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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발목을 잡은 반공포로의 실상
글 사진 : 김연려
한국전쟁을 휴전협상전쟁 또는 포로협상전쟁이란 별칭이 있다. 전쟁기간 3년 중 2년간이 휴전협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 중심에 자리한 것이 사상과 이념이 낳은 반공포로 문제다. 내일이 6.25 61주년이고 반공포로 석방은 지난주 토요일6월18일인데 58주년이 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입구 (사진
내 잔이 넘치나이다
화물선 Yuben Spring호는 1988년 3월 일본에서 출항 후 미국서해안으로 항해 중 선내도서실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책을 처음 만났다. 저자가 널리 알려진
기억은 애매하고 희미하지만 주인공 맹의순은 평양에서 월남한 남대문교회 장로의 아들로 신앙이 돈독했다. 6.25전쟁 발발 후 피난 길에 미군들에게 인민군으로 오인되어 포로수용소로 이송 되였으니 전쟁이란 극한상황 속에서나 있는 희한한 사례이다.
맹의순은 포로수용소 의무실 중 가장 열악한 중공군포로 병동에서 국적의 벽을 넘어 헌신적으로 포로들을 돌보았다. 한편 수용소 교회에서는 주일에는 설교를 담당했다. 필자가 지나온 삶 속에서 직접 만난 반공포로출신 인사는 5명인데 그 중 한 분이 서울 소재 국일교회
60년 전 반공포로였던 이 목사님과 2번에 걸쳐 약 1시간 국제전화를 통해 포로시절의 맹전도사에 대한 기억을 짜내며 들려준 이야기의 일부이다. 맹전도사는 “잘사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바르게 사는 것을 부러워하라” 고 한결같이 설교한 것이 기억된다며 그의 삶의 근본적인 흐름이라고 했다.
풍금으로 ‘할렐루야’의 반주를 할 만큼 음악에 자질이 있었고 농구 배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고 했다. 반공 포로석방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수용소교회 새벽기도 중 갑자기 쓰러져 하나님의 품으로 갔다. 그때를 상기 해서 인지 전화목소리가 변했다. 외모를 물어보니 키가 자신 보다 컸고 남달리 멋진 외모의 청년이라고 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전경 (사진
방공포로 오빠들을 면회한 안세옥 모녀
계덕명
바로 미군들에게 항복한 형제는 전쟁포로로 부산수용소를 거쳐 거제도로 그리고 휴전회담이 포로문제로 교착될 때 반공포로 격리수용을 위해 거제도에서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로 옮겨 졌다. 부산에서는 형제의 고모 되는 어머니와 딸 안세옥 모녀가 포로수용소로 면회 가 50cm 간격으로 4중의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만났고 마산 수용소로 이송된 후에는 포로면회소에서 직접 만나기도 했다.
1953년6월18일
“세계를 놀라게 한 반공포로 석방’-- 마산의 포로수용소에서는 저녁부터 입속말로 지시사항이 전달 되였다. “
부평 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 석방이 아주 늦어졌다. 따라서 미군측에서 사전에 철저히 대비한 상태에서 탈출이 시작되자 미군의 총기난사로 47명이 사망 60여명의 부상이란 큰 희생자가 나왔다. 반공포로인데 미군 경비병들이 위협사격으로 대처할 수는 없었든 것일까? 6월18일 전국 8게 반공포로수용소에서 탈출포로 중 사망자는 부평을 제외하면 7개 포로수용소에서 총14명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부평수용소에 있던 강춘형 포로는 포로석방 날 새벽에 탈출대열 중간쯤 뒤따라 가는데 총성과 함께 앞서가던 많은 동료포로들이 연발되는 총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였다. 순간적으로 겁에 질렸단다. 살자고 탈출을 시도했는데.. 앞으로 나가면 죽으니 뒤돌아 막사 쪽으로 힘 끝 뛰어갔다.
바로 이날 부평에서 탈출을 포기함으로 휴전 후에 판문점을 경유 풀려난 강춘형씨(83세)는 부산에 사신다. 필자 아내가 결혼 전 출석한 부산영도교회의 신도로 함께 신앙생활을 했고 필자내외가 교회에서 결혼할 때 결혼식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55년 만에 시드니에서 전화 드렸더니 우리부부를 반기며 아들 2명이 목사로 시무 중인데 한 명은 일본선교목사라며 아버지로서 흐뭇해 했다.
25,000명 반공포로 탈주
“25,000명 반공포로 탈주” 한단 밑으로 부제(副題)가 “휴전에 반항하는 의사표시(Gesture)”가 눈에 확 들어왔다. 바로 포로탈출 다음날인
당시
상 : 6.25전시회에 선보인 필자장서 중 이번 특집의 참고서적.
하 :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
9월28일 서울 혜화동거리에서 친구
이어지는 단편적인 내용의 일부를 뽑아 본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작은 공화국에서 처음에는 우익 반공포로 쪽에서 연대장 대대장등을 뽑고 조직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특권층의 부정 부패로 공산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나 폭동이 일어났다. “모두들 나와서 저 놈들을 때려 죽이자” 순식간에 특권층 17명중 16명이 살해되었는데 시체를 알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나만이 살아남았다.
나는 동료들이 사리사욕만 채우는데 급급한 것을 묵과하는 것이 싫었다. (주여 저를 이곳에서 죄짓지 않을 곳으로 옮겨주옵소서.) 폭동이 일어나기 한달 전 미 64야전병원의 위생병모집시험에 합격했다. 이북에서 한의학을 공부해둔 덕분이다.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은 이어졌다. 심지어 사람을 죽여 찢어서 철조망에 매달았다 “반동분자 새끼들은 쳐다보라!”. 사람을 죽여 각을 떠서 똥통에 버리는 일들도 자행했다. 포로 수용소의 밤은 그야말로 무법천지다.
시드니 한인구세군교회 한국전쟁 60주년 사진 영상 전시회중 전쟁포로 게시판
지난해 6.25 60주년 기념 사진전시회
지난해가 한국전쟁 60주년 이였다. 시드니 구세군교회에서는 사진과 도서 전시회 및 6.25영상 감상의 시간을 병행 했다. 4월초 교회 청년부에서 전시회를 위한 모임을 갖는 것을 알고 정말 대견했다. 시작이 반이라고 손창건정교 오진영부교들이 주동이 되고
전시회중 필자에게 뜻 밖에 눈을 끈 전시자료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9매의 사진이 게재된 대형전시판 이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포로 생활이라든가 시설 등 사진이 잘 배려 되어있었다. 필자는 거제도전쟁포로 관련사진 자료를 보면서 다음 해인 2011년 6.25에는 “전쟁포로 특집”을 꾸리자고 마음을 잡았는데 이번에 실현되어 몹시 흡족하다. 글을 끝내면서 서울에서
한국전쟁 포로에 관한 특집을 재조명하면서
호주로 이민온후 정년으로 직업을 내려놓고 그 뒤 15년간 자원 리포터( Volunteer Reporter) 로 호주동아와 호주한국일보에 한호 양국의 풀 뿌리(grass roots)들의 연결 고리를 찾아서 발표한 논픽션 스타일의 특집 발표가 100회에 접어듭니다. 그 중 22회 발표한 주제가 한국전쟁관련 기고로 가장 많은데 한국전쟁 50주년 특집과 60주년 특집이 각각 5편으로 총10편이 되고 포로관련 특집도 4편이 됩니다.
한편 호주 속의 태평양전쟁 관련 특집 12편중 포로관련 특집도 4편입니다. 한 편 또 한 편 특집을 발표할 때 마다 오랜 시간의 취재와 공부를 하다 보니 전쟁포로에 대하여 조금은 지식의 폭이 넓어졌다고 생각했었지요. 포로라면 한국전 반공포로와 호주군의 한국전과 2차대전의 포로에만 치우쳤던 어리석음을 이번에야 뒤늦게 알게 되였지요. 바로 국군포로에 대하여 무관심했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한국전쟁 중 북한에서 지옥 같은 역경을 이겨낸 포로들이 호주로 귀환할 때 호주에서는 개선장군 모양 환영일색인 것을 사진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주 당사자인 한국에서는 불행하게도 국군 송환포로들이 환영보다 남해안 통영시 인근의 섬 용초도로 일단 자리를 옮겨서 사상검증 절차를 받은 것을 인터넷 기고문에서 보았습니다. 현실적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이념과 사상의 문제로 어쩔 수 없는 절차라 이해하면서도 한국전쟁의 또 다른 비애라고 여겨집니다.
(이북에서 포로생활을 한 국군 귀환포로의 수기를 엮은 책은 본 적이 없습니다.) 괄호 안 은 이 글을 발송하기 2일전의 기록입니다. 그날 밤 한번 더 인터넷 탐색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저자
몇 장으로 소개된 글만으로도 정말 귀한 책 이여서 저자의 글에 찬사를 보네며 지구촌 남반부 시드니에서 서울로부터 이 책과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을 지인에게 부탁 해 우편으로 받아 읽고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돌려 볼 것입니다.
‘돌아온 패자’ 를 소개한 글에서 머리에 남은 내용의 일부입니다. 휴전 후 국군포로귀환으로 개성에 왔을 때 3년 만에 치약으로 이를 닦으니 입안이 헐었다고 했어요. 거울로 얼굴을 처음 봤답니다.
원문의 인용입니다. ‘대학 선배 한 분은 인민군에 지원했다. 이대로 수용소에 있다가 죽을 것이 뻔한데 살길은 인민군에 가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살아 돌아가거든 가족들에게 소식이나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포로교환 후 제일 먼저 선배 집을 찾아가 선배의 소식을 전했을 때 온 집은 울음 바다가 되었고 그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나는 도망치듯 선배 집을 뛰쳐나왔다.’
‘용초도 수용소 화장실 앞에 귀환 동료들이 모여 있었다. 거기에는 밧줄에 목을 매달아 죽은 동료 10여명이 있었다. 비극은 다음날도 7~8명 그 다음 날은 4~5명이 목을 매달았다.(중략) 죽기는 왜 죽어 사람으로 대접 못 받는 곳에서 굶주림과 추위에도 살아서 왔는데.. 주조하다가 “돌아온 패자”원문에서 용초도의 실화를 옴겼습니다.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들을 바로 눈 앞에 두고 말 입니다. 같은 연령대인 독자로 한번 더 맘이 무거워 습니다. 용초도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지금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관광지로 각광을 받는다고 소개 되여 있을 뿐입니다.
호주시드니 시간은 한국보다 한 시간이 빠릅니다. 세상이 좋아져 서울과 동시에 시드니에서 6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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