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계년사 2⌟의 동학농민혁명의 시작과 끝 2부 -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다
1894년 5월
( 대한계년사의 사건 일지는 음력으로 기록되었다)
이때 동학 무리들이 퇴각하여 장성을 점거하고 있으면서, 전라 감사 김학진에게 13조의 요구사항을 보내어 결재하여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1.전운사를 혁파하고, 옛날대로 읍에서 상납하게 할 것.
2.균전어사를 혁파할 것.
3.탐관오리들의 못된 버릇을 징계하고 내쫓을 것.
4.각 읍에서 많은 돈을 헛되이 써버린 아전들은 그 자신민을 죽이고 가족들에게 족징을 하지 말 것.
5.봄•가을 두 번 바치던 호역전(戶役錢)은 옛날의 예에 따라 호당 1냥씩 배정할 것.
6.각종 항목의 결전은 돈으로 거두되 부담을 균등하게 나누고 과도하게 나누지 말 것.
7.각 포구에서 사사로이 쌀을 교역하는 일을 엄금할 것.
8.각읍의 수령이 그 지방의 산에 매장하거나 장토를 구입하는 해위를 엄격하게 금지할 것.
9.각국 상인들은 각 항구에 매매하도록 하되, 서울에 들어와 시장을 설치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여러 곳으로 나가 제멋대로 행상하지 못하게 할 것.
10.행상과 보부상은 폐단이 많으므로 혁파할 것.
11.각읍의 아전들에게 일을 나누어 맡길 때, 뇌물을 받치지 못하게 하고 쓸 만한 사람을 골라 일을 맡길 것.
12.간사한 신하가 권력을 제 마음대로 휘둘어 국가의 일이 나로 그르치게 되니 그들의 관직 매매를 경계하여 다스릴 것.
13. 국태공(대원군)이 국정에 간여한다면 민심은 거의 다스려질 것. (민비는 13번째 요구사항을 보고 분노하였다.)
(대한계년사에는 폐정개혁안 12개조가 나오지 않는다.)
1894년 6월
○ 교정청을 대궐 안에 설치하다.
6월 7일, 고종이 일본의 제안에 따라 모든 정사를 개혁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교정청을 설치하였다. 영의정 심순택, 영중추부사 신응조, 판중추부사 김홍집, 영돈녕부사 김병시, 와의정 조병세, 우의정 정범조를 총재관으로 임명했고 지중추부사 김영수와 호조판서 박정양을 비롯하여 15명의 당상관을 임명하였다. 그들이 날마다 모여 상의하고 보고하여 시행토록 했다.
6월 12일, 신정희, 김종한, 조인승 등이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와 함께 남산 옛 병영 안에 있는 노인정에 모였다. 이튿날 다시 모여 폐단 개혁에 관한 다섯 가지 조항을 사리에 맞게 처리하는 일에 대해 의논했다.
제 1조 중앙 정부의 제도에서 지방 제도에 이르기 까지 적절히 고려하여 고치고, 인재는 빨리 선발한다.
제 2조 재정을 정리하고 부의 원천을 개발해야 한다.
제 3조 법률을 정돈하도 재판법도 마땅히 잘 살펴 정해야 한다.
제 4조 군비와 경찰은 서둘로 마땅히 바르게 고쳐 국내의 변란을 진압하도, 아울러 국가의 안녕을 보전하고 유지해야 한다.
제 5조 학교의 각 업무는 헤아려 정해야 한다.
6월 17일에 또 모여 의논했다.
○ 청나라 공사 원세개 등이 돌아가다.
원세개 등은 분위가가 좋지 않음을 보고 스스로 의구심을 품었다. 15일에 드디어 상민(商民)들을 거느리고 줄지어서 인천 제물포에 나아가 바다를 건너 자기 나라로 돌아가버렸다.
○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군대를 거느리고 대궐에 들어가다.
청나라는 일본에게 ‘군대 철수’를 권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청나라와 일본이 함께 힘을 합하여 한마음으로 정치를 대신 처리해준다면 이 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며 청나라와 함께 조선을 내정을 개혁을 제시하였다.
이때 심순택 등은 교정회의 때마다 은밀히 민영준의 지휘를 받고, 모호하게 그가 시키는 대로만 하여 한 가지 일도 교정하지 않았다.
○ 6월 21일 새벽,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군대를 이끌고 광화문(경복궁 정문)과 영추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지키던 병졸들이 깜짝 놀라 총을 쏘았으나 마침 누군가가 손을 흔들어 막았다.(고종이 사알을 보내 중지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일본 병사들이 합문으로 들어와 주위를 삥 둘러 겹겹이 에워싸고서 각 문을 지키자 안팎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부하를 보내 대원군이 대궐로 들어오는 행차를 맞이하도록 했다. 대신 김홍집 등 몇 사람이 비로소 대궐에 나아가 임금에게 위문을 드렸다. 그러나 수많은 백성들은 대궐 밖에서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랐는데 그 수를 다 셀 수 없었다.
(일본은 청나라에게 힘을 합해서 조선의 내정개혁을 돕자고 제안하였지만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고종이 거주하고 있는 경복궁 침범이었다. 그들은 국권의 상징인 왕을 인질로 삼고 대원군을 추대하여 친일파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로서 동학농민군을 부패한 관료와 양반 사대부를 일소하는 반봉건투쟁에서 방향을 바꾸어 침략자 일본에 대한 항일투쟁으로 결연히 돌아선다. 북접이 2차 봉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북접과 남접의 협상도 있었겠지만 일본으로 부터 나라를 구하려는 불타는 애국심의 발로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은 전 조선 농민들로 하여금 총궐기하여 치열한 항일투쟁에 나서게 만들었다. 전라도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가 전 조선,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 경상도, 전라도 남부지역까지 확산된 것은 임금이 잡혔으므로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전 조선에서 공유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
○ 민영준를 죄주어 임자도에 안치하다.
(민영준은 고종의 최측근으로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청나라 군사 청병의 실무를 감당하였다.)
일본군이 궁궐에 들어왔을 대 민영준은 궁궐 안에서 도망하여 숨어 있었다. 청나라로 가라는 왕의 은밀한 지시를 받고는 도망하던 중에 칠산의 백성들에게 붙잡혀 묶인 채로 평양에 있는 청나라의 군대에 넘겨졌다. 그러나 청나라 장수가 그를 석방했다.
(동학농민군의 위세 놀란 민영준은 고종에게 청나라 군인 청병을 권하였다. 고종의 허락을 받은 그는 원세개에게 소식을 전했고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알렸고 이홍장은 황제에게 알려 출병을 허락받았다. 이홍장은 출병 전에 천진조약에 근거하여 일본에 있는 청의 주재공사에게 일본 외무부에 조선에 청병 사실을 알리게 하였다. 일본은 청의 조회를 받고 바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청일전쟁과 조선 멸망의 비극은 자기 백성을 치기 위하여 청나라에 청병을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 총제영을 혁파하다.
김윤식을 강화 유수로 임명했다. 지시하기를 “각 나라의 사례를 보건대 그 군사 업무는 모두 친왕에게 두어 관할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해군과 육군의 군사업무는 대원군께 나아가 결정한다.”고 했다.
○ 일본인이 청나라 군대를 풍도에서 습격하여 패배시키다.
○ 궁궐 안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였다.
(참고로 군국기무처는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가 발의하고 대원군과 친일파 개혁 관료들이 참여하여 성립되었으며 7월 12일에 설치되어 개혁 추진이 끝난 1894년 12월 17일에 폐지하였다.)
○ 일본 군대가 청나라 군대를 성환에서 공격하여 패배시키자, 청나라 장수 엽지초가 등은 평 양으로 달아나다.
○ 관제를 고쳐 2부 8아문을 설치하였다.
6월 28일 군국기무처가 2부 8아문으로 고쳐 정하고 그 명칭을 궁내부, 의정부, 내무아문, 외무아문, 군무아문, 탁지아문, 농상아문, 법무아문, 학무아문, 공무아문이라 했다.
○ 군국기무처가 또 회의 안건을 보고했다.
(참고로 군국기무처는 최고정책 의결기관으로 폐지될 때 까지 제 1차 개혁 기간에 약 213건의 개혁안을 제정하였다.
청일전쟁 기간이었으므로 비교적 개혁파 인사들의 주장이 많이 반영되었다.)
1.공사 문서에 개국기년을 사용한다.
2.청나라와의 조약을 개정하고 각 나라에 전권공사를 특별히 파견한다.
3.문벌, 양반과 상민 등의 등급을 없애고 인재를 뽑아 쓴다.
4.문관과 무관의 높고 낮은 구졀을 폐지하고 단지 품계에 따른다.
5.조인은 자기에게만 연루되며, 본인 이외의 친족에게 연좌되는 법률은 폐지ᅟᅪᆫ다.
6.정실 부인과 첩 모두에게서 자녀가 없는 경우에만 비로소 양자를 허용한다.
7.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 이후에 결혼한다.
8.부녀자의 재혼은 신분의 귀하고 천함을 따지지 말고 그의 자유에 맡긴다.
9.공사노비의 법을 혁파하고 인신매매를 금지한다.
10.평민 중에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의견을 가진 사람은 군국기무처에서 글을 올려 여러 사람의 논의에 부칠 것을 허가한다.
11.중앙 관리 의복제도는, 임금을 볼 때 입는 공복은 사모, 장복, 반령착수를 사용하고, 평상복은 옻칠한 갓, 답호, 실띠를 사용한다. 일반 백성들은 옻칠한 갓, 두루마기, 실띠를 쓴다. 병사들은 근래의 제도를 따르되, 장수와 병사는 마땅히 다른 복장을 하지 않는다.
12. 각 관공서의 관제는 7월 20일에 정한다.
15. 역인, 창우, 피공은 모두 면천을 허락한다.<나머지 2조는 생략한다>
1894년 7월
○ 청나라와 일본 두 나라가 전쟁을 선포하는 조서를 반포하다.
7월 1일, 청나라가 전쟁을 선포하는 조서를 내렸다.
같은 날 일본도 전쟁을 선포하는 글을 내렸다.
○ 동학의 무리가 다시 일어나다.
이때 동학의 무리가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무리가 충청도 이인역에서 모이자 관리를 보내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진정시켰다.(경복궁이 침범당하였고 고종이 인질로 잡혀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위기감에 빠진 전 조선의 농민들이 동학도들과 함께 항일투쟁에 나섰다)
○ 김홍집을 총리대신에 임명하다.
○ 청나라 제독 위여귀, 총병 좌보귀 등을 보내어 평양에 주둔하게 하다.
조정에0서는 비록 새로운 곤제를 제정했으나, ㅁ두 청나라와 일본 두 나라ㅇ가 평양에서 벌이는 전투의 승패로써 대세의 움직임을 점치려고 했다. 대원군은 그의 손자 이준용과 모의하여, 몰래 전 교리 이용호를 평양에 보내어 청나라 진영과 내통했다. 또 내부 주사 박세강, 전 도사 박동진을 호서지방의 동학 무리에게 보내 군사를 몰아 북진케 하여 반역을 도모했다.
궁중에서는 전 교히 송정섭, 무관 출신 황재현을 보내 충청 감사 박제순돠 호서 지방의 수령들에게 임금의 비밀 명령을 전달하고, 호서•호남 두 지역의 동학 무리와 함게 힘을 합해 북상하도록 했다. 이는 평양의 청나라 군대와 함께 <민영준은 벌써 청나라 장수에게 비밀 명령을 전했다> 힘을 합쳐 일본 군대를 격파하고 새 정부를 뒤집어엎고자 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새 정부는 유명무실해지고 궁궐과 정부 사이에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충돌이 생겼다. 얼마 되지 않아 정누는 궁중과 대원군의 계략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박제순에게 몰래 지시를 내려 박세강과 박동진을 붙잡아 금강 나루에서 목베어 죽였다. 송정섭과 황재현을 도망쳐서 죽음을 면했다.
○ 일본과 공수동맹을 맺다.( 이 동맹에 근거해서 일본군과 관군이 연합하여 농민군을 토벌한다)
“대조선국과 대일본국 정부는 청나라 군대의 철수 사안을 조선국 서울 주재 일본국 특병전권공사에게 맡기고 그가 대신 힘을 다한다는 사항에 대해 진심으로 조약을 맺었다. 이후 두 나라 정부는 청나라에 대해 이미 서로 도와 공격과 수비를 함께 하기로 입장을 세웠다. 관련된 사실들의 원인을 분명히 드러내고 아울러 두 나라가 함께 하는 일이 분명히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뜻에 따라 아래의 두 나라 대신은 각각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 조관을 의논하여 결정한다.
제1조 이 맹약은 청나라 군대를 조선의 국경 밖으로 물리쳐 조선국의 자주독립을 공고히 하고 조선과 일본 두 나라가 누리는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일본국은 이미 기꺼이 청나라에 개한 공격과 수비를 다투는 전쟁을 떠맡기로 했으니, 조선국은 일본군대의 수시 진퇴에 따라 미리 군량을 마련하는 등 마땅히 처리해야 할 여어 가지 사항을 잘 헤아려, 반드시 도움을 주고 편의를 제공하는 데 모든 힘을 다 한다.
제3조 이 맹약은 청국과 화약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려 파기한다. 이를 위하여 두 나라 전권대신이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어 증거로 삼는다.
대조선 개국 5백3년 7월 26일. 외무대신 김윤식.
대일본 메이지 27년 8월 26일, 특명전권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
○일본과 청나라가 평야에서 크게 싸웠다. 청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총병 좌조귀가 죽고, 제족 엽지초, 총병 섭계림, 풍승가, 위여귀, 마옥곤 등이 모두 도망을 가다.
1894년 9월
○ 박영호가 일본에서 돌아오자 그 죄를 풀어주었다.
○ 일본과 청나라가 평양에서 크게 싸웠다. 청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총병 좌보귀가 죽고 제독 엽지초, 총병 섭계림, 풍숭가, 위여귀, 마옥곤 등이 모두 도망가다.
○ 장수를 보내 동학의 무리를 치다.
이때 동학의 무리들이 크게 번성하여 여러 고을에서 멋대로 날뛰면서 수령들을 살해했다. 삼남도 또한 그 피해를 입었는데, 곧바로 안산과 죽산을 침범하자 영관 이두황, 성하영 등를 보내어 그들을 쳤다.
○ 순무영을 설치하다.
동학의 무리들이 걷잡을 수 없이 날뛰자 순무영을 서울에 설치했다. 신정의를 양호 순무사D 임명하고 모든 군대를 지휘하여 상황에 따라 토벌하거나 달래도록 했다.
1894년 10월
○장수를 보내 동학의 무리를 치다
2023.4.18일 자시
우담초라하니 올리다.
3부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