸으로 될 수 있으며,
큰 것이 작게 되고,
작은 것이 크게 될 수 있으며,
무겁기는 수미산과 같고
가볍기는 기러기 털과 같으니,
이와 같이 마음대로 행할 수 있다.
또한 보살이 이러한 몸의 신통력을 얻으면
한 생각 사이에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국토를 건널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의 중생들은 보살이 그곳에 이른 것을 볼 수 있지만
보살은 본래의 처소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며,
그곳에서 법을 설하여 교화하지만 이곳에서도 또한 중지하지 않았다.
또한 어떤 천인(天人)이 항상함[常]에 집착하여 뒤바뀐 경우에도 신통력으로 제도할 수 있다.
삼천대천국토가 타는 모습을 나타내면 중생들은 삼천대천국토가 불에 타 파괴되는 모습을 보지만 국토는 손상됨이 없다.
어떤 중생이 마음속으로 교만한 생각을 낼 때, 금강저(金剛杵)를 지어 나타내
손에 쥐고 금강저에서 불이 나오게 하면,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귀의하고 예경한다.
또 어떤 사람이 전륜성왕의 몸을 즐겨 집착하면, 곧 전륜성왕의 모습을 나타내어 그를 위해 법을 설해 주며,
혹은 석제환인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마왕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성문?벽지불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는 등 중생들이 좋아하는 바에 따라 몸을 나타내며 법을 설한다.
보살은 어떤 경우에는 허공에서 결가부좌한 채로 몸에서 사방으로 여러 가지 광명을 놓아서 법을 설하기도 하고,
혹 중생들이 현란한 색상으로 장엄한 것을 좋아할 때는 삼천대천국토를 7보로 장엄하고, 깃발[幢幡]과 화개(華蓋)와
온갖 종류의 기악(伎樂)이 있는 곳에서 법을 설하기도 한다.
혹은 삼천대천국토를 한 바다의 물로 만들어 청색 연꽃과 붉은 꽃으로 물 위를 덮어 그 위에서 법을 설하기도 하며,
혹은 수미산 꼭대기에 앉아 범음(梵音)으로 법을 설하여 널리 여러 나라에서 들을 수 있게 하고,
어떤 때는 중생들이 그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단지 법을 설하는 음성만 들을 수 있으며,
혹은 건달바의 몸을 지어 기악과 음성으로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한 뒤 법을 설하고,
혹은 용왕의 모습으로 나타나 번개와 천둥을 쳐 법을 설하는 등의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 방편으로 신통변화를 나타내서 중생을 열어 인도한다.
[문] 신통으로 변화시킨 온갖 사물은 어찌하여 허망하지 않은가?
[답] 수행자는 먼저 모든 법이 허망하여 허깨비와 같고 지어낸 것과 같다는 것을 아니,
비유컨대 진흙을 주물러 마음대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만약 복덕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름에도 눈이 내리게 하고 겨울에도 꽃이 피게 하며
강의 물을 흐르지 못하게 할 수도 있고,
또 선인(仙人)이 진노하면 호랑이?이리?사자 등을 돌[石身]로 변화시킬 수 있는데,
어찌 하물며 신통의 정력(定力)이 사물을 변화시키지 못하겠는가?
또한 일체의 사물 가운데는 각기 기분(氣分)이 있는데,
그 기분의 성질을 취하여 신통력이 그것을 넓히면 그 밖의 다른 것은 숨어 사라진다.
경전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어떤 비구가 신통력으로 마음의 자재함을 얻어서 큰 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
땅으로 만들고자 하면, 곧 그 나무가 모두 땅이 된다”고 하였으니,
왜 그런가 하면 나무에는 땅의 성분[地分]이 있기 때문이다.
물과 불과 바람도 또한 이와 같다.
만약 금이나 은 등의 갖가지 보물을 만들려고 하면 마음대로 모두 만들 수 있으니,
왜냐하면 나무에는 깨끗한 성분[淨分]이 있기 때문이다.
[문] 사물의 변화가 이와 같다면 조화에 본말(本末)이 없는데,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답] 어떤 이는 말하기를,
“허공 가운데서 4대가 미진을 만들어 내며,
마음의 힘[心力]이 있기 때문에 미진들을 화합하여 사람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비유컨대 사람이 죽어서 혹은 천상에 태어나거나 혹은 지옥에 태어나는 일은 죄와 복의 인연 때문이듯이,
미진을 화합하여 변화시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사물이 신통에 의해 변화되어 나타나는 모습이다.
만약 수행자가 천이(天耳)를 구하고자 하면,
또한 제4선(禪)을 근본으로 삼아 4여의분(如意分)을 닦아야 한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그 마음을 부드럽게 조절하고
이어서 대중들의 음성을 염두에 두고
갖가지 소리의 양상을 취하여 들은 소리에 대해 항상 상념(想念)한다.
만약 마음이 다른 것을 연(緣)하면 거두어 다시 돌아오게 하며,
항상 일심(一心)으로 생각을 닦으면 곧 귀 가운데서 색계의 4대로 된 청정한 색을 얻으리니,
이것을 천이(天耳)를 닦아 익힌다고 한다.
이 천이로 시방의 한량없는 국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
이른바 천상(천국/천상계)의 소리, 인간의 소리, 용의 소리, 아수라(阿修羅)의 소리,
건달바(乾?婆)의 소리, 전다라(?陀羅)의 소리, 마후륵(摩?勒)의 소리,
축생과 아귀의 소리,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의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크거나 작은 소리 등을 다 들을 수 있다.
보살은 선정[定]의 마음이 더욱 깊어져
마침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되 상(相)을 취하지 않아서,
법으로 진실된 법[眞法]을 삼고 가장 높은 것으로 삼으며,
깊은 뜻에 의지하고 언어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깊은 뜻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모든 법이
공(空)하고
무상(無相)이며
무작(無作)이라는 것을 알아
삿된 견해를 내지 않으며,
뜻에 대해서도
또한 뜻을 얻음이 없는 것을 말한다.
얻을 수 없는 가운데 또한 얻는다는 관념[相]도 없으니,
이것은 깊은 뜻에 의지한 것이지 언어에 의지한 것이 아니다.
또한 수행자는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요의경이 아닌 것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요의경이란, 만약 능히 뜻에 의지한다면 일체의 모든 경이 다 요의(了義)이다.
뜻[義]은 결국 공하여 그 모습[相]을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모든 경은 다 요의이다.
만약 뜻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모든 경에 대해 다 불요의(不了義)이니,
왜냐하면 깊은 지혜가 없어 음성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 음성의 실상도 또한 깊은 뜻에 들어가면 모두 말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이를 분별요의경(分別了義經)이라 하니, 요의경 아님이 없다.
또한 수행자는 지(智)에 의지하되 식(識)에는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수행자는 이 식상이 인연 화합에 의해 생기는 것이어서
자성이 존재하지 않고
색도 없고 무대(無對)이며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인식할 수도 없어,
허망하기가 허깨비와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식상(識相)에 대해 이와 같이 알면, 식이 곧 지가 되니,
그러므로 지를 의지하되 식에는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수행자는 비록 다시 식을 내더라도 식이든 지이든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하며,
식이 상(相)과 같다는 것을 알면 식이 곧 지상(智相)이 되니,
이 지상으로 중생을 위해 설한다.
또한 수행자는 법을 의지하되 사람은 의지하지 않아야 하니,
왜냐하면 만약 불법 가운데 실재로 사람이 존재한다면 청정하여 해탈을 얻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일체의 법은 무아(無我)이고 무인(無人)이지만,
단지 세속을 수순하기 때문에 사람이 있고 나[我]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수행자는 법에 의지하되 사람에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이른바 법이라는 것은 모든 법의 성품을 말한다.
법성(法性)이란 무생성(無生性)이다.
이 무생성이라는 것은 결국 공하다는 것이며,
결국 공한 것은 이를 언설로 표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언어로써 법을 설하지만 법 가운데는 언어가 없고, 언어 가운데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언어에는 곧 언어의 모습[語相]이 없으니, 일체의 언어는 언어의 모습이 없다.
이렇기 때문에 경에서 말하기를
“보여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는 것을 불법(佛法)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수행자는 천이(天耳)로 모든 불법을 들을 수 있으며,
<사람>이든 <법>이든 집착된 견해를 내지 않는다.
만약 두 가지 상[二相]이라고 분별하면 불법(佛法)이 아니며,
만약 두 가지 상이 없다면 이것이 불법이다.
수행자는 천이의 능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지극히 깊은 법을 들을 수 있고 이로써 중생을 교화하니,
이를 천이신통(天耳神通)이라고 한다.
만약 수행자가 타심지(他心智)를 얻고자 하면 먼저 스스로 마음을 관해야 한다.
마음의 생상(生相) 주상(住相)멸상(滅相)을 취하고,
또한 마음의 더러운 상[垢相] 깨끗한 상[淨相] 안정된 상[定相] 어지러운 상(亂相) 등을 알며,
또한 마음이 반연하는 바의 더러움과 깨끗함, 가까움과 멂, 많고 적음 등을 관하여
스스로 안팎의 마음의 상[內外心相]을 취한다.
그런 다음에는 중생의 색을 관한다.
즉, 탐욕하는 모습의 마음,
분노하는 모습의 마음,
교만한 모습의 마음,
인색한 모습의 마음,
질투하는 모습의 마음,
걱정하는 모습의 마음,
두려워하는 모습의 마음,
언어와 음성이 갖가지로 짓는
모습의 마음 등을 취해 이렇게 생각한다.
‘부처님도 나의 마음과 같다. 생겨날 때, 머무를 때, 멸할 때 그도 또한 이와 같다.
스스로 마음이 반연하는 바를 알 수 있듯이, 그도 또한 이와 같다.
나의 마음에 이와 같은 색상(色相)과 언어가 짓는 상(相)이 있듯이, 그도 또한 이와 같다.’
항상 심상(心相)을 닦고 배워 이와 같이 익히고 나면, 타심통(他心通)을 얻는다.
이때는 단지 다른 사람의 마음[心]과 심수법(心數法)을 반연한다.
마치 눈이 밝은 사람이 깨끗한 물속에 있는 고기를 바라보면
크거나 작거나 잘 생겼거나 못생겼거나 모든 물고기들을 다 볼 수 있으니,
비록 물이 덮고 있더라도 물이 깨끗하기 때문에 보는 데 걸림이 없는 것처럼,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통하는 능력[他心通力]이 있기 때문에
중생들이 비록 몸으로 마음을 덮고 있더라도 그 마음을 능히 볼 수 있다.
이미 타심통을 얻었으므로 혹 대중들에게 법을 설할 때
먼저 그들의 마음을 알아
이 중생들이 얼마나 깊은 마음으로
어떤 법을 행하고,
어떤 인연이 있으며,
어떤 모습을 기뻐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를 다 안다.
자기의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도 또한 청정할 수 있음을 아니,
마치 깨끗한 거울에는 모든 색(色)이 길든 짧든 네모이든 둥글든 거칠든 미세하든
본래의 모습 그대로 나타나,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하면 거울이 깨끗하기 때문이니,
거울은 비록 분별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의 모습을 나타낸다.
수행자도 또한 이와 같으니,
자기의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이요,
모든 법은 일정한 상(相)이 없으니,
항상 청정하기 때문이다.
중생의 심법과 심수법도 모두 다 알 수 있으니,
만약 중생들 가운데 음욕이 많은 자가 있으면 곧바로
그 마음을 알아서 음욕을 떠날 수 있는 법을 설해 준다.
성냄과 어리석음도 또한 이와 같으니,
왜냐하면 마음의 실상은 물듦도 없고 성냄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대중들 가운데 성문승(聲聞乘)을 구하는 이가 있으면,
또한 그의 마음을 알아 법을 설해 주니,
비록 법을 설해 주더라도 법성이 작지 않음을 알며,
벽지불도(?支佛道)를 구하는 이가 있으면 또한 그의 마음을 알아 법을 설해 주니,
비록 법을 설해 주더라도 법성이 중간 정도가 아님을 알며,
만약 대승을 구하는 이가 있으면 또한 그의 마음을 알아 법을 설해 주니,
비록 법을 설해 주더라도 법성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안다.
수행자는 이와 같이 중생의 마음을 평등하게 따라서
법을 설해 주되 또한 심상(心相)을 분별하지 않으니,
비록 삼승(三乘)을 분별하여 법을 설하더라도 법성(法性)을 파괴하지 않는다.
법성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에
일체 중생들이 마음으로 행하는 바를 다 안다.
비록 자기 스스로 마음을 수용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더라도
그 마음과 이 마음 사이에 거스름도 없고 따라감도 없으며,
또한 일체 중생의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이어져 마치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안다.
만약 심성(心性)을 알면 법성도 또한 이와 같으니,
타심지로 중생의 마음을 알아 법을 설해 주면 해로움이 없다.
이를 타심지신통(他心智神通)이라 한다.
만약 수행자가 숙명(宿命)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스스로 지금 겪고 있는 일과 종전에 겪은 일을 깨달아 알고,
계속해서 어제 밤과 어제 낮 그리고 며칠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이와 같이 한 달, 그리고 올해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어린 시절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깨달아 알아야 하니,
비유컨대 길을 갈 때 도착한 곳에 이르러 경유한 곳을 사유하여 기억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익히고 나면,
정력(定力)을 잘 닦았기 때문에
태어날 때와 태에 들어 있을 때를 기억할 수 있고,
어느 곳에서 죽어 이 태(胎)에 들어 태어났는지를 알 수 있으며,
1세(世), 2세, 3세, 나아가 백 세, 천만무량억 세를 알 수 있다.
숙명지(宿命智)로
자기 자신 및 다른 사람의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겁 동안 겪어온 일을 알 수 있다.
모두 다 생각해 알 수 있으므로, 숙명의 일로 중생을 교화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느 곳에서, 이와 같은 성자(姓字)를 지니고,
이와 같이 태어나서, 이와 같은 수명을 누리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겪었다.”
또한 그들이 겪은 일에 대해서도 말해 줄 수 있으니,
수행자는 숙명력(宿命力)이 있기 때문에
중생들이 과거 세(世)에 지은
죄와 복의 인연을 안다.
이른바 성문의 인연,
벽지불의 인연,
불(佛)의 인연을
심었는지를 알아서
그 인연에 따라 법을 설해 준다.
또한 수행자는 숙명지(宿命智)의 힘 때문에
스스로 모든 부처님께서 심으신 선근으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회향하지 않은 것까지 잘 알아
지금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회향한다.
수행자는 과거의 모든 법이 소멸할 때 떠나간 바가 없다는 것을 알고,
미래세에 모든 법이 생길 때 좇아 온 바가 없다는 것을 안다.
비록 과거세가 시작이 없다는 것을 알더라도 시작이 없다는 견해를 내지 않으며,
비록 미래세에 중생이 멸하여 열반에 드는 것을 관하더라도 치우친 견해[邊見]를 내지 않는다.
수행자는 숙명을 생각할 때 모든 선근을 늘리고 무량한 세(世) 동안 지은 죄의 인연을 멸하니,
왜냐하면 일체의 법에는 새로운 모습도 없고 옛날의 모습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혜를 얻은 다음에는 일체의 유위법(有爲法)과 겪어 온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관하되,
마치 꿈속에서 보는 것처럼 관한다.
이렇기 때문에 나고 죽는 가운데 마음에 싫어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
일체의 중생들에 대해 가엾이 여기는 마음[悲心]을 일으키며,
일체의 법이 다 지은 모습[作相]이라는 것을 알아,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천만억 무량 겁 동안 생사를 왕래한 것이 모두 허망하여 진실이 아니듯이,
일체 중생들이 생사를 왕래한 것도 모두 이와 마찬가지이다.
만약 4대(大)와 4음(陰)이 없다면 이것이 곧 진실한 것이니,
4대와 4음도 결국에는 생겨나지 않는다.’
또한 수행자는 숙명지로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일찍이 전륜성왕이 누리던 즐거움도 무상(無常)하여 마멸되었고,
석제환인이 누리던 즐거움도 또한 무상하여 마멸되었다.
모든 국토의 청정한 장엄과 모든 불보살의 오묘한 색과 법륜을 굴리는 것도 다 무상한데,
하물며 그 밖의 다른 것이겠는가?’
이와 같이 생각하고 나서 마음속으로 싫어하는 생각을 내어 멀리 여읜다.
수행자는 숙명지에 의지하여 무상공(無常空)에 들어가 일체 모든 법이 다 공하여 무상(無常)하지만
중생들이 뒤바뀐 소견 때문에 집착함을 관하고,
이런 중생들을 위하여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낸다.
이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행하면 점차적으로 대비(大悲)를 성취할 수 있으며,
대비를 얻고 나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 보살을 생각하시고 그 공덕을 찬탄하시니,
이를 숙명신통(宿命神通)이라 한다.
만약 수행자가 천안(天眼)을 구하고자 하면,
맨 처음에 밝은 빛의 상[明光相]을 취하니,
이른바 등불/밝은 구슬/해/달/별자리 등을 취하는 것이다.
이런 밝은 상(相)을 취한 다음에는,
만약 낮이면 눈을 감고 밤이면 생각을 다른 데 두지 않고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밝은 상에 둔다.
항상 밝음에 생각을 두고 닦아 익히면서 마음을 밝음에 매어 두고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으며,
만약 마음이 달아나면 다시 거두어들여 마음을 한곳에 둔다.
이때 색계의 4대로 된 청정한 색이 이 눈 안에 있게 되니,
이를 천안이라고 한다.
이 천안은 4대로 되었기 때문에 천안이라고 하며,
또한 모든 현성의 청정한 눈이기 때문에 천안이라고 한다.
수행자가 이 천안을 얻고 나면
모든 산과 나무와 철위산(鐵圍山)과
수미산 및 모든 국토가 도무지 막고 가리지 못하니,
눈을 장애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능히 시방의 무량 아승기 부처님들과 장엄된 국토를 볼 수 있다.
그때 수행자는 일체의 부처님들이 한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며,
또한 한 부처님을 일체의 부처님으로 보니, 법성이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모습을 보듯이 스스로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도 그렇게 보니,
자신의 모습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일체법의 모습도 또한 이와 같다.
부처님을 청정하게 보듯이 제자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보니,
두 모습[二相]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방의 한량없는 국토에 있는 중생들이 지옥에 있든 축생이든 아귀이든 인간이든 천상이든
무색자(無色者)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나고 죽음과 좋고 나쁨을 모두 다 볼 수 있다.
* 무색자란 몸이 없는 무색계의 존재들을 의미한다. 몸이 없으니 당연히 그 몸을 볼 수 없다.
또한 시방 6도(道) 중생의 업의 인연과 그 과보를 모두 아니,
이 중생은 선한 업의 인연을 지었기 때문에 천상이나 인간 세계에 태어나고,
이 중생은 선하지 못한 업의 인연을 지었기 때문에 3악도(惡道) 가운데 태어남을 아는 것이다.
수행자는 천안 가운데서 지혜력(智慧力)을 얻었기 때문에
비록 중생을 보더라도 중생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으니,
일체의 법에는 중생의 모습[相]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업과 과보가 서로 이어지는 것을 보더라도
또한 일체법의 무업(無業), 무과보(無果報) 가운데 들어가며,
비록 천안으로 일체의 색을 보더라도 지혜력이 있기 때문에 또한 색상(色相)을 취하지 않으니,
이 색은 모두 다 공하기 때문이다.
또한 막혀 있든 막혀 있지 않든, 가깝든 멀든, 위든 아래든, 못 보는 것 없이 다 볼 수 있으니,
수행자는 색계 제천(諸天)의 청정하고 은미한 형상을 볼 수 있으나
저들은 수행자를 보지 못하며, 나아가 대천(大天)에 이르러도 또한 볼 수 없다.
이와 같은 갖가지 신통의 뜻은 마하연에서 신통의 뜻을 설하는 가운데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선법요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