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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강 창세기 26:1~5 내가 지시하는 땅에 52.54
26.10.19(월)
이삭은 40세 때에 리브가를 만나서 60세 때에 에서 야곱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두 식구가 네 식구가 된 것이죠.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때에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삭과 아브라함 나이 차이는 100세가 되는 것이죠.
따라서 이삭이 60세의 쌍둥이 아들을 보았다면 아브라함 160세가 됩니다. 그죠 근데 그 아브라함은 몇 세까지 살았다고요.
175세 그러니까 이삭과 리브가 부부에서 에서 야곱을 낳을 때 아브라함은 분명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15년 동안 두 손자와 함께 산 것입니다.
여러분 그 아브라함이 나이 들어서 두 손자를 보고 얼마나 예뻐했겠습니까? 얼마나 자주 같이 밥을 먹고 또 얼마나 그 아이들하고 자주 놀았겠습니까?
명절 때가 되면 또 한데 모여서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전혀 초점을 더 이상 맞추지 않습니다.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낳기도 전인 이야기를 전해주는 그 전인 25장 서두에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었다 이렇게 하고 창세기의 카메라는 살아있는 아브라함을 더 이상 비춰주지 않고 이삭 가정만 비춥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정의하셨거든요.
이삭은 결혼하면서부터 그 가정의 가장은 이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거기에 있지만 하나님의 그 원칙에 의해서 아브라함으로부터 독립된 그 가정 가장이 이삭이고 그 가장에 의해 영위되어가는 그 가정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전혀 비춰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결혼한 자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 또 철저하게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카메라에서 제외되는 이 아브라함이 초연하게 받아들인단 말이죠.
그래서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아브라함의 전 생애를 볼 때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라고 조상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믿음이 절정을 이룬 것은 실은 이삭을 결혼시킨 이후였다. 결혼 때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였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는 소위 그 유명한 팥죽 사건을 보았습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거여요. 더 엄밀하게 얘기하면 야곱이 의도적으로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을 사버린 것입니다.
얼핏 보면 그것은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 두 사람 사이의 지극히 사소하고도 간단한 사건인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실은 그것이 아니라 이삭과 리브가 에서 야곱 이 네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그 사건은 인간사의 한 단면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7절을 다시 보십시다.
그 아이들이 장성함에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 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한 어머니 배에서 태어났는데 아이들의 성격이 각각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큰아들에서는 들에 나가서 사냥을 즐겨 행하는 호방한 아들이 되고
둘째 아들 야곱은 그저 샌님처럼 집 안에서만 노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28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아버지 이삭은 아마 육식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막 잡아온 신선한 고기를 좋아했나 봐요.
그래서 아버지는 두 아들 중에서 에서를 사랑했다는 겁니다. 편애했다는 거예요.
또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은 샌님처럼 집 안에서만 노니까 아무래도 엄마하고 있는 시간이 많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엄마 리브가는 둘째 아들 야곱을 편애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 따로 있고 엄마가 사랑하는 자식이 따로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게는 아들 4명이 있잖아요.
요즘은 제가 그런 질문을 안 받는데 아이들이 어릴 때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이 누가 제일 좋으냐는 거예요.
꼭 아이들한테 아빠가 좋니 엄마가 좋니 묻듯이 그래서 저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해가 참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자식 중에 더 사랑스러운 자식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다 똑같이 사랑스럽잖아요.
자식 중에서 더 신뢰하는 자식은 있을 수 있다고 그랬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가령 한 자식은 수학을 잘해요.
그러면 수학에 관한한 수학 잘하는 그 자식을 더 신뢰할 수 있죠.
그 말을 다른 자식이 수학을 못한다고 덜 사랑합니까? 아닙니다. 한 자식은 예술적인 재능이 더 뛰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술적인 문제에 관한한 그 자식의 말을 더 신뢰할 수 있죠. 그러나 예술성이 떨어지는 자식은 사랑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것과 어떤 한 부분의 능력이 있어서 신뢰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여요
어떤 부분에서 한 자식을 더 신뢰할 수 있더라도 사랑은 다 똑같이 하게 되는 것이잖아요.
적어도 정상적인 부모라면 그래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삭과 리브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기 개인적인 취향과 기호에 따라서 자식을 편애한 거예요.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들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 팥죽 사건 역시 바로 여기에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여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자식이 부모를 편애하는 것이 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
아버지든 어머니든 한쪽이 편애하는 그 자식과의 관계만 맺어질 뿐 나머지 가족과의 관계는 등한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다고 하십시다.
그 부모 밑에서 두 자식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자식만 사랑해요.
어머니는 이 자식만 사랑해요. 그럼 어떻게 돼요.
가족의 선이 아버지하고 이 자식만 연결되죠.
어머니하고는 이 자식만 연결되죠.
이 자식은 자기 엄마는 이 형제밖에 사랑하지 않는 걸 아는데 이렇게 선이 연결되겠습니까? 이 자식은 자기 아버지는 얘만 사랑하는 것 아는데 이 정상적으로 이 아이와 아버지와의 선이 연결되겠습니까?
부모와의 선이 연결되지 아니하면 형제의 선이 연결 안 되는 겁니다. 이래서 편애가 무섭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자식을 아버지가 이 자식도 사랑하고 이 자식도 사랑하고 사선이 연결되죠. 그죠
어머니가 이 자식도 사랑하고 이 자식도 사랑할 때 형제와 형제의 선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한 시대를 살아가는 동역자로서의 형제가 되는데 부모가 자식을 편애해버리면 자식들 사이의 연관이 없어져 버린단 말입니다.
그때 남의 집에 사는 이웃집 사람은 상관없습니다.
한 집안에 한 부모 밑에서 한 형제로 사는데 인격적인 관계 형제의 관계가 맺어지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무서운 경쟁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얘가 없어져야 내가 더 가지지않아요.
이 팥죽 사건이라는 게 거기서부터 유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모든 부모는 자기 자식이 어떤 자식이 더 능력이 뛰어나든지 못하든지 얼굴이 더 잘생겼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정말 모두를 똑같이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형제가 사이가 좋지 않다 그것은 형제의 책임이기 이전에 부모의 책임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들이 서로 사랑할 수 없도록 만든 거예요.
지금 리브가와 이삭이 자기들도 모르게 그렇게 어리석은 편애를 했습니다.
29절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심히 피곤했습니다.
그저 허기가 져도 그냥 허기가 지는 것이 아니라 심히 허기가 졌습니다. 그러니까 에서의 배고픔이 극한상황에 다다른 겁니다.
여러분 인간이 어떤 극한 상황에 다다를 때 그 극한 상황을 자기의 신앙을 더 깊게 하는 영적인 은혜의 기회로 승화시킬 수도 있고 그 극한 상황 속에서 영적인 면과는 전혀 상관없이 더 육적인 인간으로 스스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10.40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먼에 제일 먼저 하신 게 뭡니까? 성령 님의 이끌림을 받아서 광야에 가서 40일 굶으신 것이잖아요.
금식 기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40일 금식을 했다고 가정할 때 정말 그 허기짐의 극한 상황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극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부터 시작되는 사탄의 유혹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시지 않습니까?
왜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그 극한 상황 속에서 사탄의 유혹을 통과하게 하시겠습니까?
진짜 신앙과 참 신앙이 아닌 모양만의 신앙은 어디서 구별되는가? 인간이 극한 상황을 맞았을 때에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40일을 굶으셨지만 그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하시는 분이 되신 것이죠.
열왕기 17장에 보면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충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요
그 과부에게도 남은 것이라고는 통 속의 밀가루 한 움큼밖에 없습니다. 식구는 두 사람이에요. 자기하고 아들입니다.
여러분 흉년에 그 가난한 과부가 한 움큼 밖에 밀가루가 남지 않았다면 그동안에 얼마나 아껴 먹었겠습니까?
이 한 움큼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본다 한들 아들하고 자기하고 그저 한입이나 채 들어가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가 뭐라고 합니까?
그거 떡 만들어서 나한테 먼저 다오 지금 밀가루를 가져다 줘도 모자랄 판인데 그건 나 먼저 달라는 겁니다.
근데 사르밧 과부가 어떻게 합니까? 그 극한 상황 속에서 떡을 만들어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먼저 주지 않습니까? 그 사람한테 준 건가요? 아닙니다.
사르밧 과부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드린 것이죠.
극한 상황이지만 그 마지막 극한 상황에 육적인 인간으로 잘 나가지 않고 차라리 이것 먹지 않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영적인 사람으로 자기 신앙을 승화시켰습니다.
그때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께서 그 흉년이 끝나기까지 그 과부의 밀가루 통에서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에서 기름병이 마르지 않게 해주셨단 말이죠.
그런데 그 배고픔의 극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육적인 인간으로 전락시켜 버렸던 대표적인 인물이 에서여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장난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엄마의 뱃속에 쌍둥이가 들어있는데 한 쌍둥이를 먼저 나오게 하셔서 그 아이를 장자되게 하시고 남은 아이를 차자되게 하셨다 이것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형제의 순서는 인간이 정하지 않습니다.
형제의 순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예전에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막내들이 가끔씩 왜 형 말 들어야 되느냐 이렇게 불평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애 엄마가 제 처가 꼭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게 하나님 뜻이다. 형이 먼저 나와서 네 형이 되고 네가 형 말을 들어야 되는 것은 하나님 뜻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에서는 그 배고픔의 극한 상황 속에서 그 하찮은 팥죽 한 그릇 때문에 그 팥죽 안 먹으면 죽나요? 그 한 그릇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에 의해서 준 첫 아들이라는 자기의 자리 자체를 경홀히 여겨버렸단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 우리가 원치 않는 가운데에 극한 상황을 만날 때가 참 많습니다. 배고픔의 극한 상황 경제적인 극한 상황 신체적인 극한 상황 어떤 상황적인 극한 상황 내 힘으로 안 되는 극한 상황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그 상황을 신앙적으로 우리를 더 영적인 존재로 성숙시키는 주님의 은혜로 승화시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극한상황을 주님께서 주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거든요. 상황이야말로 나의 한계를 내가 처절하게 통감하고 더 더욱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맡기는 정말 은혜의 순간이잖아요.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10절을 통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여러분 능욕 궁핍 박해 곤고 이거 다 뭐예요? 극한상황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뒤에 일평생을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극한 상황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어떻게 해요. 강함이라
이 극한 상황에 내가 처해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나의 연약함을 알고 그래서 내가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강함이 내 삶을 통해 역사하시므로 나는 기뻐한다.
30절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붉은 것은 팥죽이죠.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놈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고작 팥죽 한 걸음 놓고 형의 그 장자의 명분을 나에게 다오 바꾸자는 거여요. 장자 차자를 바꾸자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형제입니까? 아닙니다.
야곱과 에서 사이에서는 더 이상 형제가 아닙니다.
상대를 나의 더 큰 몫을 위해서 제압해버려야 될 경쟁 상대입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에서가 뭘 잘못했는가?
극한 상황 속에서 그 극한 상황을 영적인 신앙의 성숙 기회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스스로 육적인 면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잘못은 무엇인가?
스스로 장자의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25장 23절 한번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 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나님의 섭리는 큰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의 자리를 뒤바꾼다는 말이 아닙니다.
장자지만 장자로서 차자지만 차자를 섬기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서가 감당해야 될 역할은 장자지만 차남을 섬겨야 하는 것이고. 야곱은 차남이지만 겸손하게 섬김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거여요.
그런데 야곱은 스스로 장자의 자리에 앉겠다는 것입니다.
이 야곱이 나중에 아내를 얻어서 아들을 12명을 보지 않습니까?
그 12명 아들 가운데 장자의 이름은 르우벤입니다. 그런데 그 12명 가운데에 열한 번째 아들 이름이 요셉인데
이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의 종으로 팔려갔다가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기근 때에 온 가족을 한 가문을 구출하는 구원자가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10명의 형들이 요셉을 섬겼습니다. 자기 생명의 은인이니까. 그때 르우벤이 자기 장자 자리를 내놨습니까?
20:30
요셉 형님 이제부터 당신이 장자 되시고 내가 열한 번째 될게요 아닙니다. 장자의 자리를 그대로 갖고 현재 동생을 섬기는 겁니다.
모세와 아론이 있습니다. 아론이 장자입니다.
모세는 차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장남인 아론을 택하시지 않고 차자인 모세를 택하셔서 춘애굽의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론은 죽을 때까지 자기 동생 모세를 섬겼습니다. 그때 아론이 자기 장자 자리를 내어놓고 섬겼습니까? 아닙니다.
모세가 형한테 형 나한테 자리죠 그러지 않았습니다. 장자로서 차자를 겸손하게 섬기고 모세는 차자이지만 자기 역할상 형님의 섬김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완수했습니다.
이세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7명 아들 다 제쳐놓으시고 위에 7명 형들 제쳐놓으시고 마지막 막내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위에 형들이 다 막네동생 섬겨야죠 왕이니까.
그때 장남 엘리압이 장남 자리 내어 놓았는가
다윗이 형한테 장남 자리 달라고 요청했던가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차남으로서 장자의 섬김을 겸손하게 받아야 될 사람이 형의 자리까지도 차지하겠다고 과욕을 부린 것입니다.
그것도 그 형의 자리를 둘이서 그야말로 사적인 계약에 의해서 살 때 뭘로 샀습니까? 팥죽 한 그릇인데 그 팥죽을 만드는 재료가 자기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 팥 하나도 자기 것 아닙니다.
다 아버지 엄마 거예요. 집에 있는 겁니다.
예 그러니 자기 것은 하나도 드리지 않고 남의 것을 가지고 인심을 써서 남의 자리를 탐하겠다는 것입니다.
보십시다. 33절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본래 에서가 원했던 건 뭐였습니까?
팥죽인데 야곱이 뭐까지 줬어요 떡까지 줬습니다. 얹어주는 건 뭐라 그러죠 예 덤으로 줬습니다.
목적 이뤘거든요. 근데 그 떡은 누구 거예요.
그것도 자기 것 아니에요.
그 다음 보십시다.
에서가 자 그 동사를 잘 보세요.
네 개가 나오는데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다
히브리 원문에도 동사가 다 다르게 4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에서가 자기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아들의 서열까지도 경홀히 여기고 그저 배가 고프다고 허겁지겁 먹고 마시고 일어나 가는 이 모습이 뭐하고 똑같습니까?
제가 보면 짐승하고 똑같습니다.
굶주린 짐승이 시냇가에 가서 먹이를 배불리 먹고 물 마시고 아 트럼 한번 하고 일어나서 가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을 갖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먹고 마시고 일어나 가는 이 동작 속에는 생각이 게재되지 않습니다.
믿음도 없습니다. 영성하고는 아예 거리가 없습니다. 배만 부르면 트름 한번 하고 만족하게 그냥 가는 겁니다. 성경은 에서의 모습만 보여주지만 이렇게 먹을 것 먹고 배부르게 트름하고 만족하게 가는 이 등 뒤를 지금 미소를 품고 바라보는 야곱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속으로 쾌제를 부를 것 아닙니까 입이 이렇게 됐겠죠. 여러분 이 형을 그렇게 교활하게 어머니 아버지의 팥죽을 가지고 그 형의 가장 극한 상황을 이용해서 남의 어려움을 이용해서 그 자리를 탐하고 그 자리를 스스로 뺏었다고 생각하고 미소 짓는 야곱을 생각하면 얼마나 비열하고 교활합니까?
야곱하고 에서를 아무리 비교해도 좀 모자란 듯이 보이는 에서가 훨씬 인간미가 있습니다. 야곱은 인간미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야곱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야곱을 태중에 있을 때부터 불러서 너는 내 것이라고 지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택의 이 은총을 누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사의한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가 온전하게 말로 표현해 낼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사실은 이 야곱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 야곱 교활한 이 야곱의 이야기를 야곱으로 보시지 마시고 우리의 이름을 넣어서 보자 그 말이에요. 이재철인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비열하고 교활한 야곱을 불가사의한 당신의 은총으로 선택해 주시고 당신의 은혜를 쏟아부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 같은 죄인도 소망 가운데에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 은혜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본문에 나오는 야곱이요.
우리같이 참으로 하잘 것 없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에만 하나님에게 우리의 삶을 온전히 드릴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통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여러분 바울은 그야말로 폭도였지 않습니까?
진리를 짓밟고 주님을 대적하던 사람인데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구원의 빛 생명의 빛을 빛으로 임하셔서 그 바울의 인생이 바뀌잖아요.
그래서 바울이 나의 나댄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외에 어떻게 불가사의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바울의 고백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이렇게 계속됩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되는 일방적인 선물을 받았으므로 그 선물을 깨닫고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어떤 사도보다 더 충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더 수고했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 역시 나의 공로가 아니라 그것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평생토록 나의 야곱됨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누구보다도 더 충성하고서도 교만에 빠지지 않고 더 충성하는 바울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죠.
오늘 창세기 26장도 바로 이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확인시켜줍니다.
26장 1절입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었다
자 지금 이삭의 시대인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 이러면 될 터인데 아브라함 때의 첫 흉년이 들었더니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시작이 됩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다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 때에 가나안 땅에 유사 이래 첫 번째 흉년이 들었다 그 말이 아니라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던 아브라함도 처음으로 흉년을 맞았는데 이삭도 흉년을 맞았다. 지금 이 말이 되는 것이죠.
여러분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이주하자마자 흉년을 맞지 않습니까? 근데 그 흉년을 맞을 때 나이가 몇 살이었죠.
75살 간 첫 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몇 살에 죽었어요. 175세에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삭이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으니까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을 때에 야곱과에서의 나이가 몇 살쯤 되겠습니까?
15살이죠. 쌍둥이니까.
30:51
그러니까 가령 이 팥죽 사건이 아브라함이 죽은 그 해에 있었다. 그러면 지금 15살 때 일이겠죠. 그죠
그리고 그 해에 흉년이 있었다 라고 하면 지금 그 아브라함이 흉년을 맞을 때 거의 나이 75세 때 이삭이 흉년을 맞을 때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죽은 그 해라고 가정한다면 최소한도 지금 100년이 지난 겁니다.
근데 이삭이 지금 흉년을 맞았는데 100년 전 아브라함 이야기를 한단 말입니다.
왜 그러는가 답은 조금 이따가 우리 생각해 보십시다.
26장 1절
아브라함 때의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그랄 아비멜렉 많이 듣던 이름들이죠.
바로 아브라함이 한동안 머물렀던 곳이 그랄입니다.
그리고 그 그랄은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통치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블레셋 왕의 공식 직함이라 그랬습니다. 이를테면 이집트의 왕들의 직함이 파라오라고 하잖아요.
개인 이름 따로이고 왕은 전부 다 파라오이듯이 아비멜렉도 그와 같은 이름입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지금 이삭이 흉년을 맞이해서 가족들 가축을 데리고 그랄에 이르렀는데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이삭아 에굽으로 가지 말거라
그러면 지금 이삭이 어디를 목적지로 삼고 길을 출발한 겁니까? 애굽을 목적지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땅 안에 거주하라
그러니까 지금 이삭이 애굽을 목적지로 삼고 가다가 그랄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 그랄이라고 하는 곳은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입니다.
그 그랄을 지나면 가나안 땅을 벗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이삭이 그랄 땅을 벗어나기 전에 너 애굽으로 넘어가지 말고 가나안 땅 안에 내가 지시하는 그 땅 안에 있어라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그랄을 벗어나지 마라
그것 벗어나면 가나안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왜 흉년이 들어서 이삭이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하는 이 기사를 전해주는 창세기 26장 1절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는가 이제 우리 이해할 수 있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가서 제일 먼저 흉년을 맞이했을 때에 어디로 갔습니까? 생각도 하지 않고 가나안 땅을 벗어나서 애굽 땅으로 갔습니다.
지금 이삭도 흉년을 맞이하니까 그저 다른 생각 없이 자기 아버지가 했던 그대로 애굽땅으로 향해 갑니다.
그리고 또 자기 아버지가 한때 거했던 그랄에 가서 지금 머물러 있습니다.
이 짧은 26장 1절 2절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그 메시지가 뭐겠습니까?
여러분 아버지의 삶이 자식의 삶 속에서 되풀이되고 자식의 삶이 그 손자의 삶 속에서 되풀이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시대는 100년 전에 비해서 첨단의 시대 아닙니까?
100년 전에 지하철이 있었겠습니까? 비행기가 있었겠습니까? 자동차가 있었겠습니까?
뭐 문명의 이기라든지 문화생활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비교할 수 없는 시대에 삽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요
인간이 태어나서 장성하다가 병들어서 죽고 기뻐하고 화내고 즐거워하고 슬피 울다가 재난을 당하면 피하고 배고프면 먹고 똑같은 삶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이 전도서 1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전도서 1장 9절에서 10절입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하는지라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느냐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의 삶 그 자체는 늘 반복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 그 자체로는 새로운 것도 있을 수 없고 삶 그 자체로는 새로워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만 그저 무의미하게 뱅글뱅글 돌다가 어느 날 공동묘지에서 한 줌의 흙으로 사라져 버릴 인생이 비로소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영원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땅 안에 거하거라 내가 너한테 지시하는 땅 안에 거하라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내가 지금 하는 이 말 안에 있으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당신의 언약 당신의 말씀 안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안에 있을 때만 해가 떠서 지고 밤에 잠자고 매일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의 삶은 그분에 의해서 매일 새로운 의미로 건져 올려지는 것입니다.
3절
이 땅에 거류하면 조건절이 아닙니다.
원문에는 그냥 명령형으로 이 땅에 거류해라 거기에도 전치사가 들어있습니다.
이 땅 안에 거류하라 그 땅이 뭐예요?
가나안 땅 무슨 땅이죠. 약속의 땅이여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으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그 약속을 벗어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을 때만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이루어지는가?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었다
너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내가 그렇게 맹세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너희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내가 맹세한 바로 그 맹세가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맹세를 그토록 강조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게 뭐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우리에게 맹세해주신 말씀입니다.
그 언약이어요 그러니까 그 말씀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아브라함 이삭 경우에는 어떤 약속
4절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언약의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이처럼 언약의 말씀을 주셨는가? 왜 이런 은총을 왜 주셨는가?
5절
이는 왜냐하면, 이유를 밝히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했기 때문이다. 순종 거기다 공표하십시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귀로 듣고 눈으로 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대로 순종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들으라는 것이죠. 아무리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말씀이 어떻게 능력으로 역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씀에 순종할 때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죠.
또 순종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
명령 계명 율례 법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거죠.
내 말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각각 다른 용어로 강조해서 설명하셨습니다.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순종하는 것은 여러분 지키는 것입니다.
40:33
우리는 지킨다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을 굉장히 쉽게 그냥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지킨다는 것의 의미를 잘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내가 무엇을 지킨다면 내가 지키는 그 대상이 조금도 상하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가령 이 건물을 그 세콤 경비업체가 시켜줍니다.
관리를 하죠. 그러면 그 업체가 이 건물을 지킨다는 것은 유리 한 장도 안 깨어지고 누구도 못 들어오도록 지켜주는 거예요.
만약에 그 세콤이 찍히는데도 밤마다 아무나 들어와서 뭘 들고 간다 찍히는 것 아니란 말이죠. 말씀을 지킨다는 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전에 우리가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대통령과 경호원의 관계와 같다고 설명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대통령의 경호원을 보십시오.
대통령이 어디 가든지 대통령을 따라다녀요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데 대통령 옆에서 밀착 경호를 하는 경호원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카메라가 있을 때마다 자기가 없어서 이러면 그 경호원 자격 없습니다.
밀착 경호를 하지만 경호원은 안 보여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뉴스 보면 대통령 지나갔을 때 다 경호원 누군지 알지만 카메라는 항상 보면 대통령만 딱 보이게 돼 있잖아요.
그 대통령을 가리면 안 되거든요. 경호원은 그러다가 위급 상황이 발생했다. 경호원은 몸을 던져서 대통령을 지킵니다. 대통령이 상하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총알이 날아오면 인간 방패막이가 되는 겁니다. 자기를 던져서 자기가 죽고 대통령 살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 경호원들을 나라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말씀의 경호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돋보이게 하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나는 가려지고 말씀이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말씀이 훼손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말씀이 어떻게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겠습니까? 내 삶을 통해서 그 말씀이 어떻게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당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신 맹세를 주시고 언약을 주시는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은 아브라함이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하자도 모를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먼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가 말씀을 모를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먼저 주셨고요.
아브라함이 실족하고 여러 번 실수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아브라함을 일으켜 세우고 아브라함은 나는 엘 샷다이 나는 충분자야 전능자야 내 앞을 걸어가 넘어지면 내가 붙잡아 줄게 내가 백그라운드 되어줄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었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게 절대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뭐라고 그러세요. 제가 지켰다는 겁니다. 제가 순종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증거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증거입니다. 부모만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 얼마나 애씁니까?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들은 소 팔고 논 팔아서 자식 공부시키잖아요.
그런데 그 자식이 나중에 자랑스러운 사회인이 되었을 때 부모가 자기 자랑합니까? 정상적인 부모는 자식 자랑합니다.
제가 똑똑해 제가 열심히 해 그래서 제가 서울 가서 저렇게 그 자식은 매일매일 이렇게 눌러놓고 야 내가 소 얼마 팔았거든 2년 전에는 내가 뭐 했거든 저 자식 형편없었는데 야 그 선생 똑똑해 그 선생한테 무슨 과외 얼마 고액과외 했거든 그 선생이 저렇게 만들어서 그런 부모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정상적인 부모는 자기가 수고를 다 하고도 자식 자랑하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그러신 분이에요.
당신이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실족할 때마다 당신의 은혜로 우리를 붙들어 일으켜 세워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내가 진리를 건넌다고 제가 저렇게 한다고 우리를 자랑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와 자식 관계를 우리가 생각해보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알게 됩니다.
부모는 자기가 모든 수고를 하고도 자식 자랑하잖아요.
그럴 때 그 자랑을 다 그냥 받기만 하는 자식이 있다.
그 자식도 정상적인 자식이 아니죠. 예 부모는 자식 자랑하지만 자식은 부모 자랑하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 자랑할 때 아닙니다. 우리 부모님이 아니면 저는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저를 이렇게 키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부모 자식은 서로 상대를 높여주고 자랑하고 서로 상대의 수고를 인정해 주는 가운데에 사랑이 깊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 관계도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랑해 주시는 분이세요. 그냥 고개 끄뜨리고 맞다. 맞다. 이게 아니죠. 아닙니다.
나의 나댄 것은 하나님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누구보다 수고를 더 많이 하지만 그것도 하나님 은혜입니다. 하나님만 자랑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더 깊어지지 않겠느냐 그 말이에요. 지금 이삭이 그 말을 듣고 6절 보면
이삭이 그랄에 거주했다.
그러니까 이삭이 본래는 가나안을 벗어나서 애굽땅을 목표로 했다가 이처럼 아브라함을 붙들어 주셨던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당신의 말씀으로 붙들어 주심으로 이삭도 가나안을 벗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 말씀 속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어보십시다. 해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새로운 삶을 사는 것 같아도 천 년 전 살았던 삶하고 본질적으로 똑같은 겁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만 우리의 인생이 공동묘지에서 한 줌의 흙으로 허망하게 끝나지 않고 영원한 의미로 승화될 수 있는데 지금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그 은혜를 베풀어 주고 계시는 겁니다.
왜 이삭에게 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까?
바로 그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얻었던 언약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위해서 이 아들을 또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들이 바르게 설 때에 하나님께서는 또 그 아들 자랑하시겠죠.
내가 해줬었다가 아니라 제가 이렇게 잘한다고 자랑하시겠죠. 여러분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을 때에 우리 자신만 영원하고 새로운 의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자식에게 이 언약의 믿음을 물려주는 것 외에 무엇이 더 큰 선물일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들에게 믿음을 준다고 해서 자식들이 평생 실수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자식 이삭도 실수하듯이 손자 야곱도 실수하듯이 실수합니다. 실족합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언약의 믿음을 자식에게 선물로 줄 때 유산으로 남겨줄 때 그 아이들이 실패해도 실수해도 실족해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의 말씀으로 그들을 지키시고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대를 이어서 이루어져 가고 그 우리 개개인의 삶을 통해서 한 시대의 역사는 새로워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50:12
여러분 우리 모두 그 언약 안에 있으십시다.
그 언약에 순종하십시다.
우리의 삶으로 그 언약을 지키십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그 자식 후손까지 지키시면서 당신의 역사를 펼치시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자식들의 삶을 당신의 말씀으로 지키시면서 이 시대를 위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여 불러주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실족하고 실수할 때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외면하시지 아니하시고 더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그를 붙들어 주시사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그가 말씀대로 살았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라고 오히려 아브라함을 자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실족하려 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맹세하셨던 그 언약의 말씀으로 그 자식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주님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언약의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하나님의 은혜 의지하고 그 언약 속에서 살아가게 도와주옵소서
순종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던져 그 언약을 지켜가는 언약의 사람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이 언약을 믿는 믿음이 우리 자식들에게 남겨주는 가장 위대한 유산이 되게 도와주시고
우리의 자식들이 그 언약 속에 있도록 붙들어 주시어서 그들이 실족하고 실수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붙들어 주시므로 그들의 일평생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역사만 드러나게 도와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 살아가는 우리 자신 개개인의 삶을 통하여 이 시대를 위한 이 땅을 위한 하나님의 귀한 역사가 날마다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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