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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주목한다
차이를 생성하는 길
― 정해송,바람 변주곡(천년의 시작, 2018) ― 김승재,허수아비(고요아침, 2018) ― 이한성,전각篆刻(고요아침, 2018) ― 진순분,돌아보면 다 꽃입니다(고요아침, 2018) ― 유순덕,구름 위의 구두(고요아침, 2018)
김태경
편파적인, 특이성 찾기
언어는 변형 가능한 예술의 재료이므로, 언어를 어떻게 배열하고 조직하는가에 따라 미적․정신적 세계가 다르게 나타난다. 예술로서 문학 작품의 특이성은 이러한 차이에서 만들어지고, 새로움도 특이성과 차이에서 온다. 작품의 특이성과 차이는 그 속에 녹아있는 특정 정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인이 쓰고 있는 단어가 지닌 색채와 느낌, 그 단어들을 조합하여 만든 감각이 우리를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다. 시조는 모두 다르게 생겼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어느 한 작품도 동일하지 않고, 차이에 의해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 시조가 동일성의 덫으로 가고 있다면 진부한 예술이 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독자들은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 예술영역과 이별하게 된다. 시조가 같은 형식 안에 있고, 심지어 소재가 비슷하다고 할지라도, 차이는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성’이라는 개념을 다시 한 번 짚어봐야 한다. 시조와 현대성에 대한 고민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오고 있었다. 그래서 시조시단은 그 대안을 얼마큼 구체적으로 찾았는가. 그리고 시인들은 작품을 통해 어디까지 실현해내고 있는가. 현대성이란, 단순히 현대의 삶과 고민을 담는 것만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문학예술로서의 시조에, 지금 얘기되고 있는 예술미학과 철학이, 작품은 물론이고 창작자의 관념과 창작 과정, 심지어는 시조시단의 구조와 제도 전반과 어우러질 수 있어야 현대성이 반영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시조의 특이성과 차이도 다양하고 폭넓게 싹 틔울 수 있게 된다. 오늘날의 예술은 의미 영역에서도 인간을 해방시켜서 오랜 기간 발이 묶여 있던 것들을 풀어주고 있다. ‘나’에 대응하여 ‘너’의 영역에 있던 것들이 그렇게 타자화되고 소외의 영역에 있던 것들이 주체의 붕괴와 함께 다시 ‘나’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예술은 하나의 공식이나 정답이 없으며, 그것이 ‘맞다’ 또는 ‘아니다’라는 방식의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겨울을 기다리며 읽은 다섯 권의 시집에서, 오늘날의 예술이 말하고 있는 ‘현대성’과 연관된 작품 한 편씩을 ‘편파적’으로 선정하여 읽어보려고 한다. 신간 시집에 나타난 시인의 작품 세계와 더불어, 시인이 차이를 생성해가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며 논의하게 될 것이다.
사실의 역설, 의미의 역설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의 말을 빌려, 지금 시조가 생각해야 할 것들은 ‘무엇이 미인가’가 아니라, 시조가 현대의 예술 작품이 되기 위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이다. 시조의 정체성과 본질을 굳히기 위해 또는 그것을 시조미학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에 의해, 시조의 뿌리를 전통에 두고 그것을 재현하고 그 가치를 미화하는 데 집중하는 경향을 목격할 수 있었다. 가령, 유적지나 유물, 역사 및 전통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의 소재 선택과 재현. 또는 지금은 낡았다고 느껴지는 단어들. 이러한 것들이 오랜 기간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여기에 문단의 제도적 장치가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통에 묶인 보편적 기준은 시조에 차이가 없는 서사와 표현 방식을 요구하게 된다. 물론 현재에도 의도적으로 그런 창작방식을 고수한다면, 그 또한 시인의 시세계이므로 상관없겠다.(우리는 문화에서 복고주의가 소환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대중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하는지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고전주의’지 ‘현대성’은 아니다. 시조에서 현대성을 실현하기 위해선, 시조에 대한 고정적인 미적 판단 기준을 만들지 않아야 하고, 무엇이 예술일 수 있는지에 대한 규칙도 만들지 않아야 한다. 그저, 작품 자체가 개별 작품 세계 안에서 그만의 개성과 범주를 만들도록 하고, 창작자도 이에 부응하여 규칙 없는 생산이 가능하도록 이끄는 분위기를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주지하듯, 오늘날의 문학에는 보편적으로 권장할 만한 좋은 표현이라든지 내용이나 주제의식이란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의 예술은 의도적으로 특정 서사와 논리를 비틀기도 한다. 그렇다면 역설은 어떠한가. 작품 안에서 구현되고 있는 사실의 역설과 의미의 역설은 특정 서사와 논리를 비트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한다고 본다. 역설은 작품 안에서 욕구들이 일종의 전이를 겪거나, 대상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번에 만난 신작 시집에서 역설의 예시를 발견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현대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바로 정해송 시인의 바람 변주곡에 실린「카페 테라로사에 가면」과 김승재 시인의 허수아비에 수록된 표제시다. 먼저, 정해송 시인의 바람 변주곡을 펼쳐보자. 그의 신작 시집을 읽어본 독자라면, 그의 시집 속에서 불고 있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이 “바람은 언제 봐도 내 안에서 먼저 분다”(「바람 변주곡」)라고 고백한 것처럼, ‘내면의 울림’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바람은 여러 시편에서 다양하게 변주된다. “내 생애 나뭇결에 얼룩진 삶의 무늬”(「겨울 수목원」)를 어루만지는가 하면, 세상으로 시선을 돌려 “그을린 문명의 화폭에 새 숨 그린 푸른 손길”(「도장공사」)을 바라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카페 테라로사에 가면」에서 느끼게 될 바람은 변화된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자각 사이에서 느끼는 역설적 감성을 담고 있다.
시월을 달인 커피 향이 연인처럼 맞아준다,
제강 공장 기계 소리 사라진 천장 아래
흰 손이 하프를 드리워 이 계절을 연주하며…
현과 현 그 사이로 내비치는 정담들이
강철의 기억을 밀며 선율 속을 흐르는데
산업화 일군 사람들은 그림자를 옮겨갔다
피카소 손길 와서 녹슨 시간 닦아낸
뒤
자리 지킨 폐품들은 조형물로 살아나고
감성은 기계를 아울러 달빛 빚는 공간 미학 ― 정해송, 「카페 테라로사에 가면」 전문
역설은 우리 사는 세상 곳곳에 흐른다. 사랑이 폭력으로 돌아오고, 인간의 편의와 더 나은 삶의 질을 영위하기 위해 문명과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인간 소외와 불행을 낳기도 하며, 도심 곳곳에서 자연보호와 친환경을 말해도 결과적으로는 인간을 위한 관상용 자연이 되어버린다. 현대성을 반영한 시조는 이렇게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역설적 메시지를 발견하고 기꺼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포장된 메시지보다 역설 속에 감춰져 있는 메시지가 현대사회의 진실에 더 가까울 수 있기 때문이다. 「카페 테라로사에 가면」에서 엿보게 되는 역설은, 산업자본주의의 종식을 알리는 그로테스크한 공간에서 차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는 장면으로 인해 발생한다. 6, 70년대에 진행되었던 산업자본주의는 이제 금융이라는 탐욕스러운 탈현실(de-realization) 절차의 블랙홀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근면한 부르주아지와 산업노동자들의 동맹관계는, 구체적 실체였던 사회적 문명을 추상 속으로, 즉 수학적 잔인성과 화폐라는 형태가 없는 무無의 축적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른바 금융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업자본주의의 구체적 산물이었던 “제강 공장 기계 소리”는 사라졌고, 이에 대해 시인은 “산업화 일군 사람들은 그림자를 옮겨갔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래에 찾아올 미래의 파괴를 예견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사랑한 시인 횔덜린의 말처럼,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 역시 자라나는 것일까. 황무지처럼 남아있는 공간을 “흰 손이 하프를 드리워 이 계절을 연주”하는 예술적 감성으로 재활성화 시키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은 “연인처럼 맞아”주는 “시월을 달인 커피 향”을 즐기는 것이다. “폐품”과 “감성”이 어우러진 사실과 의미의 역설은 치유의 공간으로서 “달빛 빚는 공간 미학”을 이뤄내고 있다. 현대성을 지향하는 시조가 마땅히 말해야 하는 현대사회의 일변일 것이다. 다음으로 김승재 시인의 허수아비를 읽어보자. 그의 시집에서 읽을 수 있는 대표적인 키워드는 “해종일 조잘대던 참새 떼 안 보”(「고향에 가니」)이는 고향의 모습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눈 감감 귀도 먹먹 더듬이 짚어”(「어머니 지피에스(GPS)」)가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서, “기왓가루 짚에 팍팍 햇빛 살린 놋제기/ 갖은 곡물 담아놓고 개미벌취 향 피”(「까치리 마을」)우는 진도 이야기와 구수한 남도 방언 등이 있다. 시집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허무와 슬픔이라고 단정 짓기엔 충분하지 않은 그리움과 깨달음이 서려있다. 시집의 표제시를 감상하면서 이와 같은 정서가 작품 속에 어떻게 담겨있는지 역설적 상황과 연관하여 이야기해 보자.
아무 쓸데없어야 내다 버린 작대기에 다 해진 적삼 입혀 밀짚모자 씌워주고 텃밭에 공개채용으로 정규직이 되었다
용돈 달라 때 쓰는 자식놈 투정이라면 이미 아궁이에 밑불이 되었을 터 누군들 훠어벌판에 두 팔 벌려 섰을까
세상에 들춰 보면 버릴 것 하나 없다 아버지 씨 뿌리듯 다문다문 심은 말씀 홍시불 물이 든 가슴 서쪽 하늘 밝힌다 ― 김승재, 「허수아비」 전문
「허수아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역설은 서늘하다. 어디에도 쓸 곳이 없어진 작대기에, 적삼을 입히고 밀짚모자를 씌워준 다음에야 “공개채용으로 정규직”이 되었다. 버려진 다음에야 ‘허수아비’라는 이름으로 제 자리를 찾는다는 역설 뒤에는, 불안정한(precarious) 입지와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현대인의 단면을 응축하고 있다. 그러나 둘째 수에서 자식을 위해서라면 “아궁이에 밑불이”라도 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통해 ‘허수아비’의 원관념은 비로소 아버지로 좁혀지고, 붕괴된 가부장제 속에서 흔들리는 아버지의 위치와 더불어 자식에 대한 희생정신과 사랑이라는 주제의식으로 귀결된다. 허수아비의 역할은 논밭을 지키는 데 있다. 허수아비라는 단어의 형태를 분석하면, 단어 속에 ‘아비’ 즉, 아버지가 있는데, 여기에서 ‘아비’는 ‘지키는 자’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가족을 지키는 전통적인 아버지의 역할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셋째 수에서 ‘서쪽 하늘’과 연결되면서 이 지켜준다는 의미가 확장된다. 마치 허수아비가 적삼을 입고 서서 텃밭을 지키는 것처럼, 죽어서도 가족을 지키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시적 상상력을 넓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세상에 들춰 보면 버릴 것 하나 없다”는 지나간 아버지의 말씀과 버려진 작대기가 허수아비가 되는 것, 두 양상이 겹쳐지면서 허탈하고 서늘했던 역설에 뒤늦은 깨달음이 녹아 슬픔과 그리움의 정서를 남기게 된다. 앞서 기술한 것처럼, 오늘날의 미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보편적인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할 수 없고 그런 행위는 의미도 없다. 다만, 이 글에서 견지하고 있는 ‘현대성’의 관점으로 논의하자면, 위 인용시는 근래 우리 시조에서 자주 보이고 있는 고전주의와 현대성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다. 즉, ‘과도기적 현대시조’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쓰이고 있는 시어를 두 부류로 나눠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공개채용, 정규직’이라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단어와 ‘허수아비, 적삼, 밀짚모자, 아궁이, 밑불’이라는 예스러운 소재가 함께 뒤섞이어 있고, 비율로 보자면 예스러운 이미지에 좀 더 가깝다. 또, 사실과 의미의 역설적 표현으로 시상을 일으켜 차이를 형성하고, 보편적인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상을 종결시켜 전형적인 과도기적 현대시조의 양상을 띠고 있다. “한겨울/ 백지장 위에/ 철새 떼 놀다갔다”(「시조時調」)하는 그의 작품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차이를 형성해갈지 기대를 남겨둔다.
목적 또는 서사보다 이미지
우리는 예술 작품에 목적을 만들기 위한 인위적인 작업을 할 필요가 없고, 증명된 거대 서사를 중심에 놓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목적에서 벗어나서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이야말로 순수미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떤 것이 되든지 시상은 자기만의 방향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윤리의식과 검열이 없어도 시조가 순수미를 지향하게 되도록 시조가 흘러가게 두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조가 지켜야 할 윤리이다. 시인이 독자 위에 위치한 교시적인 시 쓰기는 흥미롭지도 않고, 독자 또한 그런 윤리 교과서 같은 시집을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독자는 시인의 감상보다 자기 자신의 감상에 더 가치를 두기 때문에, 시인의 감상을 주입하는 시집도 독자들은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 특수한 목적과 증명된 서사로 시조의 의미화를 성취하고자 해서 작품에 고착미를 준다면, 그 작품은 절대성을 얻게 될 뿐, 다양성은 추구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고착은 독자와의 사이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지 못하므로, 예술작품으로서 시조가 추구할 수 있는 미의 최소한의 영역만 성공하게 되는 셈이다. 절대적 주제 의식을 중심에 놓아, 주변에 파생될 수 있는 개념과 감상을 묶어둘 필요가 없다. 시조를 쓰는 과정에서 사용된 사유가 또 다른 다수의 사유로 생산되는데, 그 사유가 독자와 교합한 과정에서 감상이라는 결과가 나오도록 유도해야 한다. 시조 안에 시인 스스로 사유와 감상의 결과를 고착화해서 담는 것은, 오늘날 얘기하고 있는 예술 미학이 아니므로 ‘현대성’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조의 다수는 목적 지향 또는 서사 지향적 성격에 사로잡혀 의미화의 다양성, 그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러나 오늘의 시와 달리, 단형을 추구하는 시조는 근본적으로 목적과 서사가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목적과 서사를 떠난 시조가 ‘현대성’을 지향하기 위해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 시조의 언어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시가 보여주고 있는 추상성으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도 있겠지만, 이보다 언어를 통해 색이나 모양 등으로 이미지화하는, 즉 감각의 언어로 형상화하는 것이 적합하겠다. 이렇게 탄생한 시조는 희미한 기의와 선명한 기표를 낳고, 독자의 기의와 교합한 과정이 끝난 후에야 별개의 기호로 완성될 것이다. 이한성 시인의전각篆刻과 진순분 시인의돌아보면 다 꽃입니다의 시편을 통해 구체적인 논의를 이어가보자. 이한성 시인의 일곱 번째 신작 시집 전각篆刻에는 “점 위에 점을 찍듯 몇 날을 세울 칼날”로 “마음의 흐름에 따라 푸른 혼을 심는”(「전각1」) 행위와, “한 꺼풀씩 걷어 내는 넉넉한 마음으로/ 세상사 시끄러움도 함께 담아 문지”(「각刻을 하며 2」)르는 노력들이 내재되어 있다. 여섯 번째 시집을 내고 2005년부터 한 동안 붓을 들지 않았다는 시인의 고백 속에는 고민과 인고의 시간이 느껴진다. 그래서 깎고, 다듬고, 세상의 소리를 문지르는 행위를 지속했던 것일까. “때 없이 떠 있는 희멀건 낮달처럼/ 물결치면 치는 대로 바다를 표류하”던 그가 “닥종이 흰 전지처럼 머릿속 다 비우”(「멍 때리기」)고 왔다. “달달한 살냄새”(「수취인, 이한성」)와 같은 시편 중에서도, 우리는 단시조「골목길」을 만나려 한다. 그는 ‘골목길’에 대한 느낌을 이미지로 작품 속에 던져두고 있다.
싸락눈 내려앉은 낯선 마을 안쪽
울퉁불퉁 하지정맥 앓고 있는 골목길이
곰삭은 새끼줄 같다
풀어져 흘러내린 ― 이한성, 「골목길」 전문
작품 속에서 골목길의 모습은 어떠한가. 낯설고, 정돈되지 않았으며, 곰삭아 풀어져 있다. 시인은 이런 골목길에 대한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전해 주고, 이에 대한 다른 말들을 늘어놓지 않았다. 이로써 골목길의 상징은 유동적인 것이 되었다. 시적 대상의 상징이 독자가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이것 또는 저것, 아니면 그 어떤 것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누군가는 우리 집 뒷골목을 떠 올릴 수 있고, 또 누군가는 낯선 동네의 골목길에서 느끼는 이방인의 외로움과 당혹스러움을 읽어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황혼에 접어든 인생길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이 아니어도 독자가 놓인 처지와 가치관에 따라 골목길의 의미는 달리 해석될 것이다. 이런 감상이 가능해진 것은 시인이 시조 안에서 사유나 감상의 결과를 일방적으로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조는 내용과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에서 작품을 종결지어도 된다. 좀 더 나아가 내용도 제거하고 이미지만 남겨두는 것에서 생산을 멈출 수도 있다. 이미지만 남겨두어도 독자들이 작품의 의미를 스스로 구성할 것이고, 시인과 독자가 교합하여 다양한 사유를 생성할 수 있게 된다. 작품 속에 화자의 심오한 감상이나 교훈 및 깨달음을 굳이 담아두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가령, ‘선경후정’의 경우,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전주의에 가까운 내용 전개 방식일 뿐이므로, 현대성을 지향하는 시조가 꼭 그와 같은 창작 방식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 선경후정은 대상을 그려주고, 화자의 정서를 표현하는 방식인데, 이렇게 되면, 서정적 자아가 시적 대상에 대한 감상을 결과적으로 제시하여 의미화의 다양성을 실현하기보다는 감상의 고착화를 불러오게 된다. 작품을 생산하는 자가 시인이라고 해도 작품의 의미까지 규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최종적으로 작품의 의미를 구성하는 행위는 독자의 역할이 되어야 하고, 이러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현대성을 실현하는 길이 된다. 다음으로 진순분 시인의돌아보면 다 꽃입니다를 만나보자. 이번 신작 시집에는 제목을 통해서도 추측할 수 있듯이 여러 시편에 많은 꽃들이 피어 있다. 그 꽃은 “서러움 삼킨 늑골/ 피눈물 고”인 것, 그래서 “처절한 투혼”이며 “짧아서 더 향기로운”(「한해살이 꽃-비정규직」) 꽃이고, “척박한 가슴에도 시멘트 틈새에도” “햇살이 푸르러지면 저릿저릿 피가”(「개망초꽃」) 돌게 만드는 꽃이다. 그것은 아픔이기도 하며,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다음 작품「공존의 궤도」에서 우리는 어떤 아픔과 아름다움을 이미지로 만나게 될까.
그믐밤 서걱대는 수숫대 소리다 속속들이 침투된 미세한 입자다 찬 이마 피 삭는 가슴 눈 시린 허공이다
뼈가 깎이는 삼경 살얼음 갈라지며 순간, 부서지는 눈빛 속울음 숨죽인 찰나
차디찬 서리꽃 피어 다시 돋는 별자리다 ― 진순분, 「공존의 궤도」 전문
내용의 영역이 축소되고 표현의 영역이 이미지화로 가득 차 있을 때, 독자는 작품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공존의 궤도」에서 목적이나 서사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공존’이라는 중심어 아래, 몇 가지의 이미지가 순차적으로 배열된다. 수숫대가 서걱대는 소리(청각), 미세한 입자(시각), 찬 이마와 눈의 시림(촉각), 눈빛(시각), 숨죽인 속울음(청각), 차디찬 서리꽃(촉각), 다시 돋는 별자리(시각) 등의 이미지들로, 그 밖의 구체적인 사연을 만들어 가는 것은 독자의 역할이 된다. 독자들은 이미지를 엮어가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과 상처, 인내, 사랑 등의 장면을 개별적으로 그려갈 것이다. 개별의 독자가 결정하는 의미가 또 하나의 상징적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성’을 지향하는 시조는 이한성 시인의「골목길」과 진순분 시인의「공존의 궤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시인과 독자가 작품을 매개로 엉켜있는 사유의 흐름을 맺고 풀면서 구체화하는 여지를 남겨둬야 한다.(다만, ‘새끼줄’이나 ‘사경’과 같은 시어는 고전주의에 더 가깝다.) 이런 교감의 과정에 사용된 각각의 사유가 변증법적으로 차이를 지니는 사유를 발생시키고, 이로 인해 사유의 결과는 다양화된다. 시인이 한 편의 시조를 생산해냈을 때, 시인 스스로, 어떤 의미 안에 갇혀서 그 의미를 형성하기 위해, 시를 구성하는 요소의 일부가 되려고 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해서 시조를 작동시키는 것은 고전주의에 가깝다. 독자와 유기적으로 상징을 형성하는 ‘작동’이 시작되는 순간, 시조는 하나의 새로운 기호로 성립되고, 각기 다른 새로운 사유를 생산해내게 된다. 그것이 차이를 생성하는 길이 되고 시조가 보여줘야 하는 현대성인 것이다.
서정적 재현을 넘어
오늘날의 예술 미학은 모방에서는 당연히 벗어나야 하고, 재현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므로 의미가 없으며 차이를 생성해내지도 못한다. 시조에는 유독 자연물을 소재로 한 시편이 많은데, 그것이 지니는 가치가 있는 바,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기보다는, 자연물을 소재로 하면서도(심지어는 똑같은 형식 안에서) 어떻게 차이를 만들어 갈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물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데서 작품이 멈춰있으면 오늘날의 예술미학이 아니다. 요컨대, 현대성과는 멀어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인들에게 시적 상상력과 감수성뿐만 아니라 ‘지성능력’도 요구된다. 차이를 생성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대상을 재현하고 거울 비추듯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고, 이를 시조 안에 표현하기 위해서 지난한 고민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을 모방하고 재현하거나, 자연에서 얻은 감동을 전달하는 데 그친 작품을 두고 능동적인 창조성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수동적인 창조성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창작방식과 주제의식은 차이를 만드는 길이 아니라, 소재만 다를 뿐, 결국 같은 내용을 재생산하는 창작이 된다. 그래서 시적 대상인 자연물에 대한 시인의 지성적 사유와 함께 차이를 생성하는 관점과 창작이 요구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유순덕 시인의 작품을 감상해보기로 한다. 유순덕 시인의 첫 시집 구름 위의 구두를 지나오면, 피부에, 마음에 물기가 묻어난다. 고통에서 그녀를 살게 만든 것은 물 이미지이다. 그런데 쏟아내고 또는 정화하게 하는 것도 물이다. 그녀가 보는 대상들은 “눈물로 심은”(「구름 위의 구두」) 꿈, 아니면 “물안개로 일어서”(「수이푼강」)거나, “가랑비 맞는”(「물병자리를 찾는 서쪽 풍경」), 또는 “골 깊은 푸른 적의도 물방울로 맺히기를”(「물방울 현상학」) 바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물의 이미지와 함께 대부분의 시편에 등장하는 소재가 있는데, 바로 자연물이다. 그녀는 “이번 생은 내내/ 상처 입은 짐승이거나” “청보리밭 떨다 가는 낮달만 같았다고”(「초승의 눈썹 - 달맞이꽃」) 독백한다. 그러나 자연만큼 강한 것도 없다. 상처와 고독은 자연을 거쳐 오면서 극복하게 된다. 다음 인용시를 감상해보자.
물머리 초록을 이고 달려가는 완행열차 휘어지는 굽이마다 간이역이 출렁인다 대숲은 물소리 따라 귀만 더 깊어지고
빈집이 울지 않으려 마디를 지어 놓고 깜박깜박 불을 켜 줄기를 친 그 어디쯤 차창 밖 이슬 벤 기억 지퍼를 환히 연다
생과 사를 오간 풍경 툭 불거져 아픈데 눈은 자꾸 침침해 길은 더 흐려져도 나이테 다 비운 막차, 죽순 밀어 별이 뜬다 ― 유순덕, 「대나무 완행열차」 전문
대개 자연물로 시를 구상하는 방법은 대상의 특징을 재현하기 위해, 그것의 생김과 생태 조명에 고도로 집중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시인의 감각에 의해 재조명된 이미지를 그린다. 「대나무 완행열차」에서 발생하는 ‘사실의 재현’이란 그 자연물이 될 수 없으며, 대상을 바라본 ‘화자의 감각’이 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언어로서의 재현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감각의 언어로 대상의 형상을 그린다는 것은 재현과는 다르다. 대상의 본질적 특성과 시인의 지성능력이 조우하여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촉발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대나무는 “물머리 초록을 이고 달려가는 완행열차”에 비유되고 있다. 그리고 완행열차는 간이역마다 쉬면서 천천히 나아가는데, 인용시에서 ‘화자의 감각’은 열차가 나아가는 것보다 간이역에서 쉬고 있는 모습에 닿아 있다. 이 간이역은 대나무의 “휘어지는 굽이마다” 존재하는데, “나이테 다 비운” “빈집”이 “생과 사”를 오가며 나아가는 동안, 그렇게 “툭 불거져” 나오고 대나무의 마디가 만들어졌다. 흔히 대나무가 거센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건 줄기에 굵은 마디를 지어 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대나무 자체보다도 상처를 극복한 흔적과 같은 대나무의 마디를 조명하여 감각의 언어로 노래하는 것이다. 자연물을 소재로 취한다면, 이 때 자연물은 단순한 분석 대상으로서의 존재성을 넘어야 한다. 그리고 어느 한편에 의한 일방적인 분석으로 끝나서도 안 된다. 자연물이 실재의 모델로 대상화되고, 시인이 그에 종속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물이 시적 대상이 되긴 하지만, 사람의 얘기를 하고 있어야 한다. 대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데서 끝난 작품은, 그 어떤 멋진 수식이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 대상의 존재적 아름다움을 뛰어 넘을 수 없으므로, 결국 무의미한 창조성이 된다. 하지만 시인이 감각 언어로 자연물에서 읽어 낸 ‘사실의 재현’은 대상과 인간사에 유의미한 울림을 준다.
균열과 균열에 대응하는 ‘것’들
시조는 사라질 뻔 했으나 고비를 이겨내고 ‘현대시조’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므로 아직도 시조를 쓰느냐는 질문은 시조에 대한 편협한 이해에서 온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우리에게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다시 태어난 시조는 다시 태어났으므로 그 이전의 시조와는 다른 것이 되어 있어야 한다. 즉, 고전의 시조가 아니라 현대의 시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시조를 전통의 산물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시조에 전통적인 것을 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시조의 확장을 스스로 묶어둔 점은 없었는지 고려해봐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시조는 고전주의와 현대성 중에서 어디에 더 닿아있을까. 시조는 현재를 살고 있는 현대의 시조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현대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현대성’을 반영한 창작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대시조라는 범위 아래에 발표되고 있는, 그러나 현대적이기보다는 고전적 상상력을 지닌 어떤 기율이 더 크게 작동하는 것에 대해 의도적으로 균열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균열에 대응하기 위한 여러 갈래의 ‘~것’의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균열을 은폐하는 일은 시조를 응고시키는 행위가 되고, 균열을 일깨우는 일은 시조에 차이를 생성하는 길을 마련할 것이다. 지루하게 돌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버릴 요량으로, 이 모험적 성격이 짙은 글쓰기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섯 시인의 신작 시집을 정독하면서 차이를 생성하는 길을 모색할 수 있었다. 그것을 ‘~것’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면에 숨어있는 현대의 밑그림을 그릴 것, 그것이 특정 서사와 논리를 비트는 방식이어야 할 것. 목적이나 거대 서사를 중심에 놓기를 거부할 것, 그 대신 감각의 언어로 이미지화 할 것. 시인이 의미를 고착화하기보다는 의미의 다양화를 추구할 것, 그러기 위해 작품 안에서 시인과 독자가 서로 사유의 관계를 맺을 것. 색다른 감각의 언어를 산출하기 위한 지성능력을 발휘할 것, 한층 더 깊어지는 지성적 사유로 대상을 바라볼 것. 물론, 고민의 결과는 필자의 주관적이며 편파적인 관점에서 도출된 것이다.(이견은 문예지의 지면을 빌려 비평적 글쓰기로 건강한 소통을 열어 가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것’의 가능성은 다섯 시인의 신작 시집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기도 하다. 다음 계절에 만날 시집은 균열에 대응하기 위한 어떤 ‘~것’들을 제시하고 있을까. 오늘날 우리 시조의 과제와 열망인 대중화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시조가 차이를 생성해가는 길을 모색하여 새롭게 쓸 수 있으면 된다. 특이하고 새로우면 재미있고, 새로운 것은 예술 미학에서 말하고 있는 현대성의 요건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그래서 시조가 재미있고 새롭게 되기 위하여 현대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쓸 수 있는 시인을 ‘시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어느 평자의 말을 빌려 새로움은 시인의 제1윤리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시조의 위상 자체를 변화시킬 것이다.
김태경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14년 ≪열린시학≫ 평론 등단,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