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호(1905-1982)]
1905년에 전남 화순 군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전주고보, 휘문고보를 다니면서 고희동의 지도를 받았다. 나혜석의 그림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1926년(21세)에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8년에 綠鄕會를 창립하였다. 7회부터 선전에 출품하였다.
1931년에 졸업 후 귀국하여 백화점의 직원, 교사로 재직하였다. 40세에 광복을 맞았다.
오지호는 인상주의 화가로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인상주의 화풍의 그림을 그린 화가로 꼽는다. 1938년에 오지호-김주경의 원색 화보집은 유명하다.
그는 순수 회화를 견지하면서 신사조의 미술(예로서 피카소)을 거부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광주에 낙향하여 작품 활동과 후배 양성을 하였다. 말년에도 인상화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그림을 그렸다.
오지호
(1905 - 1982)
전남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서 한말에 군수를 지낸 오재영의 8남매 주에 막내로 태어났다. 본 이름은 오점수이다. 1920년인 15세에 전주고보에 입학했다. 이듬해에 서울로 올라가서 휘문고보에 편입학하고 고희동에게서 미술 지도를 받았다. 이때 같이 공부한 학우로는 이무영, 조택원, 이선근, 이마동 백두진 등이 있다. 17세 때인 1922년에 나혜석이 그린 ‘농가’를 보고 크게 감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23년에 고려미술원에 다니면서 뎃생 수업을 했고, 1925년(20세) 일본의 천단 화 학교에 들어가서 미술공부를 했고, 1926년에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동급생으로 김용준과 임학선이 있다.
동경미술학교에 재학하면서 7회 선전부터 작품을 꾸준히 출품했다. 1931년에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33년에 서울 동아백화점의 공고부에 입사했다. 1935년에 송도 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취직하여 10년 간을 보냈다. 이때 자신의 이름을 오점수에서 오지호로 바꾸었다.
1938년에 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을 발간했다. 이 화집이 우라나라에서 최초의 원색 화집이라고 말한다. 1944년에는 창씨 개명에 반대하다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자 함남 단천의 철산으로 피신했다. 그는 한자교육의 부활을 주장했고, 한복을 입고 살면서 전통의 보호에 힘을 섰다. 광주에 정착하고서도 초가집에 살 만큼 지사적 풍모를 지녔다. 광주에서 광복을 맞은 후에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양화부에 최고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48년에는 광주로 내려가서 정착한다. 이듬해에 조선대학교 교수로 취임하면서 광주에서 생의 마지막까지 보낸다.
그의 미술관은 추상미술의 부정과 구상 미술의 예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구상 미술 중에서도 인상파 미술에 집착했다. 그를 두고 우리나라 인상파 미술의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지호의 미술을 이야기 할 때는 1938년에 발행한 오지호-김주경 2인의 원색 화집에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송도 고보에 재직하던 무명의 화가 오지호가 화단에 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화가가 자기를 알리는 방법은 전시회가 전부였다. 그러나 오지호는 원색 화보를 발행하자 이 화집을 두고‘조국 자연의 맑고 투명한 색조를 되찾은 하나의 기념탑’이라고 했다. 김주경과 각각 10장의 그림을 싣고, 미술론도 피력했다. 오지호는 ‘빛이 회화 작품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오지호의 작품들에 일관되고 있는 것은, 다른 인상파 기법을 도입하고 있는 작가들에 비해 단순히 기법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우리의 자연으로 소화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한다. 비로소 인상파다운 인상파 화가로서 자신을 세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찍이 鄭圭는 오지호의 예술을 두고 유일한 인상파라고 평가했다. 그것은 다른 화가들에 의한 우리나라 풍경이 안이한 감상으로 빠지고 있음에 비해, 그는 "비로소 우리나라의 자연을 조형의 대상으로 삼은" 화가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그가 유일한 인상파 화가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요인으로 "일관성"을 들고 있다. 오지호의 후기와 조기 작품을 비교해 보면, 가히 다른 어떤 작가에서도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일관돼 있다. 그는 인상파화가로서 출발하여 거기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은 유일한 작가이다.
남향집은 오지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오지호가 일본서 미술공부를 하고, 1931년 서울에 돌아온 후 생계를 위해 1935년에 개성의 송도고보 미술교사로 일하면서 1935년에서 1944년까지 지냈던 개성의 초가집을 소재로 어느 화창한 봄날에 그려진 것이다. 본인 스스로도 작품활동에 문을 연 그림으로 지칭할 정도로 그의 회화세계가 뚜렷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등록문화재 제536호로 된 이 작품은 1939년 작으로 80x64cm 캔버스에 유채화다. ‘남향집’은 캔버스를 시원하고 대담한 구도이다. 초가와 고목으로 종횡의 균형을 잡으면서(사진은 흑백이나 원 작품에서)고목의 그림자가 파란색으로 초가에 드리웠다. 빛은 강렬할 때 푸른빛을 튕긴다. 빛이 작품을 강하게 잡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 문을 나서는 빨간 옷을 입은 계집아이는 오지호의 둘째 달 금희이며, 돌벽 밑 양지에서 졸고 있는 흰 개는 애완견 삽사리라고 한다. 어린 금희가 손에 쥔 것은 개 밥그릇인지 모른다. 금희가 다가가면, 바닥에 닿은 배를 작게 들석이며 졸던 삽사리는 눈을 천천히 뜨고 꼬리를 부드럽고 정겹게 흔들 것 같다. 초가집 위로 청명한 파란 하늘이 펼쳐있고, 화폭은 얕은 채도의 색상을 써서 이 작품은 맑고 투명한 공기가 흐르고 있는 것 같다. ‘남향집’이 주는 메시지처럼 오지호는 서양의 인상주의를 한국적 감성으로 토착시킨 대표적 화가이다.
1931년의 2회 녹향회전에는 대작 ‘조춘’을 위시하여 13점이나 출품했다. 녹향회가 정신적 지주로 사숙했던 ‘세잔'이나 ‘칸딘스키' 등 인상파의 계열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색채를 향토적 분위기로 끌어들여 절묘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931년 녹향회의 2회 전람회에 가담하면서 동족 서양화가들만의 유일한 독립단체로서 ‘조선 양화의 발전 촉진과 그 대중화’를 내세움으로써 당시 그림을 그리던 젊은 예술가들이나 동료들로부터 독립 자주정신이 강렬한 작가라는 평도 받았다.
吳화백은 2세대 서양화가다.고희동이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일본을 통해 유화를 한국에 소개했다면 오지호는 1세대 서양화가들의 작품에 묻어 있던 일본 감성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한국 서양화의 출발을 예고했다.단순한 서양화 기법의 차용 에서 한발 나아가 한국의 모습을 가장 한국적으로 그린 최초의 한국 서양화가인 셈이다.
광복이 되자 한국 미술계는 새로운 질서를 요구했다. 식민지 시대의 청산과 민족미술의 수립으로 부산했다. 오지호는 한국 민족의 공통되는 감성은 쾌적한 것이다. 조선사람은 예로부터 선명한 색채를 좋아했다. 미술에서도 그러한 정신과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주에 낙향하여 한국의 산하를 한국의 색채로 표현하기 위해서 무등산을 수없이 그렸다. 그리고 광주 금융조합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그리고 광주지역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오지호에게 공부한 화가가 오승우, 강길원, 전양욱, 조규일 등이다.
1959년에는 ‘구상예술선언’이라면서 구상예술과 추상예술은 별개의 예술이라는 선언을 함으로 미술계를 요란하게 했다. 이때는 한국에 추상미술이 강하게 대두하던 시기였다. 구사예술선언 이상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미술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한글폐지론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로서 1969년에 한자교육 부활을 위한 ‘한국 어문 교육 연구회’를 이희승 등과 창립했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예술 사상이 전통에 강한 뿌리를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1959년에 조선대 교수직을 사임했고, 1961년에는 5. 16으로 1년 간 옥고를 치뤘다.
말년의 작품도 30대 초반에 이룩했던 인상파적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한국의 산하를 밝고 명랑하게 그렸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한국을 그렸더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그렸더니 한국” 이더라 했다.
이미 많은 화가들이 우리나라의 자연을 모티브로 한 그림을 그렸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익힌 새로운 서양화의 기법으로 그것을 묘사했을 뿐이지 조형의 대상으로서의 자각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는 자연은 조형의 대상으로서 투시된 것이 아니라 단순한 모티브로서의 자연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인상주의와 자기 방식의 민족미술의 진로에 획기적인 역할을 못했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형식에 치중했을 뿐 작품에 담겨지는 내용 즉 메시지에 대한 진취적 의식을 여전히 실천하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선비같은 꿋꿋한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고수한 것은 높이 인정할 만하다.
1968년부터 다년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1973년 예술원 회원에 선임되어 그 후 원로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국민훈장 모란장·예술원상을 수상하고, 국전 운영위원에 추대되었다. 1974년 유럽 각지의 문화계를 시찰하고, 1980년 아프리카 미술계를 시찰하였다. 1082년에 노환으로 눈을 감았다.
2002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두 아들도 오승우와 오승윤(1939-2006)도 유명 화가가 되었다. 손자 오병욱, 오상욱, 오병재도 서양화가와 조각가로서, 화가 일가를 이루었다.
오지호 화백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일이지만 둘째 아들 오승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실도 현대 한국 미술계에 크다란 파문을 던진 사건이었다.
오승윤은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전남대 교수로 재직하다 작품세계에만 몰두하기 위해 대학직을 그만 두었다. 여러 번에 걸친 국전의 특선과 국전 초대작가가 되었다. 한국 현역작가 초대전도 가진 중진 화가였다.
프리미엄 조선에서 인용한 기사는 이렇다.
“그는 자신보다 네 살 많은 누나의 아파트에 다녀오던 길에 8층에서 투신하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화가의 최후였지요. 그가 죽음에 앞서 남긴 유고도 있습니다. 원문을 인용해보기로 합니다.“출판사이기 때문에 잘하리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저작권을 모르는 작가는 쉽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었다. 계획적인 계약서다. 혼란스러운 것들을 수정하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어차피 계약을 해지하면 변상하는 작품과 호수를 이야기할 것이다….”
기사의 내용을 조금 더 인용하면
인척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린 명작들이 사기를 당해 회수할 수 없는 지경에 몰린 것이었습니다. 지금 그의 그림들은 오간 데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일로 상심했습니다.
장사꾼 출판사와 순진한 화가 사이에 갑질과 을이 있었다는 기사 내용이었다. 유명한 화가의 집안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미술 시장의 모습이 투영된 사건이라서, 충격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