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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만해"님"시인상> 수상 기념 특집으로 선생님의 시세계를 간단하게 연구해 보았습니다.
선생님의 시세계를 예전부터 연구해 보고 싶었는데 이번 수상 기념을 계기로 써보았습니다.
다소 부족하고 아쉽지만 마음만이라도 전하고 싶어 쓴 것으로 이해하시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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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획 섬광의 소슬한 시
―최명길의 시세계
이대의(시인)
1.
문청시절, 나는 시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시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설레고 시가 내 생의 전부가 되어도 좋을 만큼 간절했었다. 그 시기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시를 보면 시를 쓴 시인을 만나고 싶어졌고, 시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세상을 다 얻은 것 마냥 행복했다.
그 시절 여러 시인들 중에 최명길 시인과의 인연은 남달랐다. 풀밭동인 후배가 속초에서 최명길 시인을 만나고 왔다고 자랑하며 때 묻지 않은 너무도 인간적인 선생님을 만났다고 했다. 덧붙이는 말이 자신의 턱이 선생님과 너무 닮아 있어서 더욱 기분이 좋다고, 자신의 턱이 콤플렉스였는데 선생님을 만나고 그 콤플렉스가 오히려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선생님이라며 함께 만나러 가자는 것이었다.
그 후 최명길 시인과의 만남은 이루어졌고, ‘물소리시낭송회’에 초대되어 참석하기도 했다. 이런 만남을 통해 ‘풀밭동인 문학기행’을 최명길*이성선 시인 두 선생님을 찾아가는 문학기행 행사를 만들어 속초를 찾기도 했다.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해 한비동인, 바다시낭송회, 고성문학회 등 문학단체와도 교류를 할 수 있었다. 그 만남은 언제나 정감 있고 따스했다. 특히 ‘물소리시낭송회’에 초대된 날에는 우리를 기존 문인만큼이나 환대를 해 주었기에 늘 고마웠다. 그런 만남을 통해 시인이 되겠다는 꿈이 더욱 간절했던 나는 마침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 인사차 들러 환대를 받기도 했다.
최명길 시인을 대면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항상 겸손하며 앞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앞에 나서야할 자리임에도 그 자리까지 물리고 뒤에 계셨다. 그것은 의도가 아니고 그냥 그런 모습이 당연한 거였다. 그보다는 오로지 깨달음을 갈망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박해 보이나 큰 울림이 느껴지고 은자의 모습이나 결코 세상을 외면하지 않는 고결한 풍모가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고 가는 길엔 언제나 아쉬움이 남아 속초 주변을 맴돌다 저물 무렵에야 서울로 향했다.
서울로 돌아오면서 보았던 노을은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 노을을 보면서 최명길 시인이 그려준 노을로 생각했다. 노을까지 함께한 여운이 가시면 우리는 승용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며 낄낄 거리다 지루한 줄 모르고 서울에 도착했다. 이렇게 들뜨고 기분이 좋았던 것은 우리도 언젠가는 시인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고 최명길 시인과 같은 선생님과 시의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기대가 커서였다. 그 기대가 이루어진 요즘, 시를 통해 최명길 시인과 교류를 할 수 있고 시를 통해 무언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하다. 이런 인연으로 최명길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해 여러 차례 논할 기회가 있었지만 더 좋은 사람이 썼으면 하는 바람으로 미뤘다. 아직도 최명길 시인의 시를 평한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는 하나 이번 「만해‘님’시인상」 수상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미력하나마 써보려 하니 그야말로 감회가 새롭다.
2.
최명길 시인의 시는 구도자의 소박한 언어로 지어진 탑이다. 그의 언어로 지은 탑은 기교 넘치는 거대한 탑이 아닌 밭이나 길가 혹은 깊은 계곡에 굴러다니는 돌로 쌓은 탑이다. 불교적 철학의 깊이를 과신하지 않고 또는 깨달음을 강요하지 않으며 하고자 하는 의도를 침묵 혹은 여백으로 대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는 화려한 수사학적 방법론이나 거창한 담론을 표출하지 않고 소박한 일상을 담은 시들이 주류를 이룬다. 시는 소박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깊이를 유추해보면 물 위에 나타난 빙하만큼만 보여줄 뿐 물속에 숨겨진 거대한 빙하는 여백으로 처리한다. 물론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빙하를 유추하지 않고 소박하게 만들어낸 시만 봐도 충분히 의미 있게 읽힌다.
하늘이 노을을 내어걸었다.
칠장사 괘불탱
누구를 모셔 앉히려고 저 야단인가
아직 덜된 시커먼 뭉텡이
앞에 놓여 있다.
동녘에서 좌정해 바라보는
서녘 끝 살바야
―「하늘 불탱」전문
시집『하늘 불탱』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는, 흔히 보는 단순한 노을이 아닌 체험과 명상을 통한 절묘한 결합의 노을이다. 시인은 노을을 보고 하늘이 내걸었다고 생각하며 그 노을이 칠장사 괘불탱인 것으로 본다. 칠장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절로 큰 법회를 열거나 의식을 행할 때 법당 앞마당에 걸어놓는 대형 괘불탱이 유명한 절이다. 시인은 그 절에서 괘불탱을 보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했다가 노을을 접하는 순간 일획 섬광처럼 칠장사 괘불탱을 연결하여 시를 썼으리라 추측된다. 이렇듯 체험을 하고 난 다음 사물을 보고 번갯불처럼 스칠 때 낚아채 쓰는 것이 시인만의 시적 기법이다.
이 시의 내용을 보면 하늘이 걸어놓은 괘불탱이 ‘누구를 모셔 앉히려고 저 야단인가’ 하고 의문을 던진다. 이는 화자가 알면서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동녘에서 좌정해 바라보는 서녘 끝 살바야’다. 하늘 불탱은 곧 모든 것의 안팎을 깨달은 부처의 지혜를 가진 ‘살바야’를 모셔 앉히기 위해 불탱을 걸어놓은 것이다.
이렇듯 명상을 통해 일획 섬광으로 꽃 피운 그의 시편들은 초기부터 줄곧 명상적 서정시의 극한을 보여 주고 있다. 명상은 주로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으나 노자나 장자 사상이 곁들여지기도 하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깨달음을 전하기도 한다.
알 수 없는 그대 비밀 엿들으러
내 속 마음 삐끔 내어보이고
여시인 여시과…. 이렇게 읊조리면
그대 닫힌 입술 조금만 벙글러 주오시라.
첫새벽 바다와 하늘 빙긋 열리듯이
그렇게 벙글러 주오시라.
―「꽃과 나비의 노래―花蝶詞」부분
문득 바람 오니 허공은 눕고
어스름 내린 길로 세상이 눈뜨리.
비밀스런 능선 너머 아직 먼 나라
화엄의 불 한 소쿠리 놓아본들 어떠리.
河海의 끝 어딘가에는 꿈 같은 수풀 깃들리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를 비춰주오리.
하늘이 가리키는 이 길을 따라
나는 가오리, 풀피리 하나만으로.
―「풀피리 하나만으로<1>」부분
그러나 당신은 늘 침묵, 침묵한 채로 땅과 하늘을 가리킵니다. 나는 당신의 손짓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알려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 모습만 보는 것입니다.
내 안의 그 사람
그 분이 그대이고 나임을 뒤늦게야 깨닫고 놀랍니다.
―『바람속의 작은집 21』부분
바다를 지나 나비는
어디로 가려는 걸까?
거두어들일 날개가 오히려 화사롭다.
하늘 아래 빈 집
마른 잎사귀 사이
시간 지는 길목을 돌아
헐리우듯 내려앉는 입동 나비
―「입동 나비」부분
하루 종일 누운 자리
심심해
뜨락에 나가 풀을 뽑다.
무심히 건너다보는 산밭
황혼불 일고
隱者, 물을 건너다.
―「隱者, 물을 건너다」부분
첫 시집 『화접사』의 표제작이기도 한 「꽃과 나비의 노래―花蝶詞」는 문득 신라 향가 「헌화가」가 연상된다. 꽃을 꺾어 바치지는 않으나 ‘내가 벼랑을 날아 그대에게 다가가오리.’에서 보듯 노인이 깎아지른 벼랑을 타고 올라가 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바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시는 헌화가 보다 더욱 애절하다. 그대가 꽃이 되어 있으면 나는 나비가 되어 벼랑을 날아 그대에게 간다고 소망한다. 유추해 보면 꽃이 되어 벼랑에 있길 바란다. 왜 하필 벼랑일까? 아마도 평지에 있으면 남들이 쉽게 접근할 것 같기에 혼자만 차지하고 싶어서 벼랑에 피어있길 바라지 않나 생각된다. 나비가 된 자신은 파도가 무섭게 쳐 와도 목숨을 걸고 벼랑을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그대를 사랑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여시인 여시과….’ 부분이 묘하다. 이는 『묘법연화경』 방편품에 나오는 구절로, 십여시(十如是) ‘소위제법 여시상 여시성 여시체 여시력 여시작 여시인 여시연 여시과 여시보 여시본말구경’ 중 두 개의 항목에 해당한다. 문제는 ‘여시인’ 다음 ‘여시연’을 넘어 ‘여시과’로 간다는 것이다. ‘여시인’은 원인이고 ‘여시연’은 인연이며 ‘여시과’는 결과다. 이걸 어떻게 해석할까? 원인에서 인연을 뛰어넘어 결과를 바라는 화자의 마음으로 보여진다. 이런 소망은 ‘한 즈믄 해 지난 다음쯤에야/ 그대가 나비 되오시라./ 나는 꽃이 되오리.’라고 다음 생애까지 사랑을 할 것을 기원한다.
이와 같이 사랑도 구도자처럼 하고 또한 명상을 통한 이상향의 사랑을 하는 것이 이미 초기부터 탑을 쌓듯 진행돼 왔다.
「풀피리 하나만으로<1>」은 두 번째 시집의 표제작으로 출가의 모습이다. 집과 세속의 인연을 떠나 불문에 들어 수행하기 위해 집을 떠나는 모습이나, 정작은 청빈한 안빈낙도의 자신이 나타나 있다. 이런 모습을 통해 과욕이 많은 인간에게 소박한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한다.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내려놓고 또는 욕심을 내려놓고, 보잘 것 없는 풀피리 하나만 가지고 떠나고 싶어 한다. ‘비밀스런 능선 너머 아직 먼 나라/ 화엄의 불 한 소쿠리 놓아본들 어떠리.’ 라고 말한다. 시인의 소박한 삶을 바라는 평소 생각이 담겨져 있다. 이런 청빈하고 고결한 생각은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바람속의 작은 집 21』은 109편의 연작형태의 명상시집‘21’로 시집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바람 속에 어떤 집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바람이라 함은 흔들리고 고단한 세상일 터인데 그 속에 작은 집은 ‘내 안의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집이다. 깊은 밤 수많은 모습 중 한 얼굴만 그려지고, 자신만이 아는 은밀한 숲길을 따라 가서 만나고 교감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그 분이 그대이고 나임을 뒤늦게야 깨닫고 놀랍니다.’ 이런 깨달음은 ‘부처가 나이고 내가 곧 부처’란 말과 같이 어쩌면 우리가 자신을 그만큼 사랑했지만 모르고 살아온 것으로 본다.
(「입동 나비」『반만 울리는 피리』)는 입동 무렵, 나비가 바닷가를 날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시를 명상하듯 전개한다. 나비는 바다를 지나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거두어들일 날개가 화사롭다’. 아직 거처도 마련하지 못하고 가는 나비의 운명이 가엾다. 나비는 꽃을 찾아서 가야 제격인데 ‘마른 잎사귀 사이’ ‘시간 지는 길목을 돌아 헐리우듯 내려앉’고 있으니 그 길이 순탄치 만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나비는 장자의 ‘제물편(齊物篇)’의 ‘나비의 꿈’ 을 떠오르게 한다. 결국 나비는 얽히고설킨 삶 속에서 장주의 꿈과 같이 훨훨 날아다니고 싶은 화자의 바람이 아닌지 모르겠다.
「隱者, 물을 건너다」는 한편의 영화 같은 영상이 펼쳐진다. 일상생활에서 포착한 짧은 시이지만 그림이 선명하고 강렬하다. 하루 종일 심심하게 있다가 뜨락에 나가 풀을 뽑던 중 무심히 건너다보는 곳에 ‘황혼불 일고’ 있는 곳에 ‘隱者, 물을 건너’고 있다. 여기서 은자는 타인으로부터 떨어져서 홀로 명상을 하며, 금욕고행에 임하는 사람으로 물을 건너는 상황이 이채롭다. 은자는 곧 화자일 수 있고 구도자일 수 있다.
지금까지 첫 번째 시집부터 표제작 위주로 살펴본 시세계와 같이 최명길 시인의 시는 불교사상을 기반으로 한 자연주의를 지향하며 명상을 통한 선시류의 시를 유지해왔다.
3.
최명길 시인의 시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많은 체험을 하고 깊은 명상에 들었다가 일획 섬광을 칠 때 낚아채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 한마디로 일획 섬광의 여래장 곧‘아알라야’에서 밀어올린 꽃대궁이다. 그것이 일상적 생활 속의 이야기나 자연 또는 곤충과 동물을 통한 명상을 통해 얻어져도 그만의 향기가 시집 가득 진하게 펼쳐져 있다.
새털구름 한 짐 짊어지고
벌판길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가만, 이건 댕댕이덩굴 아닌가
내가 피할 사이 없이
덩굴에 그만 오른발이 걸려
나가 뒹굴었다.
지게꼬리로 붙들어 맸던
새털구름 서너 파람
헐거워진 꼬리를 벌리고 달아났다.
높이 옮겨가는 서쪽 하늘로
화살처럼 날아서
수미산 사천왕사 문고리에 걸렸다.
광목천왕이 얼른 나와
그걸 떠메어가니
하늘은 그제서야 챙챙 푸르러
낙산해벽 끝에 매어달린
천년 소금고등어와 희롱하다.
―(「사천왕사 가을 하늘」『하늘 불탱』)전문
이 시 역시 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산을 좋아하는 시인은 한 때 평창 기화라는 곳에서 살며 주변의 산들을 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강물을 굽어보며 비탈을 치고나가다 댕댕이덩쿨에 걸려 나가 뒹굴었다. 그 일이 있고 20년이 가까워오는 어느 가을 날 홍련암 난간에 기대 있었다. 파도가 심하게 쳐서 암자를 뒤흔들고 있었다. ‘한데 파도소리에 묻어 어디선가 독경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방은 파도소리밖에 없었다. 독경소리는 끊어질듯 말 듯 나직이 울려 퍼져 파도소리와 뒤섞이거나, 압도하면서 울리는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깊은 수렁에 빠지는 듯 한참을 헤매다가 수렁 속에서 뜻밖에도 수미산이 불쑥 솟구쳐 오르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하늘에는 마하의 그 산에서처럼 새털구름이 서쪽으로 조금씩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새털구름 틈으로 뵈는 하늘은 끝없이 높고 깊었다. 불현듯 시의 제 일행이 떠올랐고 이어 낙산사의 소금고등어까지 한꺼번에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시의 전모가 펼쳐지는 것이었다. 시는 이렇듯 때로는 별 희한한 경로를 거쳐 태어나기도 한다.’ (「‘사천왕사 가을 하늘’의 경우」《시와시학》2012년 겨울호)
작품을 쓴 배경을 들여다보면서 시가 이렇듯 오랜 기간의 숙성과정을 거쳐서 탄생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체험했던 것을 간직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폭풍처럼 이는 찰나의 영감을 시로 탄생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는 짧은 시 속에 많은 이야기와 선적 명상이 담겨 있고 그 이야기가 구도자의 깨달음으로 진솔하게 나타난다.
이렇게 체험을 통한 신비적 혹은 불교적 명상이 더해지는가 하면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깨달은 승화 과정을 보여주는 시도 있다.
아내가 쟁반에 담아둔
노란 모과 한 알
새까매져 마당에 버린 후 잊었다.
겨울 가고 새봄이 왔다.
묵은 낙엽을 쓸다가 이상한 게 있어 보았다.
지난 해 버린 모과였다.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다시 살폈다.
그새 어미가 되어
수많은 자식들을 거느렸다.
아니 자식싹들이 파먹어
투구처럼 껍데기만 달랑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내가 버린 모과
오글오글
싹들을 먹여 살린 모과
―(「투구 모과」『하늘 불탱』)전문
보통 모과는 꿀에 재어 차를 끓여 먹거나, 방향제 대용으로 쟁반에 담아 방에 둔다. 쟁반에 담아 두면 향기가 진해질수록 모과 볼 귀퉁이가 검게 물들어 가고 마침내 전신이 까매지고 향기도 멈춘다. 속부터 썩기 시작해 겉이 검게 변하면 마치 투구처럼 변한다. 이런 썩은 모과를 버리고 한겨울 지나고 봄이 와 묵은 낙엽을 쓸다가 그 버려진 모과를 발견한다. 다시 버리려고 보니 안은 이미 다 썩어 있고 그 안에 싹이 오골거리고 있다. 버려지고 죽어서까지 자식싹들을 먹여 살리는 모과의 모성이 눈물겹다. 아무런 보상 없이 헌신하고 몸을 맡기는 희생이 있어 세상은 또 연을 이어가게 된다.
나는 콧구멍 없는 소다. 누구도
내 코를 꿰어 끌고 갈 수 없다.
채찍을 휘둘러 몰고 갈 수도 없다.
나는 다만 콧구멍 없는 소
홀로 노래하다 홀로 잠든다.
구름 쏟아지면 쏟아지는 구름밭 속이
폭풍우 몰아치면 몰아치는 소용돌이
그 속이 바로 나의 집 나의 행로다.
내 너무 괴로워 못 견딜 때엔
하늘을 향해 크게 한 번 으흐흥 하고
울부짖으면 그만
나는 한 마리 뿔무소다.
―「콧구멍 없는 소」전문
시집『콧구멍 없는 소』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곧 꿈꾸는 세계이며 자유를 누리고 싶은 갈망이 담겨 있다. ‘콧구멍 없는 소’는 원래 경허 선사의 ‘오도송’에서 유래한다. ‘중이 시주하는 것을 먹고 방일하면 죽어 소가 되어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된다.’는 말을 듣고 경허 선사가 홀연히 깨닫고 쓴 것이다. ‘문득 콧구멍 없다는 소리를 듣고/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 없는 들사람 태평가를 부르네.’ 와 같은 깨달음을 시인은 한 단계 넘어 꿈꾸는 세계를 말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얽히고설킨 일들이 많아 속박되거나 구속되어 사는데 그로부터 벗어나고픈 꿈을 노래한다. 콧구멍이 없기 때문에 코를 꿰어 끌 수도 없고 채찍을 휘둘러 몰 수 없다. 다만 홀로 노래하다 홀로 잠드는 ‘콧구멍 없는 소’는 바로 순간의 시인이다.
4.
지금까지 최명길 시인의 시 흐름을 연대기적으로 특징 있는 작품 위주로 살펴봤다. 여기서 거론된 작품들은 대부분 명상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일획 섬광의 소슬한 시편들이 라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작품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겠으나 그 보이지 않는 이면을 캐면 캘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이러한 작품은 시인의 전체 작품 중의 일부분으로 시인의 작품세계에서 독특한 어법으로 언어를 구사했지만, 정작 시인의 원래 색깔은 전통적 자연주의 서정시이다.
시인은 자연을 벗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자연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며 결국 자연과 합일되는 시를 써왔다. 이는 ‘자연이 나요 내가 곧 자연이다’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 안의 그 사람/ 그 분이 그대이고 나임을 뒤늦게야 깨닫고 놀랍니다.’라고 한 바와 같이 나*너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시에는 사람이나 세상에 대한 불만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현상은 시인의 천성도 천성이려니와 구도자 같은 생활에서 얻어진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시인과 그의 작품은 ‘큰 산 깊은 골에 핀 꽃’이다. 누가 봐주건 봐주지 않건 언제나 그 자리에서 구도자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피어난 꽃이다. 깊은 골에 피어 잘 드러나지 않지만 한번 보면 빠져들게 만든다.
예전엔 보지 못했던 꽃, 어쩌다 마주친 꽃, 다시 보고 싶은 꽃. 그 꽃을 자세히 보기위해 큰 산 깊은 골을 더 다녀와야 할 것 같다. (200자,50.8장)
(이대의/ 1960년 경기 평택 출생. 199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서울엔 별이 땅에서 뜬다』)
첫댓글 대단히 고생이 많으셨네요.
선생님의 시세계에 빠져있는 그 시간
얼마나 진땀나고 행복했을까요.
진지하고 즐겁게 읽었어요.
다시 한번 이대의 시인께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