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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척의 전설
금척(金尺)이라는 신기한 자에 대한 전설이 있다. 금척은 단군왕검이 천부경의 묘리를 터득하고 만든 황금자였는데, 형상은 삼태성(三台星)이 늘어선 것 같고, 머리에는 불구슬을 물었으며, 4절5촌으로 이루어진 신기였다고 한다. 금척으로 언덕을 재면 언덕이 평지가 되고, 흐르는 물을 재면 물길을 돌릴 수 있으며, 병든 사람이나 짐승들의 몸에 대면 모든 병이 깨끗이 나을 수 있고,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도 살려 내었다. 부루태자(단군조선 2대 임금)는 번조선에서 있었던 도산(塗山, 중국 안휘성 소재)회의 때, 후일 하나라 시조가 되는 사공 우에게 치산치수법을 가르쳐주었고, 금척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치산치수는 오행의 논리를 이야기한 것으로 많이 생각하는데, 유호의 요임금 비판으로 봐서 그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금척이야기는 사실일 것이다.
그림 10-1. 경주 금척리 고분군
그런데, (우왕에게 빌려주었던 것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오리지날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 금척이 2대 단군 부루 시절에 아사달의 천존고에서 분실되었다가,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거서간에 취임한 후, 하늘에서 천사를 보내 이 금척을 전수하였다고 한다. 역시 병을 낫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 소문이 나서, 중국의 한나라 황제가 이를 달라고 사신을 보내었다. 낭패를 당한 신라는 수많은 봉분을 만들어 묻어버렸는데, 사신은 결국 이를 찾지 못하고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그 마을이 지금도 행정구역명칭으로 남아있는 경주 금척리 고분군이다. 그런데, 박혁거세는 6촌의 촌장에게 금척의 이치에 따라 천지가 생긴 근본을 가르치고 옥관(玉管)의 소리를 고르게 하여 율려화생법(律呂化生法)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면 금척이 피리였던가? 분명 척(尺)이라고 했으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무왕과 김유신의 혼령이 용을 시켜 신문왕에게 만들게 한 ‘만파식적’도 무언가 관련이 있을 듯하다.
시대를 뛰어넘어, 이성계가 고려 말 장수로 있을 때, 어느 날 꿈에 신이 나타나 금척을 건네며 “이 금척으로 장차 삼한의 강토를 헤아려 보라”고 말했다. 그 후 이성계는 지리산 자락 운봉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개선하는 길에 ‘마이산’을 보고 그 형세가 꿈속에서 받은 금척을 묶어 놓은 듯하다 해서 여기서 30일 동안 기도하며 혁명의 뜻을 품었다고 한다. 전북 진안군의 마이산은 꼭 말귀처럼 생긴 좌우 대칭의 두 산으로 지금도 위로 자라는 신기한 고드름 현상이라던가, 이갑용 처사가 기를 모아 만든 신기한 탑사로 유명하다. 금척의 기(氣)가 흐르는 곳 같다. 조선시대 용상의 뒤편 병풍에 일월과 함께 그려진 산의 두 봉우리도 마이산을 표현한다.
그림 10-2 마이산
이러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한국판 인디아나 존스 영화를 만들면 정말 히트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이 금척은 생각하건대, 길이가 3 : 4인 컴퍼스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천부경에 그럴만한 구절이 하나 있는데, 그 구절은 운삼사성환오칠일(運三四成環五七一; 3, 4를 움직여 5,7,1을 돌려 이룬다)이라는 구절이다. 머리에 불구슬을 물었다는 것도 컴퍼스를 연상케 하고, 쌍둥이산인 마이산의 모양도 그렇다. 마이산의 말귀 모양도 그 사변의 비율이 3 : 4 형태와 비슷하다. 만파식적은 두개의 대나무가 합쳐졌다 떨어졌다 하면서 소리가 나는데서 유래한다. 3 : 4 컴퍼스를 90도 각도로 꺾으면 빗변의 길이는 피타고라스의 정리(고대 중국에서는 구고의 정리라고 알려져 있으나, 천부경의 해석이 맞는다면, 단군의 정리라고 할 만하다)에 의하여 5가 된다. 180도로 펴면 3 + 4 = 7 이 되며, 360도 회전하여 접으면 4 - 3 = 1 이 되니, 말 그대로 운삼사성환오칠일(運三四成環五七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이산이 좌우대칭의 쌍둥이 산이니, 이 컴퍼스 2개를 좌우대칭으로 붙이면, 3 : 4 : 4 : 3 비율의 접자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빙빙 돌려 측정하지 않더라도, 각 마디를 돌려서 만들면 1에서부터 10까지 모든 길이를 만들어 측정이 가능하게 된다. 손오공의 커졌다 작아졌다하는 여의봉도 이 금척을 뜻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더욱이 각 마디를 잇는 중심축에 빙빙 돌 수 있도록 구슬을 박으면 그 모양이 삼태성이 늘어선 것처럼 되고, 4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5촌이라는 길이 정보(1촌이 손가락 1마디라고 할 때, 전체길이가 5촌이면 사실 너무 짧다. 금척으로 만들 수 있는 한마디의 길이가 5촌이 아닐까?)도 있으니, 완벽한 금척 모양이 되지 않는가? 유레카!
그림 10-3 금척상상도
설마…… 이걸 실제로 만들어 보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지 시험해 볼 사람은 없겠지? 아니면, 또 피라미드인지 뭔지 같은 부적처럼 만들어 혹세무민하는 돈벌이로 삼을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혹시 그런 분이 계시면, 아이디어를 제공했으니, 필자에게 로열티를 주셔야 한다. ;-) 실제로 자신이 해석한 천부경에 따라 복잡한 금척 그림을 새긴 접시, 심지어 목걸이로 만들어 파는 분도 있던데…… 혹 아는가? 마이산처럼 신비한 기가 흘러 정신수양에 도움이 될는지…….
아무튼……. 설사 3 : 4 : 4 : 3 접자가 맞는다고 치더라도, 이런 하찮은 물건이 어떻게 병든 사람을 낫게 하고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천부경이 이야기하는 진짜 ‘진리의 말씀’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지 않는가? 병든 이를 낫게 하는 것도, 죽은 사람(아마도 식물인간)을 살리게 하는 것도 부모님의 마음과 같은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면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10-2. 도량형과 정신노동
그러나 필자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 꼭 이렇게 허무한(?) 소리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부도지에 의하면 태초에 율려(律呂)라는 소리가 있었고, 마고는 이 율려의 소리에 맞추어 사람들을 다스렸고, 사람들은 그 소리에 따라 마고의 젖인 지유를 먹고 살았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말 뜻은 채집과 수렵으로 거둔 ‘생산물’의 ‘공평한 분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공평하게 나눈 것인가? 그것은 그릇에 무언가를 담았을 때 나는 소리(즉, 율려)의 높낮이로 측정하여 구분한다. 컵에 물을 채운 실로폰이 있는데 물을 채운 양에 따라 컵을 두드리면 소리의 높낮이가 바뀌기 때문에, 역으로 소리를 듣고 분량을 나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원시시대에 인공적인 그릇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마고대성의 모습이라는 실달성(實達城)과 허달성(虛達城)은 한자 그대로 차고 비어 있는 것을 말함을 알 수 있다. 세종대왕이 음악을 정비한 이유도 무슨 예술적 취향 때문만은 아니다.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려면 도량형의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이었고 음은 곧 부피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의 지도교수님이 일본 궁내성 박물관에서 조선시대 유물인 됫박을 찍어왔는데, 신기하게도 은허에서 발굴된 됫박의 도량형과 똑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은 왕조마다 됫박사이즈가 다르다. 실제로 중국의 한의학 문헌을 참조한 허준조차도 꼭 필요한 일이었지만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일이 이 도량형 문제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왕조가 바뀌면 어떻게 하면 세금을 더 많이 걷을까 고민했기 때문에 됫박사이즈를 자기들 입맛대로 막 바꾸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방 문헌이라 하더라도 예전의 책을 계속 베껴왔기 때문에 현실에 안 맞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됫박사이즈가 은나라와 동일한 이유는 부루태자와 하나라 우왕의 도산회의를 실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한단고기에 의하면 도산회의의 주목적이 두 나라 사이의 도량형을 맞추기 위한 것(국경을 정할 목적도 있음)이었다고 한다. (한국은 그만큼 ‘비교적’ 착취가 없는 나라였고 왕조가 오래가는 하나의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음……그러나 어디까지나 비교적이다. )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기초는 이집트의 삼각주에서 발생한 기하학의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제세이화, 이기론 등에서 말하는 이(理)라는 것의 실체도 사실은 이러한 수학이다. 천부경도 수로 이루어져 있으며, 달력과 시계에서 보듯, 1년 12달, 365일, 24시간 모두 자연현상을 수량화한 것이다. 따라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수량화가 곧 문명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역사보다 수량화의 연원은 더욱 깊다. 인간의 역사시대보다 길었던, 똑같이 배분하여야 생존가능한 수 만 년 동안의 원시공산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수량화는 반드시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부도지의 지소가 따먹은 오미의 화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그 분배의 법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너무도 배고파서 포도를 따먹었을 뿐인데, ‘죄’라고까지 이야기하기는 솔직히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지소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전쟁과 지구 멸망의 공포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 10-4 컴퍼스와 삼각자를 든 여왜-복희도 (출처: 한재규화백)
복희-여왜도에서도 여왜는 ‘컴퍼스’를, 복희는 ‘삼각자’를 들고 있다. 마고대성의 부피의 단위를 재는 ‘소리’에서 측량 가능한 컴퍼스와 자막대기로 바뀌는 것은 획득경제(채취와 수렵)에서 생산경제인 ‘농업’사회로의 전환을 뜻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생산물(수확물)의 분배 뿐 아니라, 생산수단인 ‘토지’의 분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곧 복희와 여왜를 통하여 토지의 균등분배라는 정전제(井田制)의 기본이 만들어졌으며, 균등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다스림’의 발생은 단군왕검, 박혁거세, 이성계의 금척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제왕’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통상 인류최초의 분업은 수렵과 채집의 생산력 격차에 따른 모계사회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필자는 수치를 재고 분석하는 것, 즉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업이 인류의 가장 본원적인 분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정신노동의 담당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모계사회는 그 다음이라 볼 수밖에 없으며, 마고신화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에 수렵이나 어로를 주생활로 하는 사회는 어디까지나 남성원로가 그 담당주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본원적 분업구조를 뛰어넘는 ‘상상’속의 원시공산제사회(그야말로 완벽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러나, 필자생각으로는 이러한 아나키스트적(혹은 도가적) 상상은 아무리 생산력이 발달해도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 왜냐하면, 원시사회를 미루어 짐작가능한 아무리 저급한 원숭이사회라 하더라도, 또한 인간집단과 매우 유사한 난교(? 헉!……오해 마시길…… 발정기가 따로 없다는 뜻임)가 이루어지는 보노보 사회라도, 보스는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보스를 타파하지 않는 대신, 잉여산물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고대사회에서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준은 정신노동자나 육체노동자 모두 ‘균등한’ 생산물의 분배만이 최선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 본원적인 생물학적 단위에서 비롯된 연장자로서의 부모님의 지위 자체를 거부하는 ‘가족주의의 파괴’ 역시 있을 수가 없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부모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며, ‘진보’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사고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마마보이가 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랑과 이성은 분리해야한다.) 물론 본질적인 가족단위의 혈연사회가 아닌 경우, 더욱이 고대 우리나라 같은 혼혈사회에서는 실제로 조상들이 했던 ‘오가회의’나 ‘화백회의’와 같은 설득이 전제되어야 하는 만장일치의 공화제가 가장 이상적이었을 것이다.
10-3. 계급과 정전제
따라서 ‘계급’이란 이러한 본원적인 분업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계급은 어떤 의미에서든 ‘균등성’이 깨졌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잉여가 발생했을 때 계급은 비로소 발생한다. 다시 말하면 ‘지도’가 ‘지배’의 구조로 바뀌는 인간관계 속에 계급이란 말은 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급의 타파가 지도체제의 타파는 아니다.
원론(마르크시즘)적으로 계급은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의미하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계급개념을 반드시 그렇게 ‘소유’라는 자본주의적 혹은 물신적 ‘개념’으로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사회주의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관계임을 표현하기 위하여 자본주의의 모순을 ‘소유의 사적 성격과 생산의 사회적 성격’으로 규정하였듯이, ‘경제외적 강제’로 인한 지대가 발생했던 서구의 봉건제도(Feudalism)를 ‘중층적 토지소유’ 또는 ‘대토지 소유(경영)와 소토지 경영(소유)의 모순’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애매모호한 말로 꼭 만들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소유관계라는 개념이 있기 이전에도 이미 그러한 혈연적 가족의 확대된 연장으로서 씨족 및 부족사회의 ‘지도층’이었던 봉건영주계급(제후, 부족장)의 발생은 어느 인류 집단에서나 사실 본원적이었다.
더더욱 토지의 지력이 떨어져서 매해 옮겨 다니며 경작을 해야만 했을 고대 사회에서는 ‘소토지 경영(소유)’ 자체가 발생할 수가 없었고 그것을 기초로 경제외적인 강제를 동반한 ‘대토지 경영(소유)’가 일어났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유럽이나 동아시아나 개별경영이 가능하게 된 때는 ‘비료’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연작상경’이 가능해야 했기 때문에,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00여 년 전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필자 생각으로는 토지사유제와 더불어 바로 자본주의로 이행된 유럽이 토지공개념(왕토사상)에 묶여 자본주의가 아니라 관료주의사회로 이행된 동아시아보다 한 500년 이상은 느린 것 같다.
또한 고대사회를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우리는 현재 사회의 자유로운 ‘개인’ 개념이라는 잣대로 바라보면 많은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고대사회로 올라갈수록 기록된 역사에서 우리는 가급적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개념으로 해석을 시도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오래도록 지속된 ‘원시공산제’ 사회가 불과 몇 천 년에 불과한 역사시대보다 훨씬 더 길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웅녀를 실제로 한 마리의 곰이라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곰 토템 집단의 부족장이라고 생각하는 센스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최초의 ‘독점’현상도 ‘개인’개념으로 바라보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고대사회에서 가장 큰 대립은 개인과 개인이 아니라 ‘집단’을 대표하는 부족장간의 갈등이었다.
예를 들면, 번조선말(발해만 유역의 번한. 고조선이 아니다. 대부여로 이름을 바꾼 만주의 진한-진조선, 한반도의 마한-막조선은 망하지 않았다.)에 한나라와 강화를 하자는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간 조선상(朝鮮相)이라는 벼슬을 한 역계경이란 사람 이야기(한단고기가 아니라 백과사전에 나온 이야기임)를 생각해보자. 통일신라시대 서원경(청주) 근처의 촌락문서 분석에 의하면 한 호(戶)의 인구수는 10여명이라고 하며, 호를 연(煙)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밥을 해먹는 공동체인 가족단위를 이야기한다. 통일신라보다도 훨씬 더 오래전인 대가족구성의 고조선시대로 생각되지만, 이를 환산하면 역계경을 따르는 무리 2,000호는 최소한도 20,000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인구도 얼마 되지 않았을 고대사회에서 20,000명이라면 하나의 부족집단에 맞먹는 숫자이다. 환웅이 신시배달국을 열 때 데려온 알타이어족의 사람들도 불과 3,000명이었다.
따라서 정전제(井田制)를 맹자이야기로 착각되듯이, ‘개별’ 농가기준의 세금제도라고 볼 수 없으며, 원래의 정전제는 ‘씨족 혹은 부족’ 단위의 분배제도로 보아야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가들에게 혼동을 주는 부분이다. 느슨한 부족연맹체 형태의 국가 구조에서는 세금은 실제로 ‘조공’의 형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전제란 무엇인가? 이것은 최소한의 단위 씨족사회를 이야기하며, 8개의 농가가 한 토지를 공동으로 경작한다 함은 ‘생산물’ 지대가 아닌 ‘노동’ 지대였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적합한 용어가 생각나지 않지만, 물론 땅의 소유를 전제한 ‘지대’의 개념과 여기서 이야기하는 일종의 ‘노력봉사’의 개념에는 차이를 두어야한다. 이 노력봉사를 받는 한가구는 정신노동을 수행하는 씨족장의 가구이다. 이 부분이 국가에 바치는 세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세율이 1/10이 아니고 이렇게 되면 1/9이되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이 9가구(씨족장 포함)로 이루어진 씨족 공동체에서 발생한 전체 산물의 1/10이 조공 즉 세금으로 부족장에게 갔으며(그래야 9가구가 남은 것을 균등분배 가능함), 부족장은 그렇게 거두어들인 생산물의 1/2을 국가에 바쳤다. 그래서 고조선의 세율은 개별농가 기준으로 1/20 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후에 1/80에 불과하게 된 것은 그만큼 하부 부족단위가 방계를 쳐서 23 만큼 배분구조가 많아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유목이나 어로를 주생활로 하는 집단에서는 이렇게 땅 자체를 균등 분배한 것은 아니고 대체적으로 ‘이념적’으로 정전제에 준하여 사람의 머릿수를 기준으로 계산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은나라처럼 범람원의 집약적 농경사회에서는 중간 집단인 부족장(혹은 제후)의 분배 없이 바로 1/10 세율이 원칙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소위 총체적 노예제(? 동의하기 힘든 개념임)로 불리는 중동지방처럼 절대 왕정 국가와 유사한 모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은나라의 경우에도, 기자, 연나라, 강태공의 제나라, 백이, 숙제에서 유추되듯이 중간 부족집단이 분명 있었다. 부족장이 굶주리지 않는다면, 그들도 추가로 세금을 부여해 나누어 가졌다. 따라서 1/10세율은 정전제와 관계없이 가혹한 이중의 착취구조였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1/10 세율을 정전제와 결부(1/9 ≒ 1/10)시켰던 오도된 생각은 후일 조선시대의 과전법체제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던 것이 아닐까한다.
아무튼 한단고기를 읽어본 필자로서는 고조선 사회가 그렇게 아름다운 사회였다고만은 볼 수 없었다. 사실 초기 고조선은 법 없이도 사는 나라였던 걸로 보인다. 그러나 BC 1,000 여 년 최초로 8조 금법이 만들어지게 된 색불루 단군의 집권은 거의 쿠데타에 가까웠으며, 그로부터 천년 후에 광풍의 춘추전국시대에 개발된 철기문명의 유입과 번조선 지역 집단의 독점 및 고조선의 분열, 한반도, 만주, 일본에로의 대대적인 철기문명 부족집단의 연쇄이동 현상은 동아시아지역에서도 아주 특이한 형태의 ‘신분제’사회로 이행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즉 최초의 생산수단의 독점현상이 바로 철기문명의 독점이었고 이는 개인이라는 계급이 아니라, 부족이라는 집단이 주체였으며 부족과 부족의 누층적 구조가 한반도의 골품제라는 신분제의 발생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신분제 사회는 ‘전쟁’의 결과로 인한 것이며, 이질적 집단이 ‘집적’적으로 거주 지역을 공유하게 된 사회 예를 들면, 예전 장에서 이야기하였던 인도, 마다가스카르, 이스터섬 등에서 공히 발견되는 사회양식이지만 보편적인 양식은 아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도 포함된다. 마찬가지로, 과거 소위 인류발전 보편양식이라는 ‘역사발전 5단계설’에 준하였던, 고전 고대적 노예제 사회 같은 것은 지중해 북쪽 연안에서만 아주 특이하게 발견되는 생산양식이었을 뿐이다. 역사학자들은 ‘보편성’이란 미명으로 침대에 맞지 않는다고 발을 자르거나 늘려버리는 그런 버릇은 고쳐야 한다.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자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과학’이란 기본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에 의하여 수정되거나 폐기되는 것이기 때문에, 수정주의 운운하며 여타 이론을 무시하는 그러한 태도는 과학이 아니라 미신일 뿐이기 때문이다. 뉴튼의 고전물리학도,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마찬가지로 그 오류가 발견되고 새로운 이론이 정립되는 것이 현재의 자연과학인데 마르크스 이론만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미신의 대표적인 예가 소위 ‘창조론’이다. 진화론은 언제든지 폐기처분할 수 있는 과학이다. 그러나 진화 자체는 사실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과거 자연선택설이 틀렸다면, 돌연변이설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이다. 창조론에 어긋나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창조론을 버리지 못함은 좋게 말하면 신앙이요, 나쁘게 말하면 미신일 뿐이다.
금척은 자막대기에 불과할 뿐 진리는 아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금척은 제왕의 상징이 되며 사람들은 금척이라는 껍데기에 천부경이 말하는 인내천의 본질을 오도하게 되었고 이후 수천 년간 피지배의 고통을 받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내면에 알게 모르게 남아있는 미신의 타파……. 그것이 곧 혁명 아니 개벽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