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이적(李迪) → 이언적(李彦迪)
자 복고(復古)
호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시호 문원공(文元公)
본관 여주 이씨
출생 1491년(성종 22) 11월 25일 조선 경상도 경주부 양좌촌(良佐村) 서백당(書百堂)
사망 1553년(명종 8) 11월 23일 (향년 61세) 조선 평안도 강계
부모 부친 - 이번(李蕃, 1463 ~ 1500), 모친 - 경주 손씨(慶州 孫氏, ? ~ 1548): 손소(孫昭)의 딸
형제자매
남동생 - 이언괄(李彦适, 1494 ~ 1553)
부인 함양 박씨 - 박숭부(朴崇阜)의 딸
자녀 (양자) - 이응인(李應仁)
1. 개요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 정치가. 본관은 여주 이씨. 호는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주시 양동마을에서 출생.
영남 남인의 선구자이자 조선 시대 최초의 철학적 사유인 태극 논쟁을 벌인 성리학의 태두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設)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는 사상을 확립했으며 이는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 학파의 근간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의정부 종1품 좌찬성, 이조판서, 예조판서, 대사헌, 대사성, 한성부 판윤, 경상도 관찰사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사후 영의정으로 증직된 정치인이기도 했다. 학문적 업적으로 그는 동방 5현이자 동국 18현으로서 문묘, 정치적 업적으로 명종의 배향공신이 되어 종묘에도 모셔졌었다. 명종이 영녕전으로 체천(遞遷)되면서 이언적의 신주는 여주이씨 종가로 옮겨갔다.
현재 문묘(대성전)와 종묘(공신당)에 모두 이름을 올린 사람은 이언적, 이황, 이이, 김집, 송시열, 박세채 뿐이다.
2. 생애
본래 이름은 이적(李迪)이었으나 후에 피휘로 인해 중종이 선비 언(彦)을 이름에 포함하여 개명하도록 명했다. 경주 양동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이다. 당시에는 남귀여가혼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외가인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으로 한양에서 유학하며 문과를 준비했는데 이언적이 10세 때인 1500년 요절했다. 이후 외삼촌 손중돈(孫仲暾)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손중돈은 김종직의 제자로 의정부 우참찬, 이조판서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명망 높은 사람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손소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된 사람이었다.
18세 때인 1508년 함양 박씨와 혼인하였고 20세 때인 1510년 외할머니 풍덕 류씨가 별세하면서 별급으로 종가(宗家)인 양동마을 무첨당(無忝堂)을 짓고 분가하였다. 젊었을 때 인근 사찰인 정혜사에서 학문을 닦았다. 당시에는 유불(儒佛)이 상호 보완 관계였기 때문에 이러한 학업이 가능했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러한 이언적의 수학 과정을 두고 ‘학문연원수수설(學門淵源授受說)’을 낳게 하였다.
27세에는 외숙부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서 일어난 무극과 태극에 관한 논쟁에 뛰어들었으며 이 근간이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 학파의 학문적 근간이 되었다. 37세에는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세자 인종의 스승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지평,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밀양도호부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530년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사간원 사간을 역임할 당시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에 반대했다가 김안로가 외척이 되어 부상한 직후 성균관 사예로 좌천되었다. 이후 낙향하여 자옥산에 별장인 독락당을 짓고 학문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가 종가인 무첨당으로 가지 않고 은둔한 것은 관직에서 사실상 쫓겨난 신분이었기 때문에 가족과 친인척들에게 피해가 미칠까 우려해서였다. 주자를 독자적으로 해석한 그의 학문관은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에 나와 있다. 그는 주자가 다시 살아나온다고 해도 자신의 해석에 동의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1537년 김안로의 실각 이후 복귀하여 조광조의 복권과 사림의 등용을 요청하였다. 홍문관 응교를 거쳐 1538년 홍문관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으며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1539년 세자시강원우부빈객이 되어 다시 세자 교육을 담당했다. 1542년 이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1544년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고 인종 승하 후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권신 윤원형(尹元衡)은 사림파를 축출하려 한다. 이에 이언적은 의금부판사가 되어 사림 윤임(尹任)파를 심문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그 해 12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인해 평안북도 강계로 유배되는데 이후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63세에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을 저술하다 1553년 사망한다. 저서에는 《회재집(晦齋集)》,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이 있다.
자식이 없어서 사촌인 이통(李通)의 아들인 이응인을 양자로 들였다.
이황은 그의 저술을 접하고 크게 영향을 받고 찬탄하여 직접 행장(行狀)을 지었다.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조선에도 주자를 훌륭하게 해석한 학자가 있는지 물었을 때 이언적의 저술을 보여주기도 했다. 선조 즉위 이후 1568년 그의 유문을 수집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며 1569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하고 그의 종가인 양동마을 무첨당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한 시호가 문원(文元)으로 내려졌고 종묘에 배향되는 종묘배향공신의 은전이 내려졌으며 1610년 문묘에 종사되었다.
핵심적인 공을 세운 인물은 이언적의 손자인 수졸당 이의잠(李宜潛)으로 선조가 서인들에 의해 부화뇌동하여 을사사화 당시 이언적의 소위 모호하다는 행적을 핑계로 그의 문묘 종사를 반대할 때 외종매부이기도 한 서애 유성룡을 움직여 변무(辨誣)하게 했고 백사 이항복이 <명종실록> 기록을 살펴 이언적의 무고함을 변백하자 그로부터는 이언적의 묘지명을 얻어내었으며 옥산서원 원장으로서 이언적의 문집 간행을 주도하는 등 조부의 현양과 가학의 전수에 핵심이었다.
3. 학문과 사상
이언적은 조선조 유학, 곧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것은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 그의 신념이기도 했다. 또한 사서육경과 그 중에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에 우선적으로 있다고 보았다.
그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자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 그에 의하면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된 것으로 이가 기보다 우위에 있으며 이로써 기를 통제하고 다스려야 된다고 보았다. 당시는 정치적으로 기득권인 훈구파와, 비교적 덜 부패했던 사림파가 있었으며 훈구파에 의해 사림파가 억압받는 입장에 서 있었다. 독창적인 이기론과 사회에 비판적이었던 것, 실천을 중요시한 점 등은 그대로 이황과 남인과 일부 북인 학파에게 전달되었다.
3.1. 이기론과 태극론
그는 앞서 본것처럼 이기이원론을 취하면서도 이와 기에서 이가 중심, 주도가 되어야 한다는 이우위설(理優位說)을 주창했다. 이는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영향을 주었다. 사물의 이와 기 중 이가 기를 다스려야 된다고 하였다. 이가 기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본 이우위설은 한세대 뒤 이황에게 계승되어 이기이원론이자 이가 기를 다스려야 된다는 이론을 확립시킨다. 여기에서 이는 인간의 도덕과 덕성이고 기는 평범하고 세속의 행동, 욕심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그의 계승자와 이황 학파를 비롯한 일부 사림은 기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동인과 그 후신인 남인 붕당의 이념이 되었다.
그는 27세 때 당시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어 이가 주가 되어야 한다는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손숙돈과 조한보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이 논쟁에서 이언적은 이기론의 주리론적 견해를 통해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의 견해는 이황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로 이어졌다.
3.2. 수신과 덕치
그는 하늘(天道 · 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 · 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 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이라 지적하였다. 1517년에 지은 〈오잠(五箴)〉에서 그는 사람의 도리로 '하늘을 두려워 함'(畏天), '마음을 배양함'(養心), '공경하고 신뢰하는 마음'(敬心), '허물과 잘못을 고침'(改過), '신념과 믿음을 독실하게 하는 것'(篤志)을 꼽았다.
그는 출사 후에도 중종과 인종 때에 경연과 상소를 통해 임금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된다는 점과 덕으로써 통치해야 됨을 역설, 강조했다. 1537년 중종에게 올렸던 상소문인 〈일강십목소〉와 〈진수팔규(進修八規)〉와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올린 〈서계 10조 書啓十條〉를 통해 정치와 민생, 국가의 통치원리를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경세의 근본으로 임금과 관료들이 먼저 솔선수범해야 된다고 지적하였다. 임금이 우선적으로 자기 수양을 게을리 하지 말고 덕을 쌓아야 된다 하였으며, 하늘의 도리, 곧 천도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 곧 인심을 바로잡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하여야 함을 역설, 왕도정치의 기본이념을 추구하였다. 또한 임금이 솔선수범하여 사치와 탐욕을 경계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의 도학적 경세론을 제시하고 있다.
《구인록》 4권에서 그는 유교경전의 핵심개념으로서 인(仁)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에 인의 본체와 실현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일강십목소〉에서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임금의 마음 씀씀이(人主之心術)'를 지적하였으며, 나머지
'언로를 넓히고 다양한 말을 들을 것',
'사치욕심의 경계하고 검소할 것',
'국가 근본의 배양',
'가정법도의 엄숙함',
'조정기강과 매사의 공명정대',
'인재취사의 신중한 선택',
'하늘의 도리에 순응',
'먼저 군자의 길을 닦고 수양할 것',
'일을 추진하기 전에 항상 살핌을 도모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그는 군주와 국가, 선비가 나갈 길로서 먼저 모범을 보이고 실천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저서 중의 하나이며 29권으로 된 《중용구경연의》에서도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9가지 덕목을 요약하여 9경(九經)이라 하여 수신(修身), 존현(尊賢), 친친(親親) 경대신(敬大臣), 체군신(體群臣), 자서민(子庶民), 내백공(來百工), 유원인(柔遠人), 회제후(懷諸候)로 요약하였다.
이로써 그는 사후 조선조 성리학 도통의 정통이자 도학의 학문과 실천에 모범이 되는 우뚝한 봉우리로 추모되었다.
4. 관련 문화재
이언적 종가 종택(宗宅)은 경주 양동마을 무첨당이며, 현재 종손(宗孫) 혹은 주손(胄孫) 이지락(李址洛)씨가 살고 있는데 그는 17대 종손이다.
경주시 안강읍의 옥산서원은 이언적을 배향한 서원으로, 1572년 고향에 건립되었으며, 1574년 선조로부터 사액을 받고 현재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경주 지역 향촌사회를 대표하고, 지역 유림들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이황을 배향한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 남인의 중심이 되어주었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보존된 서원으로,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