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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신 은혜. わたしに与えられた恵み。(2024년 8월 25일 주일예배)
본문 갈라디아서 2:6~10
갈 2:6 그 유명하다는 사람들로부터 나는 아무런 제안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든지, 나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 유명한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런 제안을 하지 않았습니다. 7 도리어 그들은, 베드로가 할례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과 같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8 그들은, 베드로에게는 할례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사도직을 주신 분이, 나에게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사도직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9 그래서 기둥으로 인정받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나와 바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서, 친교의 악수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이방 사람에게로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사람에게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10 다만, 그들이 우리에게 바란 것은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고 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내가 마음을 다하여 해 오던 일이었습니다.
6. おもだった人たちからも強制されませんでした。――この人たちがそもそもどんな人であったにせよ、それは、わたしにはどうでもよいことです。神は人を分け隔てなさいません。――実際、そのおもだった人たちは、わたしにどんな義務も負わせませんでした。7. それどころか、彼らは、ペトロには割礼を受けた人々に対する福音が任されたように、わたしには割礼を受けていない人々に対する福音が任されていることを知りました。8. 割礼を受けた人々に対する使徒としての任務のためにペトロに働きかけた方は、異邦人に対する使徒としての任務のためにわたしにも働きかけられたのです。9. また、彼らはわたしに与えられた恵みを認め、ヤコブとケファとヨハネ、つまり柱と目されるおもだった人たちは、わたしとバルナバに一致のしるしとして右手を差し出しました。それで、わたしたちは異邦人へ、彼らは割礼を受けた人々のところに行くことになったのです。10. ただ、わたしたちが貧しい人たちのことを忘れないようにとのことでしたが、これは、ちょうどわたしも心がけてきた点です。
지난 주일에는 제가 한국으로 휴가를 다녀오는 사이에 요코하마영광교회의 부목사님이신 임성열 목사님께서 은혜롭고 귀한 말씀으로 섬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지난 주일에 전했던 말씀에 이어서 오늘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는데요. 두 주 전에 말씀을 전했던 메시지를 한 마디로 다시 상기시켜 드리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모든 순간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입니다. 무엇인가를 제멋대로 무절제하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것이 자유인 것처럼 유혹하는 시대의 어둠을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매일 하루에 하루만큼 주님을 바라보며 말씀과 동행하는 진정한 자유를 영생하도록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계속해서 바울의 이어지는 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2장 1절부터 시작하는 내용에 포함된 부분인데요. 아라비아에서 3년을 지내고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에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 밝히고, 친교의 영역을 확장시켰지요. 그 후 14년 동안 바울은 예루살렘의 제자들과는 별도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14년 만에 사도들과 다시 만나게 되면서 복음전도의 방향과 지평에 관하여 대화하고 교제하였던 것인데요. 이 내용 속에 몇 가지 주목하며 주님께서 주신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첫째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사도들의 권위를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한 도구로 삼지 않았던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미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께 부름을 받고 다시 보냄을 받은 12명의 사도들에 대한 영적인 권위가 점점 명확해지고, 또한 중요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곤란을 겪었던 유대인들은 스승인 예수님이 죽고도 여전히, 아니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는 열 두 사도의 존재에 대해 매우 걱정하면서 본격적으로 복음전도를 핍박하고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분봉왕 헤롯은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도 잡아서 옥에 가둔 적이 있지요.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1(행 12:1-4)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가 베드로를 옥에서 직접 구출하고, 교회를 멸하려고 했던 헤롯은 벌레가 먹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행 12:23)
그 뒤로도 교회는 공식적으로 박해를 받았지만, 유대 사회에는 오히려 복음이 퍼져나가며 믿음이 굳어해 지는 부흥을 경험하고 있었지요.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놀라운 부흥의 주인공들인 12명의 사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날로 견고하고, 깊어지고 있었지요.
인간적으로 보면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사도들을 만나러 간다고 하면 아마 그들의 이름과 권위에 의지하여 보다 영향력이 있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한다고 오해할 만 하기도 한데요.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또렷하고도 뚜렷하게 천명하여 말합니다.
그 유명한 사람들로부터 어떤 제안도 받지 않고, 또한 그들은 자신의 활동에 그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고 말이지요. 그러면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이 말씀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신 10:17)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의 중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물론 사람은 외모와 외적인 조건과 환경, 그리고 세속적인 가치관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으로 보고 계신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혹은 마음을 통해 보시는) 이유에 대해서 이런 감동을 느끼는데요.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외적인 조건과 환경과 여건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지요.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모두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좋게 여기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외면적 가치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 1:31)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으십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아름답기 때문이지요. 외모에 대해서 평가하고, 신경을 쓰고,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인간이 가진 안목의 정욕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외모는 값비싼 장신구로 꾸미는 것보다 단정하게 관리하는 것이 성도다운 것이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딤전 2:9-10)
물론 누군가 사람을 만나거나 공공장소에 나가면서 용모를 단정하게 살피지 않고 가는 것은 무례한 일이 될 수 있지요. 또한 어떤 직업이나 삶의 자리에서는 외적인 여건과 조건도 무시할 수 없는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만 신경 쓴다고 상대방의 시선이나 입장을 완전히 신경 쓰지 않고 무시하는 것도 실은 사람답지 않은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의 마음은 더러워지기 쉬운 곳이며, 또한 더러워진 마음에서 모든 악행이 뛰쳐나와 결국 외면까지 더럽히고 만다고 말씀하시며 경고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 7:20-23)
따라서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떤 외모를 가졌느냐 보다, 우리의 마음과 내면세계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가를 주목하고 계시지요. 그렇게 먼저 복음과 말씀, 그리고 기도로 관리하여 정결해진 내면에 어울리는 외면을 갖추는 것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모습인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도 마음과 내면, 그리고 가치관과 생각의 관리에 대해서 반복하여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혜에 관해 분명한 태도와 자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14년 만에 사도들과 재회하여 대화하고 합의한 내용의 핵심을 오늘 본문은 7절~9절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한 마디로 열 두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다는 것인데요.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과 일거리를 은혜라고 표현하는 점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은혜’란 원어로 ca,rij(카리스)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여러가지로 해석이 되는데요. 특별히 선물의 의미가 가장 강합니다. 그저 거저 받는 것,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상대의 기쁨을 위해서 주는 것이 바로 ‘카리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선물은 모두 카리스, 즉 은혜인 것이지이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이든, 아니면 소유물이든, 혹은 마음의 감동이든, 재능과 심지어 외모까지도 실은 하나님께서 내게 선물하신 ‘은혜’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사역과 사명이 하나님 은혜(하나님께 받은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쉼 쉬며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좋은 것이라도 그렇지 못한 것이라도 모두 은혜인 것을 믿습니다.
사람들은 외적으로 혹은 현실적인 형편에서 좋은 것, 혹은 성공과 성취해 낸 것만을 은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곧 은혜인 것을 믿습니다.
이번에 한국에 다녀오면서 네 번의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요. 처음에는 세 번의 설교만을 준비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정 도중에 안부 전화를 했다가 갑자기 한 번의 설교를 더 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애초에 준비했던 내용을 불가피하게 수정하고 보완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구요.
휴가를 가서 마음과 몸이 조금 편하고 즐겁고 여유롭게 지내길 원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또한, 갑작스레 주어진 일정과 스케줄에 다른 일정이 영향을 받거나, 이미 준비된 설교원고를 갑자기 변경해야 할 변수에 대응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부르심에 응답을 하면서 오늘 본문에 바울이 고백하는 은혜에 대해서 조금은, 아주 조금은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사명과 삶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시며 기억하고 계실지를 미약하게나마 조금은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유명하다는 사람들, 유력하다고 여겨지는 열 두 사도의 존재와 귀중함은 인정하고 수용하였지만, 그들의 현실적인 영향력에는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사람을 함부로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자신에게 고유하게 주신 이방인을 향해 전도할 사도로서의 사명이 은혜임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런 바울의 가르침과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며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의 시선을 더욱 바라보기에 외모를 관리하며 사는 인생을 살면서도 내면을 정결하게 하는 영생을 사는 자신을 지키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육신은 외모와 혹은 가시적인 성과 및 성공으로 좋은 평가로 인정 받기를 원합니다. 세속적으로 얻어진 성취의 열매에 존재와 삶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지요. 현실의 일상에서 뿐만 아니라, 믿음 생활에서도 여전히 그런 영향력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은 것이 우리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육신이 성취한 것으로 나의 가치를 헤아리지 않으십니다. 오로지 주님께서 맡겨 주신 모든 사명을 은혜로 알고, 믿어 마음을 관리하는 이들의 중심을 살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임재하심을 믿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세와 태도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직 마음의 중심에서 은혜를 지킬 때 가능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음의 중심을 말씀과 기도로 채우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놀라운 은혜로 충만한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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