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행로는 종종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내 군생활의 가장 치열했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전투지휘훈련단(BCTP)과의 만남이 바로 그러했다. 창설 초기, 이름조차 낯설었던 그곳에 첫발을 디딜 때만 해도 내가 한국군 과학화 훈련의 초석을 다지는 역사의 현장에 서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BCTP단은 1993년 9월1일, 육군교육사령부 예하로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그 뿌리는 멀리 미 육군의 개혁 역사와 맞닿아 있다. 베트남 전쟁의 실패를 뼈아프게 겪은 미군은 대규모 피해가 단기간에 발생하는 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해법을 고민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단 하나, 전쟁이 터지기 전에 '실전과 똑같은' 가상 전투를 수없이 경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렇게 NASA의 제트추진연구소가 개발한JESS(Joint Exercise SimulationSystem) 모델이 군단과 사단 전투지휘체계에 도입되었고, 이것이 바로 BCTP의 시초가 되었다. 컴퓨터 시물레이션을 활용한 워게임 모의훈련(Constructive)은 군단과 사단급 대부대를 실제 병력의 기동 없이도 완벽하게 훈련할 수 있는 혁신적인 체계였다. 특히 1976년부터 이어져 오던 팀스피리트(Team Spirit) 훈련이 1993년 중단되면서, BCTP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사격과 기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음, 민원, 안전사고를 예방하면서도 훈련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자신들이 직접 개발한 워게임 모델을 가지고 미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훈련하는 나라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드는 자부심이었다. 창설 초기, 우리는 육군교육사령부 별관의 좁은 공간에서 동고동락하며 기틀을 잡았다. 준장 윤영정 단장님의 지휘 아래 단 본부와 사후검토처, 대항군운영처, 전투모의처(War Game)가 편성되었고, 나는 부대의 핵심인
사후검토처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아 2년간 청춘을 바친 후 부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5년에는 남국진 후임으로 동기생 위윤형 대령이 전투모의처장으로 합류하기도 했다 자운대의 신축건물로 이전하며 마침내 온전한 조직의 면모를 갖춘 우리는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사단급 대상의 '백두산 훈련'을 개시했다. 백두산 훈련이 시작되는 날이면, 우리는 아침 대형버스 한 대에 몸을 싣고 훈련 대상 부대로 향하곤 했다. 사단사령부 복지회관에 짐을 풀고 나면, 그곳은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상 전장으로 탈바꿈했다.
통상 공격과 방어를 아우르며 3박 4일간 주야 연속 상황으로 진행되는 훈련 동안, 사단장들의 관심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훈련결과가 곧 그들의 지휘 역량을 평가하는 엄격한 잣대였기 때문이다. 북괴군 전술교리를 철저히 숙지한 대항군처는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집요하게 상황을 공세적으로 몰아붙였다. 전장의 안개 속에서 언제, 어디서, 어떤 돌발 상황이 전개될 지 몰랐기에 통제관인 나 역시 단 한 순간도 모니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수많은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훈련이 끝날 때쯤이면 몸은 마치 물에 젖은 솜처럼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진짜 하일라이트는 훈련 종료 후 참모총장과 군사령관 , 군단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는 1시간 동안의 사후강평(AAR)이었다. 단순히 잘잘못을 가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전투개요를 복기하며 주요 상황마다 "왜 그런 조치를 했는가?", "그 판단이 적절했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날카로운 질의 응답이 이어졌다. 사단장과 참모들, 지원부대장들의 얼굴에는 역력한 긴장감이 흘렀고, 때로 윤용남 참모총장의 직설적인 질문이 날아들 때면 장내에는 정적마져 감돌았다. 강평이 끝나고 부대로 복귀하는 길, 우리는 총장님의 지침에 따라 훈련결과를 꼼꼼히 수치화 하여 최종보고를 올렸다.
그것이 대한민국 육군의 전투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귀한 밀알이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러 윤영정 장군의 뒤를 이어 동기생인 오윤석 소장, 그리고 4대 단장인 나의 동기생 한광문 소장으로 지휘권이 이어졌다. 이제 BCTP단은 당당히 독립된 부대로서 고유의 부대 마크를 가슴에 달고, 10개 처와 직할 전투모의중대를 거느린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제 군은 4차 산업혁명의 거대한 파도 위에서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전 장병이 통합된 가상 공간에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훈련할 수 있는 첨단 과학화 훈련체계가 가시화 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무기 조작 절차부터 소부대 나아가 여단급에 이르기까지 가상 환경 속에서 실전과 다름없는 전투를 수없이 체험하게 될 때 미래 군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돌이켜보면 창설 초기 거칠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밤을 지새우며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훈련을 통제했던 우리의 땀방울이, 저 거대한 미래 훈련 체계의 든든한 주춧돌이 된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진다. 첨단 과학기술로 무장한 대한민국 육군이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화 훈련 체계 속에서 당당히 포효할 그날을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