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하느님의 선택, 우리에겐 은총
원자가 가장 작은 단위의 물질이라고 믿었던 과학계에서 원자가 핵과 전자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떠오른다. 많은 과학자는 이 ‘양자역학’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했다. 전자의 발견은 ‘전자공학’으로 발전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생활에서 ‘전자공학’을 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현대문명을 창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대성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조차도 “나는 이해할 수 없네!”라고 끝까지 ‘양자역학’을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그에게 젊은 신진 과학자들은 되레 “이해한다는 것이 뭔가?”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이해한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라고 묻는다. 인간의 이해 여부가 왜 그리 중요하냐는 것이다. 알파고가 인간을 이겼을 때도 많은 사람이 어떻게 알파고가 인간을 이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김상욱 교수의 양자역학 강의 중) 우리가 이해하지 못해도 세상에는 존재하고 있고, 어떤 일은 이루어져 가고 있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있을까? 존재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고 쓰임새가 있지 않을까? 하물며 사람이야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가치를 따지고 기준을 정하여 우열을 평가한다.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보고 알고 이해하는 것만을 믿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어도 이 세상을 움직이는 어떤 것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을까? ‘양자역학’ 이전의 과학 세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신은 없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신은 어디에든 존재한다.’라고 할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파악할 수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모두 예비하신 일이란다.
아모스가 말한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아모 7,14-15)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7)
이 모든 일이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일, 세상 창조 때부터 하느님은 이렇게 당신의 일을 하신단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든 말든, 우리가 받아들이든 말든, 그분의 일은 계속 진행된다.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해도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로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있듯이 우리의 삶에도 하느님의 예비하심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 예비하심이 운명처럼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참된 것은 참된 길로, 거짓된 것은 거짓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따로 있을까? 아니 오히려 거짓이 없는 것이 참된 것이고 참된 것이 부족하면 거짓이 아닐까? 인간에게 하느님의 모상성을 부여하셨다면, 인간은 진리를 동경하고 참된 길을 걷고자 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살 것이다. 그 경향성을 ‘양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고,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예비’하셨다.
세례성사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제자 신분을 갖는다. 이 의미가 뭘까? 우리는 분명 내가 자유로운 선택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하느님의 선택이었단다. 그리고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에페 1,7ㄴ)이란다. 하느님과 관계는 너와 나의 인간적 관계와는 사뭇 다른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서로가 선택하게 될 때 비로소 관계가 형성되고 만들어지지만, 하느님과의 관계는 다르다. 하느님은 ‘너’처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시다. 하느님은 내가 엄마의 태에서 비롯했을 때 이미 거기에 계신다. 구체적으로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형식이지만 그것은 나의 양심과 함께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나의 욕구 속에 고스란히 머물러 계신다. 어찌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미 나를 선택하신 셈이다. 내가 양심과 진실 안에 살아가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그 선택에 대한 응답이지 내가 양심과 진실 그리고 진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에게 양심과 진실 그리고 진리는 선택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에 대해 응답하는 관계 속에 놓여있는 것 같다.
모두가 믿는 것은 아니지만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도 존재할 때는 다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는 존재다.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본래 있던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본래 있던 것이 없어지는 것 또한 아니다. 우리가 이해하든 못하든, 잘 간직하고 살든 잃어버리고 살든 세상은 언제나 우리 앞에 있고 하느님의 뜻을 그 종말을 향해 나가고 있다. 하느님의 예비하심 속에 그분의 선택은 우리에겐 은총이다.
첫댓글 양심과 진실 그리고 진리는
선택할수 있는 대상이 아닌
응답하는 관계속에 놓여있는 것임을~~
어떻게 응답할것인가
존재의 이유, 본래 있었던 양심과 진리, 진실~
수용하고 응답할 때!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힘이기도 하네요.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