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동선 (객원논설위원) |
<저작권자 © 경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출처 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4138
眞靈君 (진령군)
조선시대 말기의 무속인
(?~1895년)
임오군란때 하마터면 성난 군사들에게 죽을 뻔한 명성황후가 간신히 장호원까지 도망갔다 50여일만에 환궁하니 백성들은 놀랐다.
그런데 명성황후는 한 여인을 데리고 와 진령군이란 작호를 받게 해 주었으니 무당에게 군봉을 내린 것이다.
이것은 황후가 죽음의 공포와 절망속에서 지낼 때 점을 쳐 주었기 때문인데 숨어지내기가 하도 갑갑하여 민응식이 불러온 무당이 바로 진령군으로 자칭 관우의 딸이라 하였다 한다.
우연인지 진령군은 명성황후의 환궁과 그 날자까지 알려주어 환궁시 명성황후를 따라 나선 것이다.
이래서 그녀는 대궐로 들어가 살며 부귀를 누리게 되었는데 날마다 왕실을 위해 산천 기도는 물론이요, 굿판과 제사는 쉴 날이 없었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임금께 아뢰어 봉군의 은전도 내려주었으니 진령군이 된 것인데 군봉은 특별한 공로가 있는 신하나 왕의 장인에게만 내리는 벼슬 호칭인 것이다.
차츰 권세를 쥔 그녀는 벼슬에 임명하고 내쫒는 것도 마음대로였다.
이렇게 되니 배슬을 구하는 자는 돈을 싸들고 와 청탁했고 올곧다는 선비마저 그에게 줄을 대느라 법석떠니 조정은 기강이 문란해지고 세상은 어지러워만 갔다.
허약한 세자(순종)의 병을 고친다고 굿판을 벌이고 금강산 1만 2천봉에 쌀 한섬과 돈 천냥, 무명 한 필씩을 얹은 것도 이 때의 일로, 국고가 탕진되고 있어도 명성황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당 말만 믿은 것이다.
게다가 진령군은 명성황후의 승인 하에 나랏돈으로 서울 북방에 관우 사당인 북묘를 건립하고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억만금을 벌였는데 왕과 왕비는 자주 찾아와 점도 치고 굿도 했다고 한다.
진령군의 세도가 세상을 흔든지도 어느덧 11년. 감히 뉘라서 그 철벽같은 권세에 도전하랴,
이러한 때 대담무쌍하게 목숨을 걸고 진령군을 통렬히 규탄하는 상소를 올린 선비가 있었으니 사간원 정언 안효제인데 그는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다못해 붓을 든 것이다.
당시 진령군은 안효제를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힘썼는데 고종은 대로하여 그를 전라도 먼 섬으로 귀양 보냈다.
3년 뒤 안효제는 귀양이 풀렸고 다시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한 후 낙향해 버렸다.
한편 왕비는 진령군을 달래느라 더 큰 굿판을 자주 열어 주는 등 총애함에 변함이 없었는데 그러나 요지부동이던 진령군의 영화도 드디어 망할 날이 왔으니,
고종 31년(1894년) 청일전쟁의 승리로 친일 내각이 들어서자 개화파 새 정부는 진령군을 잡아들여 옥에 가두었다가 진령군이 모아놓은 억만금을 모두 몰수한 뒤 풀어주었다.
그녀는 북묘인 관우 사당에서도 쫒겨나 삼청골 오막살이에서 숨죽이고 근근이 살다가 이듬해 8월 을미사변 때 일본인들 손에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그 충격인지 얼마 뒤 따라 죽었다.
첫댓글 120년 전 당시와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닮아 있어 소름이 끼칠 정도다.
도탄에 빠진 민생, 민씨 일족과 대원군 간의 정쟁, 불통과 독선과 전횡,
여성 실권자, 종교 종사자와의 결탁, 주변 강국들의 대결, 원칙 없는 외세 의존...
위 사항들은 그대로 오늘의 상황에 대입이 되는데 그러면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당시 새 세상을 부르짖으며 전국에서 일어난 동학운동이 있었고
민비는 청군, 일군 등을 불러들여 그 운동을 무자비하게 짓밟았으며(40만 학살)
결국 그때부터 본격 진출한 일본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했다.
지금은
역시 새 세상을 바라는 수많은 국민들의 궐기가 있고
항간의 소문이지만 현 정권이 자신의 실정을 덮고 장기집권을 위해
외국군대와 결탁하여 전쟁도 불사할지 모른다는 루머??도 있고...
다만 그때와는 다른 점이
그렇게 되기 직전에 권력의 정체가 백일하에 까발려졌다는 것인데
아직 어둠 속의 검은 흐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만큼
이런 때일수록 냉철한 판단으로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옛 시대에도 이런일이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