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記
千古聖君世宗大王與昭憲王后子孫繁盛,生得八王材。然其中不幸(世祖簒位),後有兩大君及一公主之殤。由此昭憲王后崩於一年之內,悲慟甚矣。其第五子廣平大君生大王繼位4年後,太宗薨後得實王權,廣平最肖大王,其文武兼備之名聞於朝野。然年方弱冠,僅留一子而卒,令人惋惜。其品行高潔,深受聖君寵愛,且得百姓信賴,然天不假全。其邸在普濟院(今京東市場)之北,乃安岩谷(今高麗大)之地。雖爲豪宅,然世宗大王公平處理,七度王與后同住半月間,可見其愛之深。其亦通曉佛理,與兩宮談論之。初葬於現宣陵(成宗陵)地,因爲天下明堂,遂遷於今光秀山(水西洞)。此後天下名地之效應似已不存。然其子永順君後生三子,繁衍至十九世宗孫李圭明,至今傳後十萬之眾,且占全州李氏科擧及第者之十三分第一位.成為最大之宗派。廣平大君初爲撫奉撫安大君(李芳蕃)之奉祀孫,與其夫人王氏常祭撫安大君之靈,至宣祖時,神德王后姜氏之墓由貞洞遷至城北區貞陵洞逸失況,廣平大君之老僕僅憶可尋祭祀後,雨降,稱“洗寃之雨”,此乃大君後孫發福之由也。永順君亦於睿宗朝被疑為王嗣,險遭滅門之禍,然其恭謙處世,保全家門。其後廣平大君之後裔未有叛逆者或重罪人 彼亦年僅二十六而卒,然留三子,皆多子孫。史無假說,然廣平大君與永順君之夭折或為家門繁盛之基也。思之令人心寒矛盾,若廣平大君在首陽大君篡位之時,果順從否 永順君若活至燕山君年間,又當如何 雖王族隨時歲流逝而成變平凡人,此乃世事。廣平大君三世孫猶保君號,至四世則為副正公,後漸成平凡士族之家,然其傳統延續,多出賢士,其所遺文集雖散失,然手抄保存,至朝末十八世孫李範奭保之,今存世者《世稿纂編》。作此文者重要,然手抄保存者功更大,且使之易解,以傳後世尤為重要。今有志之後裔雖未能精製,然為宣示祖上大意,十匙一飯之齊力,以韓語譯之,惟恐未能傳其真意,然其嘗試本身,望後學正之,是以成書。
其意在於審視各時代均 分布之文集特性,名句可內外發表,合理搭配成冊竹簡,置之案頭,可善。
冀此分裂土再降“洗怨之雨”,以世宗大王與廣平大君及永順君之蔭德
往三十年,與廣平大君之後裔緣之甚深,今因參與譯撰集,再度重逢,哦!緣分之縷,實堅 非常。
甲辰 初秋 安東人 眞虛 權五澈 拙書.
후기
천고의 성군 세종대왕께서는 소헌왕후와 사이에서 자손이 번성하여 여덟명의 왕재를 낳으셨으나 이로 인한 불행한 일(세조 찬위)도 후에 있었고, 두 명의 대군과 한명의 공주를 잃는 참척(慘慽)을 겪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소헌왕후께서 서세하는 변고가 일년안에 일어나니 매우 슬픈일이었다.
이제 그 중 다섯째 광평대군은 대왕이 등극하고 나서 4년후 태종대왕 사후에 왕권을 실제 획득하고 낳은 첫아들이고 대왕과 가장 닮았다고 하며 그 문무겸전한 명성은 조야에 대단했다.
허나 약관의 나이에 겨우 몇 달된 아들 하나만을 남기고 별세하는 안타까운일이 있었다. 훌륭한 인품과 인물로 성군의 총애를 받고 백성의 신망을 받았으나 하늘은 모든 것을 다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저가 보제원(경동시장) 북쪽이니 안암골(고려대)일 것이다. 호화주택으로 문제가 되지만 세종대왕의 공평한 처리로 마무리되고 일곱차례나 세종과 왕비가 보름 씩 거주 했다하니 그 사랑의 정도를 알만하고 불교에도 밝아 양궁이 이를 사적으로 논의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애초 현재 선릉, 성종이 묻힌 자리에 묘소가 있었으나 천하명당이라 하여 결국 현 광수산(수서동)으로 이장하게 된다. 이로써 천하명당의 효험은 없어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아들 영순군이 후일 삼남을 낳고 이들이 번성하여 19세 종손 이규명에게 까지 내려오면서 오늘날 십만명의 자손을 남기게 되고 또 전주이씨 과거 급제자의 13%를 차지하는 최대 가문이 되니 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 보다 애초 광평대군이 무안대군(이방번)의 봉사손으로 결정되어 무안대군 의 부인인 왕씨와 꾸준히 비명에 간 대군의 혼령에 제를 지냈다. 신덕왕후 강씨의 묘가 현 정동에서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 진 후, 선조때에 와서는 거의 잊혀져 갈 즈음 광평대군의 늙은 종이 이를 겨우 기억하여 찾아내어 제사를 지내고 나서 곧 비가 내리니 이를 세원지우(洗怨之雨, 원한을 씻은 비)라 했고 이런 것이 대군의 후손이 발복(發福)한 연유의 하나일 것이다.
영순군 또한 예종조에 왕재(王材)로 거론 되어 자칫 멸문지화의 위험성도 있었으나 항상 타협하고 겸손하면서 몸을 낮추는 심성이 가문을 살렸다. 이후 광평대군 후손에서는 역적이나 중죄인이 나오지 않았다. 영순군 또한 26세의 나이에 서세하지만 세아들을 남기었고 모두 또 자손을 많이 두었다.
역사에 가정(假定)은 없겠으나 광평대군과 영순군의 요절이 가문의 번성에 밑거름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가슴 서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양대군의 찬탈과정에서 광평대군이 있었다면 과연 그가 순응했을까 하는 것과 영순군이 성종 원년에 사망하였지만 이후 연산군 때 까지 살았다면 이 또한 모를 일이다.
왕족이라도 세월이 지나면서 평범하게 되는 것은 세상사의 원리이다. 이후 광평대군의 3세손까지는 군호를 유지하고 4세에 와서는 부정공 정도가 되고 또 평범한 선비의 집안이 되어갔지만 역시 그 전통은 이어져 수많은 유명 선비가 나오고 이들이 남긴 주옥같은 문집은 산질되었으나 필사로 유지되고 조선조 말기 18세손 이범석에 의해 보존되어 오늘날 ‘세고찬편’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글을 쓴 분도 중요하지만 이를 필사하여 보존한 사람의 공로가 더 클 수가 있고 또 이를 알기쉽게 하여 후손에게 널리 알리려는 노력은 더욱 중요할 수가 있다.
근자에 이런 뜻을 가진 몇몇 후손이 비록 정제(整齊)되지는 못했지만 조상의 뜻을 알리기 위해 십시일반하여 모은 돈과 정성으로 한글로 풀어 보았다. 비록 참된 뜻이 전달 될 것인지 심히 저어하지만, 그래도 그 시도(試圖) 자체가 중요하고 이 다음에 올 후학들이 제대로 할 것으로 믿고 감히 상재(上梓)하게 된 것이다.
그 의미는 시대별로 고루 분포된 문집의 특성을 살피고 명문장은 내외에 발표하여 일리고 죽간으로 제작하여 걸어 놓은 것도 좋을 것이다.
이 토록 갈라진 이 땅에 다시 ‘세원지우’가 세종대왕과 광평대군 그리고 영순군의 음덕으로 다시 내리기를 기원하면서 머리말에 대한다.
지난 삼십년간 광평대군 후손과의 인연이 이렇게 문집 만들기에 참여하여 다시 만나게 되니 아! ‘인연의 끈’은 모질고도 긴 것이라.
갑진년 가을 안동인 진허 권오철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