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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인생을 산다(MBC수기공모입상작)
내가 퇴직 후의 삶에 대한 계획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남들보다 먼저 직장을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주변의 반대는 사고의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우선 가족들의 반대는 주관이 뚜렷한 나에게도 밤잠을 설치게 하였다.
이처럼 가족들의 만류는 내 생에서 가장 힘든 고민을 하게 하였고 어떤 이유로든 미리 명퇴를 하였던 일은 지금 생각해 보면 나 자신과 가족들에게 도전을 한 셈이었다. 동료직원 중에 기회만 되면 그만두겠다고 말하던 사람도 막상 때가 되었는데도 쉽게 결정을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후배들을 위해 용퇴를 결정했고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과감하게 실행에 옮긴 것이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5년 전, 34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명예퇴임을 했다.
내가 다들 만류하는 명예퇴임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관리자(5급)로 진급을 하면서 나 자신에게 한 약속이 있었는데 5년만 근무하고 후배들을 위해 자리를 명예롭게 비워줘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명퇴 이유가 분명했던 나로서는 조기 명퇴를 결정했고 지금도 후회를 하지 않는다. 평생직장이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다시피 들어온 상황에서 직장을 스스로 그만두는 일은 누구에게나 큰 변화겠지만 나에게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군 입대 전 1973년부터 공직생활을 시작으로 2008년 6월 30일 퇴직하기까지 34년의 긴 세월을 마무리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것이다.
당시 내 나이는 56세였으며 정년(60세)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 보다 4년을 먼저 나온 셈이었다.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은퇴 후 3년을 잘 버텨라” 라는 충고를 들으며 제2인생을 위해 정든 직장을 후배들에게 부탁하며 직장을 떠나게 되었다.
막상 퇴임을 하고 나니 해보고 싶은 일들이 참 많았다. 특성상 어쩔수 없는 속박의 조직생활에서 우선 여유롭게 자유를 누려보고 싶었고 그 동안 해보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마음껏 하고 싶은 의욕과 기대에 찬 마음으로 은퇴자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퇴임 후 몇 달 동안은 등산도 다니며 친구들도 만나고 여행도 다녔고 그동안 해 보지 못했던 일들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나름대로 시간이 잘 갔고 이제 건강이 최고지하는 마음으로 건강을 챙기기 위한 일에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은퇴생활에 적응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무료해짐과 할 일이 없어 빈둥거려야 하는 내 자신의 모습에서 어느 순간 초라함과 쓸모 없어져가는 삶의 가치에 회의를 갖기 시작하였다.
이래서는 안 되지 않는가? 잘못 하다간 우울증 같은 병으로 나 자신의 고통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힘들게 만들 수 있다는 강박감에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할 일 없는 무료한 나의 일상, 누가 해결해 줄 것인가 라는 질문과 아직 나이가 젊은데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자책감은 정신적 고통은 물론 육체적 고통까지 수반하더니 병원을 자주 가야하는 일까지 생겼다.
현직에 있었을 때에는 아프더라도 시간이 가면 자연히 치유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퇴임 후에는 병원이 아니면 극복할 수 없는 상태로 몸은 쇠약해져 일주에 두 번 정도는 병원에 들려야 하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결국은 정신적으로 무장이 덜 돼 있었고 그 동안의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일 할 나이에 뚜렷하게 할 일이 없어 집안에서 소일하다보니 리듬이 깨져 병원이 아니면 해결 할 수 없는 일, 의욕은 있어도 막상 하고 싶은 일이 정리가 되지 않는 일 등을 시급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주변에서 걱정해준 것처럼 3년 안에 잘못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고심 끝에 나는 정신 줄을 더 이상 놓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조명을 하기 시작했고 그 원인을 하나씩 찾아 해결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지고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자신에 대한 분명한 철학을 몇 가지 갖고 평생을 살아왔다. 그것에 대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生子必滅(살아있는 것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不狂不及(미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이 그것이다. 이 사자성어는 내 삶의 철학이요,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의 슬로건이었다. 결국 열정 없는 사람은 삶의 가치도 없다는 평소 생각을 잘 담은 내용이다. 현직에 있을 때는 장단기 계획으로 지금 이 순간부터 5년 후의 내 모습과 10년 후의 모습에 대하여 고민과 상상을 하며 살아왔으며 10년 후의 자기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시간투자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에 언제나 계획을 세워 삶을 살도록 노력하였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다름없다는 생각도 가졌고 삶의 질이나 자아성취를 위해서는 목표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나는 청년시절부터 김소월 시집을 좋아하여 지니고 다녔고 시간 날 때 마다 유명한 시인들의 시집을 읽으며 습작을 해 왔는데 그것이 나를 시인으로 등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쉼 없이 메모지를 작성하고 신문에서 독특한 글귀들이 있으면 스크랩을 하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좋은 말들이 있으면 차량 운행 중이라도 잠시 차를 세워 메모하는 일, 오솔길을 산책하며 시적인 감성이 떠오를 때에는 가는 길을 멈추고 메모하여 두었던 것들, 그것들이 나에게는 습작을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글쓰기를 좋아해 그동안 습작한 시가 300여 편이 넘었다. 그 결과 2008년 시인으로 등단하는 기쁨을 얻으며 “현직공무원이 시인으로 등단”이라는 지역방송과 신문에 보도가 되기도 했다. 젊음이란 누구에게나 화려한 자산이다.
나는 지난 세월에 있었던 좋은 일들을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하여 설계에 들어갔는데 물방울이 무수한 세월을 통하여 바위에 구멍을 뚫는 것처럼 역동성이 있으면서 날로 새로워지는 삶으로 바꾸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다시 시작하자. 다시 뛰어보자, 이 세상 누구보다 활활 타오르는 열정은 갖고 있지 않은가? 아직도 살아가야 할 날이 너무도 많은데 이대로 늙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드디어 은퇴로 인하여 주어진 이 순간의 모든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라는 생각으로 내 마음속 생체시스템의 톱니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은퇴 후의 삶은 어떤 것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는 일이야말로 은퇴 후 닥치는 제2의 인생을 극복하는 길이며 자신으로부터 그 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창의성과 소질을 찾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큐멘타리로 제작돼 방영되는 동물의 왕국에도 보면 결코 강한 생물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환경에 잘 적응하며 자기 몸을 지혜롭게 변화시켜온 생물이 살아남는 것 또한 자연의 이치이며 진화에도 분명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퇴임 1년차에 나는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는 사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 둘째는 나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 볼 것인가 라는 두 가지 큰 프레임속에서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해 보자는 것이었다.
요즈음은 시간만 있으면 평생교육을 받을 수가 있다. 우리지역에서는 시민을 대상으로 무료로 하는 교육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모두 청강을 신청했고 아침에 일어나면 갈 곳이 있다는 것에 마음이 한결 평화로워졌다. 그해 나는 숲 해설가 양성교육과정과 숲 치유코디네이터과정을 수료 하였고 요양보호사 자격교육도 이수하여 생전에 처음으로 도지사가 발부하는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취득하였다. 남자가 무슨 요양보호사냐는 빈중거림과 색안경을 쓰고 보는 시각들을 무시한 채 자격과 소양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결과 하나 둘 수료증과 자격증을 취득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서양속담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모이를 찾는다.” 라는 말이 있듯이 밤낮으로 청강을 하며 이룬 성과이기에 마음은 이미 부자가 된 기분 이었다.
사람이 일상적으로 산다는 것과 자기성취를 위해 무엇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산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어 보였다.
또 자아실현을 위해 무료로 지도해주는 미술교실을 찾아 데생 공부도 시작하였다.
그림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직장 일을 하였고 음악, 미술 같은 예능하고는 아주 거리가 먼 자신이었지만 평소 해 보지 못했던 분야라 취미로 해 보자는 생각에서 일 년을 공부하다보니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고 그 해 가을 그룹전시회까지 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림을 공부하는 공부방에는 모두 여성이고 남성은 내가 유일해서 같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기까지는 용기도 필요했다. 전시회장에 걸린 연필로 그린 말, 연필로 그린 연예인 연필화를 보고 공부방 동료들이 일 년 만에 그린 그림치고는 참 잘했다고 하는 격려에 용기를 얻었고 은퇴 후 아무런 생각이 없이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는 이 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었다. 유명한 화가는 아닐지라도 전시회에 그림 두어 점 걸어둘 수 있는 자신감에 이미 벅찬 감격으로 자신감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그림에 대한 감각을 익혀 갈 무렵 또 하나 번듯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들을 내 것으로 찾아 소화시킨다면 분명 자아는 달라질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그것은 어렵다고 잘하지 않는 분야를 반드시 독학으로 소화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고의 시간과 고통이 따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불현 듯 스치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 한번 미쳐보자. 끝이 보일 때 까지 미쳐보자. 속담에도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으니 잘 될 거야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용기를 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풀피리를 연주하는 일, 첼로를 연주하는 일, 초원의 악기인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일,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유사한 소리를 가졌다는 톱을 연주하는 일이었다.
이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다면 최소한 우리지역에서 봉사활동도 가능하겠지, 더 나아가 불우 이웃을 위한 재능기부도 해야지 하며 야무진 꿈도 가졌다. 이러한 생태악기들을 다룬지 어언 3년, 나는 지금 공식적인 장소에서 연주 할 정도로 발전했다. 한번은 안산시교육청에서 강의요청이 있어 창의성개발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강의를 하였는데 풀피리연주와 톱 연주 시연, 생태공예와 나뭇잎예술에 대한 내용으로 강의하였다. 자율적으로 모인 200여명의 선생님들은 진지하게 강의를 받았으며 주최기관에서 동영상까지 찍어 배포한 적이 있다. 특히 톱이나 풀피리 연주는 계음의 자리가 없어서 절대음각인 계음을 익히는 데에도 1년 이상이 걸렸다. 모든 것은 자신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문제이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과거와는 달리 삶의 질이 향상된 요즈음은 색소폰이나 기타를 배우는 것이 홍수를 이룬다. 누구든지 악기 하나 다루는 게 개인의 소질이 아니라 당연한 일처럼 되어버렸다.
나는 또 다른 충동을 느끼며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 한다는 첼로를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중고 첼로를 연습용으로 구입하였고 시간이 날 때마다 기대에 찬 마음으로 첼로 활을 잡는다.
프로와 아마추어는 어떤 차이일까?
내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질문중 하나다. 결국 자신을 극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뜻으로 결론을 내리고 나는 이것을 이루기 위해 전념해 왔다.
또한 직장에서 공부하고 익혀 온 지식을 그냥 버려서는 안 되겠다는 신념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전문 기술을 전달해주는 강사로서의 역할도 해 봐야겠다는 의욕으로 기득 차 있었다.
마침 지역에서 청소년을 위한 체험강사로 봉사요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여 청소년을 위한 강의를 시작했고 시민교육의 메카인 평생학습센터에서 강사요청이 있어 2년에 걸쳐 야생화재배와 이용, 자생약초의 활용이라는 커리큘럼을 가지고 강의를 실시하였다. 은퇴 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나 역할을 찾다보니 봉사뿐 아니라 자존감까지 회복해 주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이렇게 사회봉사와 취미활동으로 보내다가 어느 날 숲 해설가를 뽑는다는 정보를 접하고 숲 해설가 모집에 응시하였다. 숲 해설가는 산림의 자원들을 청소년이나 관광객들에게 안내하며 해설하는 도우미로서 은퇴 후에 할 수 있는 일로는 괜찮은 직종이라고 생각한다.
숲속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계곡의 음이온을 한없이 느낄 수 있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숲속 생물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이치에 대한 정보를 전해준다는 자부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숲 해설가로 3년 동안 근무하며 많은 것을 느꼈고 보람도 느꼈다. 자연의 이치와 생태가치, 나무가 나뭇잎을 가을에 떨어뜨리는 일까지 모두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이치도 알았으며 생태계급간의 경쟁과 우리가 보지 못하는 숲속 세계에는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자연스러운 법칙에서 이 세상 영원한 것은 없다 라는 것도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 말로만 듣던 공생과 기생도 보았으며 종족 간에 치열한 생존을 위한 싸움도 목격했는데 우리인간의 생활방식들은 자연으로부터 도입되었을 것이라는 판단과 남아있는 삶의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는데 큰 지혜를 주었다. 숲 해설가는 환경과 매우 밀접한 일을 하는 전문가이다. 나는 또 다른 역할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였고 마침 환경부에서 지방 환경청의 환경강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원주지방환경청으로 환경강사를 자청했다. 공직생활을 하였던 경력과 현직으로 있을 때 외래강사로 활동을 하였던 경험들, 그리고 당시 숲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경력들이 참고가 되어 아주 수월하게 환경강사로 위촉되었다.
스스로 자존감을 갖는 일과 스스로 할 일을 찾는 일은 어쩌면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비타민 같은 활력을 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은퇴자들은 퇴직과 동시에 자신감을 상실하고 가장 중요한 자존감마저 잃게 되는데 스스로 극복해야 할 중요한 일일 것이다. 나는 요즘도 군부대, 학교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환경에 대한 강의를 하며 환경홍보대사로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강사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주경야독을 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문득 걸어보고 싶은 길이 생각나지 않던가?
나도 어느 가을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내가 다니던 옛 초등학교 운동장을 거닐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어린 시절 책보자기를 둘러메고 다니던 초등학교의 추억과 운동회를 치르던 시절이 그리워 초등학교 운동장을 걸었던 적이 있다. 매서운 가을바람 때문에 안간 힘을 쓰며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참 쓸쓸함을 느꼈다.
은퇴 후에 맞는 가을이라는 계절은 자신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으며 평소 생각해 보지 않았던 자신의 삶에 다시 한 번 의미를 부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가을을 연상하면 누구든지 붉게 물든 단풍잎이 생각나고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먼저 떠오르게 마련인데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프라다나스나무(양버즘나무)들이 많이 심겨져 있었다. 지금은 그 나무들이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커 있었고 늦가을인지라 나무 밑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은 바람에 이리 저리 뒹굴고 있었다. 프라다나스나무 아래에서 어릴 적 보던 나무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무가 이정도로 컸으니 내 나이도 그 만큼 먹었겠지? 라고 푸념을 하다가 스스로 떠나기 위해 바닥에 떨어진 잎 하나를 손에 주어 들었다.
그 열매를 땋아서 친구들의 머리를 몰래 때리던 일과 그 열매의 털이 목에 들어가면 몹시 가려워 못 견디게 힘들었던 기억들만 있었는데 평소 관심도 두지 않았던 가을 나뭇잎의 빛깔과 모양이 눈에 들어 올 때 나는 비로소 그 가치를 새롭게 부여할 수 있었다.
세상에 프라다나스 나뭇잎의 단풍 빛깔이 이렇게 고을 수 있단 말인가?
유명디자이너가 아니고는 도안해 낼 수 없을 정도의 기하학적인 나뭇잎의 디자인은 무엇을 닮아가려 했을까?
새로운 것을 느끼는 순간 감동을 받았으며 순간 스쳐가는 아이디어 하나가 어둠속을 비치는 빛으로 다가왔다.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떨어지는 프라다나스 나뭇잎에다가 그림을 그려볼까?
아니면 예술적인 기법을 통하여 나뭇잎에다 조각을 해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을 수는 없을까?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무엇인가 가치를 부여한다면 분명 새로운 창조물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포인트를 맞추기 시작했고 나뭇잎의 생리생태를 공부하며 여러 가지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나뭇잎은 과연 무엇인가?
나뭇잎의 역할은 봄여름이 되면 탄소동화작용을 하기 위한 일종의 기관이며 여름 내내 곤충들에게 먹이를 제공하고 가을이 오면 특별한 가치없이 부엽토로 변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는 물질이다. 그러나 사람이 나물로 이용하거나 약성 있는 물질을 축출해내고 더러는 풀피리를 연주하는 일에도 사용되어 나뭇잎은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일 년에 한두 번 도배를 하셨다. 문종이를 문에 바르고 곱게 물든 나뭇잎을 따 오라고하여 그것을 문종이를 바를 때 손잡이 있는 부분에 나뭇잎을 살짝 올려놓고 발라 문종이가 떨어질 때까지 보면서 그 빛깔과 모양을 즐기셨던 정성스러운 마음, 바로 우리 조상들의 지혜요, 일종의 풍류였다.
나는 여기에서 기발한 힌트를 얻어 짧은 시간에 나뭇잎예술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처음으로 국내에서 개발하여 개인전시회로 발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가을에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종이처럼 납작하게 말려 압착시키고 잎 뒤에 종이를 배접하고 배접한 종이에 그림을 그린 다음 수술칼(매스)로 양각 음각의 기법을 통하여 투각해내는 일로 엄청난 수고와 시간이 투자되어야 하는 일이지만, 피나는 노력 끝에 국내에 없었던 나뭇잎예술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예술을 탄생시키는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직장을 은퇴한지 불과 3년 만에 이룬 기적 같은 일이다.
은퇴 한지 얼마 안 되어 나뭇잎예술작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면서 지역예술작가들은 평생을 해도 해내기 어려운 일을 했다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동안 작업이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하고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전부 수집하여 방법을 찾아내고 어떤 재료들이 적합한지를 연구했고 실행과정에서의 실패와 반복, 그리고 시행착오 속에서 나만의 나뭇잎예술기법을 정립할 수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가 모두 노하우이다. 국내 최초 나뭇잎예술이라는 장르를 만들기까지 얼마나 힘든 여정이었는지는 오직 나와 우리가족만이 알고 있다. 나뭇잎 조각에 대한 지도를 받기 위해 백방으로 물색을 해봤지만 이에 대한 정보나 전문가가 없었으며 단계별로 작업과정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많은 시간은 보내야 했다.
난관을 극복하며 밤낮없이 새로운 기법을 찾아 동분서주한 결과 지금은 나뭇잎예술작가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나뭇잎예술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나를 포함해 세계에서 두 명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최초라는 것, 처음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대단한 파괴력을 가진 용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동안 나에게 주어졌던 영광스러운 일로 그 파괴력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중앙과 지방의 많은 매스컴에 소개됐고 초청전시회도 가졌는데 SBS TV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도 방영되었으며 MBC전국시대, KBS TV 중앙뉴스, KBS 2TV “생생정보통”, CCS충북방송, OBS경인 TV, KBS1 TV 청주방송국 문화마당 등에 방영되었으며 서울신문 외 30개 지방언론 매체에도 보도됨으로서 은퇴 후 새로운 인생설계의 주춧돌을 마련하게 되었다. 전직공무원으로 퇴임한 터라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서도 찾아와 2012년 4월에는 매월 발간되는 월간 공무원연금지 표지 모델로 실리는 영광도 있었다.
2012년 개인전을 하게 된 동기로 특별한 의미를 두었는데 나의 60번째 생일을 맞아 회갑기념 나뭇잎예술 “마지막잎새,그 이야기”(제천시민회관)전을 시작으로 하여 “나뭇잎예술 김종명 작가 초대전”(대전정부종합청사)을 비롯 “산의 날 기념 초대전시회”(경기도 일산 킨택스전시관)등에도 참여하였고 그 동안 쌓아온 경험이 바탕이 되어 개인 갤러리도 작게 운영하고 있으며 나뭇잎예술강습회, 나뭇잎예술체험프로그램, 생태공예체험프로그램 등을 알찬 계획으로 운영하고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던가? 나는 회갑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행을 가기 보다는 전시회를 선택한 것이 자아실현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이룬 셈이었다. 아무 욕심 없이 개최한 개인 전시회의 파급력이 이렇게 클 줄은 상상도 못하였다. 전시회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점심은 김밥으로 때워야 하는 일까지 생겼다. 한마디로 나뭇잎예술전시회는 대단한 반응이었고 기존 예술을 하는 전문예술인까지도 컨셉이 새롭고 신선하다면서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흔한게 나뭇잎인데 어떤 계기로 나뭇잎에 작품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는지에 대하여 질문하며 궁굼해 하는 방문객, 만지면 부서지는 나뭇잎에 어떻게 정밀한 그림들을 표현 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궁굼해 하는 배움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 그들은 모두가 나에게 보람과 용기를 주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갈망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차츰 매스컴에 알려져 보도되면서 제천지역은 물론 전국에도 널리 알려져 생태예술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실정이다. 한번은 중국행 비행기를 탔는데 스튜어디스 한분이 세상에 이런일이에 나오는 것을 보았다면서 나뭇잎예술작가임을 알아보며 사인을 요구하여 내가 가지고 있던 리후렛 형태의 도록에 사인을 해 주었더니 얼마 후에 스튜어디스 여러 명이 한꺼번에 몰려와 사인을 해준 적도 있다.
2013년에는 중학교 1학년 과학교과서에 광합성이라는 단락에 내 작품이 실렸으며 초등학교실습 교과서에도 사용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와 이미 저작권 승낙을 해준 상태이다. 교과서 제작업체에서 저작권료를 지급하고 활용하겠다는 제의가 있어 허락해 준 것인데 파급효과는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다
다니던 직장에서 언젠가 그만두어야 하는 은퇴자의 길, 때로는 외로움에 고독해야 하고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을 손 놓아 체념하기도 하는 게 필연적인 일이지만 은퇴자는 남은 삶을 위해 사회적으로 어떤 일들을 할 것인가 하는 설계와 어떻게 삶의 질을 높여 나갈 것 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정해진 꿈을 이루려는 목표의식,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몸 안에 있는 체액이 소진될 때까지 쉼 없이 서두르지 말고 온 힘을 다하여 노력해야 한다. 은퇴 후 제 2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보람 있다고 자신이 생각될 때 그것은 개인의 에너지뿐만 아니라 인류사회의 시너지효과를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은퇴 후의 삶을 위한 설계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모든 것이 우연히 이루지는 법은 없다. 사물을 골몰하게 관찰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분야를 개척하며 지금 주어진 상황을 거침없이 받아들이며 안주하지 말고 남다른 고통도 감내하며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일이야 말로 은퇴자들의 지혜로운 생각일 것이다.
중국의 고서 주역에 보면 “潛龍(물속에서 나오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용)은 勿龍(용도가 있어 승천할 수 있는 용)이다”라는 유명한 글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무엇이든 충분히 검토하고 온전한 실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과 사람은 언젠가 쓸모가 있기 때문에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뜻이므로 가슴에 새기며 살 일이다. 새는 살아남기 위해 털을 고르고 먹이를 찾는 일을 한다. 일부 곤충은 알에서부터 부화되어 깨어나면 생존을 위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자신이 나온 알껍데기를 먹어치우고 먹이를 찾는 일에 일생을 보낸다. 무엇이든 해야 한다.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은퇴자들은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라는 질문에 나는 자신의 소질에 부합되며 좋아하는 일을 찾고 죽는 날 까지 자존감을 버리지 말고 자신있게 살아가야 한다라고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은퇴자는 현직에서의 직위나 자존심 같은 것은 모두 버리고 평생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 자신의 개발과 사회의 공익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은퇴자의 삶은 지금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출처] 제2의 인생을 산다(MBC수기공모입상작)|작성자 김종명나뭇잎예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