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빛나는 행복
광우 스님, 화계사 교무국장
단조로운 나날 지루해 하다가
병 걸린 뒤 일상의 기쁨 깨달아
무심코 지나치던 평범한 것들
촛불처럼 작아도 가장 따스해
행복 찾으려 먼 곳 바라보지만
웃고 있는 지금이 바로 그 순간
작지만 어떤 것보다도 빛나는 행복이 있다. 소소하지만 일상에서 누리는 평범이란 이름의 행복이다.
평범은 행복이다. 작아 보여도 알고 보면 가장 따스한 행복이다. 무심코 지나치고 심심해 보였던 일상의 평범함이 누군가는 가장 간직하고픈 행복이다. 느리고 지루해 보이던 그 순간이 사실 가장 기억하고픈 삶의 촛불이다. 촛불은 작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작지만 빛나는 불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일상의 평범함을 놓치다가 한참 지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아, 그때가 참 좋았구나.’
어느 중년의 가정주부가 있었다. 평범한 남편, 평범한 자녀, 평범한 하루하루. 그의 삶은 평범하고 단조로웠다. 어느 날 몸에 이상이 느껴졌다. 나이가 들어 옛날 같지 않구나 여기고 지나쳤다. 점점 반복된 몸의 이상에 심상찮음을 느끼고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았다. ‘무슨 큰일이야 있겠어?’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 봤다.
그런 그에게 충격적인 결과가 전해졌다. 유방암이었다. 예후가 좋지 못하니 치료에 집중하자는 의사의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단조롭고 평범했던 일상이 무너졌다.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과 집중치료를 받았다. 가족들과 지인들이 찾아왔다. 눈물을 흘리며 울던 사람도 있고 담담한 척 웃으며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벼락 맞은 듯 멍한 상태로 얼마의 시간이 지났고, 그는 비로소 마음을 가다듬었다. 생각을 정리하며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모습과 나날들을 떠올렸다. 하얀 병원 침대에 누웠는데 먹먹한 감정 사이로 눈물이 하염없이 솟구쳤다.
남편을 위해 준비했던 아침 식사와 아이들을 위해 챙긴 도시락, 한 아름 세탁해 햇살 아래 펼쳐 놓은 가족들의 옷가지들, 친구들과 모여 떠들던 수다와 함께 구워 먹던 뒤처리 귀찮은 삼겹살. 그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아름답고 그리운 행복의 일상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대로 행복이었구나. 지루하게 지내던 평범한 하루하루가 그냥 그대로 행복이었구나. 멀리서 찾았던 행복이란 것이 항상 나와 함께 하고 있었구나.’
그는 다짐했다. 만약 자신에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진다면 그 심심하고 밋밋했던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가 최고의 행복이라 감사하며 살아가겠다고. 그렇게 굳게 다짐했다. 다행히도 그는 건강을 회복했다. 그는 다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식탁을 차리고 부지런히 빨래도 하고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즐긴다. 그리고 새로운 봉사활동도 적극적으로 시작했다. 일상으로 돌아온 이후 그에게 한 가지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친한 사람들에게 부쩍 잔소리가 늘어났다.
그가 하는 잔소리는 매번 똑같다.
“너 진짜 행복이 뭔지 아니? 지금이 행복이야. 이게 행복이야. 멀리서 찾지 마. 지금 웃을 수 있는 이 순간이 진짜 행복이야.”
북한산 자락 둘레길을 주말마다 등산하는 할아버지가 계시다. 쉬엄쉬엄 걸으며 항상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신다. 가끔 마주치면 가벼운 인사를 나눈다. 하루는 여쭤봤다.
“할아버지, 인상도 참 좋으시고 뵐 때마다 항상 웃고 계시는데 늘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무슨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으세요?”
할아버지는 즐거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과거의 사연을 들려주셨다. 젊었을 때부터 성격이 괄괄하고 다혈질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급한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실수도 많이 했다. 운동도 좋아하고 사람 만나기도 좋아하는 호인이라 술자리도 자주 가졌다. 남부럽지 않은 건강과 체력을 자부했다. 중년의 나이가 넘어갈 때쯤, 건강에 큰 이상이 느껴졌다.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서 검사 결과를 받아보니 폐병이었다. 지난 시절에 체력만 믿고 술과 담배와 과로로 혹사한 몸이 무너진 것이다. 생각도 못 한 폐질환을 안고 중환자실에 머물렀다. 종일 호흡보조기를 코에 쓰고 생활하는데 그 답답함이 몸이 아픈 것보다 더 지독스레 괴로웠다. 숨이 차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때, 침대에 누운 채로 병원 밖을 내다봤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할아버지는 울음이 터졌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저토록 편안히 걷고 떠들고 움직이는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럽고 눈물이 나왔다. 할아버지는 간절히 기도했다.
“제가 다시 걸을 수 있을 정도만 돼도 항상 고마운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어머님이 입버릇처럼 해주시던 말씀이 가슴에 사무치게 와 닿았다. “건강이 최고다. 밥 잘 먹고, 잠 푹 자고, 그저 건강하기만 해라.” 왜 몸이 아플 때는 그리도 엄마 생각이 나던지…, 창피할 정도로 울기도 많이 우셨다고 한다. 긴 투병 생활 끝에 건강이 많이 회복됐다. 쉬엄쉬엄 조금씩이나마 밋밋한 둘레길을 걸을 정도로 체력도 좋아졌다. 산길을 걷게 되면서 이만큼 건강해진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은혜를 받은 기분이다. 세상이 달리 보였고 행복이 멀리 있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씀하신다. “그러니 내가 늘 웃지 않을 수가 있겠소. 허허허.”
출처 : 문화일보 2021-07-16