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 회의
Ⅰ. 서 론 기독교의 대박해는 콘스탄틴 시대(니케아 시대)종식 되었다. 그러나 외부적인 박해가 끝이 나고 평안의 시대가 교회 안에 주어졌을 때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교리의 논쟁이었다. 초대 기독교가 갖고 있었던 최대의 교리 논쟁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신성,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 등의 문제는 주후 수세기 동안 초대 교회에서 논쟁의 쟁점이 되었다. 이것을 ‘삼위일체 논쟁’이라 한다. 아리우스 논쟁은 이러한 삼위일체 논쟁들중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교회는 이러한 교리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전체 교회가 참여하는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아리우스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니케아회의가 소집되었다. 따라서 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회의를 연구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과 기타 여러 교리논쟁을 정리하는데 중요한 일이며 가치가 있는 일이라 하겠다. Ⅱ. 본 론
1.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적 배경
삼위일체 논쟁의 기원은 기독교 내부에서 오래 전부터 계속 되어온 신학적 발전 가운데서 찾아야 한다.
* 삼위일체에 대한 대표적인 오류 - 단일신론 단일신론은 삼위일체에 대한 대표적인 오류로 아리우스의 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2. 아리우스 생애와 사상
1) 생 애 아리우스(Arius)는 리비아 사람으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다. 그는 키가 크고 연설을 잘했으며 열성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많았다. 그는 안디옥 신학교의 교장인 루시안(Lucian312)에게 배웠으며,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260-272)의 여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하여 그의 설교, 서신 그리고『향연(饗宴,Thaleia)』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극단적으로 종속적인 기독론을 가르쳤다. 31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알렉산더와 충돌한 뒤 니케아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아 추방되었다. 그러나 후에는 다시 귀한하여 니케아 신조에 형식적으로 동의함을 복직되었다. 2) 사 상 이미 사모사타의 바울이나 시벨리우스는 성자를 성부로부터 발산된 형태, 또는 성부의 뜻과 행동을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수단 중의 하나로 이해했었다. 이에 대하여 터툴리안, 오리겐 등은 보다 성경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받아야 하는 강제력을 가진 기준은 제시되지 않았었다. 아리우스는 학교에서 공부했고, 후에 사모사타의 바울에게서 배웠다. 아리우스의 사상이 공적으로 드러난 것은 알렉산더 감독이 삼위일체신의 현현(顯現)에 대해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아리우스가 그것이 사벨리우스설이라고 공격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3) 아이우스의 교리체계
결국 그의 주장은 삼위일체설을 부인하는 것으로 알렉산더 감독으로부터 이단적 사상이라는 반박을 받게 되었다.
3. 아다나시우스의 생애와 신학
1) 생 애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서 알렉산더의 뒤를 이은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였다. 그는 약 30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했고 373년에 그곳에서 별세했다. 그는 니케아 회의의 결정을 작성하는데 기여했고, 그의 여생을 그것을 옹호하는 데 바쳤다. 강직하고 고결한 성품을 소유한 그는 지도자와 행정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적 신학자였다. 그는 수도원에 대하여 동정적이었으며, 에집트의 수도사들중에 그의 최대의 조력자들이 있었다. 신학자와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는 253년에 사망한 오리겐과 354년에 출생한 어거스틴 사이의 모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2) 신 학 그의 신학과 신앙은 벧후1:4에 있는 말씀에 지배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여기에서 우리는 서방 신학과 동방 신학간의 큰 차이점에 직면하게 된다.
아리우스는 완전한 신성도, 완전한 인성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아다나시우스는 전심 전력 그를 반대했다.
4. 니케아 회의 니케아 회의는 기독교의 세계적인 회의의 효시(嚆矢)로서 당대의 최고 사건이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분기점이다. 특별히 이것은 교리적인 논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비슷하지만 기독교가 아닌 것과 기독교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간의 싸움이기도 하다. 사실 두 학파는 신학적 접근 방법이나 강조점이 크게 달랐다. 그래서 서로를 이단적 경향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니케아 논쟁은 기독론에 기초한 삼위일체 논쟁이다. 그것은 유일신 사상과 기독론의 피상적 부조화에서 오는 아리우스의 오해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로고스 기독론’의 반발에서 시작되었다. 1) 발 단 아리우스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알렉산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하여 32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지방 대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아리우스는 직분을 박탈당하였고, 그의 추종자인 세쿤두스(Secundus)와 데오나스(Theonas)도 같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아리우스와 같이 루시안에게서 배운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를 지지했으며 동방의 교인들은 대부분 아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콘스탄틴은 자신은 보기에 ‘하찮은 것’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고, 그로 말미암아 제국의 통일성이 위협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실 콘스탄틴에게는 교리적인 문제보다 정치적인 통일성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호시우스(Hosius of Cordova)를 파견하여 분쟁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그는 세계적인 대회를 소집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2) 과 정 콘스탄틴은 각 지방의 감독들에게 안내장을 띄웠다. 각 지방에서 2인의 장로와 3인의 수행원을 파견하는데, 정부의 운송 수단을 사용하도록 했으며 체재비용과 왕복 여비를 모두 황실에서 지출해 주었다. 그리하여 325년 니케아(Nicea)에 최초의 세계회의가 소집되었다. 모인 인원은 300여 명이었는데 이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었던 서방측에서는 10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크게 3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고, 콘스탄틴은 다만 통일과 평화 유지만을 부탁했다. 처음으로 신조를 제출한 것은 아리우스파의 니코메디아의 제출한 신조가 수정이 가해져서 채택되었다. 아다니시우스는 ‘유사본질’(Homoiousios)이 아니라 ‘동일본질’(Homoousios)이어야 함을 주장했다.
3) 결 과 니케아 회의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와 아다나시우스의 주장을 수정하여 니케아 신조를 선포했다. 그 내용은 아버지는 창조주시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나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개체성(신성)과 아버지와의 일체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 니케아 신조는 기독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신앙으로 남아 있다. 이외에도 니케아 회의는 아리우스의 추방, 부활절 날짜 재정, 멜리티우스(Melitius) 분파 문제 등을 다루었다. 4) 니케아 신조 전문
5. 니케아회의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니케아회의 이후에도 아리우스주의의 도전은 계속되었으나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들의 종말은 준비되어 있었고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하여 381년 콘스탄틴 회의가 소집되어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 이 회의를 통하여 아리우스주의는 완전히 정죄받고, 종말을 고함. 콘스탄틴 회의에서의 니케아 신앙의 확인으로 325년부터 381년동안 무려 50여년을 끌어온 삼위일체의 논쟁이 일단락 되었다. Ⅲ . 결 론 니케아 회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전례를 남겼다. 여기서 규정된 교회 법들은 교회의 조직과 권력 구조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실제로 황제의 법과 같은 양상을 띠었다. 한편 아리우스주의가 그리스도의 이성과 신성을 모두 부인함으로 구원의 능력에 막대한 손상을 입히는 것을 방지함으로 전통적 기독교의 진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본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위협하는 세력들이 많이 존재한다. 우리는 단지 그들을 비난하고 멀리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여 우리의 약점을 보완하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이단 세력은 기존 교회의 약점을 들고 나오므로 그 부분들에 대한 확고한 이해와 정립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기진오 『초대교회사 강의안』 1998 . 김의환 『교회사 세종문화사』 시드니 휴튼 정중은 『기독교 교회사』나침반 1997. 리재학 윤종곤 공저 『입체식 교리강해연구ⅩⅧ』선린출판사 1993. 심창섭,박상봉. ꡔ교회사 가이드ꡕ 서울:아가페 1994. 해리 R. 보어 백성호 『단편 초대교회사』 개혁주의 신행협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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