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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오늘은 사도바울의 고별 설교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을 향한 고별 설교 너희가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바울이 고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저도 여러분 앞에서 마지막 설교를 해야 된다면 오늘 이 본문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해야 되겠죠.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목회와 선교의 일을 감당해야 되겠다 이런 결심을 하면서 오늘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지난주에 주중에 설교를 열심히 준비를 했는데 오늘 이 본문 가지고 그날은 정말 성령이 감동하셨는지 그냥 한 자리에 앉아서 한두 번 정도 잠시 물 마시느라고 일어나는 거 외에는 쭉 앉아서 설교 준비가 끝났어요.
이제 마지막 결론을 쓰면서 이제 다 끝났다. 그리고 결론을 탁 커서를 눌렀는데 갑자기 창이 뜨면서 취소를 누르면 모든 것이 날아갑니다. 뭐 이런 메시지가 뜨는 거예요. 옛날에 그런 적이 있어가지고 뭘 잘못 눌렀어요? 그때 그랬더니 다 날아간 게 있어서 다시 불러옴 취소 그 메시지를 믿어야 되는데 제가 믿음이 없어가지고 옛날에 다시 블러옴을 눌렀을 때 날아갔던가 취소를 누를 때 하여튼 못 믿겠어 그래가지고 제3 지역에다 대고 커서를 눌렀는데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래가지고 그날 저녁에 차를 몰고 집에 오는데 정신이 멍한 거예요.
야 이걸 어떡하나 이걸 한 번에 날려버렸으니
그리고 주중에 다시 말씀을 같은 본문을 가지고 준비했습니다.
아마 아직은 니가 이 설교를 할 자격이 없다
뭐 그런 메시지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그런 사연이 있는 오늘 말씀입니다.
바울의 설교는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어요. 에베소에서의 사역에 대한 회고 그리고 미래의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각오와 결심 앞으로 에베소 교회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당부 또는 권고 이런 내용으로 오늘 본문을 압축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과거 에베소 사역을 회고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17절 이제 장로들을 불러놓고 그들에게 설교를 하는 거죠. 17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택하니 청하니
바울은 에베소에 대해서 관심이 참 많았죠. 그래서 2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를 목표로 가려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방향을 바꾸도록 하셨어요. 방향을 바꿔서 에베소가 아닌 마케도니아로 가게 하셔가지고 거기서 유럽 선교의 길을 여셨습니다. 3차 선교 여행을 떠날 때 바울은 에베소 꿈을 버리지 않고 다시 에베소를 목표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3년 동안이나 목회를 했어요.
바울은 목회도 하지만 선교사신 분이 주 업무기 때문에 어느 도시를 가든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는 곧바로 그곳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3년을 머물렀어요. 3년 굉장히 긴 시간이에요. 선교사에게는 바울 같은 움직이는 선교사에게는 긴 시간이었어요. 그만큼 바울의 마음에 에베소가 있었던 겁니다. 왜 그런지는 몰라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의 마음에 늘 에베소가 있었고 에베소에 대한 애착 사랑이 깊었던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에베소에 3년 머무르면서 고린도전서를 쓰고 눈물로 쓴 편지, 고린도 후서와 전서 사이에 있는 그러나 지금은 분실돼서 남아있지 않은 눈물로 쓴 편지를 쓰게 됩니다. 이제 3차 전도여행을 마치게 돼요. 이제 에베소를 마치고 그다음에 마케도니아 지방을 지나서 아가야에 있는 고린도에 가 있다가 이제 다시 돌아와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는데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에베소를 지나게 됩니다. 에베소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항구 도시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을 합니다. 거기서 만나기로 한 거예요. 그러자 장로들이 단숨에 거기를 달려왔습니다.
60km 차로 몰면 1시간이지만 당시 걸어서는 꽤나 먼 거리입니다. 그 거리를 그들이 달려왔어요. 바울과 에베소 교회 성도 그리고 장로들 사이에 그 친밀감이 얼마나 깊은지를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19절에서 21절, 33절에서 35절에 설교를 하면서 자기 에베소 시절에 자기의 사역의 모습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용을 다 살펴볼 수 없지만 거기서 나오는 주요 단어 문장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모든 겸손, 눈물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겼던 일, 성도들에게 유익한 것은 거리낌 없이 전하고 가르쳤던 것,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을 증언하는 일, 또한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던 마음, 직접 일을 해서 자신의 동역자들을 도운 일 그리고 바울은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 이렇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에베소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충분히 섬겼다고 생각하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한 거예요. 복음을 들어야 될 사람들에게는 최선을 다해서 전했어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나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 이제 그들이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자신들의 책임이고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사역을 한 것입니다.
선교사, 목회자 그리고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추구해야 될 모습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이 3년이라는 기간은 굉장히 특수한 기간이에요. 바울은 단기 사역을 하는 사람입니다. 딱 어느 지역에 가서 짧게 하고 최고 길은 시간이 3년입니다. 또 초대교회라고 하는 특별한 상황이었어요.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른다. 우리 세대에 오신다. 최소한 그래서 더 긴박하게 생각하고 모든 걸 쏟아부으면서 사역을 했던 그 상황이기 때문에 이걸 다이렉트로 우리 삶에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가령 주님은 안 오시고 우리가 수십 년을 죽을 때까지 사역을 해야 되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사역을 바울의 생활을 그대로 적용을 하면 3년 한 지역에서 했던 것을 막 한 20년, 30년 하는 사람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살아남겠어요?
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그 정신, 바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 의미 형식 겉의 모습은 그대로 다이렉트로 적용하기 어렵지만 그 안에 있는 정신과 의미는 우리 현실에 맞게 적용하면서 우리가 바울을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 영적 지도자들이 바울이 보여주신 이 정신과 의미를 기억하고 그 본을 따라가며 우리 삶에서 구현할 수 있다면 우리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 100 100년 동안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쏟아부어주셨는지 몰라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우리 한국교회가 큰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저를 포함한 우리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책임이 있어요. 우리가 이 바울의 정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우리가 바울처럼 살아가지는 못하더라도 바울이 살았던 그 정신과 그 삶에서 보여주는 그 의미를 우리 삶에 구현하려고 조금이라도 노력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다시 한 번 긍휼히 여기시고 새로운 부흥의 역사를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사실 이 설교는 우리 설교자인 저 자신 또 우리 교역자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 리더들에게 하는 설교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기 자신의 사역을 회고한 다음에 두 번째로는 22절부터 23절에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그 결심 결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 더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아멘 이 말씀은 제가 신학을 이제 하기로 결심을 한 그 해에 받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가 1983년 7월 마지막 주간에 한월산 기도원에서 변화가 됐어요. 이렇게 모태 신앙이었는데 방황을 하다가 이제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는 성령께서 제 인생을 바꿔 놓으시는 그런 사건이 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께 헌신하기로 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고향 충청도 시골 교회 아주 시골 동네입니다. 내려가서 있으면서 저녁에 매일저녁 우리 고향 교회에 가서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를 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한 3개월은 정말 저에게는 중요하고 중요한 시간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근데 하루저녁은 기도하고 성경을 쭉 읽어나가는데 오늘 이 본문을 읽은 거예요. 본문을 읽는데 갑자기 막 전유를 하는 감동이 오면서 눈에서 눈물이 터지고 그날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울면서 결단을 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그게 이제 내가 이 길을 가야 되겠다 하는 그 말씀이 내게 주어진 그런 사건이었어요. 기도원에서는 내가 기도하면서 그런 결단을 했지만 이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에 내가 헌신해야 되겠다는 결단을 하는 시간이었어요. 말씀이 똑같은 말씀인데 읽다가 갑자기 가슴으로 훅 들어오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내가 주의 종의 길을 가야 되겠다 그렇게 결심을 했고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그런 결심을 했습니다.
근데 이제 그 후로 시간이 지나면서 더 좋은 말씀이 없었을까 내가 너를 높이 들어쓰리라 뭐 이런 좀 그런 생각이 가끔 들 때도 있어요. 그런데 그날 제가 받은 은혜는 결박 환란 사명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너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 뭐 이런 사실 엄청난 말씀이잖아요. 인간적으로는 참 말하기도 편하고 듣기도 편하지만 이걸 내 삶에 적용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그런 말씀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거죠. 그래서 조금 아쉬운 생각도 있었지만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아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한 그래서 좀 무뎌지고 사명이 무뎌지고 좀 흔들리고 그럴 때는 이 말씀을 다시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바로 돌아가고 있는 건가 이렇게 반성하고 회개하는 그런 시간을 갖게 되는 또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바울에게 성령께서 주신 말씀이에요. 그리고 혹시 오늘 이 자리에 앉으신 여러분 가운데도 오늘 이 말씀을 듣는데 이 말씀이 갑자기 여러분을 사로잡으시면 거기에 하나님 뜻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이 없죠. 이게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딱 이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그렇게 또 드라이브하실 거예요.
성령 충만하다 바울은 지금 이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면 성령 충만한 상태예요. 오늘 본문에 성령의 매여 성령이 막 동아줄로 묶어가지고 끌고 가듯이 바울을 끌고 가는, 그러니까 바울이 가장 성령 충만한 상태가 지금 이 상태라고 보시면 돼요. 거기다가 지금 그전에는 또 혼자 고독한 묵상의 길을 걸어오면서 성령과 교제를 했어요.그래서 성령 충만한 상태입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성령 충만하고 은혜받고 막 기도에서 능력이 생기면 만사가 형통한다 이런 걸 생각을 해요. 이게 이제 우리 한국적 사고입니다. 약간 샤머니즘적 사고도 있어요. 충만 하늘의 능력으로 충만하면 만사가 형통한 인생.
물론 우리가 예수 잘 믿고 하나님 말씀 따라 살아가면 그런 축복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해요. 그러나 100%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령 충 충만한 상태인데 만사가 형통하는 게 아니고 인간적으로 꼬일 수도 있어요.
오늘 바울이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성령이 나를 끌어가면서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지만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나는지 모른다.
그런데 성령께서 자꾸 내게 하시는 말씀이 있어 뭔가 귀띔을 해주시는데 아마 걸어오면서 고독하게 걸어오면서 성령의 음성을 들었겠죠. 자꾸 말씀을 하시는데 그게 별로 좋은 말씀이 아닌 거예요.
너희 거기 가면 잡힌다. 너 거기 가면 결박된다. 너 거기 가면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결국은 너는 죽게 될 거다.
이게 어떻게 만사형통입니까? 그런데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바울에게 주어진 강력한 메시지예요. 성령님은 성령 충만한 사람의 보호자가 되시기도 하시지만 어려움을 극복하는 능력도 주시지만 때로는 바울처럼 죄수의 몸이 되게 하고 체포되게 하고 그 몸으로 로마에 가게 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복음이 로마에 전해지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잘 믿는다. 성령 충만하다는 의미를 다시 정립을 해야 됩니다. 내가 이 세속적으로 세상적으로 육신적으로 잘 되는 것에 포커싱을 하면 신앙이 왜곡돼요. 잘될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면 그게 성령 충만한 것이고 그게 인생을 잘 살게 된 것입니다.
바울에게 그 말씀을 하실 때 바울이 어떤 그 내면의 감정이 오고 갔을까
너 그래도 갈래? 너 거기 가면 잡혀서 죄수의 몸이 돼서 고문받고 결국은 죽게 된다.
글쎄요. 제가 꼭 그거 가야 되나요?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바울도 사람인데 그래도 가야 된다.
니가 가야지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고 그런가요?
바울은 상당한 시간 그 내면에서 그런 자기 자신과 또 성령님과 대화를 나눴을 거예요. 인간이니까.
예수님도 인간 예수로 오셨을 때 그분이 하나님이시지만 인자로 오셨을 때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얼마나 챙피한 말씀을 하셨습니까?
너희들 나를 위해서 좀 깨워서 기도 좀 해달라. 내가 고민해서 죽을 지경이다.
아니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에요. 이 송인이 그러나 예수님의 솔직한 심정이었어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님의 마음에는 그런 번민이 왔어요.
아버지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소서
하나님께도 말씀을 드렸어. 그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어요. 그전에는 그렇게 친밀하게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 기도 앞에서는 침묵하시는 거예요. 아마 하늘 아버지의 마음도 힘들고 아프셨을 거예요. 그 자식을 독생자를 그 길로 보내야 되는 아버지의 마음.
그런데 예수님이 그 길로 안 가시면 세상은 누가 구원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안 지시면 저 많은 사람들은 누가 구원합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는 그 예수님을 그 길로 보낼 수밖에 없는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마 예수님의 마음보다 아버지의 마음이 더 힘들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 우리에게 구원이 오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우리도 때로는 그런 희생 예수 믿으면서 다 잘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우리의 희생 때로는 억울함, 때로는 부조리함을 느끼면서 그 길을 걸어갈 때 우리의 그런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인생을 잘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결심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라면 나는 가겠습니다. 그 길에 비록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나는 가겠습니다.
여러분 진짜와 가짜는 언제 드러나느냐 이 순간에 드러나는 거예요. 진짜 가짜는 평소에 잘 몰라요. 그러나 위기의 순간이 오면 진짜는 빛나게 되고 가짜는 정체를 드러냅니다.
명품과 모조품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에 나왔을 때는 다 반짝반짝 빛납니다. 잘 구분을 못해 사람들이 그런데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이 짜가는 짜가 시계는 갑자기 멈춰 뭐가 빈터가 나가 가짜는 어느 순간에 부속이 빠져버려. 그러나 진짜 명품은 그런 위기 상황에서 진가를 바라는 것이 사람도 마찬가지.
바울이 진짜 사도였는지 가짜 사도였는지는 앞에서 능력을 행하고 복음을 능력 있게 전하고 그것 가지고만은 볼 수가 없어요. 고난이 올 때 위기 상황이 왔을 때 바울의 모습 속에서 아 저분은 진짜 사도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예요. 평소에는 몰라. 근데 위기가 왔을 때 큰 내가 이 길을 걸어갈 때 큰 손해가 있다. 그 순간에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 바울이 이때 흔들렸다. 내가 어떻게 이 길을 걸어가나 그러고는 여기서 이제 포기해버렸어요. 나는 예루살렘 안 갑니다.
그래 다른 도피처로 가버리거나 바울이 거기서 주님을 부인하거나 내가 죽으려고 지금까지 헌신한 줄 알아요.
그러고는 바울이 변심을 했다면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기독교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하나님의 나라는 위기의 순간을 감당한 그 한 사람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다 잘해야만 역사가 변화를 맞이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여기 있는 여러분과 저 중에 한 사람이 그 위기를 감당하면서 끝까지 나가면 여러분 그 사람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발생하고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이 온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다 누구나 알아요.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날이 오지 않아도 아마 나는 그때 되면 아마 가짜로 드러날 거야. 아는 사람이 있어. 빨리 회개하고 지금 새롭게 결심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진짜 들도 결단을 하셔야 돼요. 그래야만 이 위기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앞으로 에베소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권고입니다. 28절 30절 같이 읽겠습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한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살아온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 내가 아노라.
바울이 보니까 곧 에베소에 들이닥칠 위기 상황이 바울에게 보인 거예요. 사실은 바울은 자기 코가 석자입니다. 곧 잡혀서 조금 지나면 이제 예루살렘에 가가지고 잡혀서 죽음을 향해서 가야 되는데 그 순간에도 바울은 교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들에게 교회를 잘 보살피라고 당부를 하고 있어요.
이게 이제 진짜입니다. 그 위기 상황에 왔을 때도 자기보다는 하나님의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 그것이 진짜 지도자가 되는 것이죠.
어제 우리 집에서 가정 예배를 오랜만에 드리는데 이제 말씀을 읽고 이렇게 나누는데 갑자기 우리 집사람이 아주 질문을 아주 난감한 질문을 하는 거예요. 데살로니가후서 2장 7절 8절에 보면 8절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을 했어요.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를 위하여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가 됨이라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바울은 자기 목숨까지 주려고 했었다 하면서 이게 우리가 사역자들이 어떤 하나님의 복음만 전하는 전달자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자기 생명까지 줘야 진짜가 아니냐 하는 이제 그런 말씀을 나누다가 당신은 은석이하고 우리 교인 자녀 중에 물에 빠지면 누구를 건질 거예요?
질문을 해도 어떻게 그 질문을 하는지 네 둘 다 건져야죠 그렇죠 그런데 이제 문제가 뭐냐 하면 둘 중에 하나를 버려야 되는 상황이야 하나만 살려야 되는 상황이에요.
여러분 제가 누구를 건질 것 같아요?
저를 의심하는군요. 누구를 건질까 제가 솔직히 대답을 못하겠더라고 그 원칙은 교인 내가 교인의 자녀를 먼저 건져야죠.
근데 내 본능은 우리 애를 먼저 건지지 않을까 이 갈등이 오더라고요. 그랬더니 옆에 있다가 자기 당면한 자기 얘기를 하는 걸 듣고 은석이가 당연히 아들을 건져야지 자기를 건져달라 뭐 하여튼 그러고 이제 우리가 웃고 말았는데
바울의 심정입니다. 바울은 사실 자기 목숨까지라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서 주고 싶은 그런 심정이에요. 그게 사실은 목회자고 그게 교회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목회자와 교회 중직을 맡은 분들은 어디까지 가야 되느냐 지금 장로들에게 하는 얘기예요. 어디까지 가야 되느냐 교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라도 주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바울이 보고 있는 이 에베소교회의 미래는 뭐냐 하면 사나운 이리가 들어와서 교인들을 씹어 먹는 거예요. 거짓 선지자 이단 적그리스도 세력이 지금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이리가 들어와서 아주 잔인하게 교회를 흔들고 성도들의 영혼을 씹어 먹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보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 어그러진 말을 가지고 파당을 짓고 자기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 교회를 흔드는 그런 미래의 모습을 본 거예요.
바울은 그런 교인들을 그런 상황에 놓일 교인들을 지키는 일을 당신들이 해라. 여러분 목회자나 교회 중직자들은 뭘 해야 되느냐 교회를 지켜야 돼요. 왜냐하면 이 교회를 어둠의 세력들이 거짓 사도들이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흔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얼마나 많은 이단 사이비들이 일어나가지고 교회 이단 사이비의 특징은 불교나 다른 종교는 자기들 신앙을 발전시켜 나가지만 이단 사이비는 교회로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게 합니다. 영혼을 훔쳐가는 거예요.
바울은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는요. 하나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입니다. 그냥 몇 사람이 모여서 어소시에이션을 만든 게 아니에요. 교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피값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에베소서 1장 23절에 바울이 에베소에 이렇게 편지예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교회가 뭐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거예요. 그 몸을 누가 지켜야 되느냐 여러분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 중직자들이 교회를 지켜야 돼요.
여러분 지킨다. 이 양무리를 지킨다는 것은 사실은 우아한 모습으로는 못 지킵니다. 지금 막 이리떼들이 지금 벌판에서 시시때때로 노리고 있을 때, 여러분 자기 악무리를 지키려면 우아한 모습, 좋은 모습만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성도들에 대해서는 좋고 선하고 착한 모습이지만 교회를 해치려고 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되는 거예요. 그게 교회 지도자들의 사명입니다. 지금 바울이 마지막으로 장로들에게 그것을 부탁하고 있어요.
파리 선한 장로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입니다. 그냥 몇 사람이 송원용 목사가 개척하고 몇 사람이 모여가지고 만들어지는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이고 우리가 없더라도 이 안에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를 우리는 사랑하고 이 교회를 외부로부터 지키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주님의 몸의 지체들이에요.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돌보는 일을 최선을 다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지금은 주님 오실 때가 가까운 시대입니다. 그걸 누가 제일 먼저 아느냐? 마귀가 제일 먼저 알아요. 마귀는 자기의 때가 다 된 줄 알고 우는 사자처럼 역사한다고 그랬어요. 다 된 줄 알아요. 이 시대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아 주님 오실 때가 가까웠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돼요.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거기서 이파리가 나면 누구나 생각해 여름이 가까웠네.
그렇죠. 그런 일들이 생기면 여름이 가까웠다는 걸 당연히 아는 것처럼 그건 상식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의 소식이 들리고 기근과 지전과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생각하라는 거예요. 종말이 가까웠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웠다.
근데 우리는 무화과 나무에 가지가 연해지고 이파리가 나면 여름이 가까운 걸 아는데 이 시대를 읽는 눈이 없어요. 우리가 이 시대를 다시 한 번 봐야 됩니다. 2천년 동안 흩어졌던 이스라엘이 1948년 5월 14일에 건국을 했어요. 불가사이한 일입니다. 회복 신학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 건국 후에 언젠가는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다는 거예요.
지금은 이슬람 사원이 세워져 있지만 그래야만 거짓 선지자적 그리스도 불법의 아들이 성전에 앉는 신성 모독죄를 범하게 된다는 거 이미 복음서에 나와요. 불법의 아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신성을 모독한다는 거예요. 그러려면 성전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단계들이 오게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금 사실은 이 중동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혹시 그런 일이 아닐까 한번 생각을 해봐야 돼요. 저도 그런 고민을 최근에 많이 하고 있습니다. 또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소식 심상치 않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던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는데 지금 중동에서 화약고에서 전쟁이 터졌어요.
지금 또 북한군이 지금 러시아에 합류해서 우크라이나에 침투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아무도 장담을 못해 그런 상황입니다.
전쟁 소식뿐만 아닙니다. 곳곳에 기근과 지진, 천재지변뿐만 아니라 기후변화 위기 이건 심각하다고 그래요. 전문가들은 2030년에 지금 이 흐름을 바꿔놓지 않으면 바꿀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사라진다고 봅니다. 그래서 한 2100년쯤 되면 지구 평균 온도가 4.5도에서 8도까지 올라간다는 거예요.
0. 0 얼마가 올라가는 것만 가지고도 세상이 뒤집히는데 여러분 5도 8도가 올라가면 어떻게 살까? 우리 우리 후손들이 이렇게 살까
그러니까 세상이 아무래요. 아무래도 이게 우리 세대에 주님이 오시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신앙생활을 깨워서 하셔야 됩니다. 마귀는 아마 자기의 때가 다 된 줄 알고 더 강하게 역사할 것입니다. 이단 사이비가 요즘 얼마나 많이 강하게 역사하는지 몰라요. 세속화된 시대 정신 또 합법화를 가장한 압박은 서구 사회에서 계속됩니다. 이 서구는 공개적으로 물리적 박해는 없지만 앞으로 다양한 법을 만들어가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갈 거예요. 우리는 신앙생활하기가 정말 어려운 시대,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역사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때 깨어 있어야 되고, 시대를 잘 읽어야 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다가 혹시 우리 시대에 주님이 오시면 땅 끝에서 복음 전하다가 주님을 만나는 삶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 은혜와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